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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석의 병영일기 - 서른 살 이등병의 좌충우돌 군대 체험기
서경석 지음 / 시공사 / 2003년 10월
평점 :
품절
신병교육대에 들어간 뒤 1주일 뒤에 훈련교관들이 수양록을 쓰라고 모든 훈련병들에게 작은 공책 한 권을 주셨다. 나는 그 공책을 받아들자마자 지난 1주일 동안 있었던 일을 간단하게 기록하기 시작했다. 바깥에서 하던 대로 시간통계를 내기에는 자료와 시간이 전혀 없었다. 앞으로 남은 6주 동안 나는 오로지 민간인에서 군인으로 태어나는데 필요한 모든 교육훈련만을 받을 뿐, 내가 바깥에서 하던 모든 일은 잠시 뒤로 제쳐두어야 했다. 그랬기에 그 날 있었던 일과 그 때문에 생긴 생각과 느낌을 간단하게 기록하는 건 그때로서는 어쩔 수 없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일기 쓰기를 시작한 뒤 지금까지 같은 형식으로 일기를 썼다. 휴가를 나갔을 때는 컴퓨터를 마음대로 쓸 수 있었기에 예전처럼 인터넷 홈피에 일기를 썼지만, 군대에서는 무조건 종이에 몇 줄씩 적어 내려갔다. 야전 훈련을 나가서도 야전천막 안에서 몰래 일기를 끼적거렸고, 일기 쓰기가 여의치 않아 밀렸을 때는 과업을 빨리 끝낸 뒤 사무실이나 화장실에 몰래 틀어박혀 밀린 일기를 썼다. 바깥에서는 시간 통계 방법을 바꾸느라 며칠 동안 고심하다가 쓰지 않는 날이 며칠 정도는 있었지만, 신병교육대에서는 형식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도 전혀 없었으므로 하루도 빠뜨리지 말아야 했다. 일기 쓰는 습관은 그 정도로 내 몸 속에 깊숙이 배여 있었다.
그렇게 애지중지(?)한 일기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나에게 상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일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지금까지 여러 번 일기를 잃어버리거나 빼앗길 위기를 겪었다. 그 때 나는 정말 이성을 잃어버릴 정도로 심하게 흥분했고, 일기를 보호하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내가 군인이며 군대에서 지시 사항을 어기면 어떤 처벌이 기다리고 있는 지도 일기를 잃어버린다는 위기상황에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신병교육대에서 신병 훈련이 거의 다 끝나갈 무렵 그동안 쓴 수양록을 제출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동기들은 불평불만을 터뜨리면서도, 100일 휴가 때 집으로 보내준다고 교육대장과 교관들이 말하자 어쩔 수 없이 하나 둘씩 수양록이나 일기를 적은 수첩을 냈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내지 않고 숨기려고 하다가 결국 '지시사항 불이행'이라는 죄목으로 이병이 되기도 전에 훈련병 신분으로 영창에 갈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일기만은 절대 내놓을 수 없다는 각오로 끝까지 내버렸다고 버틴 끝에, 한 훈련병으로서 남긴 기록을 고이 간직할 수 있었다. 물론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혼이 나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는 군대에서 내가 겪은 가장 수치스러운 일 가운데 한 가지로 내 머릿속에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실무 부대에서 겪은 일에 견주었을 때 그건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수첩을 가지고 다니면서 일기 쓰는 것은 상병 6호봉(원래 호봉은 간부 월급을 책정하는데 기준이 되는 한 해이므로 병들에게는 호봉이라는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흔히 병들 사이에서는 한 달을 한 호봉으로 치고 그에 따라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정해져 있다)이라고 중대에서 명확하게 인계가 깔린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오자마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쓴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선임들이 몇 호봉인데 벌써 그 따위 짓을 하냐고 윽박질러서, 나는 극도로 긴장했다. 개념이 없고 말도 잘 안 듣는다면서 몇 번이고 얻어맞았고 일기를 적은 종이를 내놓으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나는 절대 일기를 내놓지 않았다. 그렇게 버티자 선임들도 자기가 졸병일 때 몰래 일기를 적으며 마음을 달랬던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어쩐지는 몰라도, 나중에는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갔다. 그런 분위기를 파악하고서야 나는 긴 한숨을 쉬며 그나마 마음을 놓고 일기를 썼다. 물론 상병을 달기 전까지는 절대 선임들 앞에서는 드러내 놓고 일기를 쓰지 않았다.
신병교육대에서 공책을 처음 받았을 때 나는 버릇대로 잠을 설치면서까지 일기를 얼마나 쓸 수 있을지 계산하고 계획했다. 같은 방법으로 계속 일기를 썼을 때 약 120쪽까지 쓰면 전역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 뒤 일기를 쓸 때마다 날짜와 쪽수를 확인했다. 겨우 10쪽을 넘겼을 때도 정말 기뻤는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2007년 7월말에는 어느새 89쪽에 일기를 쓰고 있다. 신병교육대에서 받은 수첩은 다 쓴 지 몇 달이 넘어 새로운 수첩에 일기를 쓰기 시작했으며, 2007년 5월부터 시간 통계를 다시 내기 시작해 작고 깔끔한 사무용 수첩을 하나 더 마련했다. 시간 통계를 다시 시작했을 때는, 신병 교육을 마친 뒤 버스를 타고 신병교육대를 벗어날 때만큼이나 기뻤다.
얼마 전에 상병 정기 휴가를 다녀왔다. 집에 가서 밥을 먹은 뒤 내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지금까지 썼던 일기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오랫동안 집에 제대로 가지 못해 그동안 일기를 적은 종이가 많이 쌓였다. 그 종이를 집에 가져가 지난해에 가져다 놓은 일기와 함께 투박한 봉투 안에 따로 담아놓았다가, 부대에 돌아가기 하루 전에 꺼내보았다.
그 종이를 어루만지면서 나는 지금까지 내가 군대에서 보낸 시간을 돌이켜 보았다. 내가 그동안 흘린 피와 땀과 눈물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노린내가 날 것 같은 손때, 흑연이 날아 붙은 때, 잉크가 땀과 눈물 때문에 번진 흔적 따위가 사람은 절대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을 용케 붙잡고 있었다. 대한민국 남자들이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하기는 하지만, 일단 벗어나면 다시는 돌아갈 일이 없는 곳이며 온갖 추억과 무용담거리를 만들어내기에, 전역하고 나서도 아주 가끔씩은 그리워할 때도 있는 곳인 군대. 그 군대에서 내가 쓴 일기는 사회에서 내가 썼던 일기와는 확실히 다른 뭔가가 있다. 그게 정확하게 무엇인지 설명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우면서도 그만큼 매력이 넘치는 과제이다.
한참 동안 침대에 누워 상념 속에 푹 빠졌다가, 내가 일병 때 읽었던 '서경석의 병영일기'를 떠올렸다. 이 책을 쓴 서경석 씨도 전역한 뒤 책상을 정리하다가 자기가 썼던 일기, 메모, 편지 따위를 발견하고 다시 읽어보면서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까. 스물여섯 달, 나는 그보다 적은 스물네 달, 그동안 그와 나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깊이 생각할수록 온갖 것들이 밑도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아마 그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다가 그는 그 모든 것을 정리해 보자고 마음먹었고, 시작하자마자 그 일에 푹 빠졌다. 그러던 그를 지켜보던 한 매니저 동생이 우연히 그가 정리하여 쓴 글을 읽어보더니, 무척 재미있다며 책으로 내기를 권하여 이 책이 세상에 나온다.
"입대를 앞둔 청년들에겐 '아, 그런 재미가 있는 곳이구나.' 하는 희망과 용기를, 아들을 군대 보낸 어머니에겐 '밥은 물론 간식까지도 잘 나오는구나.' 하는 위로를, 제대한 군대 선배들에겐 '나도 그땐 그랬었는데…….' 하는 감회의 시간을 줄 수 있기를 바라며 보잘것없는 이 글을 많은 분들 앞에 내보인다."
저자가 서문에 쓴 글이다. 실제로 이 책을 읽다 보면 저자가 서문에서 바란 대로 사람들이 반응할 만큼 내용이 풍성하다. 스물여섯 달(2001년에 입대하여 2003년에 제대하였으니 스물여섯 달이 맞다) 동안 훈련병, 이병, 일병, 상병, 병장 순서대로 모든 계급을 달면서 자기가 겪은 거의 모든 일을 재미나게 스스럼없이 담아놓았다. 군대라면 사람들이 왠지 모르게 저절로 떠올리는 투박한 이미지를 살리려고 그랬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표지부터 투박하고 누런 종이(?)로 만들어져 있다. 거의 모든 쪽에 나오는 익살스러운 그림과 가끔씩 나오는 농담 반, 진담 반인 우스갯소리는 보는 사람들을 저절로 피식 웃게 하고, 군대에 가지 않은 이들이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덧붙여 놓은 주석도 흥미롭고 재미있다.
서른한 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계급에 따른 규율과 통제가 엄격한 조직 사회인 군대에 들어가 자기보다 훨씬 어린 선임들과 자기와 나이가 조금 젊거나 더 많은 초 • 중급 간부들을 모시가며 겪은 일들, 모든 현역들과 예비역들이 배를 잡으며 공감하기 마련인 군대에서만 볼 수 잇는 먹을거리와 풍경과 일상, 그리고 가장 중요한 휴가 나가서 겪은 일, 뭐 그런 것. 그리고 연예인이라는 분명히 특이한 경력을 지니고 군대에 들어가 홍보 병사로 활동하면서 겪은 온갖 이야기……이 모든 것들이 놓치지 싫을 정도로 매우 재미있다.
맛스타, 건빵, 쌀국수, 전투식량, 군대리아, 군대스리가, 행정관, 당직 사령, 보급관, 100일 위로 휴가, 포상 휴가, 정기 휴가, 주말 외박, 외출, 진급 신고, 당직병, 당직분대장, 짬밥……군대에 오지 않으면 단순히 군대에서 쓰는 단어로밖에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 모든 것들에 이미 나는 익숙해졌고, 지금은 상병들 가운데에서도 병장 진급까지 한 달밖에 남지 않은 가장 높은 위치에 올라 있다. 이런 때일수록 여유가 넘쳐서 졸병 때 하지 못했던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이 때 나는 모든 군인들이 적어도 한 번쯤은 그랬듯이 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반성해 보았다. 그러면서 내 가슴을 가장 절절이 울린 일은, 나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것들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했는지 깨달은 것이었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 아니겠는가? 인터넷 카페 가운데 군대에서 쓴 일기를 서로 나누며 군대에서 복무하던 시절을 회고하는 카페가 있다고 한다. 거기에서 활동하는 회원들도 군대에서 얻은 것 가운데 가장 가치가 있는 것으로, 지금까지 자기를 둘러싸고 있떤 환경과 그 속에 있던 모든 존재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어치가 있었는지 깨달은 것이라고 한다. 그 안에는 부모님과 주위 사람들에게 줄 훨씬 커진 사랑, 사소한 것에도 고마워할 줄 알고 상황을 긍정할 줄 아는 자세 같은 좋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군대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혹독하다 싶을 정도로 강한 통제와 교육훈련 때문에 땀과 피와 눈물을 흘리고 절망한다. 하지만 그 속에서 그들은 분명히 새로운 것을 얻는다. 단지 그들이 그리움과 절망 때문에 너무 상처를 많이 입어, 그 새로운 것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데 어려움을 겪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과연 어떠한가? 항상 돌이켜 보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정훈교육으로 군대에 들어올 때와 들어온 뒤에는 모든 이들이 평등하다고 아무리 강조해도, 사람들은 사회에서나 군대에서나 알 것은 다 알았고 볼 것도 다 봤기에 그 말을 믿지 않는다. 병역특례 비리를 저질렀다는 검찰 조사 결과를 인정하는 척하다가 막상 현역 입대 날짜가 다가오자 바로 본색을 드러내며 행정 소송을 거는 가수 싸이. 병역특례라는 혜택을 받은 뒤 그나마도 제대로 복무하지 않고 평소와 다름없이 삶을 즐기는 고위층 자제들. 이런 이들을 바라보며 군인들은 안 그래도 더운 날씨 속에서 '신의 아들'이라는 말이 여전히 통한다면서 더욱 심하게 짜증을 낸다. 분명히 안타깝고 화나는 일이다.
하지만 윤계상, 장혁, 지성 같이 군복무를 무사히 마치고 당당하게 세상에 나서는 연예인들도 있다. 그들 가운데 서경석 씨도 끼어 있다. 그렇기에 대한민국 남자로서 군복무를 떳떳하게 마쳤다고 자신 있게 이 책을 내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여러 프로그램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서경석 씨가 앞으로도 군대에서 얻은 모든 것을 토대로 모든 일에서 성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고 아직 군대에 오지 않은 이들에게는 군복무가 여러모로 힘들고 단점도 분명히 있을지언정, 자기가 정신만 똑바로 차린다면 얻어갈 수 있는 것도 매우 많으므로 이 책을 읽으면서 용기를 내기를 바란다. 나보다 더 어려운 시절에 군복무를 마친 수많은 예비역들에게는 진정으로 고생하셨다고 따뜻한 한 마디를 건네 본다. 나도 빨리 120쪽까지 일기를 쓴 뒤, 사회로 돌아가 서경석 씨처럼 책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작은 소망도 품어 본다. 그 때 나는 분명히 군대에 들어가기 전보다 훨씬 많이 자라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