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을 찾아 떠난 여행
엔리케 바리오스 지음, 황성식 옮김 / 나무심는사람(이레) / 1999년 11월
평점 :
절판


오랫동안 나는 인류 문명에 어딘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면서,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는 욕구도 더욱 뚜렷해졌다. 하지만 문명이 갈수록 복잡해지면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갈수록 복잡하게 얽히고 있으며, 그에 따라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것이 왜 일어났는지 알아내기도 더욱 어려워졌다. 그런 현실 때문에 내가 아는 것이 얼마나 부족한지 몇 번이고 몇 십 번이고 몇 백 번이고 거듭 깨달으면서 한숨을 쉬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와 같은 생각을 해 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문제가 무엇인지는 누구나 공감할 만한 결론이 나오지 않고 있다. 그렇기에 세상이 이토록 혼란스러운 것이리라. 인류 문명이이 지니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밝혀내고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백가쟁명이라는 고사성어로도 부족할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대자연 앞에 아무 것도 없이 알몸뚱이로 놓였을 때 그 어떤 생물보다 연약하기 짝이 없는 인류는, 문명을 건설하여 험한 자연을 자기들이 살기 좋게 바꿔놓았다. 하지만 문명이 더욱 발전할수록 자연은 더욱 심각하게 파괴되었고, 사람들은 자기들이 이성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일을 수도 없이 저질렀다. 자기 보금자리를 스스로 파괴하는 얼간이가 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문명이 돌아가고 발전하는 이치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는 지식인들이 이 세상에 수없이 많은데, 왜 완벽한 평화와 영원한 번영이 오지 않는가? 오히려 그들이 지니고 있는 지식이 핵무기 같은 무서운 재앙으로 돌변하여 문명과 인간 사회에 심대한 피해를 입히기도 하지 않았는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설득의 심리학'을 쓴 로버트 치알디니는, 사람들이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사람들은 단순한 근거에 따라 판단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는 요즘과 같은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매우 좋지 않다. 예전과 다르게 인류가 세상에서 살면서 어떤 판단을 내리는데 기본으로 필요한 지식이 매우 많아져서, 사소한 한두 가지 정보를 놓치는 것만으로도 완전히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말도 분명히 일리가 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이 그렇게 단순하게 판단하기 쉬운 경향을 보이면서도, 정작 단순하게 판단해야 할 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인류가 지금까지 지구에서 문명을 이루고 유지하는데 엄청나게 중요한 구실을 했던, 사랑과 믿음과 존중 같은 보편 가치는 갈수록 심하게 빛이 바래고 있다. 그런 것은 지식과 정보로 사람들이 일부러 공부해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굳이 애써 설명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서로 돕는 사람 사는 세상에 살면서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그렇게 이해한 사람은 이해한 바를 실천으로 옮기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문명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명이 갈수록 복잡해지고 그 속력도 빨라지면서 문명을 유지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과 정보가 예전과는 견줄 수도 없을 정도로 빨리 늘어나기 시작했다. 인류는 문명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으므로 어쩔 수 없이 그 정보와 지식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고, 그 모든 것을 공부하는데 더욱 많은 힘을 쏟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지식과 정보가 문명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인류를 화합하는데 쓰이는 수단이라기보다, 생존 경쟁에 필요한 도구로서 지니는 가치만 인정받는 경향이 갈수록 뚜렷해졌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오로지 경쟁자를 무찌르고 살아남는 것만이 가장 훌륭한 가치로 인정받는다. 그런 풍토에서 자라나는 문명은 인류애 같은 보편 가치에서 우러나오는 힘(Power)이 아닌, 상처와 억압과 절망 따위에서 나와 상대를 해치려고 하는 억지로 이루어진 힘(Force : 이하 억지력)을 지닌다.

 

그 억지력을 키우고 살아남고자(?) 사람들은 계속 지식과 정보를 생산하고 소비했고, 그러면서 문명이 더욱 굳건해져 인류에게 더욱 많은 번영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지식과 정보가 생산하는 물질과 부 덕분에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지만, 정작 그것을 얻고자 사람들은 끝도 없는 잔인한 경쟁에 한평생 시달리게 되었다. 사람을 살리는 문명이 아니라 사람을 가둬놓고 죽이는 문명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속에서 지식과 정보는 더는 인격과 애정을 뜻하지 않는다. 인류를 수십 번이고 얼마든지 멸망시킬 수 있는 무기가 이 지구에 있으며, 누구를 어떻게 사랑하고 감싸안아줄 것인지 고민하는 이는 그토록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찾기가 힘들다. 그토록 사람 사이 관계가 살벌해진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인류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보편 가치를 더는 자연스레 몸에 익힐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은 오늘도 어떻게든지 남을 물리치고 내가 살아남고자 어떤 것을 공부하여 자기를 개발할 지 고민한다. 흔히 부모님들이 자식에게 많이 하는 말 가운데 '공부해서 남 주나'라는 말이 있다. 그 속에는 생존경쟁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처한 끔찍한 현실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이들을 이 책에 나오는 두 주인공 가운데 하나인 아미(Ami)는 진보지수가 너무 낮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치켜세우는 이들 대부분이 지식과 정보로 이루어진 억지력으로 무장하고 있기에, 결국은 인류 전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이들이라는 뜻이다. 나중에 인류가 쌓아올린 문명이 결국 스스로 무너질 때, 진보지수가 적어도 700이 넘는 사람들만 외계인들이 구해 사랑과 존중 같은 진정한 힘으로 이루어진 문명을 건설할 기회를 다시 준다고 한다. 지금까지 지구에서는 현생 인류가 건설한 문명보다도 훨씬 발달한 문명이 몇 번이고 나타났지만, 모두 사랑이라는 보편 진리를 무시하고 스스로 진보지수를 깎아내리며 서로를 죽였기에(!) 모두 멸망해 버렸고, 그 속에서 진보지수가 높아 선택받은 이들은 우루 여러 곳에서 새로운 문명을 건설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진보지수가 10000이 넘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 지니는 모든 한계를 뛰어넘어 오로지 사랑과 순수만으로 이루어진 초자연 존재라고 봐도 좋은 이들로서, 이들은 환경에 제약을 받지 않고 어디에서든지 살 수 있다고 한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대부분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읽거나 들으면 코웃음을 칠 것이다. 얼핏 보기에도 황당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순수한 상상으로만 내용이 이루어진 그야말로 동화로밖에 볼 수 없는 이 동화 '별을 찾아 떠난 여행'에 나오는 말이다. 이 책은 출판사에서 여러 번 퇴짜를 맞는 고난을 거듭한 끝에, 일단 출판되자마자 중남미에서 매우 크게 뜨기 시작한 뒤, 지금까지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베스트셀러'와 '스테디셀러'라는 말에 너무 익숙한데다가, 중남미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중동이나 아프리카만큼이나 생소한 곳이기에, 이 동화가 지니는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그다지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기독교도가 유난히 많은 나라 가운데 하나인 우리나라이기에 이 한 마디면 충분할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가 읽고 극찬하며 저자인 엔리케 바리오스에게 축복을 내렸을 정도로, 이 동화는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인정받았다. 도대체 그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주인공 뻬드로는 바닷가를 거닐다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미확인 비행물체(UFO)를 본다. 그 물체는 엄청나게 밝은 빛을 내면서 바다로 곧장 떨어진다. 그 안에는 한 아이가 타고 있었는데, 뻬드로에게 다가온 그 아이는 뻬드로가 전혀 믿을 수 없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안 그래도 황당한 이야기에 질려버린 뻬드로는, 그 아이가 자기보다 나이가 훨씬 많다고 하면서 외계인이라는 사실까지 당당히 밝히자 그저 기가 막힐 뿐이다. 그러나 그 외계인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뻬드로는 묘한 친근감을 동시에 느끼고, 그 외계인은 자기를 '아미'라고 불러달라면서 함께 자기 우주선을 타고 여행하자고 제안한다. 이미 그 외계인을 경계하지 않게 된 뻬드로는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신비로운 여행을 시작한다.

 

그 여행 속에서 뻬드로와 아미가 나누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소중한 진리를 일깨워 준다.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위기는 절대 낙관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지금까지 사람들 사이에 너무 많은 갈등이 쌓였고, 억지력은 너무 강해져 아무리 철저하게 통제해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처럼 위태롭고 불안하고 제멋대로다. 이 절체절명인 위기를 벗어나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쥐어짜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 따르면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사람들이 고안하는 방법 자체가 틀렸다. 방법은 단 한 가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뻬드로가 할머니에게 이 세상을 지켜나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인 '사랑'뿐이다.

 

생각해 보자. 지금 온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군비 경쟁이 이 동화에 나오는 진보지수를 얼마나 높일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은 군비 경쟁으로서 군사력 균형을 이뤄야 결국 세계 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생명, 그 가운데 사람이 지닌 생명은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고 한다. 그런 생명을 빼앗는데 쓰이는 무기를 더욱 강하게 발전시키고 더욱 많이 보유하려고 하는 것이, 인류애라는 숭고한 차원에서 얼마나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사람을 죽이는 그 행위 자체뿐만 아니라 사람을 죽이고자 칼을 가는 행위도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이다. 핵물리학을 전공하여 핵폭탄을 제조하는 연구를 하는 뻬드로의 삼촌을, 뻬드로는 진보지수가 매우 높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미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논리로 뻬드로의 삼촌은 진보지수가 매우 낮다고 판단한다.

 

시간과 공간을 마음대로 넘나들며 환상 여행을 즐기고 돌아온 과정을 일일이 적을 필요는 없다. 여행을 마치고 아미와 헤어진 뻬드로와 할머니가 나누는 이야기에 주목해 보자. 할머니는 이 세상을 지키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는 걸까? 아무리 사람들이 살아남는데 필요했기에 부정정보를 더욱 잘 받아들이도록 진화했다는 심리학 가설이 설득력이 크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인류에게 반드시 필요한 보편 가치가 갈수록 힘을 많이 잃고 있다는 결론은 이해하기가 힘들다. 사이코패스처럼 마음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사랑, 믿음, 존중 같은 훌륭한 가치들이 사람이 사는데 가장 중요한 것들이라는 사실조차 모를 까닭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과연 그들이 그걸 알고 있는 것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이 세상을 휘어잡은 피도 눈물도 없는 끝없는 경쟁 속에서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심지어 그런 현실을 이치에 맞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자 온갖 논리를 고안하지 않는가? 얼마나 어이없는 일일까?

 

결국 현대 사회라는 너무나도 거대하고 강한 괴물 속에서 개인은 한없이 나약한 존재이며, 그 안에서 끝도 없는 너무 거센 공격을 받은 현대인들은 의식 구조 자체가 무너져 버렸다. 올바른 의식 속에서나 단단히 뿌리내려 힘을 쓸 수 있는 사랑이, 무너져 버린 의식 구조 속에서는 어떻게 되겠는가? 이 괴물 같은 사회는 무너진 의식 구조에 사랑이 단단히 뿌리를 내리도록 도와주지 않는다. 오로지 사람들을 갈수록 심해지는 경쟁 속으로 몰아넣고자 발악할 뿐이다. 그에 따라 인류 속에 숨어 있는 광기는 드러날 때마다 그 전보다 훨씬 강해지고 끔찍해지고 있다. 이러다가는 그 광기가 인류를 아예 종말로 몰아넣을 것이다.

 

그 광기를 억누르는 방법은 이 책이 내리는 결론대로 단 한 가지, 사랑뿐이다. 우리는 살아남고자 정 따위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억지로 끌어내는 힘(Force)이 아닌 사랑에서 스스로 우러나오는 힘(Power)를 내뿜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그러려면 내가 하는 모든 일이 결국 남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인지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로자 룩셈부르크도 말했듯이 세상은 너무나도 끔찍할지언정 그래도 여전히 정말 아름답다. 우리는 정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경쟁에 시달리면서도, 일상에서 사람들이 사랑을 실천하면서 그런 아름다움을 창조한다는 사실을 여전히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아무리 밝은 전망을 부정하는 견해가 판치더라도 인류에게는 여전히 희망이 있다고 작가는 믿고 있을 것이다. 그가 이 책을 쓰고자 마음먹는 동기가 된 칠레 해안가에서 겪은 초자연 체험도, 결국 지구뿐만 아니라 좀 더 큰 차원인 우주로까지 사랑이라는 진리가 통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이 동화가 그저 황당무계하다는 비난에서 벗어나 많은 사람들에게서 인정받고, 심지어 교황마저 작가에게 축복을 내렸으리라.

 

답은 이미 나왔다. 아니 나왔다는 표현도 적절하지 않다. 사람들은 원래 답을 알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수 천 년 동안 인과 관계와 동기에 따라 발전한 현대 문명 속에서 무한 경쟁이라는 끔찍한 논리가 등장했다면, 그 논리를 뒤엎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면 반드시 사회주의가 떠오른다는 것이다. 러시아 혁명이 실패작으로 판명되면서 사회주의는 영원히 매장당할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측했고,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이념 대립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여전히 명맥을 잇고 있고, 여전히 이 세상 곳곳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특히 이 동화가 처음으로 인기를 끈 중남미에서 사회주의가 여전히 강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와 연관하여 이 동화 안에 숨어있는 것을 생각해 보는 것도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어쨌든 우리도 아미가 말하는 진보지수가 높은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외계인들이 선택받은 자들만을 골라 구출하기 전에, 문명이 멸망하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 지켜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이성뿐만 아니라 사랑이라는 훌륭한 본능을 지닌 사람이기 때문에,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그런 결론을 내렸으니 나는 어떤지 돌이켜 보고 반성해야겠다. 나는 지금까지 내 주위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그들에게 좋은 기억을 남겼는가? 두고두고 성찰해야 할 것이다. 언제 아미가 내 앞에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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