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 않는다는 말
김연수 지음 / 마음의숲 / 2012년 7월
구판절판


그날 이후로 나는 서울에서 혼자 살기 시작했고, 어쩔 수 없이 외로워졌다. 그러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어떤 사람이 됐을까? 아마도 "너를 안다, 정말 잘 안다, 네가 무슨 속셈으로 그러는지 다 알고 있다, 네가 틀렸다는 것을 안다, 그걸 알기 때문에 나는 옳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됐을지도 모른다. 외로운 밤들을 여러 번 보낸 뒤에야 나는 어떤 사람의 속마음을 안다는 건 무척이나 어렵다는 걸 알게 됐다. 하물며 누군가의 인생이 정의로운지 비겁한지, 성공인지 실패인지 말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했다.
[그저 말할 수 있다면, 귀를 기울일 수만 있다면]-45쪽

달리는 말에 채찍을 때리는 종족과 같은 하늘에서 살 수 없는 종족이 바로 피그말리온 효과를 믿는 자들이다. 어떻게든 말은 달리겠지만, 피그말리온 효과를 믿는 사람들은 당근을 줄 떄 말이 더 잘 달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퇴사 조치를 간신히 면했으며 감봉 조치를 가까스로 피한 상습적 지각사원이라는 딱지는 결국 그 사람을 상습적 지각사원으로 만들 뿐이라는 게 피그말리온 효과의 교훈이다. 프리미어 리그에 가면 박지성은 잘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누구나 그를 세계적인 축구 선수로 볼 테니까.
[이 우주를 도와주는 방법]-100~101쪽

샌프란시스코에서 나는 헤드폰을 끼고 배낭을 맨 채 롤러블레이드를 타고 가던 노인을 본 일이 있었다. 잘 타더라. 리스본에서는 젊은 연인들 옆에서 혼자 앉아서 우아하게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백발의 할머니도 봤다. 오래 산 사람과 그보다 덜 산 사람이 서로 뒤엉켜 살아가되 오래 산 사람은 덜 산 사람처럼 호기심이, 덜 산 사람은 오래 산 사람처럼 사려 깊은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음, 그렇다면 나는 더욱더 아저씨들을 피해 젊은 여자들이 있는 곳으로 다녀야만 한다는 것인데, 이게 말이 되나, 안 되나. 말이 되든 안 되든, 아무튼.
[롤러블레이드 할아버지, 에스프레소 할머니]-128쪽

두 번째로 달린다면 아마도 고통보다는 다른 것들을 더 많이 생각하고 관찰하고 경험할 것이다. 그걸 아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고통에게 끌려가지 않는다. 그러나 한 번 더 달리면 그 정도로 집중해야만 하는 고통은 많지 않다는 걸, 사실 고통이란 내가 얼마나 많이 달렸는가를 알려 주는 신호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된다. 고통은 우리의 자원을 완전히 점유하고서는 모든 게 소진될 때까지 빨아들인다. 고통이 생기면 멀티태스킹이 불가능해진다.
[한번 더 읽기를 바라며 쓰는 글]-143쪽

대개 어른들이 그런 건 나중에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일 위주로 생활하면 인생에서 후회할 일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늙을수록 시간은 점점 줄어들기 때문에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가능한 한 빨리 해야만 한다. 얼마든지 여자친구를 사귈 수 있는 시기는 바로 지금이다. 시간이 갈 수록 사귈 수 있는 여자친구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게 돼 있다. 비슷하게 신입생 때 대학생이 어떻게 당구장에 다니느냐는 소리를 선배에게 들은 적이 있었는데, 가만히 생각하면 대학생 때가 아니면 언제 당구장에 다닌단 말이냐? 한두 번 직장 동료들과 당구장에 간 적이 있었는데, 이건 국제대회도 아니고 다들 가만히 서서 심각한 표정으로 당구공의 움직임만 보는 것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로 입이 아프도록 떠들어 대며 당구를 쳐 본 건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평일 오후 4시의 탁구 시합]-166쪽

왜 20대에는 제대로 산다는 느낌이 잘 들지 않고, 모든 게 갑자기 부질없어 보이는 것일까? 그건 어쩌면 20대에는 결과는 없고 원인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예측한 대로 결과가 나오면 자신의 삶을 통제한다고 생각하고, 그때 제대로 산다고 본다. 우리가 자꾸만 어떤 결과를 원하는 건 그 때문이다. (중략) 자기계발서에 써 놓은 것처럼,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우리를 도와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원하지 않고 20대를 보내는 사람도 있을까? 그럼에도 20대가 끝날 무렵에 우리 대부분은 알게 된다.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지질하며, 자주 남들에게 무시당하며, 돌아보면 사랑하는 사람조차 없다는 사실을.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 모든 게 다 괜찮았는데, 왜 갑자기 이런 결과를 얻는 것일까? 그러니 20대 후반이 되면 우리는 모두 샐리처럼 울 수밖에 없다. 그건 아마도 20대란 씨 뿌리는 시기이지 거두는 시기가 아니기 때문이리라. 청춘이라는 단어에 '봄'의 뜻이 들어가는 건 그 때문이겠지. 20대에 우리가 원할 수 있는 건 결과가 아니라, 원인뿐이니까.
[어쨌든 우주도 나를 돕겠지]-204~2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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