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만큼 자라는 아이들
박혜란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1996년 11월
평점 :
절판


다섯 살 때 동네 형님(?)들 따라서 전자 오락실에 가 봤다. 갤러그, 벽돌깨기, 카발 따위 고전 게임이 그 당시에는 버젓이 인기 있는 오락으로 오락실에 자리잡고 있었다. 조이스틱을 움직이고 단추를 누르면서 벽돌을 깨부수고 아가씨를 납치해 간 악마를 무찌르고, 똥파리를 몰살하는 그 기분은 그 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대학생이 된 뒤 오락실에 가서 오락을 해 봐도 옛날처럼 짜릿한 기분을 느끼기는 힘들었다. 그 정도로 나는 어릴 때 전자오락에 푹 빠졌다.
 

나는 그 재미에 푹 빠져 오락실에 더욱 자주 드나들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도 넉넉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집안 형편이 지금보다도 더욱 안 좋았고, 내가 아직 돈을 알아서 제대로 쓸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기에 어머니는 용돈을 주지 않으셨다.

 

그러자 나는 부모님 몰래 지갑이나 호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전자오락은 나에게 마약과도 같았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은 나한테 딱 들어맞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한 두 판 정도 할 수 있는 동전 한 두 개면 충분했지만, 나중에는 10000원 지폐도 서슴지 않고 빼냈으니까 말이다.

 

처음 발각된 뒤에 무척 많이 맞았다. 아예 못된 손버릇을 고쳐 놓으시려는 듯 했다. 그러나 나는 버릇을 고치지 않았고 속이 터지는 갈등을 10년 가까이 끌었다.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면서 쓸데 없는 일에만 온통 관심이 쏠려 있는 나를 믿어주실 까닭이 없었다. 부모님께서 나를 믿어주시기 시작한 때는, 내가 부끄러운 앞날을 청산하고 스스로 자기를 다잡기 시작한 때였다.

 

대학교에 들어온 뒤 나는 부모님에게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겠으며 만약 충돌이 생기면 얼렁뚱땅 덮기보다는 부모님을 설득하겠다는 원칙을 세웠다. 지금 내가 얻고 있는 신뢰는 그 원칙을 충실히 지킨 덕분에 얻은 듯 하다. 물론 엄마 친구 아들(!) 같은 사람은 되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 그러면서 나도 나름대로 효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책꽂이에 꽂아놓기만 하고 전혀 읽지 않았던 이 책을 우연히 발견하고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여기 나오는 아이들(?)과 견주어 볼 때 참 가족에게 무심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 엄마 친구 아들과 같은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여기에 나오는 작가들의 아들들이야말로 엄마 친구 아들이었다. 공부도 잘 햇고 적절한 때 어머니를 위로할 줄도 알았고 도대체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

 

그들이 그렇게 알아서 잘 큰 까닭은 어머니가 아들을 끝까지 믿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머니가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셨다면 과연 나는 지금과 같은 나름대로 올바른 길을 찾아갈 수 있었을까? 물론 역사(?)에는 가정법을 써서는 안 되지만, 만약 쓴다면 나는 그럴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다만 그거야 철저하게 자기 생각일 뿐이니 문제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여기에는 어떤 답이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가장 늦었다고 생각하는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도 있듯이 어떤 생각을 한 뒤부터라도 잘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지금까지는 그러지 못했지만 대학교에 들어와서나마 이 아들들처럼 되어 보겠다(!)고 이 책을 읽은 뒤 굳게 다짐했다. 그러나 아주 희귀한 몇 가지를 빼면 나에게 역시 생각은 생각일 뿐이었다. 지금까지 어떻게 달라지려고 한 일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만큼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매달리는 내 모습은 부모님에게 어떻게 보였을까. 어머니가 나중에 이 책과 같은 이야기를 쓰실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군대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이라도 부모님 기분이나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나한테는 지금까지는 아무 뜻이 없는 책이 되어버렸지만, 뜻이 생기도록 하고 나중에 나한테도 자식이 생기면 이 책을 쓴 사람이 강조하듯이 되도록 자식을 믿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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