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처럼 생각하기
로버트 베이트먼 지음, 김연수 옮김 / 자유로운상상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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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하게 우파 지식 체계를 따르는 군대에서 실시하는 정훈교육을 상부에서 크게 만족할 정도로 소화해 놓고도, 사색을 더욱 많이 하고 책과 글에 더욱 열심히 파묻힐수록 나는 좌파에 더욱 이끌리고 있다. 객관을 가장해 자기가 주장하는 사상이 뿌리내린 근본에 대한 책임마저 피하려 한다는 비난까지 무릅쓰면서, 다치바나 다카시가 자기를 스스로 규정했듯이 철저하게 구경꾼으로 머무르려고 했지만, 공부가 깊어질수록 그러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심지어 마르크스가 제시한 사회 발전 5단계에서 마지막 단계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산주의 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을 내가 정확하게 예측하겠다고 마음먹기까지 했다. 러시아 혁명사에서 가장 어이없는 역설은, 혁명가들을 탄압하고자 로마노프 왕조가 만든 시베리아 형무소가 혁명가들을 더욱 단단하게 정련하는 용광로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라고 어느 책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내가 바로 그 역설을 증명하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으레 그렇듯이 나는 내가 왜 그렇게 변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렇게 길지는 않은 고민 끝에 나온 결론은 도무지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우파들이 주장하는 대로 세상이 계속 굴러간다면 인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멸망에 이르며, 그 참극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좌파들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는 것뿐이라는, 극단에 치우친 결론이 나왔다. 이는 어느 철학이든 사상이든 이론이든 각자 장점과 단점이 있으며, 그에 따라 항상 그 사실을 인정하고 객관과 중립을 지키려고 힘써야 하며, 오로지 그 안에 들어있는 비판 정신과 창조성만이 객관으로서 진정한 가치가 있다는 견해를 존중하던 나로서는,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 오로지 좌파만이 옳고 우파는 그르다는 식으로 한 쪽으로 완전히 기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 '산처럼 생각하기'를 읽으면서 나는 그런 생각에 회의를 느꼈다. 그리고 예전에 '백범일지' 독후감을 쓸 때 그토록 강조했던 모든 논리 아래 깔려 있는 기본 전제인 '삶'을 떠올렸다. 죽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아무 뜻도 없다. 오로지 살아있는 생명에게나 문명과 학문과 사상이 뜻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문명과 학문과 사상은 생명을 죽이는 길이 아닌 살리는 길을 닦아야 한다. 그 길은 지구를, 곧 자연을 보호하는 길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광기에 휩싸인 현대 문명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그 길을 만들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뉴턴 역학 덕분에 과학 혁명이 일어나면서 사람들은 종교에 억눌려 있던 이성을 새롭게 펼칠 역사에 한 획을 긋는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사람들은 자연이 돌아가는 이치를 하나 둘씩 알아내면서 자연에 경외감을 품기보다는, 기계론과 이성 우월주의에 근거하여 자연을 오로지 개발하고 정복할 대상으로만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는 수 백 년이 지난 뒤에야 엄청난 실수로 밝혀졌다.

 

자연과는 상극인 성질을 지닌 인류 문명이 발달할수록 자연은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아무리 이성이 발달했단 할지언정 결국 자연을 구성하는 한 생명체이며 그 안에서 삶을 보장받는 사람이, 자연을 그토록 심하게 파괴하면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이익을 주는 조직을 한 구성원이 망쳐버리면, 그 구성원이 그동안 보장받던 이익을 잃업버리는 건 당연하다. 자연과 인류가 그런 관계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그 이익이라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생명이라는 사실을 정말 모르는가?

 

이 책을 쓴 로버트 베이트먼은 자연을 담은 그림으로 온 세상에서 명성이 꽤 자자한 화가이다. 그는 이미 어릴 때 자연을 벗 삼아 함께 사는 길이야말로 자기가 걸어야 할 길이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는 자연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며 그림을 그렸고,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그 속에 담긴 진리를 수 십 해 동안 누구보다도 뚜렷하게 관찰하고 잘 이해했다. 문명이 주는 이기에만 찌든 현대인들에게서는 절대 볼 수 없는 탁월한 깨달음과 혜안이 이 책 전반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생물학을 전혀 공부하지 않았으면서도 자연과 생명이 돌아가는 이치를 훤히 꿰뚫고 있는 한평생 흙을 벗 삼아 농사를 지으며 굵은 땀방울을 흘리셨던 어르신들에게서 듣는 귀중한 말씀과 같다.

 

그가 강조하듯이 자연은 전혀 단순하지 않다. 온갖 다양한 존재를 속에 품고 있고, 그에 따라 별의별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든지 얽혀 있다. 그 얽는 방법도 천편일률처럼 단순하고 가짓수도 적은 것이 아니라, 전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무궁무진하다. 그 복잡성과 다양성 덕분에 자연은 어느 부분에 이상이 생겨도 별 탈이 없고, 그 부분도 다른 부분이 영향을 미쳐서 곧 다시 회복된다.

 

복잡성과 다양성이라는 본질을 지니는 자연은 인류 문명이 지닌 단순한 속성에는 절대 부합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 복잡한 자연에 부합하는 문명을 건설하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자연에 관하여 아는 것이 너무 없었고, 자연에 관한 지식이 쌓일수록 자연이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복잡하다는 사실이 더욱 뚜렷해지면서, 문명을 건설하고 관리하기에도 벅찬 인류에게 자연에 부합하는 문명은 절대 실현할 수 없는 터무니없는 망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망상을 쫓기에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대 과제가 너무나도 다급했다. 

 

수 천 년 동안 자연 속에서 모진 풍파를 견디며 진화한 끝에, 사람들은 험난한 자연 환경을 극복하고 문명을 건설하는 데는 일단 성공했다. 하지만 안정된 삶이 어느 정도 보장된 뒤에도 사람들은 자연과 어울리려고 힘쓸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자연에 관한 지식이 쌓일수록 기계론과 자연 정복설이 더욱 강한 힘을 얻었고, 사람들은 개발 지상주의에 따라 발길이 닿지 않은 자연으로 탐욕스러운 손길을 뻗었다. 오로지 인류가 지닌 이성으로 만들어낸 가장 영롱한 결정체인 문명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만이 가치가 있다는 주장이 갈수록 큰 힘을 얻었다. 문명은 자연과 본격으로 대립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문명을 더욱 정교하게 만들고자 자연을 거침없이 파괴했다.

 

파괴된 자연을 짓밟고 일어선 문명은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그럴듯해 보였다. 사람들은 충분히 똑똑했고 그 때문에 자연에서 자연을 긁어모으고 새로운 자원을 발견하여 이용하는 기술도 갈수록 발전하였기에, 문명은 계속 발전하여 그럴듯해 보이는 수준을 넘어 이제는 아주 세련되어 보이기까지 한다. 온 세상 사람들을 충분히 먹여 살리고도 남을 식량을 대량 생산 체제가 발달한 농업 기술로 생산해내며, 온갖 생필품과 편의 물품도 거뜬히 생산해낸다. 수 천 년 동안 발전하여 극도로 풍요로워진 인류 문명 안에서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부족한 것이 전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토록 풍요로운 문명 안에서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피폐해지고 고통스러워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온 세상 사람들을 충분히 먹여 살리고도 남을 식량이 쏟아져 나오면서도 굶어죽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물질이 풍요로워질수록 사람들은 가진 것이 줄어들었다는 이상한 공허감에 시달린다. 그 공허감을 채우고자 더 다양한 것들이 더욱 많이 생산되었고, 그 생산력을 뒷받침하고자 사람들은 더욱 자연을 많이 쥐어짜며 파괴했고, 아직 개발되지 않은 곳을 찾아서 눈에 화톳불도 모자라 아예 할로겐 등을 켰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들이 발악해도 물고기 숨을 죄어드는 촘촘한 그물처럼 현대 문명은 사정없이 사람들을 쥐어짰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거대한 역설에 희생당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수인 문명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그런 괴상한 일이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분명히 뭔가 잘못되고 있기는 한데,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불안에 만성으로 시달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현대 문명이 지닌 문제점이 무엇인지 나름대로 그 까닭을 제시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것은 자본주의, 특히 신자유주의 비판이다.

 

이미 신자유주의에 관한 비판은 지겹도록 교양을 듣고 사람들과 토론을 벌이고 몇 번이고 여러 글에 그 내용을 썼기 때문에, 여기에서 굳이 자세하게 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책에서 작가가 쓴 신자유주의가 낳은 폐해와 그 때문에 벌어지는 이상한 현상을 읽어보는 것만 해도, 신자유주의와 그를 뒷받침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 구조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오로지 효율과 경쟁만 생각하는 이들은 무조건 큰 것을 원하고, 그 때문에 모든 생산 활동은 거대한 자본과 시설에 의존하도록 구조가 개편된다. 그 구조 속에서 나오는 '미친(!)' 현상들은 인류 문명이 자연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너무나 심각한 피해를 입힌다.

 

'미친'이라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는 지적이 뒤따를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이 책에서 '미친'이라는 표현을 떳떳하게 썼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자연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사랑하는 이로서,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뿐어내는 광기를 두 눈 뜨고 똑똑히 목격했기에 당연한 일이다. 이 책에 나오는 온갖 이야기, 이미 공급이 넘쳐나는데도 농장을 버젓이 개간해 모든 것을 망쳐버리는 개발지상주의에 따른 대규모 집단 농업, 정부에게서 막대한 자금을 지원받아 철없는 어린이들처럼 건설 기계와 전기톱을 장난감처럼 여기는 벌목 회사, 바다 속을 모조리 긁어서 고기뿐만 아니라 다른 생물들까지 깡그리 잡아 몰살시켜버리는 초대형 저인망 어선 군단, 전쟁을 일으키기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기에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상에 분쟁을 일으키는 군산복합체와 그를 지원하고 이용하는 강대국 정부들, 개발도상국을 지원한다는 명목 아래 엄청난 돈을 빌려주고 가난한 서민들을 거대 산업체 안에 몰아넣어 비정규직 노동자와 같은 처참한 신세로 만들어 버리는 국제 금융 기관 따위는 사람과 자연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문명이 낳은 괴물들이다. 그는 이런 '미친' 현상을 나지막하지만 강하게 비판한다. 어조가 격렬하지는 않지만, 그 속에 매우 강한 힘이 있다. 부드럽게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힘차게 뛰는 강력한 운동 기관을 보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로버트 베이트먼을 공산주의 혁명 운동가로 착각하면 안 된다. 그는 새우 요리를 좋아하고, 자동차와 비행기를 타고 다니며, 현대 문명이 선사(?)하는 모든 이기를 누린다. 하지만 그 혜택 때문에 자연이 얼마나 큰 시련에 처해 있는지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기에, 그는 자연이 받는 피해를 그만큼 줄이면서도 현대 문명을 유지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곧 '자연에 적합하고 지속할 수 있는 발전(ESSD : Environmentally Suitable and Sustainable Development)'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새우와 같은 해산물을 잡을 때 바다 생태계를 송두리째 파괴할 수 있는 대형 저인망 어선 대신 낚시나 소형 어선을 권장하고, 바이오디젤과 같은 친환경 자동차 연료를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현대 문명은 자연과 더불어 발전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런 방법은 인류가 수 천 년 동안 진화하면서 자연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이미 터득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잘못된 사상과 관념에 문명이 이끌리기 시작하면서 그 방법을 잊어버렸을 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작가가 주장하는 것은 이미 정도를 넘어서서 이제는 자기뿐만 아니라 온 인류를 멸망으로 몰아넣으려고 폭주하는 자본주의에 제동을 거는 것이다. 천민자본주의와 같은 말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사람들을 천박하게 만드는 신자유주의는 광풍에 휩싸인 현대 문명이 낳는 사상은, 더욱 풍요로운 물질과 기술이 많아지는 사회에서 더 많은 이들이 절대 극복할 수 없는 모순 구조 속에서 살벌한 경쟁에 시달리다가 피혜해지고 죽어가는 역설이 당연한 것처럼 뒷받침하는 미친 논리일 뿐이다. 이런 논리를 우파들은 대개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좌파들이 절대 거기에 동의하지 않고 싸우고 있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좌파들에게 끌리지 않을 수가 있으랴.

 

놀랍게도 이 책에서 저자는 내가 예전에 학생회와 문예패에서 활동하면서 만난 사람들이 가르친 것들과, 그들과 나눈 모든 이야기 속에서 드러난 그들이 지닌 사상과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한 해 넘게 시간을 보내면서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들을 모질게 비판하여 차마 상처를 입히고 싶지 않다. 하지만 학문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한 사람이라면 그런 정이 학문을 그르치도록 내버려 두면 안 된다.

 

열병과도 같은 그 갈등 때문에 끙끙 앓다가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나마 많이 나아질 수 있었다. 적어도 사회주의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만큼은 확고히 다질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나에게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이들과 항상 의견 차이로 날카롭게 대립해야 할 필요가 매우 줄어들었다는 사실도 매우 좋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말하는 것들 안에 결국 자연을 살리고 인류를 살리는 길이 들어있다는 깨달음은, 정말 눈물을 흘릴 만큼 가장 기쁜 것이다.

 

솔직히 이건 매우 우스운 일이다. 내가 하는 이런 생각을 하찮게 여기는 이들은 맹렬하게 나를 비난할 것이다. 현실을 제대로 모르는 어줍잖은 인간답게 좌파를 지지하는 까닭도 이성을 따르지 않는다고 말이다. 하지만 피도 눈물도 없이 개발과 진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자연과 사람을 죽음으로 내모는 끔찍한 문명과 그를 뒷받침하는 잔인한 논리만을 찬양하는 이들은 싫다. 자연과 사람을 살리는 문명을 건설하는 방법을 찾아나서는 가슴이 따뜻한 사람들이 좋다. 때로는 이성이 터무니없는 결론을 내릴 때도 있으며,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직관이나 감정에 따른 판단이 옳을 때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작가가 현대 문명을 비판한다고 해서 사람이 문명 자체를 포기하고 원시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절대 아니다. '산처럼 생각하기'라는 제목을 아무 뜻도 없이 괜히 붙인 것이 아니다. 인자한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만큼 산이 지니고 있는 그 풍요로움이 인자함을 잘 보여준다는 뜻일 것이다. 산은 아무 말 없이 자기 안에 모든 생명을 넉넉하게 품고 있다. 그 안에서 모든 생명은 스스로 조화와 질서를 이루며 살아간다. 그 조화와 질서는 인류가 만들어낸 것과는 질이 근본으로 다르다. 모든 것이 순환하며 다른 것들에 피해를 주지 않는다.

 

지구에서 이성을 지닌 단 하나뿐인 존재인 인류는 그 사실을 강조하면서 으스대지만, 인류가 그동안 저지른 일을 돌이켜 보면 내가 사람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워서 미칠 지경이다. 그렇게 복잡하면서도 아무 탈 없이 잘 돌아가는 자연보다 인류 문명이 나은 것이 과연 무엇이 있는가? 자연과 상극인 문명을 찬양하는 이들이 자연 법칙을 인류 사회에 적용해 '사회진화론'이나 '약육강식' 따위 논리를 들이대는 자체가 웃긴 일이다. 그토록 자랑스러운 이성으로 지금까지 사람 잡는 세상을 만들었으니,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 잘못한 것을 바로잡고 사람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는 조화로운 문명을 건설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결코 사회주의를 포기할 수 없다. 완벽한 사회주의는 그야말로 이상일 뿐이라는 사실은 자명하지만, 사회주의를 이루는 그 숭고한 인류애와 사회 정의만큼은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자연과 인류가 함께 사는 길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것은, 이 책을 보면서 적어도 어느 정도는 저절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다 읽은 뒤에 이 글 마지막 부분을 쓰느라 고심하다가 든 엉뚱한 생각이 있다. 이 책은 진중문고로 발간된 책인데, 모든 진중문고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들어 있다.

 

 

'본 진중문고는 장병 정신교육 효과 증진 및 정서 함양 그리고 건전한 민주시민으로서의 기본 소양을 구비하는데 기여하기 위하여 국방부에서 배부하는 도서임'

 

 

이 책은 단순히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자는 초등학생들 수준인 논리에서 만족하지 못한 이들이, 스무 해 넘게 나이를 먹고 그때까지 온갖 교육을 받으며 자란만큼 좀 더 깊이 생각한다면 정신교육에는 매우 해로운 책일 수도 있는데, 어쩌다가 진중문고로 선정되었을까? 이 책을 읽고 감동받은 이들이 과연 정훈교육에서 강조하는 대로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한미동맹을 더욱 굳건하게 하고 한국 경제가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자연을 생각하는 길과 사회주의가 지닌 이상을 연결해서 생각하지 못하는 한계라고 보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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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소박하게
린다 브린 피어스 지음, 이순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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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선(禪)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두 수도승이 서로 자기 스승이 더 도통했다고 다투는 이야기가 있다(이 책 '조금 소박하게(원제 Choosing Simplicity - Real People Finding Peace and Fullfilment in a Complex World)' 추천사에도 나온다). 한 수도승이 자기 스승은 도통했기 때문에 강 한쪽 둑에 앉아 맞은편 모래에 이름을 쓸 수 있다고 자랑했다. 그러자 다른 수도승은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 한 마디로 다툼에서 이겼다.
 

"그런 건 아무 것도 아니야. 내 스승은 배고프면 잡수시고, 피곤하면 주무시는 분이셔."

 

위 이야기에 나오는 스승처럼 도통한 사람이 요즘 세상에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스승이 사는 방식을 바꾸어 말하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는 뜻이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산다고 해서, 무법천지에 딱 어울리는 망나니나 자기가 지닌 부와 권력을 믿고 제멋대로 행동하여 주위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상류층을 연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내가 말하려는 삶은 그런 삶이 아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가치가 있으며 자기가 지닌 특성을 얼마나 정확하고 반영하고 있는지도 명확하게 깨닫고, 그에 따라 꾸준히 그 방식을 실천하여 참된 자유를 얻은 풍요로운 삶을 뜻한다. 곧 자기인식에 이르는 길을 꾸준히 걸어온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삶이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사람들이 진정한 자기인식에 이르도록 절대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씌운 굴레에서 벗어나는 이들이 늘어날수록, 생산과 소비가 끝없이 반복되면서 돌아가는 동력원을 유지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기존 시장이 한계에 이르면 새로운 시장을 찾아나서는데, 그 새로운 시장이라는 거시 결국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서 삶이 지니고 있는 모든 측면을 시장에서 거래할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들려고 한다. 현실을 생각해 보자. 지금까지 시장 개척 • 경영 • 유지에 관한 경영학 이론이 얼마나 많이 쏟아져 나왔는가? 그 때문에 우리 삶 속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자본에 종속되어 버렸는가?

 

자본주의에게 만족이란 없다.  사람들이 지닌 거의 모든 것을 자본으로 거래할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들어 사람들을 자본에 끌려 다니는 노예로 만들어 놓고도, 여전히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고 끝없이 발악하며 사람들이 지닌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것들마저 빼앗아가려고 한다. 데메테르에게서 절대 배고픔에서 헤어날 수 없도록 저주를 받은 에뤼시크톤이 자기 집을 뒤덮을 정도로 산더미처럼 음식을 차려놓고 닥치는 대로 집어삼키면서도 하인들에게 음식을 더 차려오라고 악을 쓰는 것과 같다.

 

자본주의와 문명은 반드시 함께 발달해야 한다는 논리로 비판을 잠재운 뒤, 문명이 발달해야 궁극으로 인류 복지가 증진된다는 정말 그럴 듯한 논리로 사람들을 생산과 소비라는 두 축으로 이루어진 동력원에 몰아넣었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나타나는 온갖 새로운 것들을 닥치는 대로 이용하여, 사람들이 자기들이 덫에 걸렸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위장했다. 그 위장은 그람시가 밝힌 노동자들이 자기가 착취당하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까닭만큼이나 성기지 않고 치밀하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자본과 연관지어버리는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괴물 앞에서 개개인은 너무 나약하다. 이 책에서도 지적하듯이 우리는 더 많은 부와 명예와 권력을 얻으려는 강제에 가까운 앞에서 말한 그 정교한 덫에 걸려 있다. 그 덫에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품은 온갖 욕망이 덕지덕지 붙어서 서로 뒤엉켜 추하기 짝이 없다.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대로 더 많은 생산품을 내놓고자, 항상 생산성과 효율성을 올리는 방안을 연구하며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일에 파묻으려고 한다. 과연 그것이 자기가 정말 원하는 일인지도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말이다.

 

물론 자본주의가 사람들에게서 단물만 쪽쪽 빨아먹은 뒤 내팽겨쳐버린 건 아니다. 생산이 늘어난 만큼 그 풍요로움이 사람들에게 분명히 돌아왔다. 문제는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성립하는 '적대적 의존 관계'가 자본주의와 사람들 사이에서도 몇 가지 사소한 차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분명히 비슷하게 성립한다는 것이다. 풍요로운 물질에 관하여 생각해 볼 자유마저 자본주의는 주지 않았다. 생산과 절대 뗄 수 없는 관계인 소비로써 그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는 사회 구조를 만들었다. 많이 생산한 만큼 많이 소비해야 자본주의도 계속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산을 늘리고자 자본주의는 사람들이 지닌 거의 모든 것을 자본으로 거래할 수 있는 상품으로 끊임없이 만들었고, 그에 따라 사람들은 돈 없이는 사회에서 살기가 갈수록 어려워졌다. 삶에서 매우 사소한 것들마저 물질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 사랑이나 우정 같은 정신 가치도 자본에 얽매이게 되었다.

 

요즘에는 돈이 없으면 아무 것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 사람들 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나온다. 나는 그 때문에 이 자본주의 사회에 크다 못해 극렬하기까지 한 불만을 품고 있다. 이 사회가 쳐놓은 덫에 내 주위 사람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나도 걸려서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이 너무 역겹고 짜증나서 견딜 수가 없다. 무슨 일만 있으면 돈을 넉넉하게 들여야 하는데, 그러지 않을 수는 없는 걸까? 굳이 어떤 기념일이라고 해서 근사한 연회장에 가서 돈을 펑펑 써가며 성대하게 잔치를 열고 값비싼 선물을 해야 하는 걸까? 그냥 따뜻한 말 한 마디와 보듬어 안아주기, 또는 공들여 쓴 편지로 만족할 수는 없는 걸까? 값싼 요리와 소박한 술상만으로도 특별한 날을 기리며 행복을 누릴 수는 없는가? 돈 없이도 만나서 서로 즐겁게 시간을 보내며 사랑하고 아낀다는 것을 확인할 수는 없는 걸까?

 

사람들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열심히 많은 일을 해내지만, 그럴수록 자기에게 돌아가는 시간은 차츰 줄어든다. 진정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깨닫지 못하고 일에 파묻혀 사는 사람들도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무언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도 제법 많지만, 거기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 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자본주의가 쳐 놓은 왕성한 생산과 소비가 가장 아름다운 덕목이라는 무시무시한 논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풍토에, 사람들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이 빠져 있어서,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나기가 너무 어렵다.

 

결국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자본주의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대로 자기 삶을 조직하고 온 힘을 다 쏟으며, 진정한 자기를 말살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그 속에서 자기인식이란 없으며 정신이 물질에 종속되어 황폐해진다. 현대 사회가 지니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판단할 능력마저 잃어버린 이들은 자본주의를 살찌우는데 온몸을 바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본주의 때문에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논리를 더욱 정교하게 하는데 적극으로 앞장서기도 한다. 이런 이들이 사회에서 대단히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자본주의 물질문명이 사람들에게 떠맡기는 폐해, 곧 끝없는 생산과 소비 속에서 몸은 몸대로 축나고 소비 욕구는 밑도 끝도 없이 커져 결국 불만으로 가득 차 버리는 비극에서 벗어나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며 만족하는 이들을, 이 괴물 같은 자본주의 사회가 바람직하다고 인정해 주는가? 검소한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자기들이 사는 방식을 자랑스럽게 내세우지 않으며, 언론에서도 그들을 조명해 주지 않는다. 생산과 소비를 자기에게 알맞게 통제할 줄 아는 사람들은 대단하다고 칭찬을 받기는커녕 사회에서 교묘하게 따돌림을 당한다. 자본주의에 익숙해진 사람들과 맺은 관계에서 벗어나면서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이상한 인식이 퍼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에서 엄청난 부를 거머쥐어 무엇이든지 누릴 수 있거나, 자본주의 물질문명이 선사하는 안락함에 너무 깊이 물들어 버려 거기에서 헤어 나올 줄 모르는 사람들을 뺀 모든 이들은, 무언가 더 나은 삶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리고 지치고 피곤한 삶 속에서도 다른 일을 할 시간과 힘과 의욕이 약간이라도 남아있는 이들은 그 삶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우리는 물질이 주는 안락함에 길들어져 그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가 정말 바라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는 사실도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평화로운 마음을 유지하면서도 무슨 일이든지 성취하고 싶어한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치고 괴로워하는 현대인들이 지니고 있는 흥미로운 모순이다. 330여 쪽에 달하는 꽤 두툼한 이 책에 저자는 이 두 가지 모순을 푸는데 도움이 되는 내용을 풍성하게 담아놓았다.

 

작가 자신도 한 때 매우 잘 나가는 논리정연하고 의욕이 넘치는 변호사였다. 그러나 그 직업은 지갑을 두둑하게 하고 자부심을 높이는 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뭔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은 없애주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자는 끝없이 이어지는 일과 그에 따른 복잡하고 번거로운 삶이 아닌 단순한 삶에 매력을 느끼고, 변호사라는 직업을 미련 없이 버렸다. 그 뒤 3년 동안 미국 전역에서 211명이나 되는 다양한 직종을 지닌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을 취재하여 이 책을 펴냈다.

 

이 책에 나오는 이들은 정신없이 일에 치여 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물질이 부족해서 숱한 어려움을 겪으며 한탄하지도 않는다.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으며, 그 일을 찾아낸 뒤에는 삶에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집중하여 결코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는다. 시간을 어떻게든지 아끼려고 발버둥치는 이들보다도 훨씬 많은 시간을 지니고 있으며, 그 시간 속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많은 일을 해낸다. 자본주의 물질문명에 포로가 되어버린 이들이 쉽게 잃어버리는 정신 차원에서 느낄 수 있는 온갖 행복을 발견하고, 사람들이 따르는 기준이 아닌 자기만의 독특한 기준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한다. 일과 여가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기에 마음은 평화롭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느끼는 행복에 흠뻑 취해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다. 그 속에서 온갖 깨달음을 얻어 행동거지를 올바르게 하고, 자기가 하는 모든 행동이 이웃과 자연에 도움이 되도록 한다. 도움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피해는 주지 않는다.

 

과연 이들은 어떻게 이런 놀라울 정도로 이상에 가까운 삶을 이루어 냈을까? 저자가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이와 같은 단순하고 검소하게 사는 방식을 찾아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오랫동안 철저하게 알아내야 하며, 그에 따라 이 복잡한 사회에서 온갖 변수를 고려하여 쉽지 않은 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일했던 직장을 그만둬야 하고, 사랑하는 친구들과 동료들과도 헤어져야 하며, 때로는 참기 힘든 가난도 견뎡댜 한다. 자기가 생각했던 것이 옳은지도 끝없이 고민해야 하며, 때로는 자기가 좋았던 것이 틀렸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미덕으로 생각하는 삶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그렇기에 이 책에 소개된 사람들은 매우 용감한 사람들이다. 이 책에 소개된 것처럼 건전한 사고방식으로 이상에 가까운 삶을 가꾸려고 행동하기 전에, 일단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들여 자기를 성찰하고 고민했다. 그러면서 자기가 떠나는 길이 옳다고 뒷받침할 수 잇는 논리를 개발해야 했다. 그들이 이미 잘 알려진 세계를 버리고, 더 나은 앞날을 찾고자 알려지지 않은 세계로 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까닭은 겁이 없는 것이 아니라 겁이 나도 발걸음을 떼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확고한 믿음을 오랜 성찰로서 마련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일단 길을 떠났다고 해서 모든 일이 잘 풀린 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길에 들어서 갈팡질팡하기도 하고, 뜻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아 계속 상처만 입으면서 절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시련마저 기꺼이 견디면서 그들은 꿋꿋하게 길을 걸었고, 길이 없으면 다른 길을 찾거나 아예 새 길을 만들었다. 이상은 거저 도착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이 증명했다. 그리고 이상을 실현하면 얼마다 큰 행복이 찾아오는지도 분명히 보여주었다.

 

현대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어가는 삶이라고 하면,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거대한 도시 안에서 버스와 택시를 타고 틈만 나면 시계를 쳐다보면서 햄버거 따위 패스트푸드로 끼니를 때우고, 매우 정신없이 일하고 움직이는 양복 입은 사람들을 대개 떠올린다. 그래서 이 책에서도 지적했듯이 단순한 삶이라고 하면 무조건 도시에서 벗어나 시골이나 바닷가 같은 자연 속으로 들어가 소박한 집을 짓고, 땅을 갈고 우물을 파서 먹고 마시고, 향기로운 차 한 잔을 즐기며 시를 쓰고 읖조리며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삶이라는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고, 이 책을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일 뿐이다. 단순한 삶을 지극히 주관에 따르는 삶이며, 어디에서든지 어떻게든지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알맞게 이룰 수 있다. 심지어 자본주의에 철저하게 얽매인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단순한 삶을 살 수 있다.

 

어떤 이들은 도시에 환멸을 느끼고 전원으로 들어가 농장을 일구고 단풍 시럽을 만들며, 어떤 사람들은 근교에 정착해 도시와 시골을 오가며 양쪽이 지닌 장점만 누리려고 힘쓴다.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자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들도 학교에 보내지 않으며, 자연 속에서 스스로 배우고 깨닫도록 하며, 부족한 것들은 자기가 가르쳐 주는 사람들도 있다. 온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명상과 수행과 봉사 활동에 몰두하는 이들도 있으며, 자기가 하는 일을 마치 놀이처럼 즐기면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와 그 상징인 거대한 도시에 철저하게 적응해 즐겁게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 말고도 큰 감동과 가르침을 주는 수많은 아름다운 사례들이 이 책에 깔끔하게 담겨 있다. 읽다 보면 마음이 저절로 편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때로는 수다스러운 이웃집 아줌마처럼, 때로는 당당하고 자신감으로 가득한 청년처럼, 때로는 세상 모든 이치를 깨달은 것처럼 다정하면서도 위엄이 넘치는 노인처럼, 단순하고 소박한 삶 속에서 물질로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안식과 행복을 얻은 여러 사람들은 저자에게 그 사실을 거침없이 털어놓았다. 자기를 인식할수록 자기가 아는 것이 너무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하고 자기에게 화를 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덕분에 그렇게 보잘것없는 자기가 그 어려운 과정을 거쳐 지금과 같이 만족스러운 삶을 꾸려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지니고 더욱 당당해질 수 있었다. 그 자부심을 저자는 이 책에 여과 없이 그대로 옮기는데 성공했다. 그 자부심은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큰 감동과 뿌듯함을 준다. 그 자부심으로 가꿔나가는 삶은 자아와 인류와 자연에 해를 끼치지 않고 언제나 크나큰 도움이 되는 참된 가치로 가득한 삶이다. 

 

결국 그런 삶이 가져다주는 가장 큰 가치이며 동시에 그런 삶을 가꿔나가는 방법이기도 한 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우리에게 씌운 굴레를 벗어던지는 것, 곧 물질이 주는 한순간뿐인 안락함에서 벗어나 정신을 풍요롭게 가꾸는 일이다. 물질은 우리 삶을 꾸려나가는데 필요조건은 될 수 있을지언정 충분조건은 되지 않는다. 정신을 올바르게 다듬는 것이야말로 정말 가치 있는 일로 가득한삶을 가꿔나가는 필요조건이다. 자본주의가 만든 물질이 주는 안락함이라는 강한 유혹과도 같은 덫에서 벗어나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분수에 맞게 삶을 꾸려나갈 줄 아는 건전한 사고방식을 지니면, 그동안 자기가 얼마나 많은 헛된 것에 오랫동안 집착하고 있었는지 저절로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수많은 가치에 눈을 뜨고, 그에 따라 정원사가 가지치기를 하듯이 삶에서 가치 없는 부분을 없애버리면 남아있는 것들이 더욱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거기에서 예전과는 견줄 수도 없을 정도로 큰 행복과 만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책이 말하는 단순한 삶이라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느 정도 충분한 부를 거머쥔 여유로운 사람들만이 찾아 나설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가 취재한 사람들 대부분은 고소득층에 속하지 않는다.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보통 사람들과 다른 점이라면, 단지 그런 삶을 이루고자 자기가 그동안 살았던 삶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아내려고 계속 고민하고, 그에 따라 조금씩 꾸준히 생각과 삶을 바꿔나갔다는 것이다.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기초 여건만 갖추고 잇는 사람에게나, 돈이 넘쳐나 어디에 써야 할 지 모르는 사람들에게나 단순한 삶을 이루는데 지켜야 할 원칙은 똑같다. 자기를 정확하게 알고, 온전히 깨달은 자기 모습을 제대로 반영하여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며 살 수 있도록 삶을 새롭게 조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삶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런 삶으로써 자기 영혼을 고양하고 더욱 깊은 자기인식에 이르며 인류와 자연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최종 목적이 되어야 한다.

 

이 책은 자본주의 자체를 비판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자본주의 때문에 생기는 폐해에서 벗어나는 것이 단순한 삶을 이루는데 반드시 필요하다는 결론 때문에, 나는 서문에서 그토록 자본주의를 맹렬하게 공격했다. 물질이 주는 안락함으로 사람들을 유혹한 뒤 그 안에서 끝없는 생산과 소비와 경쟁을 강요하며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자본주의 때문에, 문명과 인류는 결국 파국으로 치닫을 것처럼 보인다. 그 파국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나는 이 책에서 발견했다.

 

이 책에서 나오는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일단 기본으로 끝없이 늘어나고 있는 생산량과 소비량이 줄어들 것이다. 그러면 엄청난 자원을 아끼고 매일 쏟아지는 무지막지하게 많은 쓰레기도 줄여, 자연에 끼치는 엄청난 피해부터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수준으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때문에 나타난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시도 또는 그 시도를 넘어 제도 자체를 바꾸려는 혁신 운동도 더욱 활발해질 것이다. 그에 따라 광기에 휩싸인 자본주의가 폭주를 멈출 확률도 높아질 것이다.

 

그 혁명은 러시아 혁명처럼 떠들썩하게 세상을 뒤흔들다가 실패로 끝나서는 안 된다. 조용히 이루어져서 세상을 근본에서부터 천천히 바꿔 정말 완벽하게 성공해야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는 참된 가치를 좇는 삶을 사는 것은 자기뿐만 아니라 결국 온 세상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바란다. 사람이 모여야 세상이 되지, 세상이 있어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책을 덮으며 항상 엄격한 절제에 따르며 분수를 지키는 검소한 삶을 강조하셨던 부모님을 떠올려 본다. 예전에는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부모님을 존경하려고 애써볼수록 내 부모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 증명하는 사실이 계속 드러난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나는 부모님을 떠올리며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내 부모님도 이 책에 나올 자격이 있는 분이셨다. 나는 과연 부모님과 이 책이 가르쳐 준 진리를 얼마나 깊이 되새기고 실천하고 있는가? 완전한 자아인식에 이르는 그날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도 내 부모님과 이 책에 나오는 이들처럼 그런 삶을 찾아 계속 걸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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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찾아 떠난 여행
엔리케 바리오스 지음, 황성식 옮김 / 나무심는사람(이레) / 1999년 11월
평점 :
절판


오랫동안 나는 인류 문명에 어딘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면서,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는 욕구도 더욱 뚜렷해졌다. 하지만 문명이 갈수록 복잡해지면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갈수록 복잡하게 얽히고 있으며, 그에 따라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것이 왜 일어났는지 알아내기도 더욱 어려워졌다. 그런 현실 때문에 내가 아는 것이 얼마나 부족한지 몇 번이고 몇 십 번이고 몇 백 번이고 거듭 깨달으면서 한숨을 쉬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와 같은 생각을 해 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문제가 무엇인지는 누구나 공감할 만한 결론이 나오지 않고 있다. 그렇기에 세상이 이토록 혼란스러운 것이리라. 인류 문명이이 지니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밝혀내고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백가쟁명이라는 고사성어로도 부족할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대자연 앞에 아무 것도 없이 알몸뚱이로 놓였을 때 그 어떤 생물보다 연약하기 짝이 없는 인류는, 문명을 건설하여 험한 자연을 자기들이 살기 좋게 바꿔놓았다. 하지만 문명이 더욱 발전할수록 자연은 더욱 심각하게 파괴되었고, 사람들은 자기들이 이성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일을 수도 없이 저질렀다. 자기 보금자리를 스스로 파괴하는 얼간이가 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문명이 돌아가고 발전하는 이치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는 지식인들이 이 세상에 수없이 많은데, 왜 완벽한 평화와 영원한 번영이 오지 않는가? 오히려 그들이 지니고 있는 지식이 핵무기 같은 무서운 재앙으로 돌변하여 문명과 인간 사회에 심대한 피해를 입히기도 하지 않았는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설득의 심리학'을 쓴 로버트 치알디니는, 사람들이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사람들은 단순한 근거에 따라 판단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는 요즘과 같은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매우 좋지 않다. 예전과 다르게 인류가 세상에서 살면서 어떤 판단을 내리는데 기본으로 필요한 지식이 매우 많아져서, 사소한 한두 가지 정보를 놓치는 것만으로도 완전히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말도 분명히 일리가 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이 그렇게 단순하게 판단하기 쉬운 경향을 보이면서도, 정작 단순하게 판단해야 할 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인류가 지금까지 지구에서 문명을 이루고 유지하는데 엄청나게 중요한 구실을 했던, 사랑과 믿음과 존중 같은 보편 가치는 갈수록 심하게 빛이 바래고 있다. 그런 것은 지식과 정보로 사람들이 일부러 공부해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굳이 애써 설명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서로 돕는 사람 사는 세상에 살면서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그렇게 이해한 사람은 이해한 바를 실천으로 옮기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문명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명이 갈수록 복잡해지고 그 속력도 빨라지면서 문명을 유지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과 정보가 예전과는 견줄 수도 없을 정도로 빨리 늘어나기 시작했다. 인류는 문명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으므로 어쩔 수 없이 그 정보와 지식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고, 그 모든 것을 공부하는데 더욱 많은 힘을 쏟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지식과 정보가 문명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인류를 화합하는데 쓰이는 수단이라기보다, 생존 경쟁에 필요한 도구로서 지니는 가치만 인정받는 경향이 갈수록 뚜렷해졌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오로지 경쟁자를 무찌르고 살아남는 것만이 가장 훌륭한 가치로 인정받는다. 그런 풍토에서 자라나는 문명은 인류애 같은 보편 가치에서 우러나오는 힘(Power)이 아닌, 상처와 억압과 절망 따위에서 나와 상대를 해치려고 하는 억지로 이루어진 힘(Force : 이하 억지력)을 지닌다.

 

그 억지력을 키우고 살아남고자(?) 사람들은 계속 지식과 정보를 생산하고 소비했고, 그러면서 문명이 더욱 굳건해져 인류에게 더욱 많은 번영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지식과 정보가 생산하는 물질과 부 덕분에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지만, 정작 그것을 얻고자 사람들은 끝도 없는 잔인한 경쟁에 한평생 시달리게 되었다. 사람을 살리는 문명이 아니라 사람을 가둬놓고 죽이는 문명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속에서 지식과 정보는 더는 인격과 애정을 뜻하지 않는다. 인류를 수십 번이고 얼마든지 멸망시킬 수 있는 무기가 이 지구에 있으며, 누구를 어떻게 사랑하고 감싸안아줄 것인지 고민하는 이는 그토록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찾기가 힘들다. 그토록 사람 사이 관계가 살벌해진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인류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보편 가치를 더는 자연스레 몸에 익힐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은 오늘도 어떻게든지 남을 물리치고 내가 살아남고자 어떤 것을 공부하여 자기를 개발할 지 고민한다. 흔히 부모님들이 자식에게 많이 하는 말 가운데 '공부해서 남 주나'라는 말이 있다. 그 속에는 생존경쟁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처한 끔찍한 현실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이들을 이 책에 나오는 두 주인공 가운데 하나인 아미(Ami)는 진보지수가 너무 낮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치켜세우는 이들 대부분이 지식과 정보로 이루어진 억지력으로 무장하고 있기에, 결국은 인류 전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이들이라는 뜻이다. 나중에 인류가 쌓아올린 문명이 결국 스스로 무너질 때, 진보지수가 적어도 700이 넘는 사람들만 외계인들이 구해 사랑과 존중 같은 진정한 힘으로 이루어진 문명을 건설할 기회를 다시 준다고 한다. 지금까지 지구에서는 현생 인류가 건설한 문명보다도 훨씬 발달한 문명이 몇 번이고 나타났지만, 모두 사랑이라는 보편 진리를 무시하고 스스로 진보지수를 깎아내리며 서로를 죽였기에(!) 모두 멸망해 버렸고, 그 속에서 진보지수가 높아 선택받은 이들은 우루 여러 곳에서 새로운 문명을 건설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진보지수가 10000이 넘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 지니는 모든 한계를 뛰어넘어 오로지 사랑과 순수만으로 이루어진 초자연 존재라고 봐도 좋은 이들로서, 이들은 환경에 제약을 받지 않고 어디에서든지 살 수 있다고 한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대부분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읽거나 들으면 코웃음을 칠 것이다. 얼핏 보기에도 황당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순수한 상상으로만 내용이 이루어진 그야말로 동화로밖에 볼 수 없는 이 동화 '별을 찾아 떠난 여행'에 나오는 말이다. 이 책은 출판사에서 여러 번 퇴짜를 맞는 고난을 거듭한 끝에, 일단 출판되자마자 중남미에서 매우 크게 뜨기 시작한 뒤, 지금까지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베스트셀러'와 '스테디셀러'라는 말에 너무 익숙한데다가, 중남미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중동이나 아프리카만큼이나 생소한 곳이기에, 이 동화가 지니는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그다지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기독교도가 유난히 많은 나라 가운데 하나인 우리나라이기에 이 한 마디면 충분할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가 읽고 극찬하며 저자인 엔리케 바리오스에게 축복을 내렸을 정도로, 이 동화는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인정받았다. 도대체 그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주인공 뻬드로는 바닷가를 거닐다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미확인 비행물체(UFO)를 본다. 그 물체는 엄청나게 밝은 빛을 내면서 바다로 곧장 떨어진다. 그 안에는 한 아이가 타고 있었는데, 뻬드로에게 다가온 그 아이는 뻬드로가 전혀 믿을 수 없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안 그래도 황당한 이야기에 질려버린 뻬드로는, 그 아이가 자기보다 나이가 훨씬 많다고 하면서 외계인이라는 사실까지 당당히 밝히자 그저 기가 막힐 뿐이다. 그러나 그 외계인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뻬드로는 묘한 친근감을 동시에 느끼고, 그 외계인은 자기를 '아미'라고 불러달라면서 함께 자기 우주선을 타고 여행하자고 제안한다. 이미 그 외계인을 경계하지 않게 된 뻬드로는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신비로운 여행을 시작한다.

 

그 여행 속에서 뻬드로와 아미가 나누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소중한 진리를 일깨워 준다.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위기는 절대 낙관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지금까지 사람들 사이에 너무 많은 갈등이 쌓였고, 억지력은 너무 강해져 아무리 철저하게 통제해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처럼 위태롭고 불안하고 제멋대로다. 이 절체절명인 위기를 벗어나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쥐어짜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 따르면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사람들이 고안하는 방법 자체가 틀렸다. 방법은 단 한 가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뻬드로가 할머니에게 이 세상을 지켜나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인 '사랑'뿐이다.

 

생각해 보자. 지금 온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군비 경쟁이 이 동화에 나오는 진보지수를 얼마나 높일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은 군비 경쟁으로서 군사력 균형을 이뤄야 결국 세계 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생명, 그 가운데 사람이 지닌 생명은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고 한다. 그런 생명을 빼앗는데 쓰이는 무기를 더욱 강하게 발전시키고 더욱 많이 보유하려고 하는 것이, 인류애라는 숭고한 차원에서 얼마나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사람을 죽이는 그 행위 자체뿐만 아니라 사람을 죽이고자 칼을 가는 행위도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이다. 핵물리학을 전공하여 핵폭탄을 제조하는 연구를 하는 뻬드로의 삼촌을, 뻬드로는 진보지수가 매우 높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미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논리로 뻬드로의 삼촌은 진보지수가 매우 낮다고 판단한다.

 

시간과 공간을 마음대로 넘나들며 환상 여행을 즐기고 돌아온 과정을 일일이 적을 필요는 없다. 여행을 마치고 아미와 헤어진 뻬드로와 할머니가 나누는 이야기에 주목해 보자. 할머니는 이 세상을 지키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는 걸까? 아무리 사람들이 살아남는데 필요했기에 부정정보를 더욱 잘 받아들이도록 진화했다는 심리학 가설이 설득력이 크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인류에게 반드시 필요한 보편 가치가 갈수록 힘을 많이 잃고 있다는 결론은 이해하기가 힘들다. 사이코패스처럼 마음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사랑, 믿음, 존중 같은 훌륭한 가치들이 사람이 사는데 가장 중요한 것들이라는 사실조차 모를 까닭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과연 그들이 그걸 알고 있는 것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이 세상을 휘어잡은 피도 눈물도 없는 끝없는 경쟁 속에서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심지어 그런 현실을 이치에 맞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자 온갖 논리를 고안하지 않는가? 얼마나 어이없는 일일까?

 

결국 현대 사회라는 너무나도 거대하고 강한 괴물 속에서 개인은 한없이 나약한 존재이며, 그 안에서 끝도 없는 너무 거센 공격을 받은 현대인들은 의식 구조 자체가 무너져 버렸다. 올바른 의식 속에서나 단단히 뿌리내려 힘을 쓸 수 있는 사랑이, 무너져 버린 의식 구조 속에서는 어떻게 되겠는가? 이 괴물 같은 사회는 무너진 의식 구조에 사랑이 단단히 뿌리를 내리도록 도와주지 않는다. 오로지 사람들을 갈수록 심해지는 경쟁 속으로 몰아넣고자 발악할 뿐이다. 그에 따라 인류 속에 숨어 있는 광기는 드러날 때마다 그 전보다 훨씬 강해지고 끔찍해지고 있다. 이러다가는 그 광기가 인류를 아예 종말로 몰아넣을 것이다.

 

그 광기를 억누르는 방법은 이 책이 내리는 결론대로 단 한 가지, 사랑뿐이다. 우리는 살아남고자 정 따위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억지로 끌어내는 힘(Force)이 아닌 사랑에서 스스로 우러나오는 힘(Power)를 내뿜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그러려면 내가 하는 모든 일이 결국 남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인지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로자 룩셈부르크도 말했듯이 세상은 너무나도 끔찍할지언정 그래도 여전히 정말 아름답다. 우리는 정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경쟁에 시달리면서도, 일상에서 사람들이 사랑을 실천하면서 그런 아름다움을 창조한다는 사실을 여전히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아무리 밝은 전망을 부정하는 견해가 판치더라도 인류에게는 여전히 희망이 있다고 작가는 믿고 있을 것이다. 그가 이 책을 쓰고자 마음먹는 동기가 된 칠레 해안가에서 겪은 초자연 체험도, 결국 지구뿐만 아니라 좀 더 큰 차원인 우주로까지 사랑이라는 진리가 통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이 동화가 그저 황당무계하다는 비난에서 벗어나 많은 사람들에게서 인정받고, 심지어 교황마저 작가에게 축복을 내렸으리라.

 

답은 이미 나왔다. 아니 나왔다는 표현도 적절하지 않다. 사람들은 원래 답을 알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수 천 년 동안 인과 관계와 동기에 따라 발전한 현대 문명 속에서 무한 경쟁이라는 끔찍한 논리가 등장했다면, 그 논리를 뒤엎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면 반드시 사회주의가 떠오른다는 것이다. 러시아 혁명이 실패작으로 판명되면서 사회주의는 영원히 매장당할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측했고,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이념 대립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여전히 명맥을 잇고 있고, 여전히 이 세상 곳곳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특히 이 동화가 처음으로 인기를 끈 중남미에서 사회주의가 여전히 강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와 연관하여 이 동화 안에 숨어있는 것을 생각해 보는 것도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어쨌든 우리도 아미가 말하는 진보지수가 높은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외계인들이 선택받은 자들만을 골라 구출하기 전에, 문명이 멸망하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 지켜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이성뿐만 아니라 사랑이라는 훌륭한 본능을 지닌 사람이기 때문에,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그런 결론을 내렸으니 나는 어떤지 돌이켜 보고 반성해야겠다. 나는 지금까지 내 주위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그들에게 좋은 기억을 남겼는가? 두고두고 성찰해야 할 것이다. 언제 아미가 내 앞에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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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여행 + TAPE
김영우 지음 / 정신세계사 / 199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매우 어릴 때부터 나는 삶에 관하여 사람들이 반드시 생각해 보기 마련인 온갖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예를 들자면 전생이 있는가, 천당과 지옥이 있다면 과연 어떤 모습인가, 윤회는 얼마나 타당성이 있는가, 영혼은 실체가 무엇인가, 뭐 이런 것 말이다. 그래서 자연스레 과학책보다는 여러 가지 교리를 설명한 종교책을 뒤적거리는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대개 자연과학은 그런 근본에 가까운 문제들에 관해서는 연구 영역 밖이라면서 입을 다물고 있기 때문이다.
 

그 때는 워낙 어려서 수준도 매우 낮았기 때문에, 지금처럼 책을 읽으며 진지하게 문제를 파고들며 비판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여러 가지 교리를 접하면서 느끼는 혼란도, 진지한 고민 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그런 혼란과는 거리가 멀었다. 집에 있는 여러 가지 책이 다루는 교리라고는 기껏해야 천주교와 불교뿐이었고, 그 두 가지만 해도 설명이 뚜렷하게 차이가 많이 나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역시 그 때 나는 좀 더 다양한 교리를 폭넓게 공부할 수준에는 전혀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문제의식이 사그라지지는 않았고, 그 혼란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싶다는 생각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대학교에서 자유 전공을 선택한 뒤 들을 과목을 고르면서도 그 생각을 현실로 옮기지는 못해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 문제의식을 순식간에 억눌러버릴 정도로 공부하고 싶은 것이 많았고, 내가 원하는 분야를 다루는 종교철학과 심령현상에 관한 전문 강좌는 철학과에서마저도 개설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일이 그렇게 됐으니 어쩔 수 없이 혼자 어떻게든지 찾아보면서 공부해야 했다. 예전에 어른들과 나눴던 이야기와 그동안 인터넷에서 읽은 이런저런 자료를 되새기면서, 일단 '종교철학이란 무엇인가'와 '임사체험 1, 2권'을 샀다. 철학 기초를 2학년 여름방학 때 어느 정도 공부하기는 했으니, 그 지식을 토대로 '종교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읽어서 문제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기본 지식을 갖춘 뒤, '임사체험'을 읽어 사후 세계와 후생을 이해하려고 했던 것이다.

 

나름대로 시간을 내서 차근차근 준비를 하기는 했지만, 전생에 관한 책을 사서 볼 생각은 일단 접어두고 있었다. 사후 세계와 후생을 이해하려면 전생을 반드시 함께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런 생각이 저절로 떠오른 까닭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그 해답이 떠올랐다. 나는 지금까지 '윤회'라는 개념을 나도 모르게 계속 생명과 영혼에 관한 문제를 고민할 때 기본 가정으로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사후 세계와 영혼 문제에 관해서는 그야말로 온갖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윤회설(Transmigrationism)'이라는 개념을 일단 그런 문제에 관한 모든 판단을 내릴 때 기본 잣대로 삼았을까? 어렸을 때 참 재미있게 읽었던 '만화로 보는 불교 이야기' 때문인가? 그 내용이 내가 알고 있는 종교 지식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그런가? 곧 공부가 매우 부족한 탓일까? 단순하게 따지자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 '전생여행'에서 저자 김영우가 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건 공부를 많이 했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당연한 일이다.

 

흔히 우리가 어떤 대상이나 관념에 관하여 생각하다 보면,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이든 간에 어떻게든지 똑같이 나오는 결론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결론을 우리는 흔히 상식(common sense)이라고 한다. 이런 상식은 흔히 경험에서 우러나오거나 최신 대뇌생리학 지식으로도 밝히지 못한 알 수 없는 방법으로 도출되다 보니까 논리 근거가 빈약해 보인다. 과학철학이 발전하면서 유물론과 실증주의가 갈수록 입김이 강하다 보니까, 상식도 그 속성 때문에 끊임없는 검증을 요구받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윤회설은 검증을 많이 거칠수록, 과학 법칙을 적용하여 온갖 초자연 심령 현상을 설명하는데 더없이 훌륭한 이론이라는 사실이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기가 어디에서 왔고 그 까닭은 무엇인가?', '생명은 죽으면 과연 어떻게 되는가?' 따위 이성을 넘어서는 것처럼 보이는 수많은 물음에 누가 봐도 이치에 맞게끔 대답해 줄 수 잇는 가설로 윤회설만한 것이 없다. 세상에서 나름대로 뚜렷한 교세를 보여주었던 모든 종교는, 교리 안에 윤회에 관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곧 윤회설은 종교를 뛰어넘는 보편성을 지닌 대단히 뛰어난 이론이었던 것이다.

 

원래 기독교 경전인 성경에서도 윤회 사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에 따르면 서기 335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그 어머니가 정치 목적 때문에 신약성경에 나와 있는 윤회에 관한 가르침을 일부러 지워버렸다. 신권과 왕권을 일치시켜 권력을 강하게 하여 시민들을 장악하려고 했던 황제에게, 윤회설은 영원한 생명을 지닌 신과 한정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 사이 간극을 없애버리다시피 하는 성가신 논리였던 것이다. 그 뒤 서기 553년에는 제 2차 종교 공의회에서 윤회설이 이단으로 규정되어, 윤회설은 서양에서는 한동안 거의 아무런 지지도 얻지 못하게 되었다.

 

'프린키피아'가 출간되어 모든 자연 운동을 과학 법칙에 따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눈덩이처럼 부풀어 오르면서, 자연스레 유물론과 실증주의가 강한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 때문에 유럽 과학자들은 성직자들과 다르게 믿음만 강요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그동안 그들이 믿었던 신과 영혼을 과학으로 설명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하지만 성직자들은 과학이 침범하는 영역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썼고, 서양에서 오랫동안 굳건히 내려온 성경 교리는 진화론도 절대 인정하지 못했다. 사정이 그랬으니 신과 영혼을 과학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에는 극약을 받은 죄인과 같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진화론과 창조론을 놓고 서양에서 몇 백 년 동안 신학자들과 과학자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고, 과학 발전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서양 철학사에서도 유물론과 생기론(물질만으로는 생명이나 초자연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이론) 사이에 극심한 대립이 나타났다. 자연과학이 지닌 한계라고 여기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왕성한 탐구열을 지닌 과학자들은 그럴 수 없었다.

 

끝없는 논쟁에 지친 서양 과학자들은 자연과학이 지닌 한계를 극복하고자 동양 종교철학과 신학에 관심을 지니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불교를 만났고 앞에서 설명했듯이 성경 속에도 분명히 있었지만 고의로 지워져 그동안 알 수 없었던 윤회라는 가르침을 다시 발견했다. 사람을 몸과 마음이라는 두 가지 에너지가 융합된 존재로 보고 몸과 마음 사이 관계를 연구하는 양자의학은, 첨단 과학 이론과 접목하는데 가장 적절한 윤회설 덕분에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다. 모든 심령 현상을 필요하는데 필요했던 것은 생기론을 극복하는 일이었다. 윤회설을 주창한 불교는 사람이 보여주는 모든 감정을 에너지로 가정하고 그에 따라 온갖 물리학 법칙을 적용하여 심령 현상을 설명하는 혁신 시도를 이룩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과학자들에게는 그런 시도마저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현대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생기론을 완벽하게 무너뜨릴만한 연구 결과는 여전히 나오지 않고 있다. 지금은 입자물리학자들이 쿼크보다 더 작은 입자가 있을 것이라는 가정 아래 활발하게 연구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영혼을 과학으로 설명하는 일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감정을 에너지로 가정하고 그에 따라 물리학 법칙을 적용하여 심령 현상을 설명하는 건, 절대 믿음을 강조하는 종교와는 정반대로 끝없는 의심을 강조하는 과학에서는 그야말로 완벽하게 검증되지는 못한 한 가설일 뿐이다. 눈으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실험 결과는 여전히 턱없이 부족하다는 표현마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적다.

 

눈에 보이는 실험 결과를 내놓으라면서 초자연 심령 현상을 헛된 것으로 단정해 버리는 유물론자들은 이 책을 쓴 저자에게는 반드시 비판해야 할 대상이다. 그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심령 현상을 설명할 때 과학은 방법론을 제시하는 데에 그쳐야 한다. 유물론으로 무장한 과학은 비판을 철저하게 차단하며 믿음만을 강조하는 독선에 빠진 종교와 다를 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서문을 매우 알차게 써서 누구든지 이 책이 보여주려고 하는 바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한 저자는, 현대 과학이 발전하여 유물론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에 깊숙이 뿌리내리면서,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인정할 수밖에 없는 초자연 심령 현상을 너무 쉽게 무시하는 경향이 온 세상에 퍼졌다고 비판한다. 초자연 심령 현상에 관한 실증 자료도 그를 반박하는 자료만큼이나 많이 쌓이고 그에 관한 논문도 한 해에 수 백 편씩 발표되고 있는데도, 오로지 유물론만 꼿꼿하게 고집하며 버티는 건 지독한 아집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저자가 전공으로 삼고 있는 심리치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신경정신과 전문의인 작가는 현대 과학과 심리학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증상을 보여주는 환자들 때문에 고민하다가, 최면술이 정신병 환자 치료에서 보여주는 효과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최면술이 보여주는 효과는 현대 과학과 심리학이 제시하는 이론만으로는 절대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온갖 방법을 써도 치유할 수 없었던 이들이 최면에 빠진 뒤 자기 전생을 무서울 정도로 정확하게 기억해내고, 그 순간 모든 증상이 사라졌다.

 

그렇게 효과가 분명한데도 유물론에 빠진 현대 의학자들 대부분은 새로운 진실을 보고 인정하려고 하지 않고, 도저히 학문을 하는 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현대 과학과 심리학 영역을 지키는 데만 집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저자는 그 현실을 꼼꼼하게 비판하면서 전생, 사후 세계, 업보, 환생 따위 심령 현상을 설명하는데 필요한 온갖 개념들을 과학 방법론으로 접근하여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대 의학과 심리학 지식을 갖춘 전문의가 빠질 수 있는 한계에서 과감히 벗어나고자 그는 심령과학을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했고, '전생퇴행요법'이라는 최면술에 근거한 심리치료 방식을 우리나라에 보급하는데 앞장서며 심령과학과 최면술 분야에서 선구자로서 활약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어떤 내용도 놓치지 않고 기억하고자 힘썼다. 절대 마음을 놓고 편안하게 읽을 수가 없을 정도로 이 책에 담긴 모든 것은 한 결 같이 엄청나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들, 곧 유물론과 실증주의에 사로잡힌 과학이 처한 한계, 그 한계를 벗어나고자 서양 과학자들이 시도한 것들, 최근 심령과학 연구 동향, 뭐 이런 것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주의 깊게 읽어야 할 것은 서문이 아니라 본문이다. 본문에는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전생퇴행요법으로 치료한 저자가 원종진이라는 환자에게 전생퇴행요법을 적용하면서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낱낱이 기록한 결과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원종진이라는 사람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들이 모르는 어떤 초자연 존재들이 들려주는, 인류가 지금까지 발달시킨 이성마저도 보잘것없을 정도로 굉장한 지혜가 담긴 이야기이다. 보통 환자들은 전생을 기억해내는데 그쳤지만, 이 남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지혜로운 존재가 들려주는 목소리를 쏟아내는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1996년 현재 나이가 26세인 원종진이라는 남자는 전생퇴행요법으로 수많은 전생을 기억해냈다. 조선시대 비구니, 14세기 스페인 농부, 인도에서 귀족이었지만 깨달음을 얻고 집에서 나와 거지가 된 삶, 스코틀랜드 양치기, 마사이 족 전사……전생은 그가 지금 한국 사람이라고 해서 동북아시아라는 영역에 한정되지 않았다. 온 세상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 다양한 삶을 일일이 기록하면서 저자는 평소에 고민했지만 풀리지 않았던 심령과학에 관한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저자가 내놓은 답안은 한 치 거짓도 없는 기록 중간 중간에 주석처럼 덧붙어 있다. 지혜로운 목소리를 전달하는데 좀 더 많이 집중했기에 덧붙어 있다는 표현히 적절해 보인다.

 

이 책 내용은 1부와 2부와 부록으로 나뉘어 있다. 1부가 바로 앞 두 문단에서 설명한 내용을 담고 있다. 거기에 있는 중요한 깨달음을 여기에 일일이 요약해 정리하는 것만 해도 몇 장은 충분히 될 테니, 차례 일부분을 적어보겠다. 간단한 제목만 봐도 이 안에 들어있는 내용이 얼마나 방대하고 지혜로운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네 번째 만남 - 죽은 후의 세계와 미래의 예언들"

 

"다섯 번째 만남 - 여덟 번째 삶과 교훈, 그리고 예언들"

 

"여섯 번째 만남 - 나의 전생, 원종진과의 관계, 교훈과 예언들"

 

"일곱 번째 만남 - 제 3의 방, 이 만남의 의미, 내 문제들, 빙의 현상과 예언들"

 

"여덟 번째 만남 - 동물의 영혼, 사랑, 정치지도자들의 비밀, UFO, 정신병의 원인"

 

"아홉 번째 만남 - 이집트에서의 삶과 죽음, 사랑과 겸손, 자기만족, 인구증가와 심판에 대한 가르침"

 

"열 번째 만남 - 고통의 의미, 진정한 수행, 전쟁과 평화, 예언과 교훈들"

 

"한일(韓日) 관계과 우리 사회에 대하여"

 

……

 

 

1부에 이어지는 2부에는 '남은 이야기들'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1부에서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 곧 1부에서 저자와 원종진이 경험한 놀라운 것들에 관한 모든 생각을 저자는 차분하게 2부에 글로 썼다. 2부 마지막 장을 넘기는 그 순간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어릴 때부터 삶과 관련된 근원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저자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방향을 잡고 공부를 하게 된 계기부터, 최면술로 환자들을 치료하고 숱한 깨달음을 얻으면서 자기가 어떻게 변하고 그 깨달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며 느낀 것들까지 그야말로 거의 모든 것이다.

 

결국 이 책이 주는 온갖 알찬 정보 가운데 사람들에게 반드시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은, 물질문명 때문에 피폐해진 인류를 구원할 방법은 정신문명뿐이라는 것이다. 최면에 빠진 원종진을 빌어 나타난 지혜로운 존재들은, 사랑과 영혼 같은 정신계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고 무시하는 물질문명과 과학기술 때문에 극도로 혼란스러워하고 고통 받는 인류는 한계에 이르렀다고 한다. 지금 같이 심령과학이나 초과학 같은 학문이 격렬한 논쟁에 휩싸여 있는 현실은, 지금이 물질문명에서 정신문명으로 나아가는 과도기라는 사실을 증명하며, 격렬한 논쟁과 대립 속에서 결국 지금까지 일어났던 어떤 변혁보다도 훨씬 강하고 큰 변혁이 일어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정신문명으로 나아가는 그 변혁은 어느 특정한 집단들이 이루어나가는 것이 아니다. 한 이성이자 인격체인 사람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 진리인 사랑과 용서와 포용 같은 분명한 진리를 인식하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이 일부러 의식하지 않아도 그들이 내뿜는 힘이 지구뿐만 아니라 온 우주를 변하도록 하여, 지금 인류가 처해 있는 극심한 위기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라고 한다.

 

이 책에서,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2부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양자의학개론 수준에서 윤회설에 관한 설명을 덧붙이고 그에 비추어 볼 때, '전생퇴행요법'은 어떤 뜻이 있는지 설명한 대목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물론과 생기론 사이 대립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드러나지 않았다. 책을 모두 읽어보면 거기까지는 저자가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인상을 받기 쉽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토록 많은 깨달음을 얻은 이가 그 정도도 생각해 보지 않았을 리가 없다. 현대과학이 지닌 한계를 인정하고 생기론을 긍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과학 방법론으로 접근하다 보면 언젠가는 유물론이 주장하는 대로 결국은 물성물리학으로 심령과학을 물리학이라는 기존 과학 영역에 확실히 집어넣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는지도 명확하게 덧붙였으면, 나무랄 데가 없었을 것 같다.

 

이 책에 담긴 모든 내용을 깊이 이해하려고 힘쓸수록, 저자가 이 책을 얼마나 많이 고심했는지 더욱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정말 놀랍고 대단한 책이다. 중대 책꽂이 한 구석, 그것도 아주 깊숙한 곳에 처박혀 있어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책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책꽂이를 뒤적거리다가 이 책을 발견했는데, 제목에서 알 수 없는 강한 호기심을 느껴서 꺼내들었다. 혹시라도 '빛 좋은 개살구'일까봐 걱정했는데, 몇 장 넘기자마자 정신없이 빠져드는 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동안 매우 궁금했던 것들에 관한 대답이 이토록 풍성하게 많이 들어있을 줄이야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심령과학을 공부하는데 필요한 몇 가지 기초 지식을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이 나에게는 충분한 가치가 있는데, 그것 말고도 내가 이 책에서 얻은 것은 정말 많았다. 마치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아카식 레코드(Akashic Record)'가 있는 방에 직접 들어갔다 온 느낌이 들 정도였다.

 

오랜 시간을 들여 이 글을 썼지만 여전히 부족하다는 느낌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 이 책을 읽으며 지금까지 내가 생각한 것을 모조리 밝히는 건, 나에게도 고된 일이지만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힘들 것 같아서 하지 않겠다. 저자도 밝혔듯이 환생과 윤회를 해설한 이론과, 그 진위를 검증하는 과정과 결과는 그 자체만으로도 책 몇 권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저자는 그 모든 것을 여기에서 다루려고 한 것이 아니라, 원종진이라는 사람이 전생퇴행요법으로서 우리에게 선사하는 수많은 지혜와 가르침과 예언을 나누고 싶은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심령과학을 둘러싼 끝없는 논쟁 현장을 찾아나서, 거기에 끼어들고 공부하고 더 많은 깨달음을 얻는 것은 우리 몫이다. 그리고 지혜로운 목소리가 들려주는 가르침을 받아들여, 풍요로운 물질만으로 만족하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물질이 부족할지언정 욕심을 버리고 만족하려고 힘쓰고, 거기에서 작은 평안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도 우리 몫이다.

 

매우 엉뚱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몇 마디만 덧붙이고 이 글을 끝내겠다. 윤회 이론에 따르면, 어쩌면 나는 1972년 8월 31일에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류비셰프가 다시 태어난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류비셰프라는 이름과 그가 56년 동안 꾸준히 기록한 시간통계에 관한 정보를 듣는 순간, 혼탁한 영혼이 한순간에 깨끗해진 것 같은 엄청난 충격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동질감을 느꼈던 것이리라.

 

만약 그게 정말이라면 나는 예전과는 견줄 수도 없을 정도로 훨씬 큰 자신감을 얻어 더욱 열심히 살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설명하는 영혼진화론에 따른 생각은 나를 더욱 신바람이 나게 했다. 류비셰프는 러시아 과학자로서 산 삶에서 시간통계법을 개발하여 56년 동안 학자로서 매우 훌륭한 삶을 살았지만, 자기도 어쩔 수 없는 완전하지 않은 사람이었기에 이루지 못한 것도 나름대로 많았다. 그렇기에 그는 지난 삶에서 이루지 못했던 것들을 이루고자 지난 삶에서보다 더욱 강하고 완벽한 인물로 거듭나려고 할 것이다.

 

전역한 뒤에 류비셰프 생가와 묘를 찾아가고자 러시아 여행 계획을 세우고 있다. 지난 삶에서 살았던 곳에 들어가는 순간 환생과 영혼진화론에 따라 내 안에 살아있는 류비셰프는 분명히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 경험을 인지하는 순간 나는 유물론자에서 생기론자로 변할 지도 모른다. 아마 극과 같이 변하는 만큼, 그 덕분에 얻을 수 있는 것도 지금까지 얻었던 것과 차원이 다른 어떤 것일 것이다. 그 날이 올 때까지 심령과학에 관하여 더 많은 것을 알고자 공부하며 차분하게 기다려야겠다. 편견을 걷어내고 새로운 진실을 바라볼 준비도 빠뜨리지 말자.

 

 

새로운 진실은 처음에는 조롱당하고, 다음에는 격렬한 반대에 부딪히며, 나중에는 마치 처음부터 자명(自明)했던 사실처럼 받아들여진다. - 쇼펜하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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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석의 병영일기 - 서른 살 이등병의 좌충우돌 군대 체험기
서경석 지음 / 시공사 / 2003년 10월
평점 :
품절


신병교육대에 들어간 뒤 1주일 뒤에 훈련교관들이 수양록을 쓰라고 모든 훈련병들에게 작은 공책 한 권을 주셨다. 나는 그 공책을 받아들자마자 지난 1주일 동안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기록하기 시작했다. 바깥에서 하던 대로 시간통계를 내기에는 자료와 시간이 전혀 없었다. 앞으로 남은 6주 동안 나는 오로지 민간인에서 군인으로 태어나는데 필요한 모든 교육훈련만을 받을 뿐, 내가 바깥에서 하던 모든 일은 잠시 뒤로 제쳐두어야 했다. 그랬기에 그 날 있었던 일과 그 때문에 생긴 생각과 느낌을 간단하게 기록하는 건 그때로서는 어쩔 수 없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일기 쓰기를 시작한 뒤 지금까지 같은 형식으로 일기를 썼다. 휴가를 나갔을 때는 컴퓨터를 마음대로 쓸 수 있었기에 예전처럼 인터넷 홈피에 일기를 썼지만, 군대에서는 무조건 종이에 몇 줄씩 적어 내려갔다. 야전 훈련을 나가서도 야전천막 안에서 몰래 일기를 끼적거렸고, 일기 쓰기가 여의치 않아 밀렸을 때는 과업을 빨리 끝낸 뒤 사무실이나 화장실에 몰래 틀어박혀 밀린 일기를 썼다. 바깥에서는 시간 통계 방법을 바꾸느라 며칠 동안 고심하다가 쓰지 않는 날이 며칠 정도는 있었지만, 신병교육대에서는 형식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도 전혀 없었으므로 하루도 빠뜨리지 말아야 했다. 일기 쓰는 습관은 그 정도로 내 몸 속에 깊숙이 배여 있었다.

 

그렇게 애지중지(?)한 일기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나에게 상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일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지금까지 여러 번 일기를 잃어버리거나 빼앗길 위기를 겪었다. 그 때 나는 정말 이성을 잃어버릴 정도로 심하게 흥분했고, 일기를 보호하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내가 군인이며 군대에서 지시 사항을 어기면 어떤 처벌이 기다리고 있는 지도 일기를 잃어버린다는 위기상황에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신병교육대에서 신병 훈련이 거의 다 끝나갈 무렵 그동안 쓴 수양록을 제출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동기들은 불평불만을 터뜨리면서도, 100일 휴가 때 집으로 보내준다고 교육대장과 교관들이 말하자 어쩔 수 없이 하나 둘씩 수양록이나 일기를 적은 수첩을 냈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내지 않고 숨기려고 하다가 결국 '지시사항 불이행'이라는 죄목으로 이병이 되기도 전에 훈련병 신분으로 영창에 갈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일기만은 절대 내놓을 수 없다는 각오로 끝까지 내버렸다고 버틴 끝에, 한 훈련병으로서 남긴 기록을 고이 간직할 수 있었다. 물론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혼이 나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는 군대에서 내가 겪은 가장 수치스러운 일 가운데 한 가지로 내 머릿속에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실무 부대에서 겪은 일에 견주었을 때 그건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수첩을 가지고 다니면서 일기 쓰는 것은 상병 6호봉(원래 호봉은 간부 월급을 책정하는데 기준이 되는 한 해이므로 병들에게는 호봉이라는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흔히 병들 사이에서는 한 달을 한 호봉으로 치고 그에 따라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정해져 있다)이라고 중대에서 명확하게 인계가 깔린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오자마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쓴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선임들이 몇 호봉인데 벌써 그 따위 짓을 하냐고 윽박질러서, 나는 극도로 긴장했다. 개념이 없고 말도 잘 안 듣는다면서 몇 번이고 얻어맞았고 일기를 적은 종이를 내놓으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나는 절대 일기를 내놓지 않았다. 그렇게 버티자 선임들도 자기가 졸병일 때 몰래 일기를 적으며 마음을 달랬던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어쩐지는 몰라도, 나중에는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갔다. 그런 분위기를 파악하고서야 나는 긴 한숨을 쉬며 그나마 마음을 놓고 일기를 썼다. 물론 상병을 달기 전까지는 절대 선임들 앞에서는 드러내 놓고 일기를 쓰지 않았다.

 

신병교육대에서 공책을 처음 받았을 때 나는 버릇대로 잠을 설치면서까지 일기를 얼마나 쓸 수 있을지 계산하고 계획했다. 같은 방법으로 계속 일기를 썼을 때 약 120쪽까지 쓰면 전역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 뒤 일기를 쓸 때마다 날짜와 쪽수를 확인했다. 겨우 10쪽을 넘겼을 때도 정말 기뻤는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2007년 7월말에는 어느새 89쪽에 일기를 쓰고 있다. 신병교육대에서 받은 수첩은 다 쓴 지 몇 달이 넘어 새로운 수첩에 일기를 쓰기 시작했으며, 2007년 5월부터 시간 통계를 다시 내기 시작해 작고 깔끔한 사무용 수첩을 하나 더 마련했다. 시간 통계를 다시 시작했을 때는, 신병 교육을 마친 뒤 버스를 타고 신병교육대를 벗어날 때만큼이나 기뻤다.

 

얼마 전에 상병 정기 휴가를 다녀왔다. 집에 가서 밥을 먹은 뒤 내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지금까지 썼던 일기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오랫동안 집에 제대로 가지 못해 그동안 일기를 적은 종이가 많이 쌓였다. 그 종이를 집에 가져가 지난해에 가져다 놓은 일기와 함께 투박한 봉투 안에 따로 담아놓았다가, 부대에 돌아가기 하루 전에 꺼내보았다.

 

그 종이를 어루만지면서 나는 지금까지 내가 군대에서 보낸 시간을 돌이켜 보았다. 내가 그동안 흘린 피와 땀과 눈물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노린내가 날 것 같은 손때, 흑연이 날아 붙은 때, 잉크가 땀과 눈물 때문에 번진 흔적 따위가 사람은 절대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을 용케 붙잡고 있었다. 대한민국 남자들이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하기는 하지만, 일단 벗어나면 다시는 돌아갈 일이 없는 곳이며 온갖 추억과 무용담거리를 만들어내기에, 전역하고 나서도 아주 가끔씩은 그리워할 때도 있는 곳인 군대. 그 군대에서 내가 쓴 일기는 사회에서 내가 썼던 일기와는 확실히 다른 뭔가가 있다. 그게 정확하게 무엇인지 설명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우면서도 그만큼 매력이 넘치는 과제이다.

 

한참 동안 침대에 누워 상념 속에 푹 빠졌다가, 내가 일병 때 읽었던 '서경석의 병영일기'를 떠올렸다. 이 책을 쓴 서경석 씨도 전역한 뒤 책상을 정리하다가 자기가 썼던 일기, 메모, 편지 따위를 발견하고 다시 읽어보면서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까. 스물여섯 달, 나는 그보다 적은 스물네 달, 그동안 그와 나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깊이 생각할수록 온갖 것들이 밑도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아마 그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다가 그는 그 모든 것을 정리해 보자고 마음먹었고, 시작하자마자 그 일에 푹 빠졌다. 그러던 그를 지켜보던 한 매니저 동생이 우연히 그가 정리하여 쓴 글을 읽어보더니, 무척 재미있다며 책으로 내기를 권하여 이 책이 세상에 나온다.

 

 

"입대를 앞둔 청년들에겐 '아, 그런 재미가 있는 곳이구나.' 하는 희망과 용기를, 아들을 군대 보낸 어머니에겐 '밥은 물론 간식까지도 잘 나오는구나.' 하는 위로를, 제대한 군대 선배들에겐 '나도 그땐 그랬었는데…….' 하는 감회의 시간을 줄 수 있기를 바라며 보잘것없는 이 글을 많은 분들 앞에 내보인다."

 

 

저자가 서문에 쓴 글이다. 실제로 이 책을 읽다 보면 저자가 서문에서 바란 대로 사람들이 반응할 만큼 내용이 풍성하다. 스물여섯 달(2001년에 입대하여 2003년에 제대하였으니 스물여섯 달이 맞다) 동안 훈련병, 이병, 일병, 상병, 병장 순서대로 모든 계급을 달면서 자기가 겪은 거의 모든 일을 재미나게 스스럼없이 담아놓았다. 군대라면 사람들이 왠지 모르게 저절로 떠올리는 투박한 이미지를 살리려고 그랬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표지부터 투박하고 누런 종이(?)로 만들어져 있다. 거의 모든 쪽에 나오는 익살스러운 그림과 가끔씩 나오는 농담 반, 진담 반인 우스갯소리는 보는 사람들을 저절로 피식 웃게 하고, 군대에 가지 않은 이들이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덧붙여 놓은 주석도 흥미롭고 재미있다.

 

서른한 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계급에 따른 규율과 통제가 엄격한 조직 사회인 군대에 들어가 자기보다 훨씬 어린 선임들과 자기와 나이가 조금 젊거나 더 많은 초 • 중급 간부들을 모시가며 겪은 일들, 모든 현역들과 예비역들이 배를 잡으며 공감하기 마련인 군대에서만 볼 수 잇는 먹을거리와 풍경과 일상, 그리고 가장 중요한 휴가 나가서 겪은 일, 뭐 그런 것. 그리고 연예인이라는 분명히 특이한 경력을 지니고 군대에 들어가 홍보 병사로 활동하면서 겪은 온갖 이야기……이 모든 것들이 놓치지 싫을 정도로 매우 재미있다.

 

맛스타, 건빵, 쌀국수, 전투식량, 군대리아, 군대스리가, 행정관, 당직 사령, 보급관, 100일 위로 휴가, 포상 휴가, 정기 휴가, 주말 외박, 외출, 진급 신고, 당직병, 당직분대장, 짬밥……군대에 오지 않으면 단순히 군대에서 쓰는 단어로밖에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 모든 것들에 이미 나는 익숙해졌고, 지금은 상병들 가운데에서도 병장 진급까지 한 달밖에 남지 않은 가장 높은 위치에 올라 있다. 이런 때일수록 여유가 넘쳐서 졸병 때 하지 못했던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이 때 나는 모든 군인들이 적어도 한 번쯤은 그랬듯이 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반성해 보았다. 그러면서 내 가슴을 가장 절절이 울린 일은, 나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것들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했는지 깨달은 것이었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 아니겠는가? 인터넷 카페 가운데 군대에서 쓴 일기를 서로 나누며 군대에서 복무하던 시절을 회고하는 카페가 있다고 한다. 거기에서 활동하는 회원들도 군대에서 얻은 것 가운데 가장 가치가 있는 것으로, 지금까지 자기를 둘러싸고 있떤 환경과 그 속에 있던 모든 존재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어치가 있었는지 깨달은 것이라고 한다. 그 안에는 부모님과 주위 사람들에게 줄 훨씬 커진 사랑, 사소한 것에도 고마워할 줄 알고 상황을 긍정할 줄 아는 자세 같은 좋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군대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혹독하다 싶을 정도로 강한 통제와 교육훈련 때문에 땀과 피와 눈물을 흘리고 절망한다. 하지만 그 속에서 그들은 분명히 새로운 것을 얻는다. 단지 그들이 그리움과 절망 때문에 너무 상처를 많이 입어, 그 새로운 것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데 어려움을 겪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과연 어떠한가? 항상 돌이켜 보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정훈교육으로 군대에 들어올 때와 들어온 뒤에는 모든 이들이 평등하다고 아무리 강조해도, 사람들은 사회에서나 군대에서나 알 것은 다 알았고 볼 것도 다 봤기에 그 말을 믿지 않는다. 병역특례 비리를 저질렀다는 검찰 조사 결과를 인정하는 척하다가 막상 현역 입대 날짜가 다가오자 바로 본색을 드러내며 행정 소송을 거는 가수 싸이. 병역특례라는 혜택을 받은 뒤 그나마도 제대로 복무하지 않고 평소와 다름없이 삶을 즐기는 고위층 자제들. 이런 이들을 바라보며 군인들은 안 그래도 더운 날씨 속에서 '신의 아들'이라는 말이 여전히 통한다면서 더욱 심하게 짜증을 낸다. 분명히 안타깝고 화나는 일이다.

 

하지만 윤계상, 장혁, 지성 같이 군복무를 무사히 마치고 당당하게 세상에 나서는 연예인들도 있다. 그들 가운데 서경석 씨도 끼어 있다. 그렇기에 대한민국 남자로서 군복무를 떳떳하게 마쳤다고 자신 있게 이 책을 내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여러 프로그램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서경석 씨가 앞으로도 군대에서 얻은 모든 것을 토대로 모든 일에서 성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고 아직 군대에 오지 않은 이들에게는 군복무가 여러모로 힘들고 단점도 분명히 있을지언정, 자기가 정신만 똑바로 차린다면 얻어갈 수 있는 것도 매우 많으므로 이 책을 읽으면서 용기를 내기를 바란다. 나보다 더 어려운 시절에 군복무를 마친 수많은 예비역들에게는 진정으로 고생하셨다고 따뜻한 한 마디를 건네 본다. 나도 빨리 120쪽까지 일기를 쓴 뒤, 사회로 돌아가 서경석 씨처럼 책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작은 소망도 품어 본다. 그 때 나는 분명히 군대에 들어가기 전보다 훨씬 많이 자라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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