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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식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평점 :
초자연, 초현실, 초감각……'초(超)'만큼 내가 신비로움을 느끼는 접두사도 드물다. 아마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럴지도 모른다. 사람은 많은 것을 할 수 있지만, 사실 할 수 없는 것이 훨씬 더 많다. 그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존재를 사람들은 생각하면서 신비로움을 느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생각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생각을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내려고 힘썼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지금과 같은 첨단 문명을 일굴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은 인류라는 개체군 전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각 개체에게도 적용된다. 그 정도야 사람마다 다르다. 나는 그런 것이 너무 심해서 탈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옛날에 공상 소설을 한참 쓸 때 가장 즐겨 쓰던 꾸밈씨(형용사)가 '상상을 초월하는'이었고, 요즘에도 내가 가장 즐겨쓰는 표현 가운데 한 가지가 '한계를 뛰어넘는'일 정도로 내 머릿속에는 '초(超)'라는 글자가 딱 박혀 있다. 만족을 모르는 내가 항상 외치는 것은 무엇이라도 극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생각보다 너무 어려워서 실망하는 일이 많았다.
과학 공부에 재미를 붙인 뒤, 나는 과학으로 설명, 극복,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없을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더욱 단단하게 굳히고 있었다. 자연 현상을 설명하고 문명을 건설하는 밑바탕이 된 과학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 아름다움에 푹 빠져 있던 나는 첨단 과학을 인정하지 않고 온갖 문제를 불러 일으키고 있는 종교를 당연히 거부했다. 그래서 과학이 이성을 거스르는 종교를 스스로 무릎 꿇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과학이 해결하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깨달았을 때, 내 실망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과학을 신처럼 섬기고 있던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고, '초과학'에서 그나마 안정을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공부를 더욱 많이 할수록 혼란은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커졌다. 무엇이 문제인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 했다.
그러다가 이 소설을 만났다. 글사랑 시삽 형님이 대단한 소설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셔서, 나는 한 번 읽어봐야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인터넷으로 돌아다니면서 얻은 정보는 이 소설에 대한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했다. 신인이 투고한 작품이 저명한 문예지인 '신조(新潮)'에 권두소설이 된 일은 지금까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대학생이 일본에서 가장 권위가 있는 문학상인 아쿠타카와 상을 받은 것은 무라카미 류 뒤를 이어 23년만이라고 한다. 이 말고도 그에게 쏟아지는 찬사는 일일이 다 말하기가 버거웠다.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사지 않고 시간이 좀 흘렀다. 그러다가 우연히 1학년 여름방학 때 이 책을 얻어서 읽어 봤다. 가톨릭 교리가 지배하는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은 '굉장히 깊다'는 것이었다. 교토대 법대생인 히라노 게이치로는 해박한 인문학 지식, 특히 종교에 관한 대단히 많은 지식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썼다. 그 지식이 의고체라는 문체 위에서 더욱 깊이를 더하고 있다고 하는데, 의고체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므로 그냥 넘겨야겠다.
사실 그 깊이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단순히 어렵기만 하다면 깊이라고 할 수 없다. 진정한 깊이는 마음을 울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을 내가 읽기 전에 우리나라에서 일본 사랑 소설이 유행해서 무라카미 하루키, 요시모토 바나나 따위 작가들이 쓴 소설이 많이 쏟아져 나왔다. 몇 권을 대충 훑어보기는 했는데, 파울로 코엘료가 쓴 소설과 마찬가지로 그 소설을 보고도 뚜렷하게 공감하지 못했다. 분명히 아름답기는 하지만 뭔가 빠진 듯 했다. 그 허전한 기분을 '일식'이라는 소설이 잘 달래준 셈이다.
도미니크 수도사이면서도 절대주의에 빠지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고자 이단 교리도 검토하는 주인공이 보여주는 관용과 성실성, 연금술사 피에르 뒤페가 보여주는 극한에 가까운 자기 절제 따위에서도 매우 큰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나를 가장 기쁘게 한 내용은 바로 소설 마지막에 등장하는 초자연 현상이었다. 안드로규노스를 기둥에 묶어놓고 불태우는 장면에서 일식(!)이 일어나고 그는 히에로스 가모스와 같은 느낌을 경험한다. 여기에서 다쿠보 히데오가 내놓은 심사평을 들어보도록 하자.
"기독교만이 아니라 종교는 육체와 영혼이라는 두 가지 국면에서 추구되곤 하지만, 이러한 이원론적인 택일로는 궁극의 초월성을 포착할 수 없다는 점을 이 작가는 알고 있다. 그 때문에 남녀의 육체를 상징적으로 결합시킨 존재를 화형에 처하는 광경에서, 일순 지고의 극치를 전개하여 보여주고 있다. 참으로 젊디젊은 야심과 힘이라 할 것이다."
이 심사평을 읽고 소설을 다 읽은 뒤 과학과 종교도 육체와 영혼과 같은 관계라는 결론이 나왔다. 과학과 종교는 인류 문명을 번영시키려고 함께 가야 한다. 서로 이야기하지 않고 대립하다가는 둘 다 인류 문명에 독이 된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까지 과학과 종교가 이야기하는 내용을 담은 책을 사서 읽는데 힘썼다. 이 소설에서 느낀 것을 나중에 댄 브라운이 쓴 '천사와 악마'를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정리할 수 있었다. 물론 독후감은 '천사와 악마'보다 훨씬 늦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매우 깊고 아름다운 소설이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