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소설 속 역사 여행 - 개정증보판
신병주.노대환 지음 / 돌베개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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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의 소설이 다리를 놓은 생생한 역사 여행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 허구의 소설을 매개로 활자 속에 있던 역사가 살아있는 역사로 다가온다. 흥미진진하고 때로 놀랍고,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역사를 책 제목 그대로 여행하고 난 느낌이다. 노독이 느껴진다. 책을 읽으며, 우리의 고전문학에 전에 없던 관심과 애정을 갖게 된 것과 화석과 같은 역사 속에 살던 선조들의 삶과 고민과 문제의식들을 새롭게 알게 된 것이 큰 성과이다. 다양한 사료와 자료를 통해 소설 속 사회를 생생하게 만나게 해 준 저자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싶다. 
시대와 불화를 일으킨 옛사람들의 삶은 마음을 끈다. 봉건의 냄새가 풀풀 나는 봉건 왕조시대이니 더욱 그렇다. 시대의 단면을 보려한 작가들과 작가들에게 깊은 영감을 준 역사 속 인물들의 시선으로 고전 소설 속의 역사를 톺아본다.

* 김시습이 임종 직전에 쓴 시 <아생 (我生)>

백세 뒤 나의 무덤에 표할 적에
마땅히 꿈속에서 죽은 늙은이라 써 준다면
거의 내 마음을 안 것이라
천 년 뒤에는 나의 회포를 알아줄까

세살에 지은 시로 세종에게 상을 받을 정도로 천재 소리를 듣고 자랐으나,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를 빼앗는 것을 보고는 세상을 등지고 산 속을 떠똘았던 이. 성종이 즉위하자 유교의 도리를 따라 바른 정치가 서기를 기대했지만,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사람들을 발고한 공으로 정창손이 영의정에 오르자 정창손의 행렬을 향해 "네 놈은 그만 두거라."일갈했던 사람. 자신의 마음 속에 세운 기둥을 꺽을 수 없어 세상과 등을 지고 기괴한 사람이란 소리를 들으며 산야를 떠돌았으나 그 혹독한 외로움을 죽음 앞에서도 의연히 감당하던 그를 가슴에 담는다.


* 사헌부 금서 설공찬전

채수의 설공찬전은 실록에 6번이나 오를 정도로 조선사회를 들썩이게 한 필화사건을 일으킨 작품이다. 참수형에 처할 위기에 처했지만 중종의 사면으로 교수형만은 면했다고 한다. 당연히 설공찬전은 금서가 되었고, 지금의 국방부 금서가 사람들의 이목을 모으는 것처럼, 설공찬전은 세간의 높은 관심을 모았다. 그러면 설공찬전이 금서가 된 이유가 무엇일까? 이유는  성리학이 전국에 걸쳐 퍼져있던 시대, 불교 사상이 배척을 받던 시대에 불교의 윤회화복사상을 담았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은근히 시국을 비판한 것이라 한다. 시국을 비판하는 것은 오늘에도 이어지는 금서의 필수 덕목인가 보다.  실제로 설공찬전에는
 "비록 이승에서 임금을 하였더라도 주전충 같은 반역자는 다 지옥에 들어가 있었다"는 대목이 해석에 따라서는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즉위한 중종을 겨냥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성이라도 글에 능한 사람은 관직이 오르더라는 내용, 이승에서 충언을 했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죽은 관리가 저승에서는 귀인 대접을 받는다는 내용이 나온다. 무엇보다 염라왕을 중국의 황제보다 높은 최고의 지위로 파악한 점은 국왕 중심의 현실 정치, 나아가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비판한 것일 수도 있다. 성리학을 하늘처럼 떠받들던 시대니 정말 앗 뜨거라 할 만하다.

* 나라는 백성을 뿌리 삼아야 한다. - 전우치전
6번의 사화로 수많은 인재들이 목숨을 잃어야했던 시대를 벗어나려한 지식인들은 도가사상에 몰두했다. 정치가 바로 서지 않은 시대에 민중들은 끝을 모를 핍박과 가난과 억울함 속에 살아야 했고,  신묘한 도술로 견디기 어려운 현실을 바꿔줄 도사를 기다렸다. <전우치전>은 도가사상과 민중들의 바램이 빚어낸 이야기이다. 문학적 완결성은 홍길동전에 이르지 못하고, 홍길동전처럼 율도국이라는 대안사회를 이야기 하지 못하지만 민중들의 사랑을 흠뻑 받았다. 전우치가 황금들보를 팔아 백성들에게 곡식을 골고루 나누어 주는 장면에서
"이번 곡식을 나눔으로 혹 나를 칭송하는 듯하나 이는 마땅치 아니한지라. 대개 나라는 백성을 뿌리 삼고 부자는 빈민이 만들어 준 것이어늘... 너희들은 이 뜻을 깨달아 잠시 남에게 맡겨 놓은 것이 돌아온 줄로만 알고 남의 힘을 입은 줄은 알지 말지어다." 말한다. 백성의 처지를 이해해주는 것은 물론 백성의 의미를 이처럼 명쾌하게 밝히는 데 어떻게 <전우치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민중의 눈으로 재구성한 전쟁 - 임진록
임진록은 정치 없는 나라에서 난리를 치뤄야 했던 백성들의 마음이 빚어낸 이야기이다. 백성을 버리고 난리를 피해간 왕과 양반들. 그들을 대신해서 왜군을 막아낸 의병장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는 정부, 왜군을 물리쳐달라 청해서 들어온 명나라 군사는 민가를 습격하여 재물을 탈취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등 갖은 행패를 부렸건만 왕이란 자는
"명나라 군대의 히이 아니면 왜적을 어떻게 물리쳤겠는가? 강토를 회복한 것은 모두 명나라 군대의 공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한 일이 없다. 이는 내가 사실에 근거하여 한 말이다."라 하니 전쟁이 끝났다 한들 어찌 그대로 끝난 일로 둘 수 있었을까? 임진왜란의 치욕을 민중들은 그들의 시각에서 승리하는 전쟁으로 재구성하고 싶었을 것이다. ’임진록’ 꼭지를 읽으면서 나 역시 치미는 화를 진정하기 어려웠다. 

거문고와 노래 이것은 영웅의 일이 아니고
칼춤으로 모름지기 옥장(玉帳)에서 놀 것이다
다른 날 난이 평정되어 칼을 씻고 돌아온 뒤에
강호에 낚시질하는 외에 다시 무엇을 구하리
나라를 지키려는 맑은 충절 하나로 전장에 나선 김덕령 의장의 시이다. 결국 역모로 몰려 목숨을 잃은 김덕령 의장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광주 거리에 ’충장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충장로’는 정치에 배반당한 의장의 역사와 80년의 역사가 교차되는 상징처럼 느껴져 더욱 아픈 이름으로 다가온다.

* 허균의 호민론
저자는 허균이 성리학의 철학 논쟁에 빠져 들지 않고 다양한 사상을 접한 것은 모순된 사회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학문과 사상에 동등한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학문과 사상에 대한 개방성은 당시 드러나고 있던 사회 모순을 과감하게 지적할 수 있었던 요인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책에서 소개하는 ’호민론’에 관한 부분을 그대로 옮긴다. 

 허균의 [호민론]은 그의 민중 지향 사상이 함축되어 있는 대표적인 글이다. 허균은 이 글에서 "천하에 두려워할 바는 백성뿐이다."라고 전제한 후, 백성을 호민(豪民), 원민(怨民), 항민(恒民)으로 나누었다. 항민은 ’무식하고 천하며, 자신의 권리나 이익을 주장할 의식이 없는 백성’을 말하며, 원민은 ’정치가에게 피해를 입고서도 원망만 할 뿐 스스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백성’으로 지금 개념으로는 나약한 지식인을 뜻한다. 이와 달리 호민은 ’자신이 받는 부당한 대우와 사회 모순에 과감하게 대응하는 백성’을 뜻하며 시대의 사명을 인식하고 현실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인물이다.
[호민론]의 주요 내용은 호민의 주도로 원민과 항민이 합세하여 무도한 무리들을 물리친다는 것이다. [호민론]은 ’국왕은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백성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무엇??다. 허균은 중국 진나라 때의 진승 오광의 난, 당나라 때의 황소의 난과 같이 나라가 어지러울 때 호민이 백성을 규합하여 나라사례를 통해 무엇보다 강조한 것은 호민이 나서지 않아도 되는 안정된 국가의 건설이었다

* 병자호란의 치욕 - 박씨전
김훈의 <남한산성>을  읽으면서 답답한 마음에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전쟁중에 가장 치욕을 겪은 이들은 여성이었을 것이다. 사대부가의 무기력한 남성들이 남한산성에 쫓겨들어가 40일 동안 암중모색할 때, 성밖의 백성들이 겪었을 고초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무기력한 왕과 신하들은 고통에 잠긴 백성들의 치욕을 풀어주기는 커녕, 청의 황제 앞에서 삼배구고두를 하는 창백한 왕의 모습을 보였다. 그 난리를 치루고도 앙상한 권력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아들과 정쟁을 치루던 왕을 보며 백성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박씨전을 삼배구고두의 치욕을 백성들의 마음에서 씻어내리려는 씻김굿으로 읽는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허구의 세계에서라도 이루고 그 앙갚음을 하고 말리라는 백성들의 강한 의지를 마음에 담는다.

그 밖에 춘향전을 매개로 수령의 일곱가지 의무, 조선시대의 최소한의 복지제도를 살펴보고,  옹고집전이 조선의 불교 배척정책이 낳은 이야기라는 것을 새롭게 알게됐다. 배비장전에 드러나는 혹독한 신참례 관습이 조선사회 내내 문제로 지적되었다는 점도 재미있다. 장자 중심의 가족제도를 풍자한 흥부전을 보면서는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굴절된 봉건 문화를 안타깝게 새겼다.
문학예술은 시대의 단면을 명징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고전은 그저 옛 이야기로 읽었다. 고전과 시대를 종횡으로 촘촘히 엮어내어 생생한 역사여행을 하게 해 준 <고전소설 속 역사여행>을 오래도록 곁에 두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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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하라 - 아름다운 삶, 끝나지 않은 노래
조안 하라 지음, 차미례 옮김 / 삼천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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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심들지 않을 청춘의 심장, 빅토르 하라

 

빅토르 하라의 평전이다. 빅토르가 보낸 청춘과 열정의 시절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그의 아내 춤 예술가 조안 하라가 썼다. 조안 하라는 <빅토르 하라>로 생동하는 칠레의 혁명가수 빅토르 하라를 살려 냈다. 빅토르 하라는 비틀즈처럼 유명하지 않다. 허나 빅토르가 남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비틀즈가 남긴 것에 뒤지지 않는다. 비틀즈가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출생에 조산사 역할을 했다면, 빅토르는 소위 ‘민중가요’라 말하는 노래에 그의 심장 한 조각을 전하고 있다. 

우리나라와 지구 반대편 남반구에 있어 우리와 상반된 계절을 사는 나라 칠레. 식민의 시대와 긴 독재시절을 보냈고, 긴 독재시절 만큼 긴 민주화 운동의 역사가 있고,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실종된 통한을 우리처럼 안고 사는 나라. 우리와 첫 FTA를 맺어 우리 먹거리에 영향을 주는 나라 칠레가 빅토르 하라의 조국이다. 그는 연극하는 사람으로, 연출하는 사람으로, 노래하는 사람으로 사는 동안 조국 칠레와 남미 민중을 향해 사랑을 퍼부었던 아름다운 예술가였다.  

 <빅토르 하라>는 빅토르의 아내 조안하라의 눈과 감성을 따라 주관적 눈으로 쓴 책이다. 영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조안 하라의 눈에 비친 칠레와 칠레 사람들은 때로는 놀랍고, 때론 아름다웠으며, 때로는 신기했을 것이다. 익숙한 공간에서 무람없이 만나던 자연이나 사람들과 달리 조안이 칠레에서 만난 그 모든 것들은 ’처음’이었고, 새로운 감흥을 부르는 것들이었을 게다. 길들지 않은 조안의 시선은 칠레 사람이라면 글에 올리지 않을 사소한 것들도 놓치지 않고 잡아채어 기록한다. 
간혹 너무 세세하게 풍경이나 장면을 다뤄 조금 불편할 때도 있지만 조안 자신과 빅토르의 내밀한 감성, 섬세한 감정 변화를 읽게 돕는 점이 이 책의 큰 강점이다. 빅토르와 다른 문화에서 자란 다른 민족인 우리에게는 조안의 시선이 적절하지 싶다. 

<빅토르 하라>에서는 춤의 세계도 만날 수 있다. 물론 책은 빅토르에 초점을 두었고, 조안의 춤은 빅토르의 행보에 간간히 섞이는 정도다. 허나 춤에 관한 조안의 특별한 고민과, 무대, 음악, 춤의 대중화에 쏟은 조안의 실천 경험은 또렷한 인상을 남긴다.  

1. 빅토르의 노래가 잉태된 예술적 배경

  빅토르는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무책임한 아버지와 부지런한 어머니 밑에서 형제들과 자란다. 민요를 빼어나게 잘 불러서 아기를 잃은 가정마다 위안과 평화의 노래를 부르러 다니던 어머니는 빅토르에게 노래의 씨앗을 남긴다. 가톨릭 교회는 빅토르에게 클래식의 화성을 가르친 교사였다. 어머니에게는 민요의 씨앗을 얻고 종교로부터는 클래식의 텃밭을 물려받은 셈이다. 

누에바깐시온(새로운 노래운동)의 비올레타 빠라를 만난 것과, 그의 영향으로 남미를 두루 돌며 민요를 채보한 시간은 빅토르의 음악이 세계인의 음악이 되게 만든 결정적인 시간이었다. 오지의 시골 마을을 돌며 빅토르는 칠레와 남미 민요의 다양한 리듬과 선율 뿐 아니라, 일하는 사람들의 노동과 삶에 짙게 밴 풍요로운 정서를 길어 올렸다.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이라는 뚜렷한 정체성을 가지고 격 없이 남미 민중들과 사귀는 장면은 예술가와 대중이 어떻게 만나야 할지를 가르쳐 주었다. 대중의 정서를 자신만의 여과기에 거르지 않고 온전히 노래에 옮길 줄 아는 가수였기에 그가 남긴 노래는 아직도 만인의 가슴을 울린다. 

빅토르는 연극과 연출을 십년 넘게 했다. 연극 경험은 그가 만들고 부른 노래에 극적 구성과 많은 메타포를 감게 했다. 정서적이면서 동시에 서사적이며, 하나의 이야기를 담더라도 뚜렷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빅토르가 부르는 노래의 특징이다. 

또한 연극은 빅토르에게 세계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연극공연과 연극 행사로 그는 칠레 곳곳과 남미는 물론 유럽 여러 나라들을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그의 예술이 세계성을 갖게 해준 소중한 시간이었으리라. 

2. 빅토르 노래에 색을 입힌 요소들

당시 예술가들은 남미의 오랜 문화를 고정된 틀 안에서 바라보았지만 빅토르 하라는 남미의 민속 문화를 현재진행형의 것으로 보았다. 남미 전통 악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민요 채보과정에서 얻은 전통음악의 선율과 양식을 빌어 창작에 성공한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통속의 원리를 다시 확인 한다. 

그에 앞서 누에바 깐시온을 벌인 비올레타 빠라가 빅토르를 이끈 노래 스승이라면, 그의 노래에 역동성을 실어낸 이들은 그룹 ‘낄라빠윤’과 ‘인띠 이이마니’이다. 대학에서 자라난 낄라빠윤과 인띠 이이마니는 빅토르와 숱한 밤을 음악을 놓고 토론했다. 청춘이 지닐 수 있는 혈기 왕성함과, 대가를 바라지 않는 도전 정신을 가진 그들은 빅토르가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실험을 거쳐 얻은 음악 성과는 ‘낄라빠윤’과 ‘인띠 이이마니’에 전해졌고 더욱 넓어진 채 오늘까지 이어진다.

남미 전통 악기를 모두 동원해내어 무대 위에 올린 ‘인띠 이이마니’, 다양한 지역의 노동자와 농민들을 찾아가 무대가 거리건 현장이건 개의치 않고 공연을 펼친 ‘낄라빠윤’은 빅토르와 반주단, 때로는 합창단으로 혹은 순회 공연단이 되어 수년간을 함께 보낸다. 
한번은 빅토르와 낄라빠윤이 함께 하기로 계약한 큰 도시의 공연을 취소하고 작은 마을 축제를 택해 공연에 나선다. 그 공연을 두고 벌인 토론 장면은 지금의 우리도 종종 부딪히는 문제들과 닿아있다. 
‘이미 많은 사실을 알고 있으며, 분노를 갖고 있으며, 감동할 내용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을 만나서 이미 그들 속에 있는 것을 되새김질 하는 것 보다, 아무런 경험도 예술적 세례도 받지 않은 사람들을 찾아 나서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빅토르가 준비된 큰 무대 대신 작은 소도시를 택한 이유이다. 단 한곡의 노래도 갖은 노력을 기울여 만들되, 그 성과는 칠레의 모든 사람들의 것으로 되도록 애쓰던 빅토르의 일면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3 . 우리식의 음악감상실 혹은 소극장 _ 페냐

우리의 음악 감상실이나 살롱, 소극장 문화운동 시기가 칠레에 있었다. 비올레타 빠라의 아들 앙헬빠라가 주축이 되어 꾸린 ‘페냐’가 그것이다. ’누에바 깐시온’의 산실이었다. 누에바 깐시온에 관심을 가진 음악가들은 ‘페냐’에 모여 그들의 창작물을 나누고, 실험 음악을 발표한다. 소수 마니아 층과 지식인들이 ‘페냐’의 주된 이용 층인 것도 우리와 닮았다. ’페냐’는 칠레 곳곳에 만들어졌으며, 빅토르가 자주 들르던 국립공과대학 내 ‘페냐’가 가장 활발했다. 칠레에서 열린 작은 가요제에 입상한 ‘인티 이이마니’가 빅토르를 만나 음악적 성장을 이룬 공간이 ‘페냐’이기도 하며, 빅토르가 많은 음악가들과 교감을 나누고, 음악예술가 층을 넓혀 나간 곳 역시 ‘페냐’였다.

‘페냐’에 적극적이던 빅토르는 ‘페냐’가 부흥하자, 오히려 ‘페냐’ 안에 갇힌 음악의 한계를 예견하며 ‘페냐’의 성과를 곳곳의 현장으로 퍼 나르는 활동에 심혈을 기울인다. 이 과정 역시 우리 민중예술이 소극장에서 광장으로, 현장으로 확산되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4. 아옌데 선거운동과 거리 예술

 70년 칠레 민주화운동과 살바도르 아옌데를 지지하는 인민연합의 선거운동은 칠레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예술 양식을 모색하게 한다. 엄존하는 파시스트의 테러나 방해를 피해서 거리 곳곳에 벽화를 그리는 작업은 새로운 미술 기법을 요구했다. 마치 ‘그래피티’와 같이 형태가 강조된 굵은 선에 눈에 잘 띄는 원색의 물감으로 채색을 하여, 먼 거리에서도 볼 수 있도록 크게 그려진 벽화는 칠레 미술의 새로운 성과이기도 했다. 이는 아옌데 집권기간 예술성 높은 ’벽화’로 발전한다.

발레 역시 무용가들이 충격을 그대로 받을 수 있는 딱딱한 바닥에서도 춤의 형상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 머리를 짜냈다. 조안 하라를 비롯한 안무가들은 춤의 동선을 더욱 굵게 하고, 동작을 더욱 역동적으로 만들면서도 무용가에게는 신체적 위험이 덜한 춤동작을 개발했다. 우아한 자태를 강조해주는 타이즈와 발레복도 변화했고, 먼 거리에서 보기에 동작 선을 한층 확장된 형태로 보이게 할 의상도 개발했다.

‘인티 이이마니’나 ‘낄라 빠윤’, 그리고 이들과 함께 하는 빅토르는 광장이나 거리에서도 언제든 악기를 펼쳐 공연했다. 버스 한대에 연주자와 가수들을 싣고, 전국을 누비며 언제 어디서든 관객과 한껏 어우러진 음악 공연을 창출한 것은 이들의 활달한 활동 덕분이다. 

5. 칠레 민주정부 - 아름다운 3년

 아옌데 민주정부 수립에서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민주정부가 무너지기 전. 그 3년의 기록은 국민들이 모든 활동에 팔을 걷고 적극적으로 나설 때, 사회가 얼마나 활력 넘치는지 보여준다.

빅토르 하라는 그의 팬인 노동자의 초대로 시골 마을 달동네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민주화 혁명 전에 달동네를 찾았을 때, 가난한 노동자의 아내는 고단과 가난으로 시들어 있었고, 낯빛은 그늘지고 주름이 그득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후에 찾은 노동자의 집. 가난은 여전했지만, 수도꼭지는 고쳐졌고, 천정은 수리를 했으며, 부서진 곳은 손질이 돼 있었다. 부인의 표정은 밝고 당당했다. 가난한 삶을 한탄하는 것으로 가득했던 그의 이야기는 마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바뀌었고, 조합에 대한 이야기를 하느라 얼굴에는 밝은 빛이 서렸다. 민주정부가 집권했던 3년 동안 칠레 민중들은 국가의 주인이었다.  

6. 파시스트의 테러와 폭압이 남긴 노래

 민주화 운동에 대한 테러와 쿠데타 이후 벌어진 극심한 폭력은 칠레 곳곳에 상흔을 남겼다. 민중에게 꿈을 안겨 준 아옌데는 쿠데타군의 폭격으로 숨을 거뒀다. 칠레 민중의 가슴에 숱한 노래를 남겼던 빅토르 하라는 그가 공연해오던 체육관에서 학살당했다. 하지만 억압자의 폭력은 오히려 빅토가 노래하게 만드는 기폭제였고, 더 많은 노래를 쏟아내게 한 동력이 됐다. 쿠데타 군 대위의 총탄에 쓰러지기 직전까지 빅토르는 미완의 시를 썼다.

"프에르트몬트에 대한질문"은 오늘 용산참사를 떠올렸다. "프에르트몬트에 대한 질문"은 오지 시골마을인 ‘프에르트 몬트’ 농민들이 단지 농성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총격을 받아 수십 명이 숨진 사건을 다뤘다. ‘프에르트몬트 학살’은 1960년 후반 오지 시골마을에서 벌어진 일이고, ‘용산 참사’는 2009년 서울 한복판 노른자위 땅, 그것도 대로 옆 빌딩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만 다르다.

"69 ’어느 한 농민을 위한 기도"는 고요하게 시작되어 격정으로 치닫는다. 빅토르는 가난한 농민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불렀으나, 그 노래를 듣는 농민은 난생 처음 듣는 ’자신처럼 미천한 사람’을 위한 노래였다. 그 노래를 들은 농민, 노동자들은 노래를 통해 자신의 삶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빅토르 하라가 못 다 하고 간 그의 삶은 모두 혁명이었다. 생각해본다. 성실한 연출가요, 작곡가요, 사랑스런 남편이며, 교사였고, 다정한 아빠였던 빅토르 하라의 심장을 불태웠던 요소가 무엇일지를…. 그의 모든 삶은 사랑이었으리라. 노래에 대한 사랑, 칠레에 대한 사랑, 어머니에 대한 사랑, 동료 예술가요, 아내였고 동지였던 조안 하라에 대한 사랑, 그리고, 아이들에 대한 사랑. 

빅토르는 묻혔으나 그는 살아 있다. 그가 남긴 노래와 그의 딸 마누엘라와 아만다가 여전히 살아가는 아름다운 칠레의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지구 반대편에서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시들지 않는 청춘의 모습으로, 지지 않을 노래로 살아 있다.


<선언>

내가 노래하는 것은 목소리가 좋아서나
노래하기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내 기타도 이성도 감정도 다 있기 때문에
노래하게 되는 것이다.
내 기타는 대지의 마음과
비둘기의 날개를 가지고 있네.
기쁨과 슬픔을 다 축복하는
성수(聖水)와 같은 존재.

비올레타가 말하던 것처럼
나의 노래는 목표를 찾았네.
노동하는 기타
봄 내음이 풍기는 기타.

내 기타는 부자들을 위한 게 아니다.
절대, 그런 것은 아니다.
나의 기타는 사다리
우리가 별에 오르기 위해 만드는고동치는 노래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나의 노래는 덧없는 게 아니다.
나의 노래는 이 좁다란 나라를 위한 것
땅 속 깊이까지 이 나라를 위한 것.
만물이 여기 잠들고
모든것이 시작되는 이곳에서
그동안 용감했던 그 노래는
영원히 새롭게 태어나리라.


<어느 농민에게 바치는 기도>

일어나라.
저 산맥을 바라보라.
바람과 태양과 물의 원천을
강물 씨를 뿌리는 그대여
일어나라.
너의 두 손을 바라보라
너의 형제들에게 손을 내어 주고 함께 자라나라.
피로 뭉친 우리는 함께 나아가리니
오늘은 우리의 장래를 만들어 가는 날.

우리를 비참함 속에 가두어 두는 주인의 손에서 해방시키시고
정의와 평등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높은 산길에서 들꽃을 바람에 날리게 하듯 우리에게 불어오시며,
불처럼 내 총의 총구를 깨끗이 해 주시며,
당신이 이 땅에서 마침내 뜻을 이루시듯
우리에게 힘과 투쟁할 용기를 주소서.

일어서라.
너의 두 손을 보아라.
너의 형제들에게 손을 내어 주고 함께 자라나라.
피로 뭉친 우리는 함께 나아가리라.
지금도, 우리가 죽는 그 시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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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난새의 내가 사랑한 교향곡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25
금난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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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 말하는 것이 예술가’라고 한다. 작품 속에서 예술가의 생각과 사고와 고민,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찾아내라는 얘기겠다. 물론 작가를 향해서 한 말이겠지만.. 작품을 보는 사람에게는 이 말이 그닥 친절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어지간한 눈썰미가 아니라면 작품에 담긴 작가의 생각과 철학, 그의 고민과 감성을 읽어내기란 무척이나 어렵기 때문이다. 하물며 작품을 낳을 때 그 작가가 어떤 환경 속에 있었는지, 정치적인 지향이 어떠했는지는 무슨 수로 알겠는가? 그러니 더듬기 식으로 조금 안다고 해도 안내자가 있다면 기꺼이 맞을 수밖에.

<금난새의 내가 사랑한 교향곡> 역시, 내 예술감상의 안내자로 맞은 책이다. 사실 어릴적 ’그네’라는 가곡에서 본 ’금수현’ 이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작곡가의 아들로 금난새라는 지휘자를 처음 알게 됐을 때, 그리 좋은 인상을 갖지는 않았다. 선택된 가문의 선택받은 도련님에 대한 묘한 ’거리감’이 작용했다. 하지만 그 무렵부터 클래식의 세계 안에 살아 온 사람의 안내서이니 읽어볼 가치가 있겠다 생각했다. 

<금난새의 내가 사랑한 교향곡(이하, 금난새의 교향곡)>은 전반적으로 청소년을 위한 ’교과서에 기반한 이야기 교향곡史’ 란 느낌을 받는다. 매우 유명한 교향곡 작곡가 10 명과 그들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소개하는 구성이 그 인상을 짙게 한다. 새로운 인물에 대한 재조명이나, 새로운 곡의 발견을 기대했다면 실망하기에 알맞다. 
허나, ’알고 있는 모든 것들 사이에는 틈이 있으며, 스치듯 아는 것과 내재된 속살은 분명 다른 것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읽는다면 성과를 얻을 수 있는 책이다.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시리즈’에 적절하달 수 있다. 
<금난새의 교향곡>을 통해 주목하게 된 몇 사람들과 그들의 삶, 그리고 음악의 세계를 추려본다.


푸근한 예술 성직자(?) 하이든 
음악가로서의 그의 삶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대체로 예술가 하면 성격 날카롭고 예민하고 기이하며 독특한 사람을 떠올리기 마련이건만 하이든은 나를 비롯한 사람들의 편견을 총체적으로 불식시킨다. 성실한 사람. 인품이 훌륭한 사람. 사람을 품을 줄 아는 사람. 주문자의 요구 때문이라지만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음악을 쓰려 한 사람. 행정적이나 재정을 돌보면서도 가장 많은 교향곡을 작곡한 사람이 하이든이라고 한다. 그의 일상을 상상해보면 마음과 성의를 다하는 푸근한 성직자가 떠오른다.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전면적인 후원의 대가로 후작이 만든 성안에 갇혀 지내며 수 많은 곡들을 만든다. 100 곡의 교향곡이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러나 깊은 내게 감동을 주는 하이든은 후작의 집요한 강제를 오히려 ’음악을 깊고 밀도 있게 만나는 기회’로 만들어낸 음악을 깊이 사랑하는 예술가의 모습이다. 후작의 성 안에 갇혀 지내는 것을 답답하게 여기는 대신

" 나는 세상과 단절되어 있다. 그 때문에 내 주변에는 내가 가야할 길을 혼란스럽게 하는 사람이 없다. 나는 독창적이다." 온전히 자신 안에서 솟는 음악의 샘에 몰두하며 다양한 실험 속에 독특한 음악의 세계를 구축한 음악가 하이든을 알게 되어 고맙다.

2. 금마에의 해석으로 다시 듣는 음악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 강마에가 단 한번의 지휘로 단원들의 연주를 바꿔놓는 장면이 나온다. 음악에 대한 고유하고 깊은 해석과 연주로 펼쳐놓기 전에 머리 속에 이미 형상으로 세부까지 담아낸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풍부한 설명이 단원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소개된 음악을 모두 함께 들었다. 금마에의 설명 속에 펼쳐진 음악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움을 같이 느끼고 싶어서 말이다. 그의 설명에 따라 음악을 들으면 연주의 숨소리까지 들리는 듯 하다. 꼭 권한다. 책으로만 읽지 말기를...


새롭게 만난 베를리오즈의 음악
사춘기 시절 내 감성을 자극한 음악들은 멘델스존이나 슈베르트 같은 말랑말랑한 곡들이었다. 베토벤은 당시엔 너무 무거운 느낌이었고, 베를리오즈는 잘 모르겠어서 불편했다. 헌데, <금난새의 교향곡>으로 베를리오즈를 만났고 감동 속에서 들을 수 있었다. 
사춘기 시절의 난 19C의 정서를 가졌던 걸까? 새롭고 간절한 자신의 음악을 펼치려 했던 베를리오즈. 그러나 정작 자기 나라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외면 받았던 천재적인 사람. 결국 한 세기를 지나서야 그의 정서를 공감할 사람들을 갖게 된 그와 그의 음악을 들끓는 감정을 안고 만났다. 곡 전체에 걸친 변화무쌍한 전개와 베를리오즈가 보았을 듯한 아름다운 환상이 음악 속에서 빛났다.
죽음의 문 앞에서, ’그들도 결국 내 음악을 연주하게 될거야.’라고 말 할 만큼 확신 있는 작품을 낳을 수 있다면 예술가에게는 최고의 성취가 아닐까?


여성 음악가 파니 멘델스존, 클라라 슈만
<금난새의 교향곡>에는 여성은 없다. 여성 작곡가나 지휘자는 없었으니까. 당연한 얘기지만, 여성인 내게는 늘 이런 사실이 당혹스럽고 새삼스럽다. 여성이 없는 곳이 꼭 음악만은 아니니 넘어갈까? 미술에도 물리학에도 철학에도 없던 세상이었으니 말이다. 헌데, <금난새의 교향곡>을 읽으며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그들의 음악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멘델스존이 인정한 작곡가 파니 멘델스존, 브람스가 출판 전에 반드시 의견을 물었던 클라라 슈만... 정말 만일이지만, 음악사에 여성이 등장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오늘 어떤 음악적 자산을 향수할 수 있었을까? 상상하는 것으로도 책장은 생각을 갈피 갈피에 물고 넘어갔다.


역시 우상일 수밖에 없는 베토벤. 작곡가로서의 긍지가 하늘을 찌르던 그의 당당함을 다시 확인한다. 그리고 그 사랑이 더욱 깊어진다. 나폴레옹에 대한 실망으로 악보에 적은 보나파르트란 제목을 구멍이 뚫리도록 벅벅 지우던 그의 맑은 정신세계를 흠모하는 마음으로 새겨본다. 예술언어로 세계를 드러내는 예술가란 진정 그렇게 맑아야 하지 않을까? 그럴 때 그 예술가를 거친 작품으로 더욱 선명히 드러나는 세계를 맞을 수 있으니 말이다.
사회적인 편견과 전쟁과 이념의 대립으로 고통을 겪고 그의 댓가로 더욱 밀도 있는 음악을 꺼내어 보여준 차이콥스키, 쇼스타코비치, 라흐마니노프들의 음악을 고마운 마음으로 들었다. 그 어떤 천재도 세상과 역사가 뿌려놓은 거친 흙을 밟지 않고 설 수 없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고 보니, <금난새의 교향곡>은 밀도 있는 여행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나니 아쉬움도 남는다. 아름답지만 <금난새의 교향곡>이라는 아름다운 세계가 향하는 눈은 역시 과거와 정돈된 것과, 해명되 것, 공인된 것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 보석같은 음악들이 오늘에 던지는 도전적인 화두나 예리한 자극을 바라는 것은 설익은 욕심일까?
여행 속에서 불편하게도 정갈하게 갖춰 입은 복장으로 품위 있는 사람들 틈에 앉아 '지금 박수 쳐도 되나?' 눈치를 보게됐다. 박수 칠 때를 가늠하느라 능숙한 지휘자가 퉁겨주는 유머와 안내에도 반쯤만 웃고 있는 내가 보였다. 가슴에 뭉글뭉글 올라오는 감동도 그냥 눈물 한 줄기로 끝내고 말아야 하는 내 불편한 자세를 결국 <금난새의 교향곡>은 편히 풀어주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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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그림 읽기
조이한.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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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전시회를 가는 건 좋지만, 좀 불편하다. 그림은 좀 알고 봐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나 혼자의 감성으로도 볼 수 있지만 그림 관련한 책을 한 두권 보다 보면, '역시, 좀 알고 봐야 하긴 하겠군.' 하는 생각이 드는 게다. 그러니 그림이나 미술에 관한 책들이 그렇게 많은 거겠지.
작년 초 루브르전을 갈 때도, 서양 미술에 관한 책을 몇 권 찾아 보고 갔음에도 도슨트의 안내가 없었더라면, '잘 그리는 사람들의 유명한 그림'을 눈요기 하고 오는 데 그칠 뻔 했다. 

그 전시회 이후 그림에 관한 책을 좀 봐야겠군 생각은 했지만 미루다가 곁에 도상학에 관심 있는 친구가 있어 그의 책을 한 두권 뽑아서 보다보니 슬슬 흥미가 당겨 읽은 책이 <조이한 진중권의 천천히 그림읽기>이다. 사실 저자에서 조이한이라는 이름을 보지 않았던들 이 책을 꺼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중권씨의 글은 늘 쉬운 걸 어렵게 보는 법을 배울지언정 어려운 걸 쉽게 보게 만들지는 않으니 말이다. <위험한 미술관>에서 만난 조이한이란 이름을 믿고 천천히 읽으려는 마음으로 <천천히 그림 읽기>를 집어든 셈이다.

<천천히 그림 읽기>는 나같은 도상학 초보자들이 읽기에 안성맞춤이다. 일단, 그림에 묘사된 것을 이해하기 위해 등장한 '도상학'의 개념과 단계부터 설명하고 있으니 말이다. 특히 사조와 도상학에서 드러내려 한 상징, 상징의 근거가 되는 시대상황, 철학 이런 것들을 한꺼번에 쏟아놓고 이야기 하는 통해 그림이 이야기에 묻혀 버리는 책들과 달리, 그림과 상징을 일대일로 대응시키고 그 상징에 대한 다양한 해설을 하는 것으로 깔끔하게 마무리 하는 서술 방식은 누구라도 쉽게 그림을 이해하고 그림의 세계에 들어가도록 돕는다.

제1장 그림의 표현 양식은 왜 변할까? 
제2장 그림의 내용을 얼마나 알 수 있을까? 
제3장 화가 자신 안에 숨겨진 무의식 세계 
제4장 화가의 의식 세계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제5장 여성화가들이 느끼는 육체의 미학
제6장 그림에는 요란한 의미의 움직임이 있다
제7장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거부한 현대 미술

목차에서 보는 것처럼 화가의 의도와 의식, 그것의 매개로서의 그림이라는 단선 안에 여러 곁가지를 드리우고 있어, 하나의 줄기를 따라서 책을 통과하고 나면 조금 그림이 볼만해지게 되는 것이다.

두 저자가 모두 미술사에 폭넓은 지식을 갖고 있어 다른 책에서 만나기 어려운 장면을 보여주는 것 또한 별다른 재미이다. 인상깊게 남는 것은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과 루이 블랑제가 그린 <1830년 7월 혁명의 알레고리>를 비교해서 보여준 것이다. 들라크루아의 작품 하나만 보았을 때는 다른 서유럽의 낭만주의와 다른 프랑스만의 독특한 낭만주의 정도로 이해했을 것이다. 허나 블랑제의 프랑스혁명을 보고 나서야 들라크루아가 그리고 싶었던 프랑스혁명의 장면이 선명해졌다. 

많은 부분을 할애하지는 않았지만, 좋아하는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를 다시 만난 것 역시 반가운 일이다. 특히 여성화가들이 느끼는 육체의 미학 꼭지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여성 화가들의 치열한 산고가 느껴져 더욱 공감이 갔다. 특히 파울라의 자화상과 그림을 위해 독립적 삶을 선택한 대목에 이를 때는 진한 자매애를 느꼈다.

역시, 책 한권 읽었다고 그림이 안 불편해지거나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천천히 그림을 읽어나갈 여유 하나는 배우게 된 건 소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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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이 사랑한 예술
아미르 D. 악젤 지음, 이충호 옮김 / 알마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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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을 향한 집요함은 예술의 고유한 특성이라 생각했다. 예술, 맞다. 집요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실체. 허나 또 하나의 범주가 있었다. 아름다움을 골방에서 추구하느라 가리워진 집단이 있으니 바로 수학자들이다.

20C 초반, 세계는 쌍차대전을 치루느라 혼란 속에 잠겼고, 쌍차 대전을 치른 후에 주변을 돌아보니 각 분야를 호령하던 내로라하는 인재들 중 절반이 목숨을 잃어 사라졌다. 19C 문명의 한복판에서 호령을 하던 프랑스도 프러시아의 침략으로, 나치의 공략으로 먹고 사는 것 그 자체가 ’미증유’인 때에 한 사람이 태어났다. 

그로덴티크 ____ 천재 수학자.
전쟁과 혁명의 아수라장에서 태어난, 이주민 부모들 사이에서 태어난 유태인이다. 살아남기 위해 수용소를 전전하고, 공인하는 교육기관이라고는 겨우 문턱을 밟아본 정도였다.
그저 혼자 놀았다. 혼자 노는 아이들은 종종 있지만 특이하게도 수학을 가지고 놀았다(공부를 가지고 놀다니...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랬단다). 이미 12세에 19C 수학자들이 수십년 걸려 성취한 정리를 혼자 놀다가 발견한다.(이런 사람 참 맘에 안 든다.). 허나 헛점은 있었으니, 수십명의 유수한 수학자들을 제자로 길러낸 자가 초보 수학자의 질문 "소수란 무엇입니까?"란 질문에 오답으로 답했다. "소수는 57이죠." 그런데, 57은 소수가 아니다. (57= 19*3 이므로) 개별요소에는 둔감했으나, 그 개별요소를 제거하기 위한(무시할 수 있었으므로) 치열한 노력 끝에 개별 요소를 제거하고 난 후에도 본질을 품은 채 남아있는 진리를 구하려 했고,  그 결과 세기가 지나도 변치않는 ’구조’를 밝혀냈다.

고등학교 1학년 수학의 첫 단원이 ’행렬’, ’집합’, ’순열’, ’벡터’였다. 단순 명쾌함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고되고 어려운 노동인지를 몰랐던 때라, "이게 수학이야? 국어의 가나다 잖아? 방정식 풀고 고등학교 입학했더니, 겨우 초등학교 때 배웠던 집합, 수, 자연수, 초월수, 완전수, 무리수, 유리수, 소수...들의 집합을 고등 수학에서 가르치다니?"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습게 봤던 집합, 순열들이 19C 놀라운 성과인 유클리드 수학을 넘어선 새로운 수학의 지평이었단다.  <수학이 사랑한 예술>을 읽고나서야 알았다. 
’기의’를 제거한 후에 남는 ’기표’에 주목한 수학자들의 대표주자 그로덴티크의 연구 성과이며 그 동료들의 공동 성과이다. 그로덴티크로 인해 철학과, 문화연구와, 대중문화와, 정신분석학과, 경제학은 범주의 본질을 이루는 구조를 읽을 수 있었고, 구조를 해명해 낸 성과로 저마다 연구와 분석, 학문적 성취에 있어 한 단계를 뛰어넘었다. 

대표적 주자로  레비-스트로스가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다양한 분야를 매개하는 언어를 찾아내어 사조로 일구었다. 아담스미스가 말한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좌표상에 나타낸 수요-공급의 그래프를 위상수학을 도입해서 그려내어 경제학을 구조화 해내고, 추상에서 출발한 다양한 법칙을 구상할 힘을 제공했다.

그로덴티크의 경쟁자, 지음, 질투의 화신 - 앙드레 베유

그로덴티크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 태어났으나 앙드레 베유는 귀족적인 가족 가운데(멘델스존 처럼) 온갖 교육과 환경을 제공받으면서 태어났다. 천재이고, 직관적이며, 온갖 예술과 여행을 다 경험했으나 그로덴티크의 탁월한(비인간적이기까지 한) 천재성을 보면서 열패감과 질투를 품고 살았다. 

허나, 행복을 아는 사람은 진정 놀 줄 아는가 보다. 베유는 수학에 빠져들면서 세기를 뒤흔들 놀이를 꾸몄다. 바로 "블루바키’의 탄생을 만들어낸 것이다. ’블루바키’는 개인성을 갖지 않았으나, 베유에 의해 개인으로 창조됐다. 베유가 망명하다가 연행되어 사형선고를 받을 때, ’간첩’으로 오인하게 만들었던 허위의 인물 ’블루바키’는 수학자들의 공동연구를 집대성 하여 논문으로 발표할 때마다 등장했던 인물이다. 실존의 ’블루바키’ 는 프랑스 19C의 가장 많은 승전보와 가장 많은 패전보를 전하던 전천후의 군장교였다. 그 역사속 인물의 이름을 빌어 베유를 비롯한 수학자들은 ’새로운 정리’를 발표했다. 놀라울만치 많은 논문을 발표하고, 기존의 수학으로 해명하지 못한 수학적 분석을 내놓던 ’블루바키’는 20C 프랑스 수학을 이끈 사람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그는 장난이 빚은 허위의 인물이다. 
그래도 참 아름다운 장난이었다. 고루한 수학자들이 지순한 사랑을 바칠정도로 하염없이 빠져들게 하는 창조적인 놀이를 개발하고 이어가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허위의(가상의) 블루바키는 여동생의 결혼 청첩장을 뿌리기도 하고, 지도에 없지만 버젓한 고향과 고향의 문화, 가족과 고유의 문체를 가진 수학사회 안에서 독보적으로 인정받는 인간이다. 그러나 ’블루바키’는 실존하지 않았고, 블루바키의 크고 작은 성과를 ’블루바키’라는 이름을 빌어 발표한 수학자 그룹만 있었다.

자크라캉, 소쉬르, 푸코, 프로이트, 피카소, ___ 시니피앙(기표)를 사랑한 선구자들

’블루바키’의 출발이며, 최고의 성취인 ’구조주의(다다이즘)’이 20C에 꽃피웠다. 소쉬르가 시작했으나 수학자 블루바키로 인해 깊어지고 풍부해진 구조주의의 등장과 부흥이다.
’구조주의’는 지고지순한 아름다움을 형식으로, 관계로 해명하려한 수학이며, 과학이며, 응결이며, 은유이며 환유이다.

구조주의가 문학으로 옮겨가면,
글을 쓰는 시인에게 모음 중 ’a’만 허용하는 시를 쓰게 했고,
행마다 단 하나의 모음만이 반복되는 시를 쓰게 했다.
뫼비우스의 띠를 따라 시를 쓰게 했으며,
하나의 알파벳을 정한 후에 그 알파벳이 문장 안에 결코 들어오지 않게 하는 시를 창조하게 했다.요소를 제거한, 혹은 요소가 없어도 성립되는 단 하나의 구조를 찾아, 부야별 천재들이 모여서 연구했고, 결실을 맺어 ’구조주의’를 낳았다.

예술은 총화점인 동시에 발화점이다.

출발과 마지막에 예술이 있다. 때론 놀이처럼, 때론 심오한 연구논문처럼, 때론 형식을 향한 교조같기도 했던....  많은 예술가들에게 시니피앙(기표)에 주목했던 성과를 넘어선, 그것의 변형, 그것의 풍부함, 그것의 자유로움에 대한 밀도 있는 고백이다..

<수학이 사랑한 예술> 수학자들의 삶은 그로덴티크처럼 고단했으나, 3대에 걸친 블루바키로 인해 하나의 산맥을 이루었고, 그 건실과 순수가 빚어낸 구조주의는 20C에 살던 각 분야의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성장하게 했다.

’구조주의’ 참 이해하기 어려운 사조였으나 <수학이 사랑한 예술>을 통해 내게는 아름다움의 대명사로  남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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