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한국사회 - 단지 공화국에 갇힌 도시와 일상
박인석 지음 / 현암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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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주택은 개인이 직접 공공서비스에 접속하여 서비스를 받기 위해 필요한 일들을 자신의 책임으로 부담해야 하는 반면에, 아파트는 개인이 공공서비스를 경비원 등을 통해 전달받기만 하는 일방향 관계에 있다. '아파트는 단독주택처럼 신경 쓸 일 없어서 편리하다'고 치부해버리면 그만일까? 각 개인이 공공과 직접 접속하며 공공에 대한 자신의 책무를 수행하는 일이야말로 시민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 아닐까? 쓰레기 수거, 택배 서비스와 벌이는 실랑이, 이웃집 눈치보느라 눈삽을 들지 않을 수 없는 눈 내린 겨울 아침. 이를 단독주택의 불편함이자 단점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시민 공동체의 자산을 생성하는 소중한 삶의 양식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아파트가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개인적인 삶터가 되는 것은 이러한 '불편함'을 모르고 살기 때문은 아닐까?
3장 단지 도시에서 우리는 일방통행 중- 53쪽

만고의 진리로 통하던 '한국은 땅이 좁다'는 주장은 주로 서울과 수도권 일부 도시에 국한된 주장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대부분의 한국 도시들이 외국의 이른바 '중세 건축물들이 들어찬 아름다운 도시들'과 비슷한 인구밀도를 보인다는 사실과 함께 고밀개발은 땅이 좁은 한국의 여건이 빚어낸 불가피한 처방이 아니라는 점 또한 분명히 해야 한다.
5장 한국은 땅이 좁은가- 79~80쪽

결국 집 없는 사람들은 물론 집을 가진 사람들도 집값이 오르면 손해고 집값이 떨어지면 이익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들이 집값 오르는 것을 은근히 반가워할까. 이는 순전히 명목뿐인 자산이 늘어나는 것을 실제 이익인 양 착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손해뿐인 일을 이익인 양 즐거워하는 사람들. 한 채뿐인 집을 팔아치울 생각이 없는 한 오르는 집값에 즐거워하는 것은 그야말로 바보짓이다.
7장 오르는 집값에 춤추는 바보들- 110쪽

게다가 발코니 확장은 조세정의를 훼손한다. 발코니 확장으로 실제로는 40평형대 규모가 되더라도 재산세는 발코니 면적을 뺀 30평형대 아파트 만큼만 과세한다. 시민들을 본의 아닌 탈세자로 만드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발코니를 전용면적에 산입할 경우 주택 규모가 커져서 "거주자들의 세금 부담이 커지는"문제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조세정의 자체를 부정하는 무분별한 주장이다. 공용면적인 아파트 복도, 계단실 면적도 과세하는데 개인 전용 공간이 된 발코니 면적에 이제껏 과세하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문제다. 대형 아파트일수록 발코니 면적이 크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문제의 질이 더욱 나쁘다.
발코니 확장은 비록 합법의 탈을 썼지만 공공공간 환경을 삭막하고 과밀하게 만드는 해악이며 주거 공간을 왜곡하는 불합리한 일이다. 또한 사회 정의를 훼손하는 부정의한 일이다. '월드 베스트' 한국 아파트 평면, '넓고 밝은 집'은 바로 이 해악과 불합리와 부정의라는 값비싼 댓가를 치르고 얻어진 것이다.
8장 '넓고 밝은 집'의 불편한 진실
- 138쪽

결국 아파트를 시장에서 구매자 눈치를 보아야 하는 '상품주택'이 아니라 공공의 복지와 주택시장의 균형을 위한 공공임대주택으로 공급한 역사를 갖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아파트 건축에 대한 태도가 다르다는 것이다. 공공임대주택으로 아파트 건설을 시작한 나라에서는 아파트 설계에서 개인 전용공간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보지 않는다. 물론 이들 나라라고 해서 모든 아파트가 공공임대주택인 것은 아니다. 상품주택으로 건설되고 판매되는 아파트가 공공임대아파트보다 더 많다. 상품주택으로 판매되는 아파트는 이들 나라에서도 개인 전용공간을 중요시한다. 건축 형식에서도 한국 아파트에 비해 별다른 특징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인 전용공간만을 위해 다른 가치들을 일방적으로 희생시키지는 않는다. 공공임대아파트를 통해 형성된 아파트 건축 규범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 147쪽

주택이 상품으로 거래되는 사회에서 주거 공간 규범은 자칫 개인적인 욕구와 선호에 편중되기 쉽다. 공공임대주택은 시장에 매몰되지 않은 채 건축 형식과 공간 구조에서 공공성을 강조하고 확대해나감으로써 사회 전체의 주거 공간 규범에 공공적인 가치를 유지하는 유일하고 강력한 수단이다.
9장 아파트 평면진화, 닥치고 전용공간!- 150쪽

건설업체들이 수납공간을 충분히 만들지 않는 이유는 한국 아파트가 모델하우스를 통해 분양되기 때문이다. 복덕방을 통해 기존 아파트를 구입하거나 전셋집을 구할 때는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을 살펴보게 된다. 따라서 실생활에서 가구 배치나 물품 수납 상태가 어떤지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건설업체가 새로 분양하는 아파트는 수요자에게 견본주택, 즉 모델하우스를 보여준다. 모델하우스는 비록 공간 구조는 실제 아파트와 동일하다고 해도 실제 살림살이가 없는 가상 공간이다. 가구 배치나 수납 상황은 모두 연출된 것이다. 내 집이 항상 모델하우스처럼 깨끗하게 정돈되고 장식되어 있을 리 없다는 것을 다들 알지만 당장 눈앞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공간 연출에 혹하기 마련이다.
11장 엄마를 착취해서 얻은 '넓어 보이는 집'- 167~168쪽

아파트 브랜드 현상, 아파트 벽면을 장식한 브랜드 로고가 도시를 가득 채워가는 현상을 그저 마케팅 전략의 하나로만 바라볼 일이 아니다. 브랜드 인기순위를 집계하여 발표하는 데에만 골몰할 일이 아니다. 아파트 브랜드 현상은 한국사회가 그만큼 공간 정의에 무감각한 사회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공공공간이어야 마땅한 공간을 상표 붙여 판매하고 이를 소득수준에 따라 구입해야 하는 살벌한 사회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아파트 브랜드 시대- 187쪽

공공공간의 설계는 기존 정치체제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지향하는 가치를 반영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지배 이데올로기 입장에서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공공공간을 만들어내는 일에 관심이 없다면, 민주적인 것보다는 귀족적이고 권위적인 건축양식을 선호하고, 경제적/행정적 효율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공공공간 생산 과정 역시 이를 반영할 것이다. 정부의 각종 제도와 의사결정 절차는 권위적이거나 경제적/행정적 효율을 우선시하는 방향으로 작동할 것이다.
23장 소란스러운 공공공간을 획득하라
- 3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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