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마, 톤즈
영화
평점 :
상영종료


1. 마태복음 4장에 예수께서는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나가 40일 동안 금식하며 오로지 기도만 하시면서, 하느님이 주신 시험을 통과하려고 하셨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때 마귀가 나타나 광야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유혹했지만, 예수님은 그에 넘어가지 않으시고 오로지 하느님에게 바치는 믿음만으로 유혹을 물리치셨다.

 



이 거룩한 복음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사람들이 대개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마귀가 처음부터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기도를 그만두라고 꾈 때 가장 먼저 제시한 것은 빵과 물이었다. 빵과 물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손아귀에 넣게 해주는 금권과는 견줄 수도 없이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하찮게 여기기 쉽고 그 정도야 얼마든지 나누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마귀는 그 하찮은 것을 무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유혹하는 첫 수단으로 삼았다. 예수님은 그 첫 유혹을 물리치신 뒤, 결국 이 세상을 모두 마음대로 가질 수 있는 권력욕까지 뿌리치고 마귀를 물리쳤다.

 



여기에 담긴 뜻은 절대 가볍게 넘길 수 없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보여주는 모습에서 우리는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무려 40일 가까이 단식하면서 육신이 죽음에 이를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그 보잘것없는 빵과 물이 주는 달콤한 유혹에 굴복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그 어느 것도 부족하지 않은 데도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눠서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기는커녕, 하찮은 유혹에 쉽게 굴복해 자기도 망치고 더 나아가 수많은 피해를 끼치는 사례를 우리 주변에서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찮은 유혹에도 그렇게 무참히 짓눌려 버리는데, 하물며 자기가 지니고 있는 욕망을 목마를 때 마시는 시원한 포도주와도 같이 해소해 줄 수 있는 유혹이 다가올 때 인간이 얼마나 나약해지는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와 같이 가장 쉬워 보이는 일이 가장 어렵다는 모순 같은 진리는 인간이 지닌 본성 때문에 성립한다. 항상 나누는 선행을 베풀어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도, 막상 지하철 환승통로에서 적선을 바라는 불쌍한 거지에게 500원짜리 동전 하나 던져주기도 아까워하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500원짜리 동전 하나도 그렇게 아까운데 남들에게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고 할 때 선뜻 나서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지는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하느님이 말씀하신 에덴동산은 말 그대로 유토피아로밖에 남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다.

 



하지만 ‘울지마 톤즈’에서 주인공인 이태석 신부는 인간도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나 유혹 앞에서 강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수단으로 가려는 결정을 하는 그 순간에, 수단으로 떠나는 길에서, 수단에서 온갖 고초를 겪을 때마다 마귀가 나타나서 온갖 방법으로 유혹을 일삼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았고, 그 유혹을 뿌리치고 수단 사람들에게 자기를 바치는 순간 그는 예수님이 되었다. 그 광휘를 보면서 눈앞이 아찔해지고, 내 삶이 지닌 어두운 면이 더욱 도드라지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 없다. 우리는 그를 보고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는 이미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단지 우리 주변에 있는 마귀를 얼마나 잘 물리치는지가 문제일 뿐이다.

 

 

2. 필자가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가진 고민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무엇인지 굳이 생각해 보자면, 과연 어떻게 해야 신이 세상에서 구현하려는 바를 본인이 온전히 실천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대개 그런 고민을 하게 되는 가장 큰 까닭은 보나벤투라가 이야기했듯이, 이 지구에서 신의 형상을 타고난 존재가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신 앞에서 인간은 더없이 보잘것없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간을 보잘것없게 만드는 것은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떨치기 힘든 욕망과 그를 자극하는 유혹이다. 신학자들은 신을 알면 알수록 자기에게 주어진 막중한 사명감과 인간으로서 반드시 지니고 있는 욕망과 유혹 사이에서 더욱 깊게 고뇌하게 된다. 보통 사람들은 대개 그 욕망과 유혹에 저항하면서 신이 추구하는 바를 이해하려고 하지만, 그 일은 절대 쉽지 않다. 단순히 저항하는 일도 그렇게 힘든데, 자기 존재를 버려가면서까지 신이 지닌 의지를 보여주려는 시도는 역사에서 여러 차례 나타나기는 했지만, 그 가운데 누구에게든지 인정받을 수 있는 실천과 희생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만큼 어렵고 힘든 것이기에 그 실천과 희생을 보여준 존재는 칭송받아 마땅한 것이다.

 



얼마 전에 ‘울지마 톤즈’를 봤다. 절대 울지 않기로 유명한 딩카족과 마찬가지로 나도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는 이 영화를 보면서도 약간 과장하자면 눈 한 번 깜빡거리지 않고 끝까지 화면 앞에 버티고 있었다. 심지어 딩카 브라스 밴드가 이태석 신부 사진을 들고 행진할 때 딩카족 사람들마저도 눈물을 흘렸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영화를 다 본 뒤 왜 눈물이 나지 않았는가를 생각해 보면, 이태석 신부가 보여준 그 위대한 행보에 완전히 압도당했기 때문일 것이다. 신 앞에서는 너무나도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사실은 교인이 아니더라도 이미 인식하고 있지만, 같은 사람이라도 그 숭고함에 사로잡혀 꼼짝도 할 수 없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를 보면서 깨달았다.

 



자기에게 주어진 재능이 하느님이 내려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그리고 자기가 신에게 귀의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신이 지닌 의지를 구현하는 가장 참된 방법을 알고 있었기에, 이태석 신부는 주저하지 않고 남수단에 있는 톤즈 마을로 떠났다. 척박하고 험난한 아프리카 시골 마을에서 그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쳤다. 스스로 원하신 최후의 날이 다가오자 빵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희생을 예고하신 예수님처럼, 이태석 신부도 자기가 지닌 재능으로 얼마든지 인정받고 안락한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 신에게 자기에게 준 사명감을 믿고 그 믿음만으로 광야에 뛰어들어 에덴동산을 개척했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로 나가 40일 동안 금식하며 오로지 기도만 하시면서, 하느님이 주신 시험을 통과하려고 하셨다. 이 때 마귀가 나타나 광야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유혹했지만, 예수님은 그에 넘어가지 않으시고 오로지 하느님에게 바치는 믿음만으로 유혹을 물리치셨다. 이태석 신부에게도 수단으로 가려는 결정을 하는 그 순간에, 수단으로 떠나는 길에서, 수단에서 온갖 고초를 겪을 때마다 마귀가 나타나서 온갖 방법으로 유혹을 일삼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았고, 그 유혹을 뿌리치고 수단 사람들에게 자기를 바치는 순간 예수님이 되었다. 그 광휘를 보면서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 정도로 나는 철저하게 욕망에 찌든 평범한 인간일 뿐이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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