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들어 '진보의 도덕성'에 대해 문제삼는 논의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정치와 도덕의 분리'와 같은 근대정치학의 기본 전제도 함께. 후마니타스의 대표 박상훈의 글에서 그런 문제의식을 인상적으로 접했던 것 같다. 정치를 도덕과 분리해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스틱한 이야기가 충격적이거나 새로운 건 아니다. 아마 나 자신의 삶과 결부된 지점때문에 머릿속을 맴도는 듯.

 

  어머니는 윤리적인 분이다.(전에는 이런 말이 칭찬같았는데 요즘은 그렇지가 않다.) 도덕적이라는 건 예컨대 남을 위하길 마다하지 않으신다든가 아버지와 나에 대한 헌신이 남다르다든가 길가에는 절대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남들에게는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정도가 대한민국 평균보다 높다는 말이다. 그런 어머니 밑에서, 나는 줄곧 정중하고 공손한 예절을 배웠고 남에게도 포용력있게 베푸는 것이 좋은 인생이라 배웠다. 좋은 인생. 그런 것이 몸에 밴채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은 얼마나 기본적인 '상식'인가? 나는 그런 어머니의 교육방침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내 대가리가 크기 전까지는.

  그렇지만 이제 나는 어머니가 가르쳐주신 그런 태도를 종종 윤리적 결벽 내지 강박이라고까지 부른다. 과도한 예절이 강제하는 조심성은 삶을 소극적으로 만들고 적극적이어야 할 타이밍을 놓치게 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타인에 대한 윤리를 과도하게 주장하다보면 집단의 공적인 사안에 대해서 어떤 결정도 쉽게 하지 못하게 된다. 10명이 소속된 동아리가 단 하나의 집단선택만이 가능하다고 할 때, 극단적인 윤리를 고수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결정도 할 수 없다. 나의 이해가 타인의 이해와 엇갈릴 때,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방법은 내 주장대로 하지 않는 것이고, 그래서 아무도 주장하지 않는다. 이래가지고서야, 무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 극단적인 가정이다.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 중엔 그런 도덕주의의 세례를 받은 친구들이 많았다. 그들은 매사에 신중하고 예의발랐는데, 타인과 조화를 이루는 데는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개인적인 삶에서는 자기억압적인 윤리다. 배려의 윤리가, 자기억압적이고 타인지향적인 윤리로 변해가는 모습을 많이 보아왔다. 남녀 할 것 없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예의없는 인간을 가장 싫어한다.

  왜 나는 열정보다 예절을 먼저 배웠을까? 권력이 윤리를 지배하는 세상에 대해 불만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나는 '예의바름'에 대해 회의적으로 변해갔다. 이타적으로 행동했더니 착취만 당하더라는 세상의 이치는 모두가 서로 돕고사는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예절은 화합에 기여하되, 갈등에 대해 체념을 기르는 윤리다. 군신유의 부자유친 하던 시절에 임금에게 복종하고 아버지에게 복종하며 남편에게 복종하는 윤리가 예절인 것이다. 효나 예와 같은 도덕적 개념들은 내 세대까지만 해도 강박적인 것으로 수용되어왔다.(미디어에서는 패륜사건이 넘쳐나고, 점점 말세가 되어간다고 하지만.)

 

  삶이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어떤 목표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도덕적인 관점으로 그런 것들을 달성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성실한 삶에는 마키아벨리스틱한 구석이 있다. 적극적이라는게 얼마간 다른 사람보다는 '나'를 우선한다는 말인만큼. 나부터 살고 보자는 말은 냉정하게 들릴지 몰라도 현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한다는 건 도덕적인 존경을 받는다는 것만을 함축하지 않는다. 권력과 재력을 갖춘 사람이 도덕적이기까지 하면 모두에게 칭송받겠지만, 가난한 도덕군자보다는 야심찬 권력가나 재력가가 더 인정받는 사회라는 말이다. 그런 사회에서 그저 열정보다 윤리를 내세워 산다는 건 고분고분 착취당하겠다는 말과 같다.

  뭔가를 이뤘다는 사람들의 삶에는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언제나 욕망이 도덕에 우선해왔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후에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며 살아생전 효도하지 못한 것, 앞만 보고 달린 삶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을 챙겨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모습을 보며 도덕적 가책을 엿보곤 한다.

 

  야심찬 사람은 많아도 예절바른 사람은 드문 시대에 이런 말을 꺼내는 것부터가 시대착오적일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살아온 삶의 궤적에는 도덕주의자가 야심가보다 더 안타까운 삶을 사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야심차게 자신의 삶을 꾸려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곤 한다. 아무래도 내가 엄마 인생을 착취해왔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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