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난새의 내가 사랑한 교향곡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25
금난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작품으로 말하는 것이 예술가’라고 한다. 작품 속에서 예술가의 생각과 사고와 고민,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찾아내라는 얘기겠다. 물론 작가를 향해서 한 말이겠지만.. 작품을 보는 사람에게는 이 말이 그닥 친절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어지간한 눈썰미가 아니라면 작품에 담긴 작가의 생각과 철학, 그의 고민과 감성을 읽어내기란 무척이나 어렵기 때문이다. 하물며 작품을 낳을 때 그 작가가 어떤 환경 속에 있었는지, 정치적인 지향이 어떠했는지는 무슨 수로 알겠는가? 그러니 더듬기 식으로 조금 안다고 해도 안내자가 있다면 기꺼이 맞을 수밖에.

<금난새의 내가 사랑한 교향곡> 역시, 내 예술감상의 안내자로 맞은 책이다. 사실 어릴적 ’그네’라는 가곡에서 본 ’금수현’ 이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작곡가의 아들로 금난새라는 지휘자를 처음 알게 됐을 때, 그리 좋은 인상을 갖지는 않았다. 선택된 가문의 선택받은 도련님에 대한 묘한 ’거리감’이 작용했다. 하지만 그 무렵부터 클래식의 세계 안에 살아 온 사람의 안내서이니 읽어볼 가치가 있겠다 생각했다. 

<금난새의 내가 사랑한 교향곡(이하, 금난새의 교향곡)>은 전반적으로 청소년을 위한 ’교과서에 기반한 이야기 교향곡史’ 란 느낌을 받는다. 매우 유명한 교향곡 작곡가 10 명과 그들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소개하는 구성이 그 인상을 짙게 한다. 새로운 인물에 대한 재조명이나, 새로운 곡의 발견을 기대했다면 실망하기에 알맞다. 
허나, ’알고 있는 모든 것들 사이에는 틈이 있으며, 스치듯 아는 것과 내재된 속살은 분명 다른 것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읽는다면 성과를 얻을 수 있는 책이다.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시리즈’에 적절하달 수 있다. 
<금난새의 교향곡>을 통해 주목하게 된 몇 사람들과 그들의 삶, 그리고 음악의 세계를 추려본다.


푸근한 예술 성직자(?) 하이든 
음악가로서의 그의 삶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대체로 예술가 하면 성격 날카롭고 예민하고 기이하며 독특한 사람을 떠올리기 마련이건만 하이든은 나를 비롯한 사람들의 편견을 총체적으로 불식시킨다. 성실한 사람. 인품이 훌륭한 사람. 사람을 품을 줄 아는 사람. 주문자의 요구 때문이라지만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음악을 쓰려 한 사람. 행정적이나 재정을 돌보면서도 가장 많은 교향곡을 작곡한 사람이 하이든이라고 한다. 그의 일상을 상상해보면 마음과 성의를 다하는 푸근한 성직자가 떠오른다.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전면적인 후원의 대가로 후작이 만든 성안에 갇혀 지내며 수 많은 곡들을 만든다. 100 곡의 교향곡이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러나 깊은 내게 감동을 주는 하이든은 후작의 집요한 강제를 오히려 ’음악을 깊고 밀도 있게 만나는 기회’로 만들어낸 음악을 깊이 사랑하는 예술가의 모습이다. 후작의 성 안에 갇혀 지내는 것을 답답하게 여기는 대신

" 나는 세상과 단절되어 있다. 그 때문에 내 주변에는 내가 가야할 길을 혼란스럽게 하는 사람이 없다. 나는 독창적이다." 온전히 자신 안에서 솟는 음악의 샘에 몰두하며 다양한 실험 속에 독특한 음악의 세계를 구축한 음악가 하이든을 알게 되어 고맙다.

2. 금마에의 해석으로 다시 듣는 음악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 강마에가 단 한번의 지휘로 단원들의 연주를 바꿔놓는 장면이 나온다. 음악에 대한 고유하고 깊은 해석과 연주로 펼쳐놓기 전에 머리 속에 이미 형상으로 세부까지 담아낸 사람만이 해낼 수 있는 풍부한 설명이 단원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소개된 음악을 모두 함께 들었다. 금마에의 설명 속에 펼쳐진 음악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움을 같이 느끼고 싶어서 말이다. 그의 설명에 따라 음악을 들으면 연주의 숨소리까지 들리는 듯 하다. 꼭 권한다. 책으로만 읽지 말기를...


새롭게 만난 베를리오즈의 음악
사춘기 시절 내 감성을 자극한 음악들은 멘델스존이나 슈베르트 같은 말랑말랑한 곡들이었다. 베토벤은 당시엔 너무 무거운 느낌이었고, 베를리오즈는 잘 모르겠어서 불편했다. 헌데, <금난새의 교향곡>으로 베를리오즈를 만났고 감동 속에서 들을 수 있었다. 
사춘기 시절의 난 19C의 정서를 가졌던 걸까? 새롭고 간절한 자신의 음악을 펼치려 했던 베를리오즈. 그러나 정작 자기 나라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외면 받았던 천재적인 사람. 결국 한 세기를 지나서야 그의 정서를 공감할 사람들을 갖게 된 그와 그의 음악을 들끓는 감정을 안고 만났다. 곡 전체에 걸친 변화무쌍한 전개와 베를리오즈가 보았을 듯한 아름다운 환상이 음악 속에서 빛났다.
죽음의 문 앞에서, ’그들도 결국 내 음악을 연주하게 될거야.’라고 말 할 만큼 확신 있는 작품을 낳을 수 있다면 예술가에게는 최고의 성취가 아닐까?


여성 음악가 파니 멘델스존, 클라라 슈만
<금난새의 교향곡>에는 여성은 없다. 여성 작곡가나 지휘자는 없었으니까. 당연한 얘기지만, 여성인 내게는 늘 이런 사실이 당혹스럽고 새삼스럽다. 여성이 없는 곳이 꼭 음악만은 아니니 넘어갈까? 미술에도 물리학에도 철학에도 없던 세상이었으니 말이다. 헌데, <금난새의 교향곡>을 읽으며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그들의 음악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멘델스존이 인정한 작곡가 파니 멘델스존, 브람스가 출판 전에 반드시 의견을 물었던 클라라 슈만... 정말 만일이지만, 음악사에 여성이 등장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오늘 어떤 음악적 자산을 향수할 수 있었을까? 상상하는 것으로도 책장은 생각을 갈피 갈피에 물고 넘어갔다.


역시 우상일 수밖에 없는 베토벤. 작곡가로서의 긍지가 하늘을 찌르던 그의 당당함을 다시 확인한다. 그리고 그 사랑이 더욱 깊어진다. 나폴레옹에 대한 실망으로 악보에 적은 보나파르트란 제목을 구멍이 뚫리도록 벅벅 지우던 그의 맑은 정신세계를 흠모하는 마음으로 새겨본다. 예술언어로 세계를 드러내는 예술가란 진정 그렇게 맑아야 하지 않을까? 그럴 때 그 예술가를 거친 작품으로 더욱 선명히 드러나는 세계를 맞을 수 있으니 말이다.
사회적인 편견과 전쟁과 이념의 대립으로 고통을 겪고 그의 댓가로 더욱 밀도 있는 음악을 꺼내어 보여준 차이콥스키, 쇼스타코비치, 라흐마니노프들의 음악을 고마운 마음으로 들었다. 그 어떤 천재도 세상과 역사가 뿌려놓은 거친 흙을 밟지 않고 설 수 없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았다.

그러고 보니, <금난새의 교향곡>은 밀도 있는 여행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나니 아쉬움도 남는다. 아름답지만 <금난새의 교향곡>이라는 아름다운 세계가 향하는 눈은 역시 과거와 정돈된 것과, 해명되 것, 공인된 것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 보석같은 음악들이 오늘에 던지는 도전적인 화두나 예리한 자극을 바라는 것은 설익은 욕심일까?
여행 속에서 불편하게도 정갈하게 갖춰 입은 복장으로 품위 있는 사람들 틈에 앉아 '지금 박수 쳐도 되나?' 눈치를 보게됐다. 박수 칠 때를 가늠하느라 능숙한 지휘자가 퉁겨주는 유머와 안내에도 반쯤만 웃고 있는 내가 보였다. 가슴에 뭉글뭉글 올라오는 감동도 그냥 눈물 한 줄기로 끝내고 말아야 하는 내 불편한 자세를 결국 <금난새의 교향곡>은 편히 풀어주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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