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로부터의 귀환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전현희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얼마나 잤는지 몰라도 일어나 보니까 어느덧 해가 하늘 높이 떠 있다. 하지만 날이 흐려서 그런지 방은 전혀 밝지 않고 어두침침했다. 며칠 동안 시험 공부를 하겠다고 잠을 줄여가며 도서관과 정보전산원에서 설쳐서 그런지, 근육 분절 하나마다 분동을 달아놓은 것처럼 온몸이 무겁고 찜찜하다. 피에 이물질이 섞여서 부글부글 끓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불을 켜고 책상 앞에 앉았지만 무엇을 시작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정신이 멍하고 몸은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 하루 이틀 겪는 일이 아니라서 그런지 짜증이 저절로 났다. 짜증과 피곤함과 어두움에서 오는 무기력함이 뒤섞여 몸이나 마음이나 아주 엉망진창이다. 그저 일상에서 흔히 겪는 일이라고 하기에는 내 머릿속을 너무 심하게 뒤흔들어 놓는다.

 

갑자기 군 복무 시절에 휴가를 즐기면서 뇌에 새로 입력된 흐릿하지만 인상이 강한 기억들이, 다시 막을 비집고 한꺼번에 튀어나왔다. 서울 도심 한복판을 택시를 타고 달리면서 에미넴이 남긴 상당히 멋진 곡인 'Never Enough'를 들을 때,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영상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으로 다가와 내 머리를 자극했다. 내가 부산으로 달려가는 열차 안에서 차츰 가까워지는 부산 시가지를 바라볼 때도 의식은 항상 요동쳤다. 

 

그러다가 영문도 모르는 채 온갖 기억이 다 튀어나오는 경험을 했다. 처음으로 일본과 중국이라는 다른 나라에 발을 딛었을 때뿐만 아니라, 내 방 안에 있는 자기도 모르던 새로운 공간이나 사실을 발견했을 때도 내 의식은 크게 흔들렸다. 거기에다가 원래 알고 있던 것들마저 온갖 갈래로 조합되어 새롭게 다가오기까지 했다. 그 모든 것은 시공간을 포함한 '환경'이라는 개념 안에 들어가는 내가 모르는 모든 차원 요소들이 변하면서 생기는 것이었다.

 

사실 그런 현상은 나 같이 변덕이 심한 사람들에게는 자주 나타날 것이다. 자기가 의식이 송두리째 변한다면,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보다 그 사실을 더욱 잘 인지할 듯 하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조금이라도 환경이 변하더라도 그 때문에 갑자기 온갖 생각이 떠오르고, 그것들에게 사로잡혀 꼼짝도 할 수 없을 때가 많으니, 어떻게 의식이 변하는 것을 모를 수가 있을까. 수많은 중첩된 기괴하기 짝이 없어 도저히 이 세상 것이라고 볼 수 없는 이미지들이 온 신경을 엄청나게 빠르게 뒤흔들어 놓는 일이 흔한 나 같은 사람이라도, 그 이미지들은 어차피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 덕분에 만들어지는 것이니, 그 환경이 변한다면 어떻게든지 의식은 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와 같이 생각한다면 인류가 지닌 지성은 지금까지 어떻게든지 변한 환경 덕분에 발전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먹을 것이 풍부한 정글에서 살고 있던 인류 조상이 황량하고 척박한 사바나라는 다른 환경을 보지 못했다면, 인류는 이 세상에 나타나지 못했을 것이다. 사바나를 봤기 때문에 새로운 자극이 들어왔고, 그 자극 덕분에 호기심을 느껴 사바나로 진출한 유인원들이 환경이 변하면서 생긴 온갖 것에 적응하며 초기 인류로 진화했다.

 

진화한 인류는 살아남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기술을 개발하며 지성을 점점 발달시켰고, 그에 따라 각자 자기가 사는 공간에서 독특한 문명이라고 할 만한 어떤 산물을 창조했다. 하지만 다른 부족이 이루어낸 문명을 만나기 전에는 어떤 특정한 수준을 뛰어넘지 못했다. 항해술이 발달하면서 다른 대륙에 살아 숨쉬는 문명을 발견하고 새로운 경험과 지식을 얻으면서, 결국 인류 전체가 지닌 의식이 시대에 획을 여러 번 그으면서 몇 번이고 발전했다. 물론 그 발전이라는 개념 자체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정밀도와 복잡성이라는 면에서는 분명히 발전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정밀도와 복잡성이라는 것은 인류가 처한 어떤 환경이라는 틀을 넘어서는 수준에는 절대 이르지 못한다. 모든 환경 요소는 인류 지성을 제약하고 결정한다. 지성을 자극하는 요소는 모두 인간이라는 존재 밖에서 나타나지, 존재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아기가 태어나고 나서 얼마 뒤에는 '나(self)'라는 개념도 없이 살다가, 주위 환경과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자아 개념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고, 그에 따른 존재와 공간 개념을 깨닫기 시작한다는 발달심리학에서 나온 논리는, 앞에서 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좋은 증거가 된다.

 

설사 이성을 갖춘 개인이 혼자서 생각을 한다 하더라도, 그 생각을 이루는 근본이 어디에서 왔는지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한 때 철학에서 진정한 진리에 이르는 방법은 인류가 지닌 지성만으로 순수하게 사유하는 형이상학이라는 주장이 정설이 되었지만, 지금은 그 주장에 거의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 지성이 아무리 발달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자극이 있기 때문에 발달하는 것이다. 사회에서 오랫동안 철저하게 격리되어 사람으로서 기본으로 갖춰야 할 지식 자체가 없는 사람이, 두뇌를 가지고 있다는 그것 하나만으로 사회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에 관해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만큼 예측하고 생각하고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물론 앞에서 내가 주장한 모든 것은 말 그대로 주장이며 가설일 뿐이다. 류비셰프가 쓴 편지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해서 말하자면, 내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알프스 산맥에 있는 몽블랑만큼이나 높이 쌓이지만, 내 주장을 반박하는 증거 또한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에베레스트만큼이나 높이 쌓인다. 이 모든 것을 통합하는 일명 '통일장 이론(우주 탄생론이나 역학론에서 이야기하는 통일장 이론이 아니다)'은 없다. 이것을 흔히 이성이 보여주는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이것 말고도 다른 한계도 있다. 인간은 절대 진정한 근원이라고 볼 수 있는 세계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으며, 순수한 창조라는 것은 기독교 교리에서 천사나 성령이 지닌 은총을 설명하는 말 그대로 신화일 뿐이다. 지성을 바탕으로 한 과학이 아무리 발달한다 하더라도 종교는 최후 보루인 인간 이성이 지닌 한계에서 끝까지 살아남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한계를 모른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한계는 뛰어넘으라고 있는 것이라는 말도 그렇다. 우주라는 시공간을 포함한 모든 차원에서 새로운 한 획을 그을 엄청난 인식 지평이 열리자 사람들은 우주로 진출하기를 원했다. 우주 진출에 쏟은 공이 냉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던 1950 ~ 60년대에 드디어 결실을 보았다. 일그러진 이념 대립이 낳은 산물이라는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내기도 했지만, 인류 전체에게는 지구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지평을 연 역사에 길이 남을 쾌거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 영광스러운 주인공들은 과연 어떤 인물들일까. 미지 세계인 우주를 인류 최초로 직접 경험한 우주 비행사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그 온갖 생각들이 그들이 살아갈 앞날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온갖 의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내가 보기에는 역시 다치바나 다카시는 사람들이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도 거의 아무 것도 밝혀내지 못한 의식, 사유, 지성 같은 주제에 그 어떤 주제보다도 더 깊이 몰두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사색기행'과 같은 여러 가지 저작에서 그는 줄기차게 사람이 지닌 이성을 이루는 근본에 관하여 깊이와 밀도를 갖춘 주장을 펼쳤다. 이와 같이 근본을 파고드는 일에 누구보다도 더 강한 열정을 초지일관 품었기에, 이 세상 모든 것에 왕성한 호기심을 지니고 성실하게 파고들어 취재하는 자세가 저절로 몸에 배었을 것이다. 그가 쓴 모든 글은 그 지칠 줄 모르는 열정에서 나온 것이다.

 

어쨌든 다치바나 다카시는 우주 비행사들을 취재한 뒤 쓴 취재기와 그 과정에서 든 생각을 정리한 이 책 '우주로부터의 귀환'에서도 그 근본에 대한 왕성한 탐구 욕구를 그대로 드러냈다. 비록 로켓을 타고 갈 수 있게 되었다 하더라도, 우주는 여전히 인류에게는 지구와는 차원이 다른 엄청난 미지 세계이다. 그 사실이 지니는 뜻은 인류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을 어떤 관형사로도 꾸밀 수 없을 정도로 확장한다는데 있다. 그런 흥미로운 공간인 우주를 직접 체험한 이들에게 다치바나 다카시는 굉장히 큰 흥미를 느끼고 이 책을 썼다. 그리고 두 문단 앞에서 이야기한 그 온갖 궁금증을 풀어줄 답을 담았다. 그 답을 읽으면서 인식 지평을 넓히는 일은 우리 몫이다.

 

이 책에서도 다치바나 다카시만의 지독한 집념과 탁월한 취재 능력이 그대로 드러난다. 옮긴 이가 밝히는 것처럼 이 책에서는 정말 고약한 냄새가 난다. 하지만 그 고약한 냄새는 우리가 정신을 차리게 하고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해 주는 보약과도 같은 냄새이다. 단순히 글만 잘 쓰는 것이 아니라 이 같이 방대하고 치밀한 취재기를 쓰고자 그가 들였을 시간과 공을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올려야 한다. 겉으로만 아주 그럴싸한, 곧 아주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실제로는 역겹기 짝이 없는 치졸한 행동을 일삼고 지혜와 학문을 더럽히는 이들이 세상에서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현실을, 다치바나 다카시가 이 책으로써 준엄하게 비판하려고 했다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http://cyworld.nate.com/Lyubishev -> 더 많은 자료는 여기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