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 밑 아리에티 - The Borrower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어릴 때 집에서 '세계전래동화전집'을 골방에 틀어박혀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그 책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엄지공주'라는 동화가 있었다. 아이가 없던 여자가 하늘에 빌고 빌어서 엄지손가락만한 여자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다가 어느 날 그 미모에 반한 두꺼비에게 납치되면서 벌어지는 온갖 이야기를 다뤘다. 두꺼비와 결혼하는 것이 상상만 해도 끔찍했던 엄지공주는 간신히 두꺼비집에서 탈출한다. 한동안 자연 속에서 꿀과 이슬을 먹고 살다가 겨울이 오자 꼼짝없이 얼어죽을 위기에 처하는데, 들쥐 아줌마가 쓰러진 엄지공주를 구원해 준다. 그런데 이 들쥐 아줌마도 엄지공주를 구원해 준 대가로 그녀에게 이웃집에 사는 부자(?) 두더지 아저씨와 결혼하라고 한다. 또 결혼이 끔찍해진 엄지공주는 들쥐 아줌마 집에서도 탈출해서 봄꽃이 활짝 핀 꽃밭으로 가는데, 거기에서 나비들과 어울리는 꽃의 요정들을 만난다. 그 요정들의 왕자를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하면서 이야기가 끝난다.
 

이 만화 '마루 밑 아리에티'를 보기 전에 나는 10cm밖에 안 되는 진짜 소녀(小女)가 나온다는 홍보영상을 보면서, 예전에 읽었던 그 동화 '엄지공주'를 잠시 떠올렸다. 하지만 예전에 읽었던 동화 내용을 되새겨 봐도 소인이 나온다는 것 말고는 그 어떤 공통점도 찾을 수 없었다. 싱그러운 자연이 아닌 어두침침하고 지저분한 마루 밑에 사는 소인. 꿀과 이슬을 먹으면서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소인이 아닌, 인간들에게서 꼭 필요한 만큼만 모든 생필품을 빌려서(?) 살아가는 소인. 그녀가 꾸려가는 삶을 그려냄으로써 미야자키 히야오는 사람들에게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인지 궁금해졌다. 미야자키 히야오가 지난 작품 속에서 꾸준히 이야기했던 '공존'이라는 주제가 이 작품 안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것인지도 궁금해졌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공존'이라는 핵심은 이 작품 안에서도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단지 예전 작품들과 견주었을 때 이 작품은 심심하다 싶을 정도로 특별한 내용이 없이 담담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게 처음에는 흠으로 느껴졌을 뿐이다. 정말 영화를 다 본 뒤 든 처음 생각은 그랬다. 영화를 보면서 내가 기대했던 어떤 특별한 이야기나 행복한 결말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소인족이자 주인공인 아리에티는 부모님과 함께 어느 마루 밑에서 사는 14살 소녀인데, 어느 날 그들이 사는 집에 집주인 손자인 12살 인간 소년 쇼우가 요양을 오고, 인간에게 정체를 들킨 아리에티가 결국 부모님과 함께 정든 집을 떠난다는 게 전부다. 놀라울 정도로 돋보이는 친근하고 싱그러운 자연 풍경 묘사, 도시에서는 절대 기대할 수 없는 맑고 고운 자연 소리, 걸리버가 브롭딩넥에 간 것과 같은 상황을 묘사하는 탁월한 시각과 청각 묘사, 그리고 영화 전반에서 등장하는 감미로운 음악이 내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지만, 영화를 본 그 날은 정말 그것 말고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심해진 궁금증만 안고 단칸방으로 돌아왔다.

 

고시원으로 돌아온 뒤에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내가 도대체 무엇을 기대하면서 이 작품을 봤는지 이해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정말 그게 다였는가? 쇼우는 아리에티를 보면서 아름답다고 감탄하고 아리에티도 소년에게 차츰 마음을 열지만, 왜 결국 그 열린 마음에서 싹트는 사랑을 아주 잠시도 나누지 못하고 그렇게 떠나야 했을까? 아리에티가 살고 있는 집에 살았던 인간들은 소인들과 공존하고 싶어서 집까지 만들어 놓고 소인들을 기다리지만, 왜 소인들은 인간들과 결국 어울리지 못하고 떠나야 했을까? 왜 이렇게 허무한 이야기를 90여 분 동안 이어나갔을까?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나는 미야자키 히야오에게는 훌륭한 관객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그는 이 작품에서 항상 소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강조했지, 인간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지 않았다. 거기에 미야자키 히야오가 이야기하는 핵심인 '공존'이 어떤 뜻인지를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는 단서가 숨어 있었다. 나는 철저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 관점에서 작품을 감상하고 이해했던 것이다. 인간이 베푸는 호의를 왜 소인들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으려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소년에게 마음을 연 아리에티가 아빠와 엄마를 설득해서 인간들을 이해해 보자고 설득해서 결국 다시 엄마가 좋아하는 예전 집으로 돌아오고, 쇼우가 심장병 수술에 성공한 뒤 기뻐하면서 소인들을 인형의 집으로 초대해 함께 살자고 하고, 그 뒤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을 꿈꿨다.

 

하지만 그야말로 그것은 철저하게 인간 관점일 뿐, 소인들에게는 터무니없는 소리일 뿐이었다. 꼭 필요한 만큼만 훔쳐 쓰는 것이 아니라 빌려 쓸 뿐이며, 인간에게는 절대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 인간에게 들키지 않고 그 작은 세상에서 생명을 유지하면서 인간과 같이 가족을 이루고 행복한 삶을 살면 그만이다. 인간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소인들은 얼마든지 자기들만의 보금자리를 꾸미고 살 수 있으며, 인간들은 소인들의 보금자리를 품은 집 안에서 얼마든지 방해받지 않고 안락을 누릴 수 있다. 서로 간섭하지 않으며 특성을 인정하는 것을 넘어 서로를 인지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리에티가 쇼우를 바라보면서 인간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얻었다고 해서, 소인족들이 지키는 철칙을 깰 수는 없었다. 67억이나 되는 인간은 결국 소인 눈에는 가정부 할머니와 같이 자기들을 희귀한 벌레를 잡아서 관상용으로 삼으려는, 곧 자기들 생각밖에 할 줄 모르는 위험한 존재들로밖에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인들이 누리는 행복을 인정할 줄 모른다. 그렇기에 안 그래도 두꺼비, 바퀴벌레, 생쥐, 까마귀 같은 온갖 자연 속 위험에 시달리면서 힘겹게 살아온 소인족이 사람들마저도 두려워해야 하고 피해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삶을 포기하는 것도 아니다. 왜 쇼우가 아리에티에게 그렇게 무시무시한 말을 했는지는 오랫동안 생각한 뒤에야 알 수 있었다. 쇼우는 심장병 수술에 실패하고 죽을 것이라는 체념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문제가 있는 부모에게서 제대로 된 사랑도 받아보지 못한 불쌍한 소년으로서, 삶에 애착이 그다지 크지 않다. 그런 마당에 아리에티에게 자기 가족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라고는, 자기가 곧 맞닥뜨릴 죽음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리에티는 그동안 자기들은 어떻게든지 열심히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소리친다. 그 말을 들은 쇼우는 큰 깨달음을 얻는다. 자기와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67억 명이나 있다고 한들, 자기가 살아있지 않은 세상은 자기에게 아무런 뜻이 없다. 그와 반대로 비록 종족이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한들, 아리에티 자기가 살아있다면 여전히 이 세상은 살아갈 가치가 있다. 게다가 자기 가족뿐만이 아닌 다른 소인족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세상을 등져야 할 까닭이 전혀 없다. 어떻게든지 살아서 자기가 원하는 행복으로 가득 찬 새로운 세계로 가야 한다. 만약 그런 세계가 없다면 자기가 사는 세계를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그 징표로서 쇼우는 아리에티에게 각설탕을 선물하고, 아리에티는 쇼우에게 자기 머리를 묶는데 쓰는 빨래집게를 선물한다. 예전에 조상님이 만들어 놓은 인형의 집과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큰 진정성이 담긴 선물이다. 인간과 소인이 공존할 수 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하지만 더는 쇼우와 함께 있을 수 없게 됐다. 주전자를 타고 강 따라 흘러가 새로운 세계로 떠나야 한다.

 

어느 시인은 가야 할 때를 아는 자가 보여주는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답느냐고 탄성을 내질렀다. 가야 할 때를 아는 자와 마찬가지로 보내야 할 때를 알고 보내주는 사람이 가진 가슴은 얼마나 순결하고 아린가. 기대했던 일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나누지 못하고 간직한 사랑은 더욱 슬프다. 태양 아래에서 꽃에 둘러싸인 채 사랑하는 이와 함께 지내고 싶지만, 서로 행복하려면 보내줄 수밖에 없다면 기꺼이 보내줘야 한다. 추억을 마음 속에 담아두고 각자 자기답게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공존이다. 이 세상에 정말 공존하고 있는 존재가 과연 얼마나 될까. 아리에티와 쇼우 같이 안타까운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안 나던 눈물이 났다. 오래오래 고이 흘렸다.

 

 

 



Arrietty's Song(Theme Song) - Cecile Cobel

 

 

I'm 14 years old, I'm pretty
나는 14 살, 나는 예쁘지

元気な小さな lady
힘이 넘치는 조그마한 숙녀

床下にずっと借り暮らししてたの
마루 아래에서 계속 빌려살기를 했지


時にはHaapy,時にはBlue、
어느 때는 happy, 어느 때는 blue

誰かに合いたい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風、髪に感じて空を眺めたい
머리카락으로 바람을 느껴서 하늘을 쳐다보았지

あなたに花届けたい
너에게 꽃을 전하고 싶어


向こうは別の世界
건너편은 또 다른 세계

ほら蝶々が舞ってる私を待っている
봐봐, 나비들이 날아다니고 있어, 나를 기다리고 있어


そう、変わることのないわたしの小さい世界
그래, 변할 것 없는 내 조그마한 세계

嫌いじゃないのでもあなたを
싫어하는 것은 아니야, 그래도 그대를

もっともっと知りたくて
좀 더, 좀 더 알고 싶어서


喜びと悲しみはいつも折り混ざってゆく
기쁨과 슬픔은 언제나 서로 섞여서 갈 뿐


風、髪に感じて空を眺めたい
머리카락으로 바람을 느껴서 하늘을 쳐다 보았지

あなたに花届けたい
너에게 꽃을 전하고 싶어


向こうは別の世界
건너편은 또 다른 세계

ほら蝶々が舞ってるあなたを待っている
봐봐, 나비들이 날아다니고 있어, 너를 기다리고 있어


太陽の下で花に囲まれて
태양 아래에서 꽃에 둘러싸인 채

あなたと日々過ごしたい
너와 함께 지내고 싶어

この想いを胸に新しい世界で
이 추억을 마음에 넣어두고 새로운 세계로

私らしく生きる
나답게 살아갈 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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