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이 다만 고급스러운 취향을 과시하거나 엘리트임을 보증하는 학력 자본으로 쓰일 뿐이라면,그것은 성공을 위한 욕망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분명하다. 문화적 취향을 전시하기 위해 차용된 명작, 엘리트임을 보증하기 위한 독서 목록, 성공적인 삶의 조건으로서의 학력 자본은 교양이 아니라 속물 교양이다. 이 속물 교양이 교양을 대신하는 동안 계급적 표지로 전락한 교양과 분과 학문 속에 갇힌 지식인과 학력 자본으로 무장한 엘리트만을 키워냈다.-5쪽
세계문학은 세계 문명을 배울 수 있는 필독서로서 학습되었을 뿐만 아니라 엘리트의 교양서로도 인기가 높았다. 명작이 다루는 내용만이 아니라 명작이라는 기호를 부분적으로 절취해서 문화적 수준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즉 세계문학은 지식의 방편으로 여겨졌을 뿐만 아니라 상류층이 호기로운 취향을 과시할 교양서로도 인기가 높았다.-28쪽
물론 이 인용을 통해 필자가 꼭 하고자 하는 말이 있었다면 부분적으로 허용될 수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필자의 목소리가 아니라 '인용' 자체이다. 대문호와 대정치가의 유명한 원서의 세계가 <태서문예신보>에서 동시대의 글로 '번역'되었다는 이 흔적, 이 형식이 메시지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태서의 세계가 1918년 편집자들에게 어떠한 세계였는지를 입증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인용이 적당한지 그렇지 않은지, 참인지 거짓인지를 판단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50쪽
이들은 명작을 인용하고 차용하고 심지어 전시하지만, 실은 명작이라는 기호만을 차용할 뿐이다. 왜 그럴까. 단지 명작에 압도되었기 때문일까. 이들은 인용하지만 번역해내지 못하며, 명작을 보고 있지만 자신들의 삶을 보고 있다. '있음 직한 현실'로 미학적 거리를 유지하며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발견하고 싶은 현실로서 인용한다. 명작의 권위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간접적으로 재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명작의 의미보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확인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이는 표면적으로 명작의 권위에 사로잡힌 단순한 기념비적 행위처럼 보이지만, 실은 식민지 주체가 이 명작의 기호만을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81쪽
이는 '명작'을 소장하고자 하는 바람과 긴밀히 연결된다. 명작을 읽었는지 읽지 않았는지 하는 실제적인 독서 행위가 아니라, 명작을 소장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하는 문제가 중요해지는 것이다. 이는 '책'을 통한 '욕망'의 문제이다. 고급스러운 장정, 엘리트가 읽을 만한 서적 등 교양의 속물화에 따라 명작의 소장 가치가 중요하게 부상한다. 교양이 물신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변화가 바로 서적이 소장 가치로 변화되는 것이다. 서양문학전집과 일본문학전집, 사상사 전집 등이 교양 목록에 올라 있고, 이 교양서가 집집이 배치되고 진귀하게 소장되는 것은 이러한 세태를 반영한다. 이제 교양서가 소장 가치를 통해 서재 안에서 그 가치를 보존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책을 구매하는 행위, 소장하기 위한 일차적 행위에서 만족이 이루어질 수 있다. 명작을 통해 기대했던 자신과 세계를 이어주는 현실에 대한 성찰이나 의미 공유 대신 명작을 소장하는 행위를 통해 명작에게 기대했던 욕망은 일시적으로 채워진다. 이 '소장 가치'는 물신화된 상품 목록처럼 기능하기 때문에 계급적/문화적/경제적 능력을 드러내는 기호로 둔갑한다.-108쪽
이처럼 학생들을 직접 가르치는 교원의 독서 성향이 통제의 수단이 되고 있다. 그러나 '검열'과 '통제'와 동시에 '명작의 네트워크'안에서 개인이 명작을 소장하고 익히고자 하는 기대 또한 해석해야 한다. 언어 통제와 검열이 직접적인 통치 수단으로 가시화되고 있다면, 명작의 네트워크는 개인의 선택을 통해 제도화하고 있기 때문에 실은 더 지속적이고 자발적이다.-166쪽
세계문학이 국민문학의 산술적 총합이 아니라 세계를 대표할 만한 문학으로 표상되는 순간 세계문학은 고급과 저급, 중심과 주변, 안과 밖의 구분이 발생하게 된다. 세계문학의 중심과 내부가 있다는 관념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관념은 자연적인 것도 당연한 것도 아니지만, 이 속에서 조선 문학은 세계문학 안에서 자기 자리를 할당받기 위해 노력한다. 첫 번째 방법은 스스로 세계문학 안으로 들어가 세계문학의 적자가 되는 것이고, 두 번째 방법은 문학의 지방성을 스스로 인정하고 그 안에서 좀 더 나은 자리를 확보하는 일이다. 이 두 가지 방법은 긴밀하게 맞물린다. 조선 작가들은 세계문학의 적자가 되기 위한 기획에 다들 환호작약하지만, 이는 고급과 저급, 중심과 주변의 위치를 반복하는 패러다임이 야기한 결과일 뿐이다.-285쪽
'조선문고'는 '조선문학전집'이라고 하는 이상적이고 완결되고 폐쇄된 텍스트를 구성하는 대신 오히려 다양한 명작을 집합시키는 방식으로 민중의 읽을거리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각종 문학 전집이 명작의 시대 속에서 호화본 서적으로 물신화될 때 조선문고가 먼저 묻는 것은 서적의 주인이 누구인지 분별해내는 것이다. 독자를 단순히 서적의 소비자, 계몽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서적이 매개하는 이야기의 주체로 보는 방식인 것이다. 또 이 관계 안에서 '조선적인 것'을 이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민중의 존재를 텍스트의 표면으로 드러내는 일임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독자들의 삶을 이야기의 전면에 내세운다. 이는 세계문학전집의 프레임과 무관하게 조선의 명작을 구성하는 방법이다.-323~3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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