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지금+여기 3
오찬호 지음 / 개마고원 / 2013년 12월
장바구니담기


미네르바, 용산참사 그리고 쌍용자동차에 관한 이십대들의 반응과 지금 이 이야기의 골간은 사실상 거의 같다. 여기서도 앞서 KTX 여승무원의 정규직 전환 요구를 '정정당당하지 못한 도둑놈 심보'라고 부른 여타 이십대들의 논리가 그대로 반복되는 셈이다. 입사할 때 비정규직인 줄 알았으면서 나중에 가서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정규직 지위를 요구하는 건 있을 수 없다고 했던 바로 그 논리다.
시간강사에 대한 3호의 입장도 이와 마찬가지다. 시간강사가 '이런 대우'받는다는 건 알았을 것이고, 교수라는 지위는 '이런 대우'를 받는 시간을 지나왔기에 얻을 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강사들의몇몇 요구는 일정한 선을 넘은 것이란 주장이다. 즉 '힘들다는 것 자체'가 어떤 요구로 이어져서는 안 됨을 분명히 했다. 그건 본인이 선택한 '결과'이고, 그 결과의 '무게'는 스스로가 짊어져야 할 몫이라는 것이다.-73~74쪽

"공부도 더 많이 한 분들도 아직 어려운데"라는 이유가 또 등장했다. 5호는 교직원(혹은 강사)와 환경미화원의 지위 차이를 분명한 판단 근거로 삼았다. 이는 '공부도 더 많이'라고 표현되었듯이 노력이 더 많은 쪽이, 즉 남들보다 시간관리를 더 잘 해온 사람이 사회적 우대를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결국 동일하게 주어진 시간을 더 가치 있게 효율적으로 잘 사용한 능력이 검증되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직급의 차별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차벼르이 근거가 정당하므로, 해고당하거나 비정규직이 될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차별도 정당한 것이다. 이걸 뛰어넘는 요구가 나오면 이십대들은 의아해한다. 게다가 자기들 생각에는 당연히 정규직이 되어야 할 사람들도 비정규직으로 살아가고 있는 판인데, 어떻게 '감히 부족한 사람'이 이런 요구를 할 수 있는지 개탄하는 것이다.-76쪽

이처럼 이십대들이 노동자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이 있다. 이는 어쩌면 그만큼 이십대의 취업 현실과 이로 인한 심리적 불안감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뜻이다. 노동자들의 요구를 "인생을 날로 먹으려는 게으름뱅이나 루저들이라"고 간주하며, 취업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해가는 자기통제형 자기계발에 매진하는 이십대들의 박탈감과 불안감 알이다. 이 암울한 불안감이야말로 지금의 이십대를 설명할 수 있는 핵심 키워드요, 이것이 일종의 시대정신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77쪽

경영학이 '보편적'학풍으로 존재한다는 건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다. 자기계발 시대가 빚은 지독한 학력위계주의 모습이 더욱 학화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경영학은 사실상 기업의 논리를 체득하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개인의 사고력을 바탕으로 기존의 고정관념을 재해석하는 일이 인문사회 학문에 비해 원천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말하자면 '스스로 해석하라!''상상력을 발휘하라!'등의 주문이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180쪽

인류가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고 어린이를 교육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장애인의 권리를 인정하고 인종차별을 부당하게 여겨 철폐하고... 이런 변화는 기존의 사회가 문제 많다는 걸 직시한 개인들의 노력에서 시작된 일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다만 그것이 왜 문제인지, 또 문제라면 이를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를 모를 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원래의 것이 옳은 듯 착각할 뿐이다. 그러나 착각이 깨지면 그 사회는 절로 좋은 쪽으로 구성원들을 이동시킨다. 사회는 그렇게 '개인들'로 인해 변하는 것이다.-192쪽

겉으로는 동일한 출발선인 것 같아 보여도, 이렇게 여러 상황과 조건에 따라 기회는 균등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공부에 대한 동기부여도 가족구조에 따라서 차이가 나며, 부모의 독서습관조차 자녀의 학업성적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사실이다. 집안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가정 분위기가 나빠지면 자녀의 심리가 불안정해지면서 학업성적이 하락하기도 한다. 하고자 하는 열정조차도 마찬가지다.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을 누린 선수와,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는 조건에 처했던 선수는 같은 출발선에 섰다 하더라도 결코 동등한 상태에 있는 게 아니다. 긍정이나 희망이 마음먹는 대로 생기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211쪽

누가 그랬던가, 가난하다고 꿈조차 가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다. 그저 사람들이 '출발선에 함께 서 있다'는 것만으로 기회 균등이라 정당화할 수 없는 이유다. 할 수 있다는 각오, 그러니까 일종의 '동기부여'도 누구나 얻을 수 있는 만만한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투 스트라이크를 맞은 상태로 인생을 시작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3루에서 태어난 주제에 자기가 3루타를 쳤다고 생각하며 산다"는 말이 있다. 3루에 있는 사람은 홈이 바로 눈앞이니 홈인할 수 있다는 희망을 쉽게 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투 스트라이크에 몰린 사람은 그런 희망을 품기조차 힘들고, 마음이 쫓겨 삼진당할 확률이 높다. 이런 상황을 공정하다 할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희망을 품고 노력하라 말하면 될까? 희망, 그건 개인에게 강요할 것이 아니라 사회의 모순을 해결함으로써 자연스레 생겨나도록 해야 한다. 사회가 진정 공정해지면 절로 희망이 부풀기 마련이다. 기회의 균등은 그럴 때 '실재'할 수 있는 것이다.-21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