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꺽정 5 - 의형제편 2 홍명희의 임꺽정 5
홍명희 지음 / 사계절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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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임꺽정을 처음 집어들 때 걱정되더니 어김없이 나타난다. 한 권 한 권 넘어갈 때 마다 읽으면서도 감질이 난다. 다음권을 손에 쥐지 않고, 읽기가 어렵고, 쌓인 일들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중간에 끼어드는 책이 고깝기도 하다. 그냥 푹 빠져서 내쳐 읽으면 좋으련만 그럴 수 없으니 아쉽다.

다섯번재 권은 꺽정이 의형제들이 아내 얻는 이야기다. 조선시대 힘으로 한 세상 호령하던 이들이니 그들의 '여성관'을 따지는 것 자체가 가당치 않는 일이다. 그렇지만 그게 생각 대로 되지는 않는다. 

길막봉이 / 황천왕동이 / 배돌석이 / 이봉학이의 여인들을 만나보자.

길막봉의 아내는 부모 제사 지내러 간 사이 빈 집을 지키고 있다가 소금 장수 막봉이에게 붙들려 아내가 된다. 집 지키고 있던 사이 울을 넘어 들어 온 시커먼 총각이 얼마나 두려웠을까만, 이리 따지고 저리 묻고, 따박따박 다짐 두어 첫 밤을 보낸다. 양반네 여린 색시들에게는 눈을 씻고 봐도 없을 생활력이다. 그럼에도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는 귀련이를 읽어나갈 때엔 속에서 화가 솟는다. 

천왕동이의 아내가 그래도 행복한 아내였을까? 사위 취재로 백이방의 사위가 된 천왕동이는 아내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기를 끔찍하게 한다. 하지만 역시 그의 아내도 빼어난 미모라는 무기가 하나 있었기에 대접을 받았던 것 외에는, 그의 남편이 밤 늦게 인상 좋지 않은 사내를 끌어들여 인사를 시켜도, 술상을 차리래도 그저 따를 수밖에 없는 조선의 여인네다. 
다만, 불만의 소리를 들어주는 천왕동이가 있어 여느 아내들에 비하면 호강을 누린달까? 

배돌석이의 여인들은 악처에 요부들이다. 버젓이 바람을 피우고, 남편인 돌석이를 홀대하고 업수이 여기는 모양은 작가 홍명희의 의식적인 배치일까? 조선의 남정네들이 버젓이 하던 짓을 그의 마누라들도 했을 뿐이지만 끝내 돌석이에게 자자를 당하거나 죽임을 당한다. 물론 그 시대로 놓고 보면 당연한 일일테지만, 아내들은 천하의 몹쓸년이요, 복수로 칼을 휘두르고 살인을 하고도 돌석은 인정상 불쌍한 인간이 되는 것을 속 좋게 보게만은 안 된다.

이봉학이와 계향이의 사랑은 임꺽정 의형제들 중에도 유별나고 깊은 사랑이니 따로 두어 말할 것은 없다. 허나 그의 첫 아내. 외조모의 권유로 명색 결혼만 하고 단 한 번 이봉학으로부터 사람대접 못 받다가, 뒤늦게 찾아가 내침 받고 끝내 자살한 비련의 아내는 역시 조선 여인네들의 기구함을 대표할만 하다.

소설에서 의형제들의 아내들은 어디까지나 조연이고, 처자 만나고 아내로 얻는 일도 주변부의 일이다. 여인네들의 생각은 말과 행동에서 조금씩 읽혀질 뿐이지 그 마믐에 어떤 것들이 들어 있는지 긴 이야기 중에도 끼워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런 서술이 여성들의 거침없는 시선과 얘기로 역사를 다룬 소설 없는 아쉬움을 들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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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4 - 의형제편 1 홍명희의 임꺽정 4
홍명희 지음 / 사계절 / 199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3권은 시난고난 읽었는데 4권은 확실히 속도가 붙는다. 양반들의 삻이 지리멸렬한 것과 달리 천한 상것들의 삶은 단순 명쾌하기 때문일까? 

<임꺽정 4 / 의형제편 1>은 유복이와 곽오주에 대한 이야기다. 
어린 시절에 꺽정이네와 헤어져 어머니를 사별하고 겪었던 유복이의 말 못할 고생담, 앉은뱅이 병을 앓고 앓는 동안 뼘창 던지기를 익히고 훈련하는 과정, 귀인을 만나 병을 고치고, 아버지를 모함해 죽인 원수를 갚고, 피신길에 올라 색시를 만나고 청석골 오가네 사위가 되는 과정이 긴 이야기로 전개된다.
곽오주 역시 탑골에서 오가와 마주친 후, 기운 세고 거침없고 솔직한 성격으로 유복이의 마음을 얻고, 의형제 맺고 연약한 과부 색시 얻어 살다가 아내와 아이를 잃는 장면까지 크고 작은 사건들과 엮어져 속도감 있게 담겼다.

앞 권 양반편은 봉학이와 꺽정이 만나고, 둘이 의기를 모아 왜변에 참가하기 전까지 지리하게전개 됐었다. 등장인물도 많고 사건도 부지기수로 많은데도 속도가 안 나더니 4권 유복이와 곽오주의 이야기는 절로 감겨든다.

이유를 생각해봤다. 가진 것 넘치게 많은 양반들은 배운 것도 너무 많아 생각이 복잡하고 오래 걸리고, 사람 사이 관계도 이리 재고 저리 재는 통에 또렷하게 탱글거리는 맛이 없었다. 
반면 유복이네와 곽오주 속의 인물들은 재고 자시고 할 그 무엇도 가진 게 없었다. 때문에 뭔가 잃을까봐 염려하고 노심초사할 이유가 없었다. 남의 눈에 어떻게 비쳐진다해도 생활 자체가 달라질 것도 없었다. 그저 단순 명쾌하게 내키거나, 살려거나, 의리의거나, 복수이거나, 그렇지 않은 것으로 선명한 판단의 자를 지녔다. 

어차피 사는 것은 선택의 연속이다. 선택을 산뜻하게 해낼 수 있다면 사는 것도 뚜렷이 무언가에 몰두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또 선택이 산뜻하다보니, 새로운 판단 근거나 상황이 벌어져도 두려움 없이 또 산뜻한 기준을 가지고 선택하는 데 두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앞 선 양반들의 삶을 보면 미리 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린 양반들은 자유롭게 자연 속을 노닐고, 좋은 벗을 사귀고 소인배를 불쌍히 여긴다. 양반들은 무언가 버리는 것으로 자유와 쿨한 성정을 얻는다면 상 것은 본래 가진 것 없으니, 되지 않는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자유로운 선택과 열린 배움과 의리 깊은 사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말재주 뛰어난 오가의 찰진 말솜씨, 유순하고 서글 서글한 유복이의 유유 자적합, 앞 뒤 안 가리고 성질머리 하나로 욱대기는 오주의 솔직함은 4권을 읽어나가는 재미를 더한다.

그 다양한 인물들 마다에 풍부한 개성을 실어내는 홍명희 작가에게 권을 더할 때마다 더 큰 감동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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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3 - 양반편 홍명희의 임꺽정 3
홍명희 지음 / 사계절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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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임꺽정> 3권 양반편, 양반편답게 양반네들 이야기로 한참을 간다. 양반 세계는 확실히 재미가 덜하다. 캐릭터 고만고만한 등장 인물이 너무 많고, 얘기의 건정성이 확 떨어진다. 왕족과 조정이 ’소인배’의 활동 무대가 된 명종 초 ’옥사’의 르네상스를 보다보면, 오늘이 교차편집 되면서 머리가 뜨거워지는 것이다.

하긴 양아치도 예전 양아치는 인간미가 ’좀’ 있었다더니, 같은 정치 소인배라 해도 옛 소인배들은 ’양심’이란 걸 갖고 있던 모양이다. ’유학’이라는 철학의 힘이라고 해야 할까? 봉건이 품고 있던 공동체적 미덕의 힘이라고 할까? 여튼 스스로 ’소인배’라는 자각을 잃지 않고 산다. 음모를 꾸미는 그 순간도, 성공 후에도 그들은 늘 실존의 고민에 부딪힌다. "난, 왜 이 모양으로 사는가?".  심지어, 양심의 가채그로 광인이 되어 식솔들 앞에 못 볼 꼴 보이다가 추한 모습으로 죽어가든지, 마지막 남은 양심에 기대어 욕된 목숨을 끊던지 하는 것이다.

소인배도 최소한 인간의 모습이었으니, 덕을 지닌 선비들의 모습이야 말 할 나위 없다. 모진 고문을 당하고 모인 옥 안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고 웃고 말하는 모습은 기본이다. 간수들은 저마다 선비의 그릇을 두고 아까워 하고, 칭송을 아끼지 않고, 저마다 자기가 감명받은 사람의 됨됨이를 최고라 자랑한다. 가장 인상 깊은 이는 임형수다. 죽음을 코앞에 두고 웃음을 잃지 않는 것은 물론 농과 장난까지 하는 그의 의연함이 놀랍다.

사약을 받아 든 임형수. 약 기운이 빨리 돌라고 술을 섞어 안긴 사약을 받아 들고,

"이 술은 주인으로 손님에게 권하지 못하는 괴상한 술이라 나 혼자 먹소." 하고 허허 웃고 나서 한 숨에 들이 마시고, ... 상노 아이가 포쪽을 들고 우는 소리로 "안주나 잡수십시오." 하고 내어 놓으니

"에끼놈 저리 가져가거라. 중놈들이 벌주를 먹을 때도 안주를 먹지 못하거든 이 술이 어떠한 술이관대 안주를 먹는단 말이냐? 철없는 놈이로군." 하고 웃고서 도사를 향하여

"사정 쓰려고 약 분량을 적게 타지 않았소? 어째 이렇게 무령하오? 벌써 몇 사발을 먹었는데 아무렇지도 않구려." 하고 또 웃으니 도사의 악문 입술도 조금 터지는 것 같이 보였다.

단 잔에 쓰러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사람에 따라 여러잔을 마시고도 쓰러지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럴 때는 부득이 교살을 하기도 하는데, 임형수도 교살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밧줄을 들고 들어오는 나졸에게 ’사약은 전교에 있었겠지만, 교살은 없었을 텐데, 다시 한양 가서 전교를 물어 오라" 농으로 내 뱉고, 자기 목 조를 타락줄을 걸고 방 안에 들어 앉은 척 하곤 목 대신 목침을 묶어 놓고 껄껄 웃고, 화를 내고 따져 묻는 도사에게

   
  "처음 당하는 일이니까 잘될는지 몰라서 시험하여 보았소." 하고 한바탕 기탄없이 웃는 사람 임형수. / 임꺽정 3권 양반편 86~88쪽 중에서 추림  
   

눈 가리고 아웅하듯 흠 많은 인사들 부끄러운 줄 모르고 인선하고, 인선된 인사들은 국민들 다 보는 데 뻔 한 거짓말과 뻔뻔함(정치인의 미덕?) 앞 세워 고개 뻣뻣이 들고, 통과된 후에는 면죄부 받은 양 도덕의 가면을 하고 ’법치’를 큰 소리로 말하는 오늘의 사람들과 너무도 선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읽을 수록 제도권에 대한 실랄한 비판, 그것도 부족해서 민란을 일으킨 임꺽정의 무리를 미화하는 <임꺽정>을 쓴 홍명희 선생님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런 불경스런 글을 일제 시대 신문지상에 버젓이 연재하다니.

아무튼, <임꺽정> 참 깊은 맛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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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2 - 피장편 홍명희의 임꺽정 2
홍명희 지음 / 사계절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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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부터 읽고 싶던 임꺽정을 펴드는 데 참 많은 갈등이 있었다. 장편 소설에 대한 부담, 홍명희 소설 <서산대사>를 읽으면서 느낀 반 고문(古文)체에 대한 부담 때문이다. 한 권을 읽으려면 반드시 다음권을 쥐고 있어야 할 정도로 중간에 쉬거나 간격이 있으면 안 되는 데다가 분명히 읽는 중에 끼어들 다른 책에 대한 미련을 잘 이길 것인가도 한 걱정이었다
어쨌든 저지르는 셈 치고 읽기 시작했다.

역시, 홍명희님의 글은 장쾌하다. 무엇보다 등장인물에 대한 깊은 애정과 통찰을 느낀다. 상당히 정치적이며 역사적인 이야기인데도 그런 관념이 문장이나 이야기 속에 모나게 드러나지 않는다. 각각의 인물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자기 모습과 말과 몸짓으로 그 시대 속에서 움직거리기 때문이다.

배경은 조선이나 소설이 연재된 시기는 일제하다. 많은 문인들이 대 놓고 친일을 선동하던 때에 홍명희님은 정치의 모난 것과, 소인배 정치, 정치적인 이유로 상대편을 대 놓고 핍박하는 사화 등을 대놓고 비판했다는 것 또한 혀를 내두르게 한다.

임꺽정 2권 피장편은 갓바치가 주역이다. 그가 서울 양반들과 사귀는 모습, 사화에 연루된 김덕순네 가족들의 이야기, 어린 봉학이와 유복이 꺽정이와 인연을 맺고 그들을 훈육하고, 그들의 개성을 북돋는 과정들이 담겼다.

인상적인 것은 갓바치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다. 그 누구를 만나든 그가 인간의 마음을 가진 이상 그의 생각을 존중한다. 설혹 그가 아이일지라도. 또, 자신의 견해가 뚜렷하지만 그걸 일방적으로 강요하거나 설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대가 적절한 고민과 사유를 거쳐서 좋은 선택을 하도록 적절히 이끌어내는 그의 비상한 능력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서푼어치 지식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재고, 답답하게 여기는 작은 그릇을 부끄럽게 돌아본다.

깊이와 많은 문제의식을 던지는 소설임에도 어디 한 곳 맺히거나 굼뜨지 않고 장쾌하게 엮어낸 작가 홍명희를 새록새록 느끼게 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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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빛 매드 픽션 클럽
미우라 시온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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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죽은 영혼을 안고 살면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 자존, 정체성을 잃고 사는 삶에 대한 실존주의적 고찰
 

<검은 빛>은 어두운 물 속 같은 소설이다.첫 장부터 마지막까지 읽는 과정은 마치 물큰하고 차갑고 부유물이 그득한 호수 밑바닥으로 서서히 가라앉는 느낌이다.

<검은 빛>의 주인공은 모두 한 차례씩 죽음을 겪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사는 모양은 눈은 뜨고 있지만 시야를 가리는 탁한 물 속을  버둥거리는 것 처럼 보인다. 버둥거리지만 힘이 없어 다시 솟아 오를 기미는 보이지 않고 그저 서서히 침몰할 뿐이다. 숨 막히는 삶은 너무 적막해서 자칫 평화롭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점점 더 멀어지는 수면 위의 뿌연 불 빛을  하릴없이 바라보며 멀어져 가는 삶이다.

1. 파괴와 폭력을 선명하게 그리기

작은 섬 미하마에 살던 노부유키와 다스쿠, 미카는 이유도 없고 막을 수도 없는 죽음과 폭력을 겪는다. 미우라 시온은 하루 밤 사이 벌어진 커다란 재앙과 그 틈새에 벌어진 거역 못할 폭력을 거대한 수초로 독자의 시선을 휘감듯 써내려간다. 영혼을 잃고서 살아 남은 세 사람을 보며, 일본 화가 이께다 요오손이 그린 ’재화의 흔적’이 떠올랐다. 



죽음과 삶이 엇갈린 경계에 놓인 모습이 태초의 모습인 것 같기도 하고, 아무런 기대 없이 폐허 위에 빈 눈동자로 남은 듯도 한 세 주인공의 모습이 처연하다.

2. 사랑과 죽음의 줄타기

영혼 잃은 사람들의 사랑은 늘 죽음과 맞닿아 있다. 노부유키와 미카, 다스쿠와 나미코, 다스쿠와 노부유키, 다스쿠와 요이치 이들의 관계가 그렇다. 사는 것과 나란히 붙어선 죽음 사이에서 실낱같은 위로를 ’사랑’에서 찾는다. 실은 사랑이라 말하기도 어렵다. 성애에 대한 집착, 유대감에 대한 극한의 공복, 침몰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한 폭력과 얽어매기 등이 이들의 사랑의 방식이다. 수면 위에 떠 있는 뿌연 빛은 현실에는 다시 없다는 뼈 아픈 인식이 선택하는 몸부림에 가깝다.

이들의 사랑을 그림에서 찾는다면 오스카르 코코슈카가 그린 ’바람의 신부’  쯤 된다. 



이미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사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할 수 없다. 작가 미우라 시온은 소설 속에서 노부유키의 생각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동정이나 애정으로는 회복할 수 없는 상처가 있는 한,... 궁극적으로는 자기를 공복으로 몰아넣은 놈을 찾아 죽여서 굶주림을 채우거나, 공복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기다리는 방법, 둘 중 하나뿐이다. -280쪽-"    
   

이미 영혼을 잃은 사람이 선택할 것은 죽이느냐, 죽느냐 둘 중 하나라는 얘기다.


3. 미우라 시온은 왜 이런 소설을 썼을까?

작가는 지독하게 어둡고, 밝은 것이란 한 점도 없는 이런 소설을 왜 썼을까? 폭력과 살인이 부르는 재앙에 대한 경고였을까? 작가 근본에 있는 허무주의가 이런 이야기를 만들었을까?
책에는 작가의 설명 글이 없다. 어떤 의도로 썼는지 밝히지 않으니 추론 할밖에 없다.

<검은 빛>은  현대 사회를 수 많은 은유로 엮어낸 소설로 보인다. 기존의 질서와 관계, 공동체를 단 한번의 쓰나미로 삼켜버린 사회, 개성, 사람에 대한 존중, 가치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남은 것이라고는 붕괴의 조짐이 곳곳에 있는 가정과 일자리로 이어진 불안한 동선 뿐이다. 사랑은 성욕과 역할에 대한 분담만 남기고 사라졌다. 생존을 위한 경쟁은 삶 속에 깊이 뿌리 내렸다. 언제든 (죽음으로)밀려날 것을 염두에 두고 산다. 다른 누군가를 죽이든지, 아니면 조만간에 밀려날 때를 기다리면서 사는 의미를 모르고 살아가든지 둘 중 하나다.

   
  "죄 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 있는 것은 불합리와 폭력 뿐이다. -264쪽-"  
   


아무일도 없었던 듯이 생활로 돌아와서 피부처럼 붙어 있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붙이고, 가정과 일터로 돌아 온 노부유키의 모습을 보면서 나름의 해석에 확신을 더한다.

’그 날, 덮쳐오는 쓰나미를 얼려버릴 수 있었다면’ 나즈막히 내뱉는 노부유키의 한숨이 가슴에 스산한 바람을 일으켰다.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극한의 폭력이 천연덕스럼게 재생되는 현실을 뉴스와 사람들 사는 모습에서 본다.

<검은 빛>. 무겁고 음습하지만 잘 된 소설이다. 또, 이영미 씨의 좋은 번역에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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