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inem - Angry Blonde
Eminem 지음, 최세희 옮김 / 나무처럼(알펍)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고등학교 2학년 때 정보를 얻는 재미를 제대로 깨달은 뒤 나는 정보를 머릿속에 입력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 뭐든지 읽으면서 외우려고 했다. 학문의 세계에 처음 들어서는 사람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라고 볼 수 있다. 가려서 받아들일 줄 모르는 것이다. 어쨌든 여기에서는 그런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다.
 

그 날도 나는 신문을 뒤적거리며 정보를 흡수하려고 온 신경을 신문 기사에 쏟고 있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면을 다 읽고 나니까 머리가 약간 아팠다. 머리 속에 들어온 정보들이 뒤섞여 갈리면서 차츰 날카로워져 뇌를 쿡쿡 찌르는 것 같았다. 그 사이 정보들이 조금씩 새고 있었다. 나는 다시 정신을 집중해 방금 두뇌에 입력한 정보를 하나하나 떠올렸다. 그러나 결과는 신통찮았다.

 

잠시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었다. 스포츠 면을 펴서 자질구레한 기사들을 대충대충 읽어나가던 나는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8 Mile'이라는 제목이 예사롭지 않았다. 나는 차근차근 '8 Mile'에 대한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주연 에미넴, 더는 나빠질 수 없는 인간 쓰레기, 정신병자 따위 온갖 비난을 받아왔다? 그런데 영화 '8 Mile'로써 자기를 맹렬하게 비난했던 사람들에게도 찬사를 받으며 단숨에 떠올랐다? 그가 하는 랩과 그가 살았던 삶을 담은 영화 '8 Mile'에는 그에 관한 모든 것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알 수 없는 어떤 느낌이 나를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그 뒤 나는 음반가게에 가서 국내에 발매된 에미넴 음반을 모조리 사서 틈만 나면 듣고 에미넴 일대기도 읽었다. 마치 에미넴이라는 사람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려는 듯이 에미넴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아냈다. 어떤 것에 푹 빠지면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것 같았다. 생뚱맞게 갑자기 웬 에미넴이냐는 말에도 나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에미넴 팬카페에서 들었다. 자서전인 줄 알고 샀는데, 어떤 곡을 만든 동기와 가사 해석밖에 없어서 솔직히 좀 실망했다. 그러나 깔끔한 가사 해석을 얻은 것만 해도 큰 수확이었다. 내가 원래 영어를 그다지 잘 하는 편이 아닌 데다가, 워낙 속어가 많아서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가사도 많아서, 노래를 들으면서도 좀 답답했다. 에미넴코리아에서 해석을 얻을 수도 없었던 터라 더 답답했다. 그런데 이 책에는 가사 해석이 아주 깔끔하게 잘 나와 있다. 작가도 번역하느라 애먹었다고 머릿말에 썼다. 에미넴이 공식 음반을 내기 전에 소위 '언더(Under)'에서 내뱉었던 가사들도 꽤 많이 실려 있다. 

 

이 책이 나오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정말 내가 원하던 에미넴 자서전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그 책은 살 필요가 없을 듯 했다. 어쩌면 이 책과 음반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도 담겨 있다고 하지만, 그런 것까지 일일이 다 알아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애정이 식었다는 비난이 들어오면 좀 곤란하다. 에미넴은 젊은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고, 나는 그 영향을 부정하지 않는다.

 

내가 글을 쓰면서 내가 겪었던 온갖 일을 끄집어내는 것처럼 그는 여러 음반을 내면서 그가 겪고 느낀 온갖 것을 노래에 담았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에미넴은 치사량에서 조금 모자란 가난에 시달렸다. 여자친구인 킴은 에미넴과 결혼한 뒤 술집에서 옷을 모두 벗고 춤을 추어야 할 정도였으니, 다른 사정은 말할 필요도 없을 듯 하다.

 

그렇다고 부모님이 착한 사람들도 아니었다. 에미넴은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어머니도 에미넴에 따르면 정상이 아닌 미친 X(!)인지라 허구한 날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단 하나뿐인 정신 지주였던 삼촌 로니도 죽어버렸으니 그가 어땠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정말 딱 미쳐버리기 좋은 환경이다.

 

그런 환경에서 에미넴은 힙합 세상에서 성공하겠다고 벼르고 힙합에 몰두한다. 그러나 백인들이 흑인들을 사회에서 차별하면서 겪는 설움을 풀려는 듯이, 흑인들이 지배하고 있는 힙합 세계에서 백인들은 성공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그는 거기에서도 온갖 설움을 겪어야 했고, 수많은 MC들에게 디스(Diss)를 당해야 했다. 그러나 엄청난 고난 속에서 얻은 독기로 똘똘 뭉친 그는, 자기가 당한 것보다 훨씬 대담하고 예리한 독설로 상대를 깎아내렸다.

 

영화 '8 Mile'에서도, 지금까지 나온 여러 음반에서도, 그리고 이 책에서도 소름끼칠 정도로 지독한 독설은 끝없이 쏟아져 나온다. 그 독설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라도, 절대 권력을 쥐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초강대국 미국 대통령이라고 해도 그는 속된 말로 거침없이 씹는다. 그것도 그냥 씹는 것이 아니라 대단히 정교하고 막힘 없는 플로우(Flow)로 잘근잘근 씹어버린다. 그 플로우에는 마약, 동성애, 강간, 살인 따위 온갖 것이 담겨 있다. 그것들은 플로우에 담기는 순간 품격 높은 예술이 된다. 순수 예술가들이 발끈할지도 모르지만, 그는 분명히 예술이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라킴(Rakim), 투팍(Tupac), 비기 스몰즈(Biggie Smalls) 따위와 같은 유명인들처럼 말이다. 물 흐르듯 거침없는 플로우 위에 얻혀있는 섬뜩하게 귀를 파고드는 가사를 들어보라. 예술이 아니고 무엇인가? 

 

새로운 음반이 나올 때마다 안 그래도 평가가 극과 극을 오고 가는 에미넴이 갈수록 미쳐가는지, 아니면 갈수록 영리해지는 건지를 놓고 의견이 엇갈린다. 누구도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에미넴 자신도 정확한 평가를 내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가 느끼는 대로 말하고 싶은 대로 가사를 쓰고, 노래를 만들고, 그 노래를 묶어 음반을 내고, 공연을 하러 다닐 뿐이다. 무엇이든지 내키는 대로 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는 진정한 자유를 얻은 듯 하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에미넴이 다른 것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에미넴이 내뱉는 독설에도 분명한 깊이가 있지만, 나는 그것과는 다른 새로운 깊이를 찾고 있었다. 그저 즐기는데 만족하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힙합을 즐기는 내 친구 한 명도 힙합은 그저 즐기면 그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그저 열광할 때와는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나는 홍세화가 파리에서 만난 여자가 말한 랩을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미국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White America', 'Square Dance', 'Mosh' 같은 곡에 자꾸 끌린다. 이와 같은 곡을 더 많이 발표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요즘에 더욱 많이 한다. 지금까지 그가 내놓은 이 책을 포함한 수많은 성과에서 보여준 소름끼치는 독설을 미국 정부에 더욱 강하게 내뿜으면 좋겠다.

 

에미넴을 처음으로 안 뒤 어느덧 3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벌써 30대 중반인 에미넴이 마약에 찌들어 극도로 우울해하고 있다고 했다. 우울한 영웅 때문에 나도 우울해지는 것을 보면, 나도 흔히 말하는 '빠돌이'나 '빠순이'는 아니더라도 확실히 열렬한 신도(?)인 것은 확실하다. 다른 사람들이 보고 돈이 아깝다고 말하는 이 책이지만,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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