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살 것인가 말 것인가.
이와 같이 도발적이고 한편으로는 해묵은 질문(질문이 해묵은 것과 답변이 명확한 것은 별개다)으로 시작해 카뮈는 어디에 도달하고자 한 것일까.
카뮈가 자살을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로 삼아 거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인간은 결국 죽어 없어질 뿐인데 도대체 삶의 의미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이러한 인식은 새로울 것도 없다. 불교 신자가 아닌 나로서도 이것이 불교도의 근본 정신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어쨌거나 세계의 비합리성(자연이든 사회든 그것은 어쨌거나 인간의 합리적 사고 바깥의 것들을 포함한 채로 굴러간다)을 인식하는 명철한 정신은 좌절한다. 왜냐하면 그것은(세계) 나(인간)와 무관하게, 나를 거의 무시하면서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용어적으로 표현하면 `부조리`라고 한다. 부조리는 인간 조건이다. 말하자면 내가 눈 감고 도망친다고 해서 도망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이 카뮈와 당시의 지성들이 중시하고 빠져들었던 하나의 세계관이다. 어떻게. 그러니 자살을 한다?
결론을 짓자면 카뮈는 살자고 강변한다. 대신 피안의 세계를 품지 않은 채로, 사상의 속임수를 부리지 않으면서. 그러니까 아무런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할지라도 엄마나 아빠를 찾지 않고 의연히 살자는 것이다. 이쯤되면 카뮈는 자신의 윤리적 감수성에 대해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하고 명징한 주장이다. 카뮈의 매력이란 원래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부조리를 (지속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면)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부조리의 인간으로 사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사실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그렇게 살기도 하고 또 그렇지 못하기도 하다. 게다가 카뮈의 시지프는 얼마나 엄격하고 고독한지!
우리는 영생에 기대지 않아도, 영원을 구하지 않아도 살아간다. 단순히 습관이라고 하면 비약이다. 그것은 부조리를 강조하기 위해 지성을 지나치게 내세우는 것처럼 보인다. 필멸하는 존재는 필멸하는 대로 삶의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그것이 꼭 영원해야만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카뮈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여자를 사랑했고 많은 친구를 두었다. 나는 그가 종종 시지프를 떠올렸을 망정, 진심으로 그와 동화되는 경험이 잦았을 거라고 상상하기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