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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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세상에 사람들이 신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나는 시간이야말로 사람들에게 가장 신비로운 존재일 것이라고 과감하게 말한다.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를 쓴 다닐 알렉산드로비치 그라닌은 시간은 끝도 없는 심연과도 같으며 그 속에서는 어떤 고명한 철학자도 길을 잃고 만다면서 시간이 얼마나 신비로우면서도 두려운지 밝힌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길을 잃어버리고 끝없는 절망에 빠져버린 철학자는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철학자들도 그러하다면, 보통 사람들은 아예 시간에 관하여 깊이 생각할 엄두도 낼 수 없다는 뜻일까? 수많은 사람들이 시간 속에서 살고 있지만, 정작 그 시간이 무엇인지 물으면 거의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 말이 맞는 듯 하다.
 

내가 아는 범위 안에서 생각해 보면 시간에는 물리학과 철학으로 접근할 수 있다. 물리학과 철학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일단 머리를 감싸쥔다. 물리학이라고 하면 일단 모르는 사람들한테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고대 상형 문자로밖에 안 보이는 수학 방정식이 떠오를 것이다. 그 고정 관념이 무조건 틀렸다고 볼 수도 없기에, 물리학에 진저리치는 모습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철학을 굳이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흔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삶 속에서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철학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미하엘 엔데라는 작가는 물리학보다는 철학에 훨씬 신경을 썼다. 흔히 사람들이 떠올리는 딱딱하고 어려운 철학이 아니라 삶 속에서 간단하게 깨달을 수 있는 진리를 말하는데 힘썼다. 그 결과가 '모모'라는 작품으로 나왔다.

 

어느 마을에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여자아이가 한 명 나타난다. 마을 사람들은 그 아이를 '모모'라고 부른다. 모모가 온 뒤 마을은 훨씬 인간미가 넘친다. 아이들은 모모에게서 고민을 해결하는 방법을 얻는다. 말이 안 통한다면서 한 치도 양보하지 않고 싸우던 어른들도 모모 앞에서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다가 어느새 갈등을 풀고 화해한다.

 

화목한 마을에 어느날 온통 검은 옷으로 차려입은 이상한 사람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을 만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일벌레가 되어버리고 시간을 아끼는데 집착한다. 나이 든 아들은 병든 어머니를 간호하면서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 젊은이는 애인에게 장미꽃을 사 들고 사랑을 속삭이러 가지 않는다. 

 

이상하게 변하는 마을과 모모를 무시하는 사람들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는 모모는 세상에 시간을 공급하는 신과 같은 존재인 호라 박사를 만난다. 그리고 그들이 죽은 시간에서 태어나는 시간 도둑이라는 사실을 알고 모모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그 뒤 모모와 시간 도둑 사이에 숨막히는 대결이 펼쳐진다.

 

동화에서 미하엘 엔데가 나타내고자 하는 바는 간단하다. 갈수록 시간을 아껴서 더 많은 일을 하는데만 힘쓰면서, 갈수록 인간미를 잃어가고 차갑고 우울해지는 세상에 경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는 지금과 시간 도둑에게 사람 냄새 나는 풍요로운 삶에 들어가는 시간을 빼앗긴 마을이 뭐가 다를까? 우리도 무한 경쟁 속에서 보이지 않는 시간 도둑에게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간은 자꾸만 어디론가 흘러가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정신 없이 산다. 그러나 막상 돌이켜보면 무엇을 하느라고 그렇게 바빴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할 때가 수두룩하다. 도대체 왜 그럴까? 이 물음에는 각자 나름대로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시간은 무엇인지 밝히려고 힘썼지만, 지금까지도 명쾌한 답은 나와 있지 않다. 사람이 사는데 시간이 무엇인지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보통 사람들은 한 쪽을 채 읽기도 전에 진절머리를 칠 정도로 어렵다고 하는 '시간의 역사' 따위 책을 읽어서 물리학에서 시간은 무엇을 뜻하는지 꼭 알아야 할 필요는 더욱 없다. 그저 이런 따뜻한 동화에서 말하는 인간미 넘치는 시간이 과연 무엇인지만 알면, 삶은 훨씬 풍요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시간을 기록하는 어쩌면 아무 쓸모도 없는 짓을 하면서도, 그 인간미 넘치는 시간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해 여전히 심하게 방황하고 있다. 이런 독후감을 쓰면서도 내가 그런 교훈을 지키지 않고 있으니 도대체 뭐라고 변명을 늘어놓아야 할 지 모른다. 그 변명은 다른 글에서나 실컷 늘어놓아야겠다. 늘어놓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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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만큼 자라는 아이들
박혜란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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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섯 살 때 동네 형님(?)들 따라서 전자 오락실에 가 봤다. 갤러그, 벽돌깨기, 카발 따위 고전 게임이 그 당시에는 버젓이 인기 있는 오락으로 오락실에 자리잡고 있었다. 조이스틱을 움직이고 단추를 누르면서 벽돌을 깨부수고 아가씨를 납치해 간 악마를 무찌르고, 똥파리를 몰살하는 그 기분은 그 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대학생이 된 뒤 오락실에 가서 오락을 해 봐도 옛날처럼 짜릿한 기분을 느끼기는 힘들었다. 그 정도로 나는 어릴 때 전자오락에 푹 빠졌다.
 

나는 그 재미에 푹 빠져 오락실에 더욱 자주 드나들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도 넉넉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집안 형편이 지금보다도 더욱 안 좋았고, 내가 아직 돈을 알아서 제대로 쓸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기에 어머니는 용돈을 주지 않으셨다.

 

그러자 나는 부모님 몰래 지갑이나 호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전자오락은 나에게 마약과도 같았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은 나한테 딱 들어맞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한 두 판 정도 할 수 있는 동전 한 두 개면 충분했지만, 나중에는 10000원 지폐도 서슴지 않고 빼냈으니까 말이다.

 

처음 발각된 뒤에 무척 많이 맞았다. 아예 못된 손버릇을 고쳐 놓으시려는 듯 했다. 그러나 나는 버릇을 고치지 않았고 속이 터지는 갈등을 10년 가까이 끌었다.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면서 쓸데 없는 일에만 온통 관심이 쏠려 있는 나를 믿어주실 까닭이 없었다. 부모님께서 나를 믿어주시기 시작한 때는, 내가 부끄러운 앞날을 청산하고 스스로 자기를 다잡기 시작한 때였다.

 

대학교에 들어온 뒤 나는 부모님에게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겠으며 만약 충돌이 생기면 얼렁뚱땅 덮기보다는 부모님을 설득하겠다는 원칙을 세웠다. 지금 내가 얻고 있는 신뢰는 그 원칙을 충실히 지킨 덕분에 얻은 듯 하다. 물론 엄마 친구 아들(!) 같은 사람은 되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 그러면서 나도 나름대로 효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책꽂이에 꽂아놓기만 하고 전혀 읽지 않았던 이 책을 우연히 발견하고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여기 나오는 아이들(?)과 견주어 볼 때 참 가족에게 무심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 엄마 친구 아들과 같은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여기에 나오는 작가들의 아들들이야말로 엄마 친구 아들이었다. 공부도 잘 햇고 적절한 때 어머니를 위로할 줄도 알았고 도대체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

 

그들이 그렇게 알아서 잘 큰 까닭은 어머니가 아들을 끝까지 믿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머니가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셨다면 과연 나는 지금과 같은 나름대로 올바른 길을 찾아갈 수 있었을까? 물론 역사(?)에는 가정법을 써서는 안 되지만, 만약 쓴다면 나는 그럴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다만 그거야 철저하게 자기 생각일 뿐이니 문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여기에는 어떤 답이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가장 늦었다고 생각하는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도 있듯이 어떤 생각을 한 뒤부터라도 잘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지금까지는 그러지 못했지만 대학교에 들어와서나마 이 아들들처럼 되어 보겠다(!)고 이 책을 읽은 뒤 굳게 다짐했다. 그러나 아주 희귀한 몇 가지를 빼면 나에게 역시 생각은 생각일 뿐이었다. 지금까지 어떻게 달라지려고 한 일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만큼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매달리는 내 모습은 부모님에게 어떻게 보였을까. 어머니가 나중에 이 책과 같은 이야기를 쓰실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군대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이라도 부모님 기분이나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나한테는 지금까지는 아무 뜻이 없는 책이 되어버렸지만, 뜻이 생기도록 하고 나중에 나한테도 자식이 생기면 이 책을 쓴 사람이 강조하듯이 되도록 자식을 믿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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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식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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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자연, 초현실, 초감각……'초(超)'만큼 내가 신비로움을 느끼는 접두사도 드물다. 아마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럴지도 모른다. 사람은 많은 것을 할 수 있지만, 사실 할 수 없는 것이 훨씬 더 많다. 그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존재를 사람들은 생각하면서 신비로움을 느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생각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생각을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내려고 힘썼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지금과 같은 첨단 문명을 일굴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은 인류라는 개체군 전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각 개체에게도 적용된다. 그 정도야 사람마다 다르다. 나는 그런 것이 너무 심해서 탈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옛날에 공상 소설을 한참 쓸 때 가장 즐겨 쓰던 꾸밈씨(형용사)가 '상상을 초월하는'이었고, 요즘에도 내가 가장 즐겨쓰는 표현 가운데 한 가지가 '한계를 뛰어넘는'일 정도로 내 머릿속에는 '초(超)'라는 글자가 딱 박혀 있다. 만족을 모르는 내가 항상 외치는 것은 무엇이라도 극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생각보다 너무 어려워서 실망하는 일이 많았다.

 

과학 공부에 재미를 붙인 뒤, 나는 과학으로 설명, 극복,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없을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더욱 단단하게 굳히고 있었다. 자연 현상을 설명하고 문명을 건설하는 밑바탕이 된 과학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 아름다움에 푹 빠져 있던 나는 첨단 과학을 인정하지 않고 온갖 문제를 불러 일으키고 있는 종교를 당연히 거부했다. 그래서 과학이 이성을 거스르는 종교를 스스로 무릎 꿇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과학이 해결하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깨달았을 때, 내 실망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과학을 신처럼 섬기고 있던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고, '초과학'에서 그나마 안정을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공부를 더욱 많이 할수록 혼란은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커졌다. 무엇이 문제인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했다.

 

그러다가 이 소설을 만났다. 글사랑 시삽 형님이 대단한 소설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셔서, 나는 한 번 읽어봐야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인터넷으로 돌아다니면서 얻은 정보는 이 소설에 대한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했다. 신인이 투고한 작품이 저명한 문예지인 '신조(新潮)'에 권두소설이 된 일은 지금까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대학생이 일본에서 가장 권위가 있는 문학상인 아쿠타카와 상을 받은 것은 무라카미 류 뒤를 이어 23년만이라고 한다. 이 말고도 그에게 쏟아지는 찬사는 일일이 다 말하기가 버거웠다.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사지 않고 시간이 좀 흘렀다. 그러다가 우연히 1학년 여름방학 때 이 책을 얻어서 읽어 봤다. 가톨릭 교리가 지배하는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은 '굉장히 깊다'는 것이었다. 교토대 법대생인 히라노 게이치로는 해박한 인문학 지식, 특히 종교에 관한 대단히 많은 지식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썼다. 그 지식이 의고체라는 문체 위에서 더욱 깊이를 더하고 있다고 하는데, 의고체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므로 그냥 넘겨야겠다.

 

사실 그 깊이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단순히 어렵기만 하다면 깊이라고 할 수 없다. 진정한 깊이는 마음을 울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을 내가 읽기 전에 우리나라에서 일본 사랑 소설이 유행해서 무라카미 하루키, 요시모토 바나나 따위 작가들이 쓴 소설이 많이 쏟아져 나왔다. 몇 권을 대충 훑어보기는 했는데, 파울로 코엘료가 쓴 소설과 마찬가지로 그 소설을 보고도 뚜렷하게 공감하지 못했다. 분명히 아름답기는 하지만 뭔가 빠진 듯 했다. 그 허전한 기분을 '일식'이라는 소설이 잘 달래준 셈이다.

 

도미니크 수도사이면서도 절대주의에 빠지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고자 이단 교리도 검토하는 주인공이 보여주는 관용과 성실성, 연금술사 피에르 뒤페가 보여주는 극한에 가까운 자기 절제 따위에서도 매우 큰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나를 가장 기쁘게 한 내용은 바로 소설 마지막에 등장하는 초자연 현상이었다. 안드로규노스를 기둥에 묶어놓고 불태우는 장면에서 일식(!)이 일어나고 그는 히에로스 가모스와 같은 느낌을 경험한다. 여기에서 다쿠보 히데오가 내놓은 심사평을 들어보도록 하자.

 

 

"기독교만이 아니라 종교는 육체와 영혼이라는 두 가지 국면에서 추구되곤 하지만, 이러한 이원론적인 택일로는 궁극의 초월성을 포착할 수 없다는 점을 이 작가는 알고 있다. 그 때문에 남녀의 육체를 상징적으로 결합시킨 존재를 화형에 처하는 광경에서, 일순 지고의 극치를 전개하여 보여주고 있다. 참으로 젊디젊은 야심과 힘이라 할 것이다."

 

 

이 심사평을 읽고 소설을 다 읽은 뒤 과학과 종교도 육체와 영혼과 같은 관계라는 결론이 나왔다. 과학과 종교는 인류 문명을 번영시키려고 함께 가야 한다. 서로 이야기하지 않고 대립하다가는 둘 다 인류 문명에 독이 된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까지 과학과 종교가 이야기하는 내용을 담은 책을 사서 읽는데 힘썼다. 이 소설에서 느낀 것을 나중에 댄 브라운이 쓴 '천사와 악마'를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정리할 수 있었다. 물론 독후감은 '천사와 악마'보다 훨씬 늦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매우 깊고 아름다운 소설이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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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글씨
나다니엘 호손 지음, 이지선 옮김 / 글로북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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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년 1학기에 '영미단편소설강독' 수업을 들었다. 2학년 1학기에 들었던 수업 가운데 그나마 가장 열심히 들었다. 'Young Goodman Brown'이라는 소설을 처음 읽었는데, 저자가 나다니엘 호돈(Nathaniel Hawthone)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호돈이네 호손이네 하면서 논쟁을 벌였다. th가 대개 with, throng, bath, through 따위 예에서 보면 'ㅆ'로 소리가 나므로 호손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영어에서는 예외도 꽤 많아서 나는 아직도 고유명사로서 호돈이라고 믿고 있다.

 

마치 표도르냐 효도르냐 하는 논쟁을 보는 듯 했다. 에밀리아녠코(정확한가?)에서는 별다른 논쟁이 없는데, 워낙 이 이름만 나오면 사람들이 으르렁거리니 한 번 생각해 보자. 표도르를 키릴 문자로 쓰면 фёдор인데 ф은 알파벳 F와 비슷하게 소리가 난다(실제로 영어권에서는 Fedor라고 쓴다). F는 한글 자음 'ㅍ'와 비슷하므로 한글식으로는 표도르가 더 그럴듯하다고 본다.

 

어쨌든 'Young Goodman Brown'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예전에 읽었던 '주홍 글씨(The Scarlet Letter)'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Young Goodman Brown'에서도 나다니엘 호돈이 쓴 소설만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맛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원문으로 읽는 것이 번역본으로 읽는 것보다는 훨씬 좋다는 말은 거의 진리로 인정받고 있다. 나도 탐탁치 않기는 하지만 인정하고 있기는 한데, 이상하게도 '주홍 글씨'를 읽은 뒤에는 그 말을 인정하기가 싫었다. 원문을 읽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책을 읽은 뒤 인상이 워낙 강하게 남아서 그렇다는 결론이 저절로 나온다.

 

숨이 막힐 정도로 긴장이 감도는 가운데 문체가 드러내는 아름다움에 취해 아예 질식해 버릴 정도라는 말은 과장일까. 내가 '주홍글씨(The Scarlet Letter)'를 다 읽고 난 느낌이다. 인간 심리에 대한 탁월한 묘사와 잠시도 긴장을 풀 수 없을 정도로 빈틈 없이 이어지는 내용에서 받는 충격은 예민한 사람을 기절시킬 수 있을 정도로 크다. 'Young Goodman Brown'을 읽으면서 받은 충격보다 훨씬 더 컸다.

 

헤스터 프린과 로저 칠링워드는 부부였다. 하지만 애정 없는 결혼 때문에 둘 다 불행해졌다. 헤스터뿐만 아니라 덤스테일 목사에게도 주홍 글씨가 있다. 텀스테일 목사는 자기에게 주홍 글씨가 있는데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다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있다. 자기도 간통한 죄가 있다. 그런데 자기가 사랑했던 헤스터 프린은 주홍 글씨 A로 낙인이 찍혀서 온갖 비난과 모욕을 감당하면서 살아가는데, 자기는 죄를 고백해도 사람들이 자기를 더욱 존경한다. 결국 추악한 죄수가 사람들에게 사람들에게는 성자로 칭송받는 모순이 생긴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양심에 굉장히 큰 가책을 느끼고 마음이 병들어 자꾸만 쇠약해진다.

 

계속 상태가 안 좋아지는 덤스테일 목사를 치료하게 된 로저 칠링워드는 그를 치료하려고 정신까지 탐색하던 도중에 우연히 덤스테일 목사 가슴에 있는 주홍 글씨를 발견한다. 칠링워드는 미친 듯이 기뻐하며 그에게 복수하려고 사악한 손길을 뻗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수에 시달리며 미친듯이 괴로워하던 덤스테일 목사는, 헤스터와 마을에서 도망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로저 칠링워드는 그 계획을 알아차리고 그들이 타려는 배에 같이 타려고 하는 따위 온갖 방법으로 방해한다. 결국 덤스테일 목사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 죄를 고백하고 소름끼칠 정도로 서서히 죽어간다.

 

다른 생각을 할 필요는 없었다. 숨막히는 아름다움에 취한 가운데 문득 떠오르는 궁금증을 해결하려고 머리를 굴리면 그만이었다. 가장 궁금했던 것은 나다니엘 호돈이 긍정한 사람은 누구이며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죄인으로 그린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 책을 한국어로 옮긴 사람은 호돈이 덤스테일 목사를 바람직한 인물로, 칠링워드를 악마와 같은 인물로 여겼다고 번역 후기에서 쓰고 있다.

 

나다니엘 호돈은 원래 'Hawthorne'이었던 성을 'Hawthone'으로 바꿀 정도로 조상들과 자기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했다. 자기 조상들이 저지른 끔찍한 마녀 사냥을 그는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었고 한평생 우울증과 죄책감에 시달렸다. 'Young Goodman Brown'은 어쩌면 호돈이 자기 이야기를 바꿔서 표현한 작품이라는 생각도 가끔씩 한다.

 

그런 호돈은 청교도 사회에서 평생 동안 짊어지고 살야하는 업보와도 같은 낙인을 과연 어떻게 생각했을까? 한 사람 인생을 철저하게 무너뜨릴 수 있는 낙인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 그건 일단 넘기고 다른 문제를 생각해 보자. 낙인이 있으면서도 독실한 목사로서 존경을 받는 현실에 미칠 듯이 괴로워했던 덤스테일 목사를 긍정했을까?

 

청교도 교리에 따르면 사람은 원죄를 지고 태어났기에 원죄를 씻어줄 수 있는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그리스도에게 귀의해야 하며, 평생 회개하고 참회하며 살아야 한다. 그렇기에 죄악을 저지른 뒤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괴로워한 덤스테일 목사를 호돈이 긍정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나중에는 결국 죄를 고백하고 부끄럽지 않게 죽었으니 그럴 확률은 더욱 커진다.

 

그러나 덤스테일 목사가 죄를 고백한 까닭은 칠링워드가 복수에 실패할까봐 기를 쓰고 방해해서 더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도망치는데 성공했더라면 과연 그가 죄를 고백했을까? 그도 결국 어쩔 수 없는 사람이었다고 본다. 물론 끝까지 목사로서 존경을 받으며 버티지 않고 죄를 고백한 자체는 청교도 윤리에 따르면 칭찬받을 일이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호돈이 마냥 덤스테일 목사를 긍정하기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때 황우석 교수에 대한 정당한 비판마저 가로막았던 사람들이 내세운 논리가 왜 떠오를까?

 

그리고 칠링워드는 그토록 용서받지 못할 죄인인가? 어떻게 생각하면 그는 죄인을 응징하는 정의로운 인물이다. 낙인이 있는 주제에 목사로서 존경받는 덤스테일이라는 의롭지 못한 인물을 회개하도록 하지 않았는가? 단지 그 목적이 교리에 어긋나는 복수인데다가, 칠링워드가 정말 원하는 것은 이 소설 결말이 아니라서 문제일 뿐이다. 또 사회 자체가 헤스터와 덤스테일 목사를 그토록 압박했는데, 칠링워드라는 개인이 그들을 괴롭힌 것은 특별히 비난받아야 할 까닭이 있는가? 사회에서 개인이 정당성을 얻는 무서운 일이기는 하지만, 충분히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

 

시대가 많이 변한 지금은 헤스터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반응이 나타났고, 그 반응이 대세로 자리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금지된 사랑일수록 더욱 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그래서 헤스터는 덤스테일과 사랑에 빠졌을 것이다. 의사라는 지위를 빼면 아무 매력도 없는 칠링워드가 사라졌으니 그녀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자기가 지니고 있는 매력으로 젊은 덤스테일을 충분히 유혹할 수 있었고, 덤스테일도 젊고 아름다운 헤스터를 사로잡을 매력이 충분히 있었다. 젊은 두 남녀 사이에 타오르는 사랑을 보고 몸이 끓어오르지 않는 청춘이 있을까?

 

지금 우세한 관점과 소설이 배경으로 삼은 시대에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관점을 견주어 보면서 이 소설을 읽으면 매우 다양한 해석과 비판이 나온다. 그런 것을 얻어내는 것이야말로 소설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는 진정한 즐거움 가운데 한 가지일 것이다. 이상하게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비판해 봐도 소설 자체가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은 전혀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껏 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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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inem - Angry Blonde
Eminem 지음, 최세희 옮김 / 나무처럼(알펍)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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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학년 때 정보를 얻는 재미를 제대로 깨달은 뒤 나는 정보를 머릿속에 입력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 뭐든지 읽으면서 외우려고 했다. 학문의 세계에 처음 들어서는 사람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라고 볼 수 있다. 가려서 받아들일 줄 모르는 것이다. 어쨌든 여기에서는 그런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다.
 

그 날도 나는 신문을 뒤적거리며 정보를 흡수하려고 온 신경을 신문 기사에 쏟고 있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면을 다 읽고 나니까 머리가 약간 아팠다. 머리 속에 들어온 정보들이 뒤섞여 갈리면서 차츰 날카로워져 뇌를 쿡쿡 찌르는 것 같았다. 그 사이 정보들이 조금씩 새고 있었다. 나는 다시 정신을 집중해 방금 두뇌에 입력한 정보를 하나하나 떠올렸다. 그러나 결과는 신통찮았다.

 

잠시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었다. 스포츠 면을 펴서 자질구레한 기사들을 대충대충 읽어나가던 나는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8 Mile'이라는 제목이 예사롭지 않았다. 나는 차근차근 '8 Mile'에 대한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주연 에미넴, 더는 나빠질 수 없는 인간 쓰레기, 정신병자 따위 온갖 비난을 받아왔다? 그런데 영화 '8 Mile'로써 자기를 맹렬하게 비난했던 사람들에게도 찬사를 받으며 단숨에 떠올랐다? 그가 하는 랩과 그가 살았던 삶을 담은 영화 '8 Mile'에는 그에 관한 모든 것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알 수 없는 어떤 느낌이 나를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그 뒤 나는 음반가게에 가서 국내에 발매된 에미넴 음반을 모조리 사서 틈만 나면 듣고 에미넴 일대기도 읽었다. 마치 에미넴이라는 사람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려는 듯이 에미넴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아냈다. 어떤 것에 푹 빠지면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것 같았다. 생뚱맞게 갑자기 웬 에미넴이냐는 말에도 나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에미넴 팬카페에서 들었다. 자서전인 줄 알고 샀는데, 어떤 곡을 만든 동기와 가사 해석밖에 없어서 솔직히 좀 실망했다. 그러나 깔끔한 가사 해석을 얻은 것만 해도 큰 수확이었다. 내가 원래 영어를 그다지 잘 하는 편이 아닌 데다가, 워낙 속어가 많아서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가사도 많아서, 노래를 들으면서도 좀 답답했다. 에미넴코리아에서 해석을 얻을 수도 없었던 터라 더 답답했다. 그런데 이 책에는 가사 해석이 아주 깔끔하게 잘 나와 있다. 작가도 번역하느라 애먹었다고 머릿말에 썼다. 에미넴이 공식 음반을 내기 전에 소위 '언더(Under)'에서 내뱉었던 가사들도 꽤 많이 실려 있다. 

 

이 책이 나오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정말 내가 원하던 에미넴 자서전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그 책은 살 필요가 없을 듯 했다. 어쩌면 이 책과 음반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도 담겨 있다고 하지만, 그런 것까지 일일이 다 알아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애정이 식었다는 비난이 들어오면 좀 곤란하다. 에미넴은 젊은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고, 나는 그 영향을 부정하지 않는다.

 

내가 글을 쓰면서 내가 겪었던 온갖 일을 끄집어내는 것처럼 그는 여러 음반을 내면서 그가 겪고 느낀 온갖 것을 노래에 담았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에미넴은 치사량에서 조금 모자란 가난에 시달렸다. 여자친구인 킴은 에미넴과 결혼한 뒤 술집에서 옷을 모두 벗고 춤을 추어야 할 정도였으니, 다른 사정은 말할 필요도 없을 듯 하다.

 

그렇다고 부모님이 착한 사람들도 아니었다. 에미넴은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어머니도 에미넴에 따르면 정상이 아닌 미친 X(!)인지라 허구한 날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단 하나뿐인 정신 지주였던 삼촌 로니도 죽어버렸으니 그가 어땠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정말 딱 미쳐버리기 좋은 환경이다.

 

그런 환경에서 에미넴은 힙합 세상에서 성공하겠다고 벼르고 힙합에 몰두한다. 그러나 백인들이 흑인들을 사회에서 차별하면서 겪는 설움을 풀려는 듯이, 흑인들이 지배하고 있는 힙합 세계에서 백인들은 성공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그는 거기에서도 온갖 설움을 겪어야 했고, 수많은 MC들에게 디스(Diss)를 당해야 했다. 그러나 엄청난 고난 속에서 얻은 독기로 똘똘 뭉친 그는, 자기가 당한 것보다 훨씬 대담하고 예리한 독설로 상대를 깎아내렸다.

 

영화 '8 Mile'에서도, 지금까지 나온 여러 음반에서도, 그리고 이 책에서도 소름끼칠 정도로 지독한 독설은 끝없이 쏟아져 나온다. 그 독설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라도, 절대 권력을 쥐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초강대국 미국 대통령이라고 해도 그는 속된 말로 거침없이 씹는다. 그것도 그냥 씹는 것이 아니라 대단히 정교하고 막힘 없는 플로우(Flow)로 잘근잘근 씹어버린다. 그 플로우에는 마약, 동성애, 강간, 살인 따위 온갖 것이 담겨 있다. 그것들은 플로우에 담기는 순간 품격 높은 예술이 된다. 순수 예술가들이 발끈할지도 모르지만, 그는 분명히 예술이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라킴(Rakim), 투팍(Tupac), 비기 스몰즈(Biggie Smalls) 따위와 같은 유명인들처럼 말이다. 물 흐르듯 거침없는 플로우 위에 얻혀있는 섬뜩하게 귀를 파고드는 가사를 들어보라. 예술이 아니고 무엇인가? 

 

새로운 음반이 나올 때마다 안 그래도 평가가 극과 극을 오고 가는 에미넴이 갈수록 미쳐가는지, 아니면 갈수록 영리해지는 건지를 놓고 의견이 엇갈린다. 누구도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에미넴 자신도 정확한 평가를 내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가 느끼는 대로 말하고 싶은 대로 가사를 쓰고, 노래를 만들고, 그 노래를 묶어 음반을 내고, 공연을 하러 다닐 뿐이다. 무엇이든지 내키는 대로 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는 진정한 자유를 얻은 듯 하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에미넴이 다른 것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에미넴이 내뱉는 독설에도 분명한 깊이가 있지만, 나는 그것과는 다른 새로운 깊이를 찾고 있었다. 그저 즐기는데 만족하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힙합을 즐기는 내 친구 한 명도 힙합은 그저 즐기면 그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그저 열광할 때와는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나는 홍세화가 파리에서 만난 여자가 말한 랩을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미국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White America', 'Square Dance', 'Mosh' 같은 곡에 자꾸 끌린다. 이와 같은 곡을 더 많이 발표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요즘에 더욱 많이 한다. 지금까지 그가 내놓은 이 책을 포함한 수많은 성과에서 보여준 소름끼치는 독설을 미국 정부에 더욱 강하게 내뿜으면 좋겠다.

 

에미넴을 처음으로 안 뒤 어느덧 3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벌써 30대 중반인 에미넴이 마약에 찌들어 극도로 우울해하고 있다고 했다. 우울한 영웅 때문에 나도 우울해지는 것을 보면, 나도 흔히 말하는 '빠돌이'나 '빠순이'는 아니더라도 확실히 열렬한 신도(?)인 것은 확실하다. 다른 사람들이 보고 돈이 아깝다고 말하는 이 책이지만,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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