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글씨
나다니엘 호손 지음, 이지선 옮김 / 글로북스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2학년 1학기에 '영미단편소설강독' 수업을 들었다. 2학년 1학기에 들었던 수업 가운데 그나마 가장 열심히 들었다. 'Young Goodman Brown'이라는 소설을 처음 읽었는데, 저자가 나다니엘 호돈(Nathaniel Hawthone)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호돈이네 호손이네 하면서 논쟁을 벌였다. th가 대개 with, throng, bath, through 따위 예에서 보면 'ㅆ'로 소리가 나므로 호손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영어에서는 예외도 꽤 많아서 나는 아직도 고유명사로서 호돈이라고 믿고 있다.

 

마치 표도르냐 효도르냐 하는 논쟁을 보는 듯 했다. 에밀리아녠코(정확한가?)에서는 별다른 논쟁이 없는데, 워낙 이 이름만 나오면 사람들이 으르렁거리니 한 번 생각해 보자. 표도르를 키릴 문자로 쓰면 фёдор인데 ф은 알파벳 F와 비슷하게 소리가 난다(실제로 영어권에서는 Fedor라고 쓴다). F는 한글 자음 'ㅍ'와 비슷하므로 한글식으로는 표도르가 더 그럴듯하다고 본다.

 

어쨌든 'Young Goodman Brown'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예전에 읽었던 '주홍 글씨(The Scarlet Letter)'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Young Goodman Brown'에서도 나다니엘 호돈이 쓴 소설만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맛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원문으로 읽는 것이 번역본으로 읽는 것보다는 훨씬 좋다는 말은 거의 진리로 인정받고 있다. 나도 탐탁치 않기는 하지만 인정하고 있기는 한데, 이상하게도 '주홍 글씨'를 읽은 뒤에는 그 말을 인정하기가 싫었다. 원문을 읽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책을 읽은 뒤 인상이 워낙 강하게 남아서 그렇다는 결론이 저절로 나온다.

 

숨이 막힐 정도로 긴장이 감도는 가운데 문체가 드러내는 아름다움에 취해 아예 질식해 버릴 정도라는 말은 과장일까. 내가 '주홍글씨(The Scarlet Letter)'를 다 읽고 난 느낌이다. 인간 심리에 대한 탁월한 묘사와 잠시도 긴장을 풀 수 없을 정도로 빈틈 없이 이어지는 내용에서 받는 충격은 예민한 사람을 기절시킬 수 있을 정도로 크다. 'Young Goodman Brown'을 읽으면서 받은 충격보다 훨씬 더 컸다.

 

헤스터 프린과 로저 칠링워드는 부부였다. 하지만 애정 없는 결혼 때문에 둘 다 불행해졌다. 헤스터뿐만 아니라 덤스테일 목사에게도 주홍 글씨가 있다. 텀스테일 목사는 자기에게 주홍 글씨가 있는데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다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있다. 자기도 간통한 죄가 있다. 그런데 자기가 사랑했던 헤스터 프린은 주홍 글씨 A로 낙인이 찍혀서 온갖 비난과 모욕을 감당하면서 살아가는데, 자기는 죄를 고백해도 사람들이 자기를 더욱 존경한다. 결국 추악한 죄수가 사람들에게 사람들에게는 성자로 칭송받는 모순이 생긴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양심에 굉장히 큰 가책을 느끼고 마음이 병들어 자꾸만 쇠약해진다.

 

계속 상태가 안 좋아지는 덤스테일 목사를 치료하게 된 로저 칠링워드는 그를 치료하려고 정신까지 탐색하던 도중에 우연히 덤스테일 목사 가슴에 있는 주홍 글씨를 발견한다. 칠링워드는 미친 듯이 기뻐하며 그에게 복수하려고 사악한 손길을 뻗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수에 시달리며 미친듯이 괴로워하던 덤스테일 목사는, 헤스터와 마을에서 도망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로저 칠링워드는 그 계획을 알아차리고 그들이 타려는 배에 같이 타려고 하는 따위 온갖 방법으로 방해한다. 결국 덤스테일 목사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 죄를 고백하고 소름끼칠 정도로 서서히 죽어간다.

 

다른 생각을 할 필요는 없었다. 숨막히는 아름다움에 취한 가운데 문득 떠오르는 궁금증을 해결하려고 머리를 굴리면 그만이었다. 가장 궁금했던 것은 나다니엘 호돈이 긍정한 사람은 누구이며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죄인으로 그린 사람은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 책을 한국어로 옮긴 사람은 호돈이 덤스테일 목사를 바람직한 인물로, 칠링워드를 악마와 같은 인물로 여겼다고 번역 후기에서 쓰고 있다.

 

나다니엘 호돈은 원래 'Hawthorne'이었던 성을 'Hawthone'으로 바꿀 정도로 조상들과 자기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했다. 자기 조상들이 저지른 끔찍한 마녀 사냥을 그는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었고 한평생 우울증과 죄책감에 시달렸다. 'Young Goodman Brown'은 어쩌면 호돈이 자기 이야기를 바꿔서 표현한 작품이라는 생각도 가끔씩 한다.

 

그런 호돈은 청교도 사회에서 평생 동안 짊어지고 살야하는 업보와도 같은 낙인을 과연 어떻게 생각했을까? 한 사람 인생을 철저하게 무너뜨릴 수 있는 낙인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 그건 일단 넘기고 다른 문제를 생각해 보자. 낙인이 있으면서도 독실한 목사로서 존경을 받는 현실에 미칠 듯이 괴로워했던 덤스테일 목사를 긍정했을까?

 

청교도 교리에 따르면 사람은 원죄를 지고 태어났기에 원죄를 씻어줄 수 있는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그리스도에게 귀의해야 하며, 평생 회개하고 참회하며 살아야 한다. 그렇기에 죄악을 저지른 뒤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괴로워한 덤스테일 목사를 호돈이 긍정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나중에는 결국 죄를 고백하고 부끄럽지 않게 죽었으니 그럴 확률은 더욱 커진다.

 

그러나 덤스테일 목사가 죄를 고백한 까닭은 칠링워드가 복수에 실패할까봐 기를 쓰고 방해해서 더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도망치는데 성공했더라면 과연 그가 죄를 고백했을까? 그도 결국 어쩔 수 없는 사람이었다고 본다. 물론 끝까지 목사로서 존경을 받으며 버티지 않고 죄를 고백한 자체는 청교도 윤리에 따르면 칭찬받을 일이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호돈이 마냥 덤스테일 목사를 긍정하기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때 황우석 교수에 대한 정당한 비판마저 가로막았던 사람들이 내세운 논리가 왜 떠오를까?

 

그리고 칠링워드는 그토록 용서받지 못할 죄인인가? 어떻게 생각하면 그는 죄인을 응징하는 정의로운 인물이다. 낙인이 있는 주제에 목사로서 존경받는 덤스테일이라는 의롭지 못한 인물을 회개하도록 하지 않았는가? 단지 그 목적이 교리에 어긋나는 복수인데다가, 칠링워드가 정말 원하는 것은 이 소설 결말이 아니라서 문제일 뿐이다. 또 사회 자체가 헤스터와 덤스테일 목사를 그토록 압박했는데, 칠링워드라는 개인이 그들을 괴롭힌 것은 특별히 비난받아야 할 까닭이 있는가? 사회에서 개인이 정당성을 얻는 무서운 일이기는 하지만, 충분히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

 

시대가 많이 변한 지금은 헤스터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반응이 나타났고, 그 반응이 대세로 자리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금지된 사랑일수록 더욱 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그래서 헤스터는 덤스테일과 사랑에 빠졌을 것이다. 의사라는 지위를 빼면 아무 매력도 없는 칠링워드가 사라졌으니 그녀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자기가 지니고 있는 매력으로 젊은 덤스테일을 충분히 유혹할 수 있었고, 덤스테일도 젊고 아름다운 헤스터를 사로잡을 매력이 충분히 있었다. 젊은 두 남녀 사이에 타오르는 사랑을 보고 몸이 끓어오르지 않는 청춘이 있을까?

 

지금 우세한 관점과 소설이 배경으로 삼은 시대에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관점을 견주어 보면서 이 소설을 읽으면 매우 다양한 해석과 비판이 나온다. 그런 것을 얻어내는 것이야말로 소설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는 진정한 즐거움 가운데 한 가지일 것이다. 이상하게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비판해 봐도 소설 자체가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은 전혀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껏 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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