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시민 단체들은 (프로젝트 형식으로 설문 조사를 하고, 통계자료를 만들고, 정책 대안을 모색하며) 정부와 국가가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대행하고 있다. 그 일들은 돈을 받지 않는다 해도 국가가 해야 할 업무를 나서서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NGO의 역할이란 가령 화재가 나서 피해를 입기 쉬운 곳이 있다면 그 위기 상황을 알리고 공론화시켜 국가가 이후 소방 대책을 정확히 세울 수 있도록 압력을 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당연히 국가가 해야 할 업무인 소방 대책까지 NGO에서 세우고 있는 것이다. 소방 대책까지 마련할 수 있는 사람만이 화재 신고를 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이렇게 NGO가 국가 업무까지 대신하다 보니, 그 안에는 작은 국가 공무원 조직을 능가하는 유능한 인력과 더불어 그 인원이 활동할 넓은 공간도 필요하게 된다. 넓은 사무실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하려면 사무실 관리비용과 활동가들 인건비에 대한 부담이 늘어나고, 어느덧 자연스럽게 재정 사업이 주요 사업의 일부를 차지하는 딜레마에 빠지기도 한다. [경계를 가로지르는 운동을 둘러싼 고민과 실천]-41쪽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이혼율이 높은 것은 건강가정기본법의 전제처럼 '경솔할 정도로 이혼을 너무 쉽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두 남녀가 서로에 대한 욕망과 기대를 인지하지 못한 채 '결혼을 너무 쉽게' 하는 데 원인이 있다. 차라리 정부가 건강가정기본법과 이 법에 잇따른 관련 법제도를 집행하는 데 필요한 인력과 자원을, 혼인의 해소가 원만하게 이루어지도록 돕고 이혼 후 안정적인 생활을 위한 지원을 강화시키는 데 쓰거나 혼인 전에 남성들이 평등 감수성을 키울 수 있는 교육에 투자함으로써 '건강 가정/건강하지 않은 가정'이라는 이분법을 해체시키는 것이 시대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다. [위기에 처한 핵가족, 위기의식 느끼는 국가]-77쪽
국가에 의해 지정된 징글징글한 가족은 사회적 취약자를 일차적으로 보호하고 부양할 의무를 갖는다. 그러나 막상 현실을 들여다보면, 복지의 수급권자인 취약자는 자신이 태어나고 성장한 가족'으로부터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경우도 많다. 결국 한국 사회에서 위기에 처한 것은 가족이 아니고 복지국가의 재정인 것이며, 가부장적인 국가는 이 모든 복지에 대한 책임을 개별 가정에 전가시키고 있는 것이다. 위기에 처한 것은 가족이 아니라 부모와 미혼 가족으로 구성된 정상 가족the Family이다. 이성애 부부로 이루어진 핵가족은 전체 가족을 대표할 수 없고 보편성을 상실한 지 이미 오래다. 다양한 가족 담론이 가족의 나열로 끝나지 않으려면 개별 가족들이 존중받는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위기에 처한 핵가족, 위기의식 느끼는 국가]-78쪽
만약 40대 이후 여성들이 성적인 요구를 한다면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나 억제할 수 없는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단지 오르가즘을 느끼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호적등본을 떼어봐야만 확인할 수 있는 부부관계, 부부 사이의 침묵, 여성의 요구에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남편들과 소통하고 싶은 욕구, 부부임을 확인하고 싶은 마지막 몸부림일 수 있다. [불륜과 로맨스의 정치학]-141쪽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정체성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다' 내지는 '어떻게 살고 싶다'는 내용으로 구성되기보다는 다른 여성들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구성되기 쉽다. 정숙한 범주에 속하고자 외모를 꾸미면서도 음탕한 여성으로는 보이지 않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전업주부는 취업주부를(그 반대도 성립한다) 암묵적으로 비판하면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죽여야 사는 여자들]-156쪽
장기 파업으로 인해 지친 노동자들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특정 강사를 불러 강의시키고 문화 운동 단체들을 불러들여 풍물 공연, 노래 공연도 요구하고 영상 단체에 문의해 영상을 틀어달라고 급박하게 요구하는 단체들. 이때 그들에게는 강사 노동자나 문화 일꾼들이 노동자가 아니라 더 큰 노동운동에 복무해야 할 하부 단위가 된다. 순간의 필요만 채우면 되는 소모품이 되는 것이다. 행여 그들이 자기 노동력의 대가인 공연료나 강사료를 요구했다가는 '돈에 맛이 간 속물근성'이 가득한 사람으로 낙인찍힐 따름이다. 그러나 각종 문화 공연과 강연들 역시 공식적인 일터에서의 노동만큼이나 소중한 노동들이다. 다양한 운동 조직에 가서 그들의 코드에 맞는 강연 노동, 문화 공연 노동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따지고 보면 소수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그들을 불러대는 노조나 운동 단체들은 몇 안되는 강연 노동자, 문화 일꾼들을 먹여 살릴 일정한 책임이 있다. [돈 좀 밝히는 점잖은 풍토를 희망하며]-1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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