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화려한 휴가 - May 18
영화
평점 :
상영종료
2008년 부산대학교 시월제 때 우연히 볼 수 있었던 영화다. 원래는 시월제 기념으로 10월 7일에 열리는 강연회에 영화 '화려한 휴가'와 연속극 '뉴하트'에서 호평을 받은 영화배우 박철민이 온다고 해서 강연을 들으러 간 거였다. 일단 약간 늦게 강연회장인 부산대학교 10.16 기념관 안으로 들어갔더니, 기대했던 박철민 목소리가 들려오기는 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실제로 박철민이 온 게 아니라 영화를 틀어놓은 것이었다.
속사포 같은 사투리를 퍼부으면서 주인공 민우(김상경 분)에게 연애 상담을 해 주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일단 웃었다. 동생 진우(이준기 분)와 같은 성당에 다니는 간호사 신애(이요원 분)를 짝사랑하는 민우가 벌이는 촌극을 보면서 또 웃었다. 성당 야유회에서 진우가 민우를 골탕먹이는 장면에서는 폭소가 터졌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분통 터지는 잔인한 장면들, 그 속에서 죽어가며 피를 흘리고 그들을 바라보며 생지옥 속에서 눈물을 흘리는 이들을 바라보면서는 울 수밖에 없었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과에서 벌어진 대소동 때문에 기분이 울적했는데, 시종일관 계속 되는 너무나도 슬픈 장면 때문에 결국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다. 한 번 흘린 눈물은 조금만 슬픈 장면이 나오면 무조건 흘러나왔다. 신애(이요원 분)가 을씨년스러운 광주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절박하게 외치는 목소리는 심장을 쥐어짜다 못해 도려내는 듯했다.
독재 정권을 타도하고 미제에서 민족을 구원하자고 일어섰던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 학생들 말고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그저 순박하게 살고 있던 광주 시민들은 공수 부대가 광주 시내를 휩쓸기 시작한 뒤부터 전두환 군사 독재 정권이 일삼는 미친 짓에 희생양이 된 것을 알아차렸다.
사실대로 이야기하자면 그들은 자기들이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자기들이 왜 폭도로 매도당하고 있는 지도 몰랐다. 설사 북한에서 내려보낸 특수부대가 개입했다 하더라도, 공수 부대가 그 따위로 광주 시민들을 무지막지하게 폭행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해서는 안 되었다. 테러리스트들이 도사리는 근거지를 소탕한다는 명목 아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한 미군이 전 세계에서 쏟아지는 비난에 시달린 까닭도 아무 죄도 없는 민간인을 작전에 방해가 된다는 까닭으로 마구잡이로 죽인 탓이요, 사담 후세인 또한 욕을 똥 바가지로 얻어먹은 까닭 또한 민간인을 미군에게서 아군을 보호할 방패막이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폭도들을 소탕하러 왔다면 선량한 광주 시민들 사이에 숨어 있는 폭도를 찾아내려고 힘써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다. 그 당시 작전을 지휘한 장교들이야 작전 계획에 따랐을 뿐이며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민간인으로 위장해서 공작을 벌이고 있었다고 항의할 수도 있다. 그것은 국민에게 신뢰받고자 하는 국군으로서 할 말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대들면 무조건 두들겨 패고 죽여도 좋다는 식으로 전두환이라는 살인마에게 충성을 다한 주구였을 뿐이다.
4.3 사태 때도 공산주의자들을 소탕한다는 명목 아래 양민들을 무작정 잡아 죽이고 민가를 약탈한 군인들이 양민 학살자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때 북한 특수부대를 진압한다는 명목 아래 독재 타도를 외치던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무고한 시민들까지 사살한 군인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자기들에게 대항했다고 무작정 폭도로 몰아붙이고 다 죽여도 된다고 일갈하는 장군을 보라.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한 대가로 어깨에 달은 그 별이 자랑스러운가? 그가 대한민국을 지키는 자랑스러운 군인으로 보이는가?
하긴 수구 세력은 항상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게 나라를 지키려면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으며, 그 장군이야말로 그런 고뇌 속에서 꿋꿋하게 임무를 완수한 참군인이라고 했다. 내가 해병대에서 복무하면서 정훈 교육을 귀가 솔 정도로 받으면서도 그 논리를 생각하기만 하면 저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참군인 정신이라는 게 대한민국이 처한 일그러진 현실 속에서는 얼마나 비틀어지고 악용되었는지 빤하지만, 정훈 교육 자료에서는 절대로 드러나지 않고 인정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올해 터진 '불온서적 지정' 논란과 '교과서 개정 요구' 논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작 국방부에서 국군을 지휘하고 있는 장군들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어쩔 수 없었다는 소리만 늘어놓으면서, 너무나도 억울해 피를 토하고 절규하는 피해자들과 유족들이 내는 목소리에는 귀를 닫았다. 국군은 지난 과오를 반성하고 새롭게 거듭나고 있다는 정훈 교육 내용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하긴 경찰도 새롭게 달라지겠다고 경찰서 입구마다 간판을 붙여 선전하면서 보여주는 꼴이, 이명박 정권 아래에서 시민들을 탄압하는 충실한 주구가 되는 것이었는데, 그보다 더한 보수 세력인 군대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명박이 그래도 최소한 양심은 남아 있는지 이 영화에서처럼 반정부 시위를 진압하는데 군대를 동원하지는 않아서 천만다행이다. 안 그래도 맨손인 시위대를 해산시켜 체포하려고 물대포를 쏘며 한 걸음 한 걸음 위풍당당하게 전진해 오는 전경들을 보면서도, 저들이 폭력 경찰로서 시위대 앞에서 저렇게 당당해질 수 있는 까닭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면서 한탄했던 터였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아무 무기도 들지 않고, 군인들이 실탄을 장전한 M-16 소총을 들고 있다는 것에 비추어 볼 때 화염병과 돌멩이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곤봉을 들고 달려오는 진압 부대에 대항하고자 화염병과 돌멩이를 던진 광주 시민들에게 폭도네 빨갱이네 온갖 오명을 씌우는 이들을 보면서 떠오르는 것이 있다. 국민들이 아무리 촛불 문화제를 지키면서 평화롭게 목소리를 높여도 귀를 닫고 있다가, 도저히 참지 못한 국민들이 거리로 나서자 그들을 일제히 폭력 시위꾼으로 몰아붙이기 시작하며 폭력 비폭력 논란을 조장하고 법치를 천명한 이명박 정권과 수구 언론과 어쩌면 그렇게 닮았을까.
공산주의자들이 있었다는 사실, 심지어 있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만으로 꿔다 놓은 보릿자루와 같은 주장을 펼치는 이들이 대한민국에 너무나도 많다. 그 주장이 대한민국에서 권력 위에 올라타면서 궤변은 폭력으로 둔갑했고, 수많은 국민이 그 폭압 아래 희생당했다. 5.18은 그 극악무도한 국가 차원 범죄가 낳은 한 가지 끔찍한 비극일 뿐이다. 그리고 분명히 현재진행형이다. 그 비극을 일으킨 세력은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활개를 치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들은 자기들에게 대항하는 세력을 좌익 폭도로 매도하며, 그에 놀아나는 이들은 민주주의를 쟁취하려는 움직임에 찬물을 끼얻는다.
이 비극이 영화로서 대한민국에서 빛을 보게 한 장본인인 전두환 전 대통령은 여전히 거들먹거리면서 대한민국에 버젓이 살아남아 있다. 그러면서 그를 비난하는 젊은이들에게 자기에게 당해보지 않아서 욕이 나오는 거라는 망언을 내뱉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살인마와 일왕에게 열심히 고개를 숙이며 역겨운 미소를 짓는 이명박이라는 작자가 대통령으로 올라앉아 대한민국을 말아먹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서울교회에서 목사 자리 맡고 있는 이종윤이라는 작자가 5.18 사태에 북한 특수부대가 투입됐다'고 설교 시간에 대놓고 주장했다는 소식을 듣고 치밀어 오른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다. 분노를 원동력으로 삼아 쓴 글은 논리가 잘 들어맞지 않는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것이라도 너그러이 넘어가고 싶다. 상식이 통하지 않고 엉망진창인 대한민국 현실을 삐딱하게 바라보면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여기고 싶기 때문이다.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역사를 반성할 줄 모르는 국민들이 낳은 뼈저린 현실은, 엄청난 자충수라는 사실을 증명하며 국민들을 더욱 깊은 수렁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청년인 해야 할 일은 분명히 정해져 있다. 아무리 두렵다고 하더라도 가야 한다. 그러고자 나는 오늘도 보이지 않는 채찍을 든다. 그리고 힘껏 내리친다. 아프다. 하지만 거부할 수는 없다. 다시 5.18 항쟁과 같은 대규모 항쟁이 벌어진다면, 나도 민우처럼 기꺼이 무기를 들 수 있을지 깊은 밤에 잠을 못 이루면서 고민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