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사회 - 남아도는 인생들을 위한 사회학
최태섭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9월
절판


이런 역사(적 맥락화)의 소멸은 사람들을 어떤 단절된 시공간 속으로 밀어 넣는다. 우리는 우리들의 현재를 만들어낸 맥락들과 사건들로부터 괴리되어 '영원한 현재'속에 갇힌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 복잡하고 혼란스러울지언정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 일이란 없다는 것, 어쨌거나 세상이 거대한 경향성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없게 된다. 오로지 지금-여기에서 보이는 모든 것들이 세상의 전부이고 영원한 것이라고 믿게 되고, 이것은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 무책임한 행위들과, 과거를 생각하지 않는 치기 어린 행위들, 그리고 끝없는 고립감을 낳는다.
[2_역사의 죽음과 잉여의 탄생]-66쪽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잉여의 제1조건은 '그것이 더 이상 자본주의 경제 질서에 유용하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잉여는 팔 수도 없고, 노동을 시킬 수도 없으며, 소비자로도 부적절한 어떤 존재들을 지칭한다. 그들에게는 숨을 쉬고 먹는 입은 있으되 말하는 입은 없다. 이들은 결핍 그 자체이며, 자본주의 체제의 구멍이다.
[3_무엇이 잉여인가]-85쪽

핵심은 체제에게 인정받고, 법적이고 행정적인 지위와 권한을 얻는 대가로 잉여적인 것이 지불하는 대가가 무엇이냐는 거다. 체제는 온정주의적인 관용의 낚싯줄을 드리우고 네가 존재해도 된다는 증거와 무해성을 입증하라고 말한다. 체제에 개기지 않겠으며 세금을 꼬박꼬박 내고, 더 많이 소비하면서 착하게 살겠다는 약속과 증거를 보인 다음에야 이들은 행정문서에 꼬리표를 붙여서 기입된다. 그 이면에는 이들이 만약 약속을 어긴다면, 즉 체제에 위험해 보이는 짓을 눈곱만큼이라도 시도한다면 똑같은 짓을 한 '일반인'들보다 더 큰 처벌을 받을 것이라는 조약이 숨어 있다. 열심히 일하지 않는 이주 노동자, 문란한 동성애자, 고분고분하지 않은 이주 결혼 여성들이 나타난다면 그들은 물론이고 비슷한 처지의 모두를 광장에 매달겠다는 엄포이기도 한 것이다. 관용은 왜 나의 존재가 누군가의 허락과 인가를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일부러 누락하고 있다. 금지하는 자가 아니라 허가하는 자가 갖는 더욱 커다란 권한의 효율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4_잉여는 어떻게 처리되는가]-106~107쪽

픽업 아티스트가 흥미로운 이유는 그것의 작동 기저에 깔린 기묘한 냉소주의에 있다. 관계를 하나의 스포츠나 기계적 과정으로 만듦으로써 그 목적이 되는 여성의 인간성을 유사-심리학적 편견들로 분절해버린다. 즉 모든 인간성은 여성이라는 성별적 속성에, 그리고 그 성별적 속성은 동물로서의 여성이라는 유사-생물학적 속성(여자도 어차피 동물이야)에 수렴되어 해체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두고 비인간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애매한 것은 바로 그것이 이런 괴상한 기예를 만들어낸 목적이기 때문이다. 즉 PUA의 탄생은 도대체 연애라는 것, 관계라는 것이 너무나도 어렵고 복잡하다는 남성들의 고민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중략)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어떻게 사람을 만날 수 있는지가 통째로 의문스러워지면서, 그 복잡함을 스스로 풀기는 커녕 옆으로 치워버리고 거기에 반응과 비반응으로 이루어진 어떤 동물적 존재를 가져다 놓은 것이다. 여기에 PUA가 가지고 있는 냉소는 결국 더 크고 근원적인 곤경을 회피하기 위해 부리는 '허세'로 밝혀진다.
[6_고자와 게이로서 말하기]-169~170쪽

이것은 간단한 산수다. 하루는 24시간이고 우리는 그 24시간 동안 어딘가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 세계든 가상공간이든 그 24시간은 동일하게 흘러간다. 따라서 우리는 한정된 시간을 사용하여 그 둘 중 한 곳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데, 만약 현실 세계가 아주 충만하고 즐겁다면 우리는 너무 바쁜 나머지 맛집 검색 말고는 가상 세계에 발을 들일 일이 없을 것이 분명하다. 즉 더 많은 관계, 더 많은 명예, 더 많은 쾌락 등등 현실보다 가상이 비교 우위를 갖고 있을 때에만 우리는 가상에 몰두하게 된다.
[7_키보드워리어의 생태와 습성]-196~197쪽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은 정확한 정보와 검증된 지식들이 아니라, 지식의 생성이라는 행위에 자신이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라는 점이다. 즉 여기에서 지식은 어떤 객관적인 사물이 아니라, 주관적이고 경험적이며 참여적인 대상으로 변한다.
[7_키보드워리어의 생태와 습성]-201쪽

결국 가상의 커뮤니티를 지키려는 노력은 현실과 벌이는 별 볼일 없는 개인들의 투쟁을 대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 투쟁은 '존재 증명'을 위한 인정 투쟁이다. 사이버상에서 상호 간의 전쟁과 증여를 통해, 또 모종의 참여를 통한 집단적 현실 참여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세계로부터 어떤 자리를 부여받기 위한 몸부림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투쟁을 위한 차고 넘치는 동력들, 즉 우리가 현실에서 느끼는 수많은 불만과 불안들을 가지고 있다. 이 불안과 불만은 사이버공간을 떠돌며 존재하다가 어떤 벡터 혹은 좌표가 그들 앞에 주어지는 순간 하나의 '힘'으로 변한다. 이 힘은 돈이나 권력에 의해 주어진 힘도 아니고 한 명의 위대한 존재를 통해서 얻은 힘도 아닌 익명적 집단으로서의 힘이다. 사이버 네트워크의 시대에 도달해서야 우리는 문자 그대로의 '데모스Demos'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7_키보드워리어의 생태와 습성]-202쪽

그런데 이 평등주의를 자세히 뜯어보면 모든 인간은 평등해야 한다는 민주주의적 공리에 대한 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이것이 주장하는 것은 특권의 폐지가 아니라 왜 너만 그런 좋은특권을 누리고 있느냐는 항의에 가깝다. 즉 세상의 누군가가 내가 누려야 하는 특권을 부당하게 누리고 있기 때문에 나의 삶이 힘들다는 것인데, 이것에 대한 '정황적 증거'가 사회 곳곳에 널려 있기 때문에 별다른 고민의 과정 없이 신념으로 굳어지는 것이다.
[8_잉여들의 완장 놀이]-214쪽

그런데 이른바 민주화 세대들은 민주화라는 일믕르 걸고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이들이 보기엔 낯선 행동들을 정당화했으며, 자신들은 언제나 옳다는 고압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즉 새로운 세대에게 민주주의란 이미 주어진 것이고, 이들의 민주주의적 관심은 가족 관계, 교육 과정, 사회적 평등 같은 것에 있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새로운 세대가 제기하는 민주주의를 과제로 받아들이는 단계로 이행하지 못했다. 그렇게 되면 이 새로운 세대에게는 민주화가 해방이 아니라 '주류'이자, 위선으로 경험된다.
[8_잉여들의 완장 놀이]-229~230쪽

그런데도 이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광주에 대해 악담을 늘어놓게 된 것은 이들에게 광주가 큰 의미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냥 광주를 욕하면 '적'들이 거품을 물고 길길이 날뛰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이 즐거움은 금기를 깨는 것을 통해 커뮤니티 내/외부의 관심을 받고, 그것을 영향력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구도에서 나온다. 68혁명이 그랬듯이 금기를 깨는 즐거움은 혁명에서 중요한 원동력이다. 그런데 양손에 불만을 잔뜩 쥐고 나타난 새로운 세대의 곤란함은, 딱히 더 이상 깨뜨릴 만한 창문이 없다는 것이다. 독재정권에 맞서는 정의로운 투쟁의 서사는 모두 386이라는 특정한 집단에게 그 지분이 귀속되어 있다. 성이나 죽음 같은 금기도 자본주의가 열어젖힌 90년대의 문화적 충격을 통해 깨어져 나갔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젊은이들의 상대가 되어줄 기성세대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젊음은 경쟁의 대상이고 밀리는 것은 오히려 이쪽이다. 해서 이들은 가장 큰 소리를 내며 깨질 창문 쪽으로 손에 쥔 돌을 던진다. 일종의 '금기의 블루오션 전략'인 셈이다.
[8_잉여들의 완장 놀이] -233~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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