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9일, 서른 번째로 읽은 책.
작년의 세미나에서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주제였기에, 대출 가능해지자 잽싸게 빌린 책이다.
많은 여성이 섹스를 하고, 원하든 원치 않든간에 일정 수의 여성은 임신을 한다. 그런데 그것이 혼외임신이냐 혼인중 임신이냐에 따라 산부인과에서조차도 차별받고, 연령에 따라서도 차별받고, 어찌됐든 '네 뱃속의 애를 지웠기 때문에 모든 죄책감을 네가 지고 가라'는 내/외부의 압박감까지 다 짊어지고 가게 된다. 사람마다 크기는 다르겠지만.
이 책은 낙태를 경험한 여성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여성의 관점에서 본 낙태를 다루고 있다. 민우회에서 만든 책이니 저출산 어쩌고 하는 정책적 시각이나, 예수님 설교하는 소리나, 어디 여자가 헤프게 따위의 소리를 볼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다.
**
엄마와 섹스나 피임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도 주고받은 적이 없어도 (혼전섹스로) 임신하게 되면 낙태를 하라는 이야기는 꽤 여러 번 나눈 적이 있다. 돌이켜 생각하면 재밌는 일이다. 임신을 하게 되는 경로에 대한 이야기는 일단 생략하고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다면 낙태를 하라는 말부터 하다니. 여튼, 난 엄마의 생각에 동조하고 있고 당연히 그래야한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고선 그게 그렇게 단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문제가 아니었구나 싶더라.
죄책감, 모성애, 사회적 비난, 범죄행위, 뭐 이따위 것들이 켜켜이 얽혀 있는 것인데, 그렇게 쉽게 "혼전에 임신하면 낙태해야지 뭐."라고 툭 던질 수 있었던 건 무지했기 때문이다. 실상은, 나에게 그런 일이 생길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하지만 이 책에서의 케이스에서 나왔던 것처럼, 콘돔을 쓰고 자연주기법을 사용하고 질외사정을 하고, 나름대로 피임을 한다고 했는데도(저중 효과적인 건 콘돔뿐이지만) 심지어 콘돔을 써도 정말 날벼락같은 임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 <두개의 선>처럼!!
피임을 열심히 하고 있지만 습관적인 생리불순때문에 생리가 늦어질 때마다 괜한 불안감으로 가슴 졸이며 테스트기를 사곤 했었는데, 그럴 때마다 정말 미칠 것 같았다. 몇번을 생각하고 생각해도 지금의 내 상황에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지만, 아무런 고민 없이 툭하고 쉽게 낙태를 입에 올렸던 옛날을 반성했다. 그래, 나는 멍청했기 때문에 그렇게 용감하게 내뱉을 수 있었나보다. 다행히 한 번도 두 개의 선이 나온 적은 없었지만, 그때 내가 느낀 불안감은 이것이 전혀 남의 일이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었다.
읽으며 놀라웠던 것은, 전체 낙태율 중 기혼자의 낙태가 57%라는 것. 이 수치는 흔히들 낙태에 대해 비난하는 것처럼 '몸을 쉽게 놀리'기 떄문에 낙태를 하는 건 아니라는 반례가 될 수 있겠다. 또한 이건 절대 결혼이 피임의 끝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자식을 낳는 것이 한 인간의 삶에서 얼마나 큰 변화를 일으키는가를 생각한다면, 원하지 않는 혹은 예상하지 못한 변화가 삶에 찾아오는 것은 최대한 막고 싶기에 아이를 낳겠다는 결심을 하지 않는 한 나는 계속 피임을 할 것이다.
사람들이 뭐 쉽게 애 낳으라고 하는데 화가 나요. 지들이 키워 줄 것도 아니면서. 육아는 강아지 키우는 거하고 달라요. 한 인간이 인간을 키우는 거잖아요. 아이는 정말 끊임없이 요구를 하거든요. 먹고 입혀 주고 이것만 하는 게 아니라 감정적으로 계속 보살핌이 필요해요.
근데 그러면 이 엄마는 자기 것은 완전히 접고 가야 되는 거예요. 자기의 욕망이나 욕구나 접고 가야 되는 부분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정말 자기를 죽이고 가야 되는 순간들이 너무 너무 많다는 거지요. (중략) 그런데 그걸 가지고서 쉽게 낳으라고 하는 건 별 고민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pp.110~111.
수많은 국가에서 낙태를 범죄하하자 많은 여성들이 사망하였습니다. 낙태를 범죄화할수록 여성들은 낙태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더 어두운 곳에서 음성화된 시술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낙태가 불법화된 사회에서 낙태 시술 도중 죽어간 여성이 한 해 7만 명에 달하는 것이 이것을 반증합니다.
낙태는 성관계, 피임 교육, 피임을 제안할 수 있는 여성과 남성의 관계, 육아가 가능한 사회적 지원 체계, 그리고 본질적으로는 한 인간이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에 대한 질문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여성에게 출산을 결정하는 것은 내 인생을 결정하는 것과 동등한 무게입니다.
-p.182
결혼을 했거나 아님 그 바운더리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러니까 일방적으로 인정된 어떠한 가족의 시스템이 아니면 인정을 할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저는 저출산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가 가족주의를 흔드는 거에 대한 공포가 있는 것 같아요. 위험한 인간들이 생기는 거에 대한 두려움? 그래서 피임했냐 안 했냐 이런 질문은 뒷부분만 얘기하는 느낌이에요. 그 사람들을, 관계를 인정을 하는지에 대한 부분을 얘기부터 해야 하는 거죠.낙태도 결국은 가족주의 자체, 결혼제도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p.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