일의 즐거움
다나카 고이치 지음, 하연수 옮김 / 김영사 / 2004년 3월
평점 :
절판


2002년은 나에게 여러모로 뜻깊은 한 해였다.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기회를 만들어 준 것이다. 2002 한일월드컵을 즐기면서 오랜만에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느꼈고, 서해교전을 바라보면서 북한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봤고, 사라졌던 개구리 소년들이 유골로 발견되면서 숨겨진 진실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다. 그리고 2002년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된 뒤에 우리나라에서는 반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매우 강해진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이공계 문제에 대해서 해결책을 빨리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우리나라에서 거세지도록 한 사람. 노벨상을 받은 사람치고는 너무 평범해서 세상을 놀라게 한 사람. 그는 누구인가? 나는 그에 대해서 중앙일보에 나온 과학 사설을 읽으면서 지금 소개할 책을 쓴 사람이 어떤 일을 해냈는지 대충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얼마 뒤 그 일에 대해서 본인이 직접 설명한 책이 나왔다. 




이 세상의 평범한 모든 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 준 사람. 다나카 고이치田中耕一 



2002년 10월 9일 노벨상 화학상 수상자 발표는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박사도 교수도 아닌 학사 출신, 게다가 화학을 전공하지도 않은 일개 샐러리맨 다나카 고이치가 수상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하루아침에 유명인이 되었고, 이후 반년 동안 그의 생애 중 가장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2003년 3월 말 다나카 고이치는 엔지니어 복귀 선언을 했다. 노벨상 수상 후 연일 계속 되는 강연과 인터뷰 때문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연구 활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겨우 반환점을 돈 나이인 마흔세 살에 그가 원한 것은 엔지니어로서의 삶이었다. 출세나 공명, 이익보다는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에서 행복과 긍지를 찾고 만족하는 삶,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고 상식에 얽매이지 않으며 목표를 발견한 후에는 끝까지 추구하는 삶이 그가 원하는 삶이었다. 



다나카 고이치는 현장에서 최선을 다해 일하는 사람들의 자긍심을 일깨우고 활력과 자극, 꿈과 희망,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는 직접 저술한 이 책을 통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에게 이 사회의 가장 소중한 일꾼들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독창적인 능력은 대단히 특별한 능력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독창성을 가지고 있습니다'라는 다나카의 메세지는 오늘도 이 세상의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꿈과 희망이 되고 있다…… 




책날개를 보면 이미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잘 정리되어 있어 더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일단 이 책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해 보겠다. 제목이 '일의 즐거움'이다. 일 중독증 환자들을 위해 나온 책도 아니고, 게으른 사람들을 나무라는 책도 아니다. 다나카 고이치는 이 책에서 노벨 화학상을 받은 소감, 자기가 노벨상을 타기 전까지 살아온 과정과 느낀 것들, 그리고 자기가 노벨 화학상을 받은 까닭인 고분자 질량 분석법에 대해서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어느 하나도 놓칠 수 없는 책이다. 저자는 앞에 나오는 두 가지, 곧 노벨 화학상을 받은 소감과 자기가 살아온 삶을 이야기하면서, 책날개에서 밝힌 것처럼 평범하지만 아름다운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리고 분자생물학과 고분자공학에 대한 지식도 꽤 얻을 수 있다. 다나카 고이치는 자기가 연구한 결과에 자부심을 느끼고, 책에서도 많은 면을 써서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학문 이름을 듣고 지레 겁먹을 필요가 전혀 없다. 전문 서적이나 논문처럼 설명을 어렵게 해 놓은 것은 아니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내가 지니고 있는 생물 지식은 고등학교 수준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차근차근 순서대로 읽었더니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저자가 그만큼 보통 독자들을 신경 썼다는 뜻이다. 과학 분야로 교양을 쌓기에도 제법 괜찮은 책이다.  



이 책을 읽고 내가 일에 대한 열정을 더욱 강하게 할 수 있었다는 설명은 자세하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보다는 이제 첫 문단에서 내가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이 훨씬 낫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 5개년 개발 계획을 수립하고 기초과학 연구에 투자를 집중하면서, 전국에서 수많은 인재들이 나라에서 지원을 받으며 기초과학 연구에 몰두했다. 이는 새로운 기술 개발로 이어져 우리나라가 중진국으로 발전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기초과학이 없는 응용과학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니 이는 당연한 일이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한국과학기술연구원(KAIST), 포항공대가 전국에서 합격 기준선이 제일 높았다. 그 때만 하더라도 경희대학교 한의대학과 연세대학교 의과대학과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한 번에 붙었다면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이공계 사람들이 희망이 없다고 야단이다. 의과대학, 약학대학, 사범대학과 견주어 볼 때 공과대학이 맥을 못 추고 있고, 그나마 공과대학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도 앞길이 막막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곳으로 가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이는 나라가 발전하는데 매우 큰 걸림돌이 된다. 그에 대 볼 때 일본은 어떠한가? 



물론 미국이나 독일과 같은 노벨 과학상 강국과 대 볼 때는 한참 멀었지만, 우리나라와 대 볼 때 일본은 훨씬 더 탄탄한 기초과학 기반을 마련해 놓고 있다. 핵력을 설명하는데 매개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중간자를 예언해 일본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유카와 히데키, 최근 사례를 들자면 우주에서 날아온 중성미자와 X선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관측해 2002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고시바 마사토시, 고분자 질량 분석법을 개발해 2002년에 노벨 화학상을 받은 다나카 고이치, 이 말고도 여러 과학자들을 포함하여 모두 여덟 명이 노벨 과학상을 받았다. 물론 단순히 노벨 과학상 수상자만으로 과학기술 수준을 대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하지만 그만큼, 그리고 우리나라보다는 그나마 환경이 갖춰져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증명할 수 있지 않은가? 기초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처럼 나라가 발전하도록 제대로 기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아야 하는데, 엉뚱한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사는 현실을 보면 화가 치밀어서 견딜 수 없다. 일본에도 우리나라와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이대로 가다가는 일본 전체가 망한다고 다치바나 다카시가 강하게 주장했지만, 그래도 일본은 우리나라보다는 나은 것 같다. 이와 같은 책이 나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좀 더 많은 이야기는 독후감에 쓰지 말고 따로 해야겠다. 



어쨌든 여러모로 많은 생각을 하도록 하는 책이다. 일본이 지닌 탄탄한 기초과학 기반에 대한 부러움, 자기가 가진 가능성에 대한 고찰, 일이 인생에서 지니는 뜻, 다나카 고이치가 말하는 행복론, 고분자공학에 대한 설명과 그 뜻, 질량 분석법에 대한 설명과 그 뜻……이 책을 읽고 내가 느끼고 생각한 것은 매우 많았다. 특히 생물학을 좀 더 깊이 공부한 뒤 다시 계속 읽어서 고분자 질량 분석법에 대한 내용은 완전히 익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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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베르 독자들이 쓴 나무 2
강창모 외 지음 / 열린책들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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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쓴 '나무'에 매우 많은 영향을 받은 나는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상상력을 항상 중요하게 생각한다. '나무'를 읽은 뒤 내가 그런 상상력이 말라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에는 항상 뭔가 독특한 생각을 해 보려고 힘썼다. 그러려면 많이 읽고 보고 듣고 느끼는 수밖에 없었는데, 나는 제법 짧은 시간 안에 예전과는 견줄 수 없는 속력으로 정신계를 독특하게 키울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여전히 내가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수준과는 한참 떨어져 있었다. 그래도 이런 몸부림도 치지 않는 때야말로 내가 이 세상에서 살 가치가 없어지는 때인데, 그런 때는 나에게는 절대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나름대로 하루하루에 온 힘을 쏟으면서 살았다.
 


그러다가 이 책 '나무 2'를 만났다. 대학교에 들어간 뒤 정신없이 방황하고 있던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위를 하러 서울에 올라갔다가, 오랜만에 글사랑 사람들을 만나려고 서울에 남았다. 세권이와 함께 절제 형님을 기다리면서 시간을 때우려고 신촌 거리에 있는 어느 서점에서 책을 뒤적였다. 그러다가 책꽂이에 꽂혀 있는 '나무 2'를 보고 나는 뒤적여 보지도 않고 당장 사 버렸다. 그리고 부산으로 돌아와서 틈틈이 읽었다.  



하지만 이 책은 내가 기대했던 바에 미치지 못했다. 스물 일곱 명이나 되는 사람들, 각각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쓴 독특한 이야기들을 모은 책이라면 분명히 베르나르 베르베르 한 사람이 쓴 '나무'보다 훨씬 기발하고 다양한 생각들이 번뜩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에 나오는 이야기들 가운데 1/3은 나도 뻔히 하고 있던 생각이었고, 나머지 1/3은 예전에 내가 공부를 잘 안 할 때 심심풀이로 즐겨 읽던 삼류 무협 소설이나 삼류 공상 소설에 나올 법한 이야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나머지 1/3이 그나마 괜찮아서 내가 책을 산 뒤에 돈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나무'를 이은 작품이라는 평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나는 과감하게 깎아내린다. 



'나무 2'에 나오는 이야기를 쓴 사람들은 그저 기이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짜내는 데만 몰두했을 뿐, 세상에 대해 생각하고 깨달음을 이야기에 녹이는 데는 매우 소홀했던 것 같다. 상상력은 현실에서 힘으로 나타날 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현실에서 생각이 힘으로 나타나려면 이 세상에 대한 통찰력이 밖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들은 나름대로 자기들이 지닌 창의력으로 이야기를 써 냈지만, 결국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내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다양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기에, 그래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고 문제를 제기할 만한 이야기가 있는 책이기에,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내가 그런 이야기들을 쓸 수 있을지도 의심스러울 정도로 내 상상력이 부족하기에, 나는 이 책을 다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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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들의 공부법
박희병 엮어 옮김 / 창비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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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과거에는 배움을 사람의 도리로 익히며 성격을 도야하는 과정으로 생각하고 그에 치중했다. 옛 사람들은 지식보다도 마음가짐을 중요시했고, 처신하는 법이 피와 살처럼 몸에 배도록 노력하였다. 배운 사람이 존경받았던 이유도 지식뿐만이 아니라 성격적으로도 단련된 사람이라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로 볼 때 지금의 학문은 좀 씁쓸하게 여겨진다. 공부나 연구도 성격 단련과는 아주 거리가 멀어지고 말았다. 답안지로 정답인지 아닌지만을 판정하는 교육으로 인해 우리는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렸다……

 

 

오카다 다카시 지음. 유인경 옮김. '나만 모르는 성격'. 5쪽

 

 

학생을 성폭행한 교사도 겨우 정직에 그치는 마당에, 일제고사에 반대한다는 가정 통신문을 보낸 전교조 교사 7명이 무더기로 해임되었다. 서울에 있는 유명한 학원들은 자기 이익을 챙기고자 입시 지옥을 장려하는 공정택 서울특별시 교육감에게 선거 자금 가운데 7할 정도를 지원했지만, 검찰은 손도 대지 않았다. 공정택 교육감은 사과 한 마디도 아쉽다는 듯이 고개 한 번 숙이고 자기 멋대로 교육을 망치고 있다. 그러나 검찰은 곧바로 주경복 전 서울특별시 교육감 선거 출마자에게 선거 자금을 댔다는 혐의를 들이대며 전교조에 칼날을 들이밀었다. '반국가교육척결 국민연합'이라는 난데없는 단체는 개인정보관리법을 위반하면서까지 엉터리에 가까운 전교조 교사 명단을 공개하면서, '사교육을 조장해 대한민국을 도탄에 빠뜨리고 더 나아가 반국가교육으로 친북 좌파 세력을 양성하는 무서운 빨갱이 집단'을 척결하겠다고 입에 게거품을 물었다.

 

이미 수 십 년 동안 대한민국을 쥐고 흔들며 썩은 똥에 모여드는 파리와도 같이 사익을 열심히 챙기는데만 몰두했던 이들이다. 수 십 년 동안 사회 전방위에서 분열을 조장하고 교육과 언론으로써 민중을 세뇌시킨 이들이다. 수 십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려 가면서 조금이나마 일궈놓은 그 소중한 민주주의를 그들은 절대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리고 민중들은 그들이 펼치는 집요한 공세를 견디지 못했다. 그 비극이 2008년 한 해를 선진화와 세계화와 법치라는 탈을 쓴 야만과 횡포와 폭력으로 물들였다.

 

그 온갖 만행을 저지르는 그들에게 맞서 싸우고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다가, 결국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교육 분야에서 내 전공을 살려서 일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생각했다. 인용문 뒤 맨 처음 문단에 약간 길게 썼듯이 그들 또한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교육마저 자기 입맛대로 하고자 줄기차게 손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 현실을 알고 있는 예비 교사로서 절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교육 현장이 엉망이 되어 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서 희망을 거둘 수는 없었다. 희망을 거두는 순간 우리는 대한민국을 지옥으로 만들려는 무리들에게 아이들을 빼앗기게 될 것이며, 그 순간 정말로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말 것은 분명했다. 내가 아무리 온갖 고민과 좌절 때문에 힘들고 괴롭더라도, 이 따위 나약한 모습으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현장에서 나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있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생각과 전혀 다르게 지내는 내 모습을 가차없이 비판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또 힘을 잃고 아무 것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린 뒤에 헛되이 보낸 지난 시간을 후회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해야 할 일이 많은데 계속 그렇게 악순환만 이어지니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생각과 행동이 따로 노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뇌가 멈춰 버린 듯한 그 느낌이 그렇게 끔찍한 것인 줄은 몰랐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왜 그러고 있는지 생각했다. 답은 분명했지만 그 답까지 다시 이르는 과정에서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그 모든 것을 항상 일목요연하게 잡아낼 수만 있었다면 이미 천재로서 명성을 날리고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생각도 든다. 그런 난데없는 생각들이란 게 주로 이 사회와 관련된 온갖 문제에 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연결하면서 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 가운데 가장 많이 들었던 것은, 우리는 근본에서부터 뭔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이었다. 맨 앞에 인용한 글이 정확하게 지적한 것처럼 말이다. 콩나물 시루 같은 교실에 앉아서 오로지 주입식 교육만을 강요당한 옛날 학생들은 시대를 스스로 판단할 능력을 잃어버렸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오로지 국가에 충성하는 산업 역군으로 거듭나 국가가 장려하는 대로 뼈 빠지게 일하면서 열심히 살았다.  

 

그 충성스러운 일꾼들이 만들어 놓은 국가는 분명히 물질 자체는 예전과는 견줄 수도 없을 정도로 풍요로운 곳이었다. 후대가 그 덕을 분명히 보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물질만 풍요로웠지 정신은 너무나도 심하게 썩어빠진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렇게 풍족해진 물질은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돌아가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고 의심을 품는 사람들도 갈수록 늘어났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현실이 곧바로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온갖 폭압과 부정을 못 본 척하며 그저 조용히 밥만 먹고 살았던 이들은 물질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국가를 찬양했다. 하지만 현실에 의심을 품고 사회 전반에서 국가가 저지르는 폭압과 부정을 깨달은 뒤, 그에 맞서려고 한 이들은 모두 가혹한 대가를 치뤄야 했다. 게다가 국가가 만들어 놓은 충성스러운 역군들에게서도 비난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 이들은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 덕분에 집회, 표현, 사상이 어느 정도 자유로운 현실을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진보한다'라는 말이 뜻이 없어질 만큼 이 사회는 다시 옛날로 되돌아가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보루인 교육도 기득권을 쥐고 있는 그들이 손아귀에 넣고 자기들에게 충성하는 샛노란 새싹을 기르고자 발악하고 있다. 수구 친일 세력이 주도하는 현대사 특강과 4.19 '데모' 동영상 배포 따위가 최근에 벌어진 그 천박한 사례이다.

 

어쩌면 그들도 천박한 현실에서 살아남아 그토록 달콤한 부와 권력을 거머쥐려면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된 잘못된 사회가 만들어 낸 희생자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희생자라고 해서 자기들이 저지르는 만행이 어쩔 수 없는, 심지어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지는 못한다. 부와 권력 앞에 충성하는 앞잡이가 되어버린 사람들이나, 부조리에 맞서 싸운 사람들이나 모두 같은 국가에서 같은 입시 지옥 속에서 같은 것을 배우고 세상으로 나왔다.

 

이 사실이 뜻하는 바는 분명하다. 교육 과정 속에서 학생들이 배우게 되는 내용 또한 중요하지만, 학생들이 지닌 교육에 관한 생각 자체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공교육 과정에서 배운 바른 생활, 도덕, 윤리 같은 과목 이름과 그 과목이 요구하는 지식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아는 대로 행동하지 않고 비판할 줄 모르는 인간을 길러내는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 원인을 뿌리뽑아야 한다.

 

그 방법을 아마 이 책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엮은 박희병 교수는 동아시아 사상 전통 속에서 근대를 넘어서는 생태주의 대안을 모색하다가, 자기 학문을 떠받치고 있는 기초가 온통 서양 근대학문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자각하고 이 책을 엮었다고 한다. 그 자각과는 상관 없이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어떻게 보면 박희병 교수와는 많이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에는 서로 통한다고 본다.

 

서양 근대학문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형식 논리 가운데 하나인 'A=A이고 B=B이다'와 다르게 동양철학에서는 'A=B이고 B=A다'라는 변증법으로 표현한다. A와 B를 각각 앎과 삶이라고 치면, 바로 결론이 나온다. 이는 박희병 교수가 머릿말에서 적어놓은 '공부의 활법(活法)', 곧 몸과 마음으로 동시에 깨닫는 공부와 통한다. 공부는 특별한 것이거나 어떤 것을 얻고자 억지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사람답게 살려면 자연스럽게 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그런 논리가 교육과정 속에서 반영되어 있는 현실성 없는 이상으로 치부될 뿐이다. 기득권을 가진 이들은 학생들이 사회를 비판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일단 앎과 삶이 분리되도록 철저한 주입식 교육만을 강조해서, 아무리 정의와 법과 윤리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가진다 하더라도 사회에서 그런 것들을 지키는 이들이 바보 취급을 받게 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교육 환경이 철학이라는 근본에서부터 조금씩 개선되자, 수구 세력은 신자유주의 흐름을 타고 교사와 학생을 포함한 모든 이들을 남을 짓밟고 올라서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정도로 가혹한 경쟁으로 내몰아, 비판할 힘도 없을 정도로 지쳐 나가 떨어지게 만들게 했다. 그리고 설사 뭔가 깨닫더라도 사회 자체가 그런 이들이 하는 저항을 비난하도록 사회 구성원들을 길들이고 교육시킨다. 그마저도 무시하고 투쟁에 나서는 이들은 '정의로운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짓밟았다.

 

아무리 학생들 개성을 살리고 존중하는 쪽으로 개편된다는 허울 좋은 구실을 들이댄다 하더라도, 앎과 삶이 연결되지 않고 분리된 사람들이 짜는 교육과정은 그 본질 자체가 추악하기 짝이 없기 때문에, 결국은 아무리 바뀌어도 진정한 교육이 지니는 이념을 실천하지 못한다. 대한민국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인재(?)들이 과연 교육이 추구하는 근본 이념인 올바른 의식을 지닌 사람으로서 자질을 제대로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는지 생각해 보면, 앞에서 이야기한 주장이 어느 정도는 타당성을 띨 것이다.

 

사실 이 책에서 전달하겠다고 하는 여러 가지 지혜 또한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흔해 빠진 것이다. 그런 지혜를 모르기 때문에 이 책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안다 하더라도 그 지혜와 삶을 꾸려가는 주체인 자기가 온전히 하나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현실을 깨닫고자 이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다. 아는 것을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은 굳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어차피 평생 자기를 성찰해야 한다는 필요를 느끼는 사람들이 이런 책을 끊임없이 찾아서 읽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이 책은 그저 읽은 뒤에 그냥 자기가 뭘 좀 아는 체 하려고 할 때 읊을 구절이나, 궤변을 늘어놓을 때 필요한 좋은 소재를 제공할 뿐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을 때 주의할 점은 배우는 자세에 관해 설파하는 학자들이 모두 현실에서 도리를 지키면서 살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곧 누가 어떤 말을 한다고 해서 그 말을 무작정 받아들이지 말고 비판하려는 자세로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학자들은 분명히 긍정할 만한 점도 보여주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때까지 어떤 종교도 한국 고대사와 중세사에서 보여주지 않았던 극렬한 배타성을 보여주었다. 그 배타성은 정치에서도 줄곧 이용되어 수많은 이들이 피를 흘렸다. 고상하고 좋은 말을 한다고 해서 다가 아니라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덧붙이자면, 예비 교사에서 교사로 새롭게 거듭나려면 임용고시를 통과해야 한다. 임용고시와 사범대 가산점을 놓고 지난 2004년과 2005년에 서울과 부산에서 그토록 열심히 거리를 걷고 소리를 질렀지만, 결국 바뀐 것은 거의 아무 것도 없었고 나도 임용고시를 준비해야 할 형편에 처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준비를 하기는 해야 한다. 하지만 예비 교사들도 무한 경쟁에 시달리면서, 오로지 임용고시 준비만 죽어라 한 뒤에 교사가 된 이들이 현장에서 보여주는 문제점을 이 책이 주는 깨달음과 연결해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그 일은 앞으로 내가 임용고시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 지 방향을 잡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1.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 공자

2.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몸으 다스린다 - 대학, 중용

3. 학문이란 안에서 찾는 것이다 - 정자

4. 공부하는 사람은 기가 가벼워서는 안된다 - 장자

5. 공부는 닭이 알을 품는 것과 같다 - 주자

6. 스스로 깨닫는 것은 일당백의 공부가 된다 - 왕양명

7. 학문하는 것은 거울을 닦는 데 비유할 수 있다 - 이황

8. 공부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 - 서경덕

9. 경은 학문의 시작이요 끝이다 - 조식

10. 공부를 하지 않으면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없다 - 이이

11. 훌륭한 스승을 만나려면 묻기를 좋아해야 한다 - 이익

12. 큰 의심이 없는 자는 큰 깨달음이 없다 - 홍대용

13. 선비가 독서를 하면 그 은택이 천하에 미친다 - 박지원

14. 학문은 천하의 공변된 것이다 - 정약용

15. 글쓰기는 자신을 속이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 김정희

16. 상등의 학문은 기로 듣는다 - 최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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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로부터의 귀환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전현희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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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잤는지 몰라도 일어나 보니까 어느덧 해가 하늘 높이 떠 있다. 하지만 날이 흐려서 그런지 방은 전혀 밝지 않고 어두침침했다. 며칠 동안 시험 공부를 하겠다고 잠을 줄여가며 도서관과 정보전산원에서 설쳐서 그런지, 근육 분절 하나마다 분동을 달아놓은 것처럼 온몸이 무겁고 찜찜하다. 피에 이물질이 섞여서 부글부글 끓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불을 켜고 책상 앞에 앉았지만 무엇을 시작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정신이 멍하고 몸은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 하루 이틀 겪는 일이 아니라서 그런지 짜증이 저절로 났다. 짜증과 피곤함과 어두움에서 오는 무기력함이 뒤섞여 몸이나 마음이나 아주 엉망진창이다. 그저 일상에서 흔히 겪는 일이라고 하기에는 내 머릿속을 너무 심하게 뒤흔들어 놓는다.

 

갑자기 군 복무 시절에 휴가를 즐기면서 뇌에 새로 입력된 흐릿하지만 인상이 강한 기억들이, 다시 막을 비집고 한꺼번에 튀어나왔다. 서울 도심 한복판을 택시를 타고 달리면서 에미넴이 남긴 상당히 멋진 곡인 'Never Enough'를 들을 때,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영상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으로 다가와 내 머리를 자극했다. 내가 부산으로 달려가는 열차 안에서 차츰 가까워지는 부산 시가지를 바라볼 때도 의식은 항상 요동쳤다. 

 

그러다가 영문도 모르는 채 온갖 기억이 다 튀어나오는 경험을 했다. 처음으로 일본과 중국이라는 다른 나라에 발을 딛었을 때뿐만 아니라, 내 방 안에 있는 자기도 모르던 새로운 공간이나 사실을 발견했을 때도 내 의식은 크게 흔들렸다. 거기에다가 원래 알고 있던 것들마저 온갖 갈래로 조합되어 새롭게 다가오기까지 했다. 그 모든 것은 시공간을 포함한 '환경'이라는 개념 안에 들어가는 내가 모르는 모든 차원 요소들이 변하면서 생기는 것이었다.

 

사실 그런 현상은 나 같이 변덕이 심한 사람들에게는 자주 나타날 것이다. 자기가 의식이 송두리째 변한다면,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보다 그 사실을 더욱 잘 인지할 듯 하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조금이라도 환경이 변하더라도 그 때문에 갑자기 온갖 생각이 떠오르고, 그것들에게 사로잡혀 꼼짝도 할 수 없을 때가 많으니, 어떻게 의식이 변하는 것을 모를 수가 있을까. 수많은 중첩된 기괴하기 짝이 없어 도저히 이 세상 것이라고 볼 수 없는 이미지들이 온 신경을 엄청나게 빠르게 뒤흔들어 놓는 일이 흔한 나 같은 사람이라도, 그 이미지들은 어차피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 덕분에 만들어지는 것이니, 그 환경이 변한다면 어떻게든지 의식은 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와 같이 생각한다면 인류가 지닌 지성은 지금까지 어떻게든지 변한 환경 덕분에 발전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먹을 것이 풍부한 정글에서 살고 있던 인류 조상이 황량하고 척박한 사바나라는 다른 환경을 보지 못했다면, 인류는 이 세상에 나타나지 못했을 것이다. 사바나를 봤기 때문에 새로운 자극이 들어왔고, 그 자극 덕분에 호기심을 느껴 사바나로 진출한 유인원들이 환경이 변하면서 생긴 온갖 것에 적응하며 초기 인류로 진화했다.

 

진화한 인류는 살아남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기술을 개발하며 지성을 점점 발달시켰고, 그에 따라 각자 자기가 사는 공간에서 독특한 문명이라고 할 만한 어떤 산물을 창조했다. 하지만 다른 부족이 이루어낸 문명을 만나기 전에는 어떤 특정한 수준을 뛰어넘지 못했다. 항해술이 발달하면서 다른 대륙에 살아 숨쉬는 문명을 발견하고 새로운 경험과 지식을 얻으면서, 결국 인류 전체가 지닌 의식이 시대에 획을 여러 번 그으면서 몇 번이고 발전했다. 물론 그 발전이라는 개념 자체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정밀도와 복잡성이라는 면에서는 분명히 발전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정밀도와 복잡성이라는 것은 인류가 처한 어떤 환경이라는 틀을 넘어서는 수준에는 절대 이르지 못한다. 모든 환경 요소는 인류 지성을 제약하고 결정한다. 지성을 자극하는 요소는 모두 인간이라는 존재 밖에서 나타나지, 존재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아기가 태어나고 나서 얼마 뒤에는 '나(self)'라는 개념도 없이 살다가, 주위 환경과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자아 개념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고, 그에 따른 존재와 공간 개념을 깨닫기 시작한다는 발달심리학에서 나온 논리는, 앞에서 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좋은 증거가 된다.

 

설사 이성을 갖춘 개인이 혼자서 생각을 한다 하더라도, 그 생각을 이루는 근본이 어디에서 왔는지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한 때 철학에서 진정한 진리에 이르는 방법은 인류가 지닌 지성만으로 순수하게 사유하는 형이상학이라는 주장이 정설이 되었지만, 지금은 그 주장에 거의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 지성이 아무리 발달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자극이 있기 때문에 발달하는 것이다. 사회에서 오랫동안 철저하게 격리되어 사람으로서 기본으로 갖춰야 할 지식 자체가 없는 사람이, 두뇌를 가지고 있다는 그것 하나만으로 사회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에 관해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만큼 예측하고 생각하고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물론 앞에서 내가 주장한 모든 것은 말 그대로 주장이며 가설일 뿐이다. 류비셰프가 쓴 편지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해서 말하자면, 내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알프스 산맥에 있는 몽블랑만큼이나 높이 쌓이지만, 내 주장을 반박하는 증거 또한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에베레스트만큼이나 높이 쌓인다. 이 모든 것을 통합하는 일명 '통일장 이론(우주 탄생론이나 역학론에서 이야기하는 통일장 이론이 아니다)'은 없다. 이것을 흔히 이성이 보여주는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이것 말고도 다른 한계도 있다. 인간은 절대 진정한 근원이라고 볼 수 있는 세계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으며, 순수한 창조라는 것은 기독교 교리에서 천사나 성령이 지닌 은총을 설명하는 말 그대로 신화일 뿐이다. 지성을 바탕으로 한 과학이 아무리 발달한다 하더라도 종교는 최후 보루인 인간 이성이 지닌 한계에서 끝까지 살아남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한계를 모른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한계는 뛰어넘으라고 있는 것이라는 말도 그렇다. 우주라는 시공간을 포함한 모든 차원에서 새로운 한 획을 그을 엄청난 인식 지평이 열리자 사람들은 우주로 진출하기를 원했다. 우주 진출에 쏟은 공이 냉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던 1950 ~ 60년대에 드디어 결실을 보았다. 일그러진 이념 대립이 낳은 산물이라는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내기도 했지만, 인류 전체에게는 지구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지평을 연 역사에 길이 남을 쾌거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 영광스러운 주인공들은 과연 어떤 인물들일까. 미지 세계인 우주를 인류 최초로 직접 경험한 우주 비행사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그 온갖 생각들이 그들이 살아갈 앞날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온갖 의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내가 보기에는 역시 다치바나 다카시는 사람들이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도 거의 아무 것도 밝혀내지 못한 의식, 사유, 지성 같은 주제에 그 어떤 주제보다도 더 깊이 몰두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사색기행'과 같은 여러 가지 저작에서 그는 줄기차게 사람이 지닌 이성을 이루는 근본에 관하여 깊이와 밀도를 갖춘 주장을 펼쳤다. 이와 같이 근본을 파고드는 일에 누구보다도 더 강한 열정을 초지일관 품었기에, 이 세상 모든 것에 왕성한 호기심을 지니고 성실하게 파고들어 취재하는 자세가 저절로 몸에 배었을 것이다. 그가 쓴 모든 글은 그 지칠 줄 모르는 열정에서 나온 것이다.

 

어쨌든 다치바나 다카시는 우주 비행사들을 취재한 뒤 쓴 취재기와 그 과정에서 든 생각을 정리한 이 책 '우주로부터의 귀환'에서도 그 근본에 대한 왕성한 탐구 욕구를 그대로 드러냈다. 비록 로켓을 타고 갈 수 있게 되었다 하더라도, 우주는 여전히 인류에게는 지구와는 차원이 다른 엄청난 미지 세계이다. 그 사실이 지니는 뜻은 인류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을 어떤 관형사로도 꾸밀 수 없을 정도로 확장한다는데 있다. 그런 흥미로운 공간인 우주를 직접 체험한 이들에게 다치바나 다카시는 굉장히 큰 흥미를 느끼고 이 책을 썼다. 그리고 두 문단 앞에서 이야기한 그 온갖 궁금증을 풀어줄 답을 담았다. 그 답을 읽으면서 인식 지평을 넓히는 일은 우리 몫이다.

 

이 책에서도 다치바나 다카시만의 지독한 집념과 탁월한 취재 능력이 그대로 드러난다. 옮긴 이가 밝히는 것처럼 이 책에서는 정말 고약한 냄새가 난다. 하지만 그 고약한 냄새는 우리가 정신을 차리게 하고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해 주는 보약과도 같은 냄새이다. 단순히 글만 잘 쓰는 것이 아니라 이 같이 방대하고 치밀한 취재기를 쓰고자 그가 들였을 시간과 공을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올려야 한다. 겉으로만 아주 그럴싸한, 곧 아주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실제로는 역겹기 짝이 없는 치졸한 행동을 일삼고 지혜와 학문을 더럽히는 이들이 세상에서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현실을, 다치바나 다카시가 이 책으로써 준엄하게 비판하려고 했다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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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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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에 대해서 내가 고등학생일 때 우진이한테 처음 이야기를 들었다. 우진이 집에 갔더니 '개미'와 '뇌'라는 책이 있기에 재미있냐고 물어봤더니 우진이가 매우 재미있다면서 베르나르 베르베르에 대한 이야기를 잔뜩 풀어놓았다. 나는 빠르면서도 정보가 많은 말을 끝없이 늘어놓는 우진이에게 진절머리를 내면서, 그저 대단한 작가라고 생각했다. 


이미 고등학교 2학년 때 지식에 대한 욕심이 수미산만큼이나 커져 있었던 나는, 수능을 치고 난 뒤에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모르는지 더욱 깊이 깨닫고 진저리를 쳤다. 나름대로 공부를 열심히 했기에 생각은 많았지만 그것들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해서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새로 들어오는 정보를 갈무리하기는커녕 이미 들어와 있는 정보들이 멋대로 연결되고 뻗는 바람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더욱 어이없는 것은 그 때 내가 겪었던 혼란과 고통은 내 세계를 건설하면서 계속 느낄 모든 혼란과 고통에 대 보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그 때까지 머릿속에 집어넣고 생각한 것들이 너무나 보잘것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내 모습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도 전혀 알 수 없었다. 내가 앓고 있는 고질병 가운데 한 가지는 이렇게 근원을 찾을 수 있다. 


그렇게 비틀거리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에서 주장한 사람이 지닌 본능에 따라 계속 공부하고 생각하면서 나는 시간을 보냈고, 그 결과 나는 부산대학교 영어교육과에 입학했다. 우리 과에는 부서가 5개 있었는데, 그 가운데 나는 책을 읽고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어서 문학부에 들어갔다. 문학부장 선배가 첫 모임에서 읽고 토론할 과제로 지정해 주신 책이 바로 '나무'이다. 


나는 '나무'를 읽으면서 같은 시기에 푹 빠져 있던 책인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에서 읽었던 내용을 생각했다.
 


……류비셰프의 비정통적 시각이란 단지 표면에 나타난 현상일 뿐이었다. 그 이면에는 독특한 세계관, 거대하게 뻗어가는 구조물의 윤곽이 숨어 있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 구조물의 모습은 낯설고도 매력적인 것이었다…… 



모든 사람은 성장하면서 세계관, 곧 독특한 정신계를 구축한다. 다치바나 다카시가 도쿄대학교에서 강의할 때 설명한 세계를 바라보는 위상들 가운데 세 번째에 해당하는 것이다. 곧 바깥 세상을 객관이나 주관으로 바라보면 생기는 두 가지 세계가 아니라, 자기 안으로 한없이 파고들어가면 나타나는 그런 세계, 곧 바깥 세상과는 전혀 다른 안쪽 세상(inner world)이다. 그것은 건축공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 세계관은 시멘트와 철근이 아니라 정보와 생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땅을 파고 시멘트를 부어넣어 굳혀 기초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많이 입력하여 기초를 다지는 것이다. 철근을 정교하게 연결하여 뼈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입력한 정보들을 연결하고 끝없이 생각하여 뼈대를 만드는 것이다. 이말고도 수많은 차이점이 있지만 가장 큰 차이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현실에서 건물은 완성하면 끝이지만, 정신계는 완성한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는 정신계를 끝없이 지으면서 새로워질 수 있으며, 그 가능성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 가능성을 찾아가는 것이야말로 장 폴 사르트르가 쓴 말을 빌리자면 '실존'일 것이다. 나는 실존주의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내 마음대로 정의하자면 그렇다. 


넓고 깊게 생각하는 방법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만드는 정신계와 그렇지 않은 정신계는 엄청나게 큰 차이가 난다. 굳이 위인과 속물을 견주어 보지 않더라도 단번에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나는 '나무'를 읽으면서 제목 그대로 나무를 상상했다. 생각이 깊어지면서 '나무'라는 책이 내 머릿속에서 정말 나무 한 그루가 되었다. 이 책에 담겨 있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은 모두 인류에 대한 통찰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 책은 인류에 대한 통찰이라는 뿌리에서 뻗어나온 나무다. 그 뿌리에서 나무가 뻗어나올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넓고 깊게 생각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넓고 깊게 생각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창의성과 자율성이 두드러져야 하지 않은가? 이것이야말로 인류라는 종족 안에 들어가는 진정한 한 인격체로 태어나는 것 아닌가?  


사람은 자기가 살고 영향을 주고받는 세상에 대해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렇게 끝없이 생각하여 독특하고 웅장한 세계관을 만들고 계속 넓히는 것이야말로 앞에서 설명했듯이 진정한 사람으로서 다시 태어나는 방법이다. 이 책에 있는 이야기 열여덟 편을 읽다 보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나무가 떠오를 것이다. 그 나무는 결국 이야기 가운데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가능성의 나무'로 합쳐질 것이다. 정신계에 대해서 확고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막연한 우주이기만 하던 정신계가 나무로 변하여 무럭무럭 자라는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 즐거움은 그저 누리기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계속 그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계속 힘써야 한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나는 지금 그렇게 계속 나름대로 힘쓰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러면서 많이 성장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한 가지 엉뚱한 사실이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안정되지 않고 항상 혼란스러운 내 정신이 바람직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단 한 마디로 증명해 주었다. 기억이 정확하지 않지만 어쨌든 생각나는 대로 쓴다. 그래도 이 사람이 이렇게 말해 준 덕분에 나는 지금도 죽지 않고 이렇게 살고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내가 상상력이 얼마나 부족한지도 뼈저리게 느꼈다.  


"내가 앓고 있는 정신불안증이 지닌 단 한 가지 장점은 번뜩이는 상상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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