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맛 - 음식으로 탐사하는 중국 혁명의 풍경들
가쓰미 요이치 지음, 임정은 옮김 / 교양인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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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한번 베이징에 정착한 요리는 다른 남방 도시의 경우와는 달리 원재료의 맛이 바뀌지 않는 한 본래 성격을 간직한다. 이것 역시 권력자가 바뀔 때마다 눈치 빠르게 적응해 온 베이징 시민이 지닌, 꾀바른 방관자의 태도를 취하면서 만사를 태평하게 흘려 넘기는 성격이 드러난 예일 것이다.
-p.73 3장 제국의 통치술과 궁중 요리

청나라라는 시대를 전반적으로 살펴보면, 만주족은 요리를 먹는 재능은 뛰어났으나 만드는 재주는 없었다. 요리사를 배출하지 못했다는 것은 만주족의 눈에 띄는 특징인데, 아마 오랫동안 수렵 생활을 하면서 간단한 요리를 추구했던 성향이 몇 세대에 걸쳐 끈질기게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만주족의 본질은 관리 능력에 있었다. 산과 들에서 생활하며 자연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몸에 익힌, 상황을 냉정하게 통제하는 능력이다. 만주족의 이러한 성격은 자칫하면 욕망에 떠밀리기 십상인 한족의 성격과는 빛과 그림자만큼이나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이 두 민족의 2인 3각에 힘입어 중국 요리는 엇나가는 일 없이 수도 베이징에서 찬란하게 발전할 수 있었다.
-p.105 3장 제국의 통치술과 궁중 요리

문화혁명은 통치 권력의 정점에서 발동한 혁명이다. 이런 혁명은 지구상에서 예가 드물다. 당시 중국은 마오쩌둥이 사회주의 국가를 운영할, 현대적 이념을 갖춘 실무 세력에게 권력을 넘겨주어야 할 단계에 들어선 참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음 세대로 넘어가면 자신이 제창한 혁명 이론이 휴지조각 취급을 당하리라는 두려움을 품었고 결국 국가와 경제와 인민을 업고 문화혁명이라는 동란을 일으켰다. 지금까지 만들어 온 국가기구를 무너뜨려 원점으로 돌아간 뒤, 전 국민이 농민인 국가를 새롭게 창조하겠다는 마오쩌둥의 야망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한편 중국 국민들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역사상 한 번도 주어진 적이 없었던 주인공 자리가 손안에 뚝 덜어진 셈이었다. 열광은 한동안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문화혁명 투쟁에 뛰어든 대중은 수천 년 전 옛 사람의 행동방식으로 회귀할 수 있었다. 그것이 중국인의 기질인지, 아니면 인간의 욕망을 정당화함과 동시에 현대성과 지성을 송두리째 거부하고 단숨에 시대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게 하는 방법을 생각해낸 마오쩌둥의 천재성이 불러온 결과인지 나로서는 모르겠다.
-p.149 5장 공산당과 혁명의 맛

베이징은 수도이긴 하나 수도의 기능이 없는 소비 도시의 면모를 갈수록 뚜렷이 띠었다. 인정 어린 훈훈한 이야기를 좋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치 논쟁을 즐기는 이른바 `베이징다운` 분위기가 베이징의 개성이 된 것은 이 시기부터다. 지금까지 이어져 온 왕조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 정치를 방관하면서 비판할 수 있게 된 상황과 더불어 과거 정치의 중심에 있었다는 자존심이 어우러져, 기호품을 즐기듯 정치에 관심을 두는 문화가 베이징이라는 도시의 뚜렷한 개성이 되었다.
-p.172 5장 공산당과 혁명의 맛

오늘날 톈차오에는 붐비는 인파도 없거니와 수상쩍은 노점도, 기예를 보여주는 무대도 없다. 1950년까지 톈차오의 모든 예인이 국가가 주는 등급을 받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예인도 국가 공무원이 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리고 1958년에 마침내 `농촌에 문화를 퍼뜨리고 농촌 인민에게 봉사하자`는 정책이 채택되었다. 말은 그럴듯했지만 사실은 등급 없는 길거리 예인들을 추방하는 것이었다. 길거리 예인들은 스무 명, 서른 명씩 무리를 지어 둥베이 지방이나 멀리는 티베트 산악 지대까지 뿔뿔이 흩어졌다.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일이 업이었던 이 예인들에게 국가는 아무런 지원을 해주지 않았고, 이들은 농촌에서 관객들이 던져주는 동전밖에는 연명할 길이 없었다. 농촌행은 저승행이나 마찬가지였다.
-p.205 5장 공산당과 혁명의 맛

베이징 시민들 사이에서 내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으나 마오쩌둥에 대한 반감이 강해지고 있었다.
"중국은 소련이랑 달라. 옛 러시아는 부유한 계급만 잘 먹고 잘 사는 사회였다고 하지 않나? 우리 같은 사람들 처지에서는 좋을 게 없지. 그런 상황에서는 폭동을 일으켜야겠다는 생각이 들겠지. 그래서 공산당이 생겼다면 만세를 부를 일이야. 하지만 중국에서는 베이핑이란 도시에 공산당 군대가 입성했고 새로 생긴 정권을 시민 대다수가 지지했지, 우리가 자발적으로 혁명을 일으킨 건 아니야. 베이핑에서 베이징으로 이름이 돌아온 건 잘된 일이지만, 시민 입장에서는 권력자가 바뀌었을 뿐인 거라네. 어차피 베이징이 거듭해 온 역사가 다시 반복될 뿐인 거지. 하지만 이번에는 마오쩌둥 쪽에서 갑자기 자기들 손으로 새로운 혁명을 시작했어. 그런 줄 몰랐는데, 마오보다 잘난 사람이 그 위에 있었던 건가?"
-pp.219~220 6장 문화혁명과 평등의 맛

공산주의는 획일화를 촉구했다. 예를 들자면 스징산 복무학교는 문화혁명 시대 중앙 조리학교였는데, 여기서 교육받은 요리사가 전국의 외국인용 호텔이나 음식점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이 조리학교는 효율적으로 요리하는 기술만을 가르쳤을 뿐 맛에 관해서는 가르치지 않았다. 또 태어났을 때부터 굶주리며 자란 세대의 학생들도 맛있다는 것이 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전 중국의 호텔은 호텔 바깥의 현지 전통 요리는 무시하면서 모두 똑같은 맛의 요리를 만들게 되고 말았다.
-p.252 6장 문화혁명과 평등의 맛

인간의 의식이 바뀜에 따라, 같은 재료와 같은 요리법을 사용하더라도 요리사 본인이 고개를 갸우뚱할 만큼 완성된 요리의 맛이 달라지는 게 요리의 본질이다. 그리고 문화란 본디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음식 문화를 지탱하는 것은 무엇일까? 공산주의 국가에서 음식은 국가의 정치력을 그대로 반영하며,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시대의 활력이 음식에 드러난다. 그 강인하고 농후한 사회 풍속이 미각의 수준을 지탱한다.
"아니다, 공산주의에도 풍속이 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공산주의적인 표현이나 감각이 대중 사이에 퍼지는 경우를 본다면 정치도 어떤 측면에서 풍속으로 논할 수 있다. 그러나 공산주의적 풍속이란 사회 현상 자체이며 동시에 정치 자체다. 정치의 권력주의야말로 과거나 현재나 중국 대륙의 미각을 떠받치는 바탕이리라. 거기서 미각의 방향성이 은근히 드러나긴 한다. 한편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풍속이 아무리 확고하다 하더라도 그 풍속이 드러나는 사회 현상은 그저 표층에 지나지 않는다. 너무나도 연약한 것이다.
-p.303 8장 홍콩요리, 중국 밖 중국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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