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누구이며, 나의 진정한 자아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내가 얼마나 나를 몰랐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는 앞으로 이 책에 무수히 등장할 것이다. 그러나 내 곁에 어떤 종류의 사람이든, 누군가 중요한 사람이 있기만 하면 사정은 달라진다. 어떤 감각이 살아난다. 그와 나의 관계 속에서 내가 할 일을 결정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는 타인을 통해서 나의 행동을 결정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혼자 있으면, 그것이 아무리 편안한 상태라고 해도, 내가 누구인지를 잘 모르며 무엇을 해야 할지를 결정하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의존적인 인간이며, 무척 많은 자아를 가졌지만 유독 내 자신만의 자아는 갖지 못했다. 그리하여 나 역시 이곳에서는 이렇게, 저곳에서는 저렇게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1장. 두 개의 공간, 두 개의 자아]-36쪽
'선/후배 관계'에는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현상이 있다. 즉, 이 관계에서는 신분과 권위가 커뮤니케이션을 대체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신분사회에서 말을 한다는 것은 전인권이라는 사람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과 나의 관계 속에서 주어진 나의 신분이 말을 하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 '너는 젖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말의 실제적 의미는 '나는 너보다 어른이다.'라고 말을 하는 것이 된다. [4장. 신분에 기초한 커뮤니케이션]-93쪽
요컨대, 어머니가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사람이 되는 길이었다. 과거 어머니들이 아들을 편애한 것은 자신의 노후를 보장해줄 사람이기 때문에 그랬다는 말이 있다. 그런 측면도 많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아들을 낳는 것 자체로 엄청난 신분의 상승이 일어났다. 아들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건 왕비마마가 세손을 낳는 것과 똑같은 의미를 지녔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동생을 낳은 다음, 그 앞에서 찍소리도 하지 못했던 아버지에게조차 호랑이처럼 큰소리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 혼자서는 아무 의미 없는 존재였지만, 세 아들을 통해서 진정한 인간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어찌 아들을 사랑하고 편애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또 아버지-남편-아들로 이어지는 삼부종사의 길에서 어머니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남자는 세 아들 뿐이었다. [5장. 세 얼굴을 가진 어머니]-120쪽
즉, 나는 아버지를 통해 세상의 일원이 되는 것과, '어머니 공간'에서 익힌 동굴 속 황제의 습성을 남성들의 세상에서 펼쳐보이는 방법을 배웠다. 내가 세상 속에서 동굴 속 황제가 되는 길은 맨 먼저 스스로 낮추어 "국가여! 저를 동원해주세요."라고 말하는 신하가 되는 것이었다. 신하가 되어본 자만이 황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8장. 재떨이 고고학]-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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