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표류기
허지웅 지음 / 수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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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무엇이 될 것이냐에 관한 문제는 중요한 게 아니다. 아니, 애초 정직하지 못한 화두다. 정작 천착해야 할 문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객관적으로 온전히 파악해내는 일이다.
질문이 필요하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나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그것은 다시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여기에는 어떤 사상도 당위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타자로부터 강요된 나’를 가장하길 거부하고 진짜 나를 찾아 충실해지는 순간, 모든 게 명확해질 수 있다. 정치적으로 올바를 것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성인을 연기하고 흉내 낼 이유 따윈 없다. 그저 나 자신과 솔직하게, 노골적으로 관계 맺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훨씬 좋아질 것이다. 그것은 결코 실패할 리 없는 혁명이다."

- 본문 중에서 -

 

<대한민국 표류기>는 날 것 그대로다. 쌩얼이다. ’공동체’ 없는 대한민국에 살면서 목적이든 방향이든 명료할 수 없는 사람살이의 고백이다. 나는 ’다스 베이더’나 ’세계의 유령 대백과’, ’괴기랜드’에 열광하지 않으며, 패션감각은 무디고 무뎌서 부츠를 헐렁하게 벗어 놓고 말지만 그의 글에 공감하고 낄낄거렸다.


이런 글이 좋다. 마치 오쿠다 히데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답이 안 보이는’ 20대의 초상을 그냥 현실에 풀어 놓은 듯 생물처럼 파닥거리는 삶을 마주하는 동안 내 안의 피돌기가 조금 더 빨라지는 걸 느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책을 펼치기 전 뒷면에서 본 추천글이다. 내가 좋아하는 류승완 감독과 강풀의 추천글이었다. (저자의 입장에서는 묻어가는 듯 기분 나쁠 수도 있겠으나 난 일단 류승완 감독과 강풀 화백이 너무 좋다. 그들의 작품을 보면서 이미 좋아하기로 마음을 굳혀 버렸다. _ 심지어는 내가 좋아하지 않는 미스터리도, 깍두기 물도 기꺼이 보게 만들 만큼)

<대한민국 표류기>는 그냥 허지웅이다. 어떤 담론을 터뜨려 놓거나, 어떤 이즘을 강론하지 않는다. 그냥 그의 생각이고 그의 생활이다. 그래서 그가 부럽다. 망이 거친 여과기조차 들이밀지 않을 수 있는 ’거침 없음’이 부럽다. 나는 나 자신과 관계 맺을 때조차 끊임없이 나를 검열한다. 그게 습성이 되어버렸다. 이게 그의 표현대로 386의 고질병이고, 성인 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꼰대 근성일지 모르겠다.

당장 내일 있을 일제고사를 두고 아이와 며칠 동안 이야기를 하고 나서도, 결국 아이가 "아무래도 용기가 안 나. 그냥 시험 볼래."라는 답을 듣고 나서는 그 다음을 위해 이 악물고 덤벼드는 일 따위는 하지 못한다. 그저 "그래? 그럼 오늘 저녁 다시 이야기 해보자." 해 놓고, ’할머니가 편찮으시다고 할까?’를 떠올릴 뿐이다.
’무엇이 될까?’, ’아이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 될까?’ 에 몰두하지 않지만,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두고 깊이 있게 천착하지 않는다. 그저 주위 사람들과, 일과의 관계 안에서 나를 얼마간은 규정하고, 얼마간은 비춰보며, 얼마간은 용서하고 봐주고 넘어간다.

<대한민국 표류기>는 허지웅이다. 나는 그저 자연인 허지웅을 읽었다. 비루한 환경과 말 안 통하는 세상 속에서도 자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반갑다. 이렇게 ’자기’를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으면 우리 사회도 덜그덕 거리며 생동하며 조금씩 건강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모든 사람들의 개성이 존중되고, 모든 사람들의 자유로운 상상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행동방식이 방해받지 않으며, 미래를 설계하고 이야기 하는 때에 어떤 폭력이나 제도도 발목을 잡지 않고, 다르다는 것이 어떤 집단에게 왕따나 차별의 이유가 되지 않는 세상을 바란다.
이 사회는 아직 나의 바램을 허락하지 않는다. 아주 완고하게, 제도와 정책과 이데올로기의 그물망을 앞세워서 말이다. 그렇다면 나도 당분간은 표류해야겠다. 진짜 나를 찾아서 충실해지고, 충실하게 나를 실현할 수 있는 착륙점을 찾을 때까지만 말이다. 다만, 표류하는 동안 솔직할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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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소리 기술 - 소리치지 않고 야단치지 않아도 아이가 달라지는
최영민.박미진.오경문 지음 / 고래북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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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키우는 일에 늘 서툴다. 아이를 낳고 갓 태어난 아이의 젖은 머리와 꼬물거리는 손가락과 잡으면 부러질 듯 너무 가늘었던 발목을 만지던 그 때부터 이제 열 두살 초등학생이 되어 자기 멋에 머리를 기르겠다고 하고, 옷을 우겨서 골라 입고, 만화 캐릭터가 있는 소지품은 거부하고, 연애인이 등장하는 브로마이드를 사 모으고, 인터넷 사이트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가요를 다운 받아 듣는 아이를 키우는 지금도 서툴다.

서툰 티를 내지 않으려고 '부모를 위한 강좌', 공동육아 협동조합에서 하는 '부모 교육', 몇 권의 책에서 본 상식을 앞 세워서 "아이는 말이야.", "아이 키울 때는 말이야" 하면서 늘어 놓는 때도 있지만 나는 늘 아이와 부딪히는 비반복적인 상황마다 늘 서툴다.

아이 교육에 관한 책을 처음 한 권 읽었을 때, "아이 교육에 선수를 만들어 주는 책은 없구나." 하는 걸 금방 알아챘다. 그래서 <잔소리 기술>을 받아 들었을 때도 딱 그만큼의 기대만을 안고 읽기 시작했다.

열 두살된 아이와 지내며 요즘 겪는 문제는 아이가 엄마를 너무 만만하게 본다는 거였다. 평소, '나는 어차피 일을 하는 엄마고, 아이도 인격체고 자기 환경에 적응을 하면서 생각의 폭을 넓히는 법이니까 내가 진솔하게 대하면 아이도 엄마의 진정을 알아주지 않겠는가?', '엄마를 어려워 하는 것 보다는 엄마를 격 없이 대하는 게 더 좋겠지.', '진정으로 대하면 마음이 통하는 법이니 엄마 마음을 아이도 알아줄거야.' 하는 마음을 갖다보니 아이가 엄마를 만만하게 볼 만도 하다. 하지만 그런 아이를 대할 때면 이만저만 속상한 게 아니다.

그러니 세상에 소리치지 않고, 야단치지 않아도 아이가 달라지게 하다니 대체 가당키나 한 일일인가? 하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결론을 말하면 <잔소리 기술>은 처음 기대를 넘어서는 책은 아니다. 여전히 '소리치지 않고, 야단치지 않고 아이를 달라지게 할 자신도 얻지는 못했다.

다만, 다시 내 태도의 문제를 돌아보게 했고, 책을 다 읽은 다음 나는 아이에게 전화를 걸어 "사랑한다"는 말을 의도적으로 더 했으며, 그날 밤 잠들기 전 아이가 공부방에서 다른 아이들 때문에 속상했다는 길고 긴 이야기를 성의껏 끝까지 들어주었다. 아이는 평소 보다 훨씬 더 길게 이야기를 했고, 토요일에는 아이를 '못살게 구는 5학년 여자아이들'과의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더 이야기를 해보기로 약속했다.
 

<잔소리 기술>에서 주목했던 내용들을 추려본다.

 * 철저한 이기주의자다
아이가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은 적어도 초등학생 이상이 되어야 가능해지지만 이것도 극히 부분적인 이해에 한정된다.

* 남자 아이들은 간섭을 '자기를 믿지 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아주 기분 나빠한다.

* 아이의 이득과 부모의 이득이 상충될 때는 잔소리를 해봤자 소용이 없다. 이때는 잔소리를 하더라도 아이의 이득을 먼저 염두에 두고 부모가 원하는 것을 조금만 얻는 방향으로 해야 한다.

* 강한 반항기가 있는 경우에는 처음부터 잔소리를 안 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어떤 경우라도 이왕 잔소리를 시작했으면 자녀의 행동에 부모가 휘둘려서는 안 된다. 그런 행동이 반복되면 부모로서 권위가 사라질뿐 아니라 자녀는 점점 통제하기 어려워진다.

* 부모가 위엄이 없을 경우, 특히 남자아이는 자신보다 서열을 낮게 보아 무시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잔소리 기술>은 '이렇게 이렇게 해봐라.' 보다는 '이렇게는 하지 마라.'가 더 많은 책이다. 그런 점에서 좀 더 다양한 사례로 긍정적으로 상황을 해결하는 부모의 모습을 보여주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불편했던 점은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의 특성을 고정화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성장 단계에 있는 아이들에 관한 문제이니 차이를 구체화 할 필요에서 그랬겠지만, 문제는 남자 아이든 여자 아이든 부모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과 공감을 이루고 자신의 행동을 바꾸어 나가도록 부모가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는 말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특성과 심리를 좀 더 깊이 이해하여, 소통의 실패를 예방하는 방법 보다 소통을 잘 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행동을 이끄는 방법을 담지 못한 것이 아쉽다.

불편했던 또 한 가지는 어느 정도 공부를 잘 하게 하는 것이나, 성공한 사람들의 부모교육법을 사례로 이야기 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행동변화와 성인이 되어 성공하는 것은 어느 정도 연관이 있겠지만 성공이라는 것은 명성을 얻는 것이나 돈을 많이 버는 것만을 뜻하지도 않는다고 여긴다. 아이 교육에서 더 많이 다뤄야 할 것은 아이들이 부딪히는 가족과 아이들의 세계에서 긍정적으로 성장해가는 모습이 아닐까? 그렇게 자라가는 아이들의 사례를 나는 이 책에서 기대했으나 얻지 못했다.

결국, 책에서 아이 키우는 법을 전적으로 얻을 수 없다는 평소의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허나, 아이 교육에 도움을 주는 책인 것은 분명하며 이런 책을 한 권 볼 때 마다 서툰 나도 조금씩이나마 변화해보겠다는 다짐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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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 - 사악한 화폐의 탄생과 금융 몰락의 진실
엘렌 호지슨 브라운 지음, 이재황 옮김 / 이른아침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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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이런 생각을 했었다. "왜? 가난한 사람들이 있지? 나라에서 돈을 만들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돼잖아?" 이 의문에 적절한 답을 얻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돈이라는 것은 거저 얻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와 ’진정한 가치는 땀흘려 수고했을 때, 얻는 것’이라는 이야기에 ’나눠주는 것’에 대해 일정하게 포기했나 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해 주는 돈이든, 땀흘려 얻은 대가로서의 돈이는 그 말에는 늘 가치가 섞여 있었다. 허나,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세계경제의 투기금융화의 다양한 폐해들 속에서 돈은 이미 어릴적 기억에 등장하는 ’가치’들과는 멀어지고 있다는 걸 확연히 느낄 수 있다.

<달러>는 '나라'가 돈을 찍어낼 힘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데서 출발한다. 조폐권을 둘러싼 외국의 금융과 정부간의 길고 긴 싸움을 역사적인 사건들을 예로 들어 상세히 다룬다. 어릴적 품었던 희미한 의문을 속시원히 풀어준 셈이다.
아울러, ’돈’이 왜 가치에서 이탈하게 되었는지를 ’달러’의 태생과 역사, 세계의 기축통화가 되고나서부터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그리고 과도한 유동성을 얻어 증권, 금융화 되고나서 어떤 행보를 걸어왔는지를 두루 이야기 한다. 역사 속 다양한 실례들과, 금융시장의 한 복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정치나 법과 관련한 이야기, NAFTA나 WTO 등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실증적인 사례와 함께 싣고 있다.

신자유주의화 된 세계경제의 매개자인 ’달러’의 행보를 쫓아가다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신자유주의 사회를 총체적으로 만나게 된다. 미국 국가주의의 시각을 갖고 있는 저자의 시각이 약간 거슬리는 점도 있지만, 달러의 태생지며, 주된 활약처인 미국의 상황을 생생하게 담을 수 있는 저자의 시선이 <달러>의 웅변력을 한층 높여준다.

환상의 세계로 이끄는 동화로만 알고 있던 <오즈의 마법사>를 새롭게 알게 된 것도 작은 성과이다. 미국이 영국의 금융세력으로부터 국가화폐를 지키기 위해 싸우던 때에 태어난 <오즈의 마법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완본을 구해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달러>가 가진 설득력을 배가시키고, 두꺼운 책이지만 몰입하게 만드는 데는 무엇보다 빼어난 번역의 힘이 큰 작용을 했다. 언론의 경제면을 보는 것보다 더 읽기 쉽도록 경제용어를 맞춤한 우리말로 풀어 쓴 흔적이 곳곳에서 보인다. 어느 용어사전을 찾아본다고 해도 이렇게 친절한 해석은 만나기 어려울 듯 하다.

<달러>는 금융투기화된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갖는 문제를 다양한 예시를 들어 지적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역사 속에 있었던 다양한 긍정적인 실험들과 현재, 세계의 나라와 지역에서 진행하고 있는 달러의 빚거미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행보를 걷는 사례들을 조명한다. 아직은 ’대안의 가능성’인 것들이지만, ’달러’의 고향인 미국의 경제마저 ’빚거미’의 포획에 녹아나고 있는 현재를 비추어 본다면 많은 희망의 요소를 전한다.

수많은 나라들을 실패의 늪으로 빠뜨린 변동환율제를 비롯해서, 자본시장 통합법의 발표, 각종 규제의 철회를 표방하는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과 말레이시아와 인도, 중국의 행보들을 비추어 보고, 짐바브웨의 사례를 반면교사로 비추어 보는 것도 값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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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레, 벌거벗은 영혼 다빈치 art 11
구로이 센지 지음, 김은주 옮김 / 다빈치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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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레. 그의 그림을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인물의 강렬한 시선에 빠져들고 만다. 온몸이 강한 떨림에 휩싸인 듯한 몸의 선과, 강조된 손의 표정과 옷을 벗는 것으로 모자라 마치 피부를 거둬내서 내면에 꿈틀거리는 것들을 그대로 쏟아내는 듯한 몸들은 선명한 촉감을 전한다. 아름답거나 고운 것과는 거리가 먼, 거칠거칠한 수세미로 몸을 긁어대는 듯한 정체모를 불편함이 그의 그림에 눈을 잡아둔다. 왜 그는 이런 불편한 그림들을 그렸을까? 그게 궁금했다.

<에곤 실레, 벌거벗은 영혼>은 짧은 생애에 실레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 실레만이 구축할 수 있었던 예쑬세계를 꼼꼼히 짚어낸다.

두 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에곤실레에게 그림은 살기 위해 꼭 필요한 구성요소였고, 삶의 가장 중심에 있었으며, 그림이 한 복판에 깃든 자신의 삶에 대한 기록이었다. 에곤 실레를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것은 그림이었고, 에곤 실레가 가장 첨예하게 부딪혔던 삶의 현장도 그림에 있었다. 


1. ' 새로운 예술가'

히틀러가 그렇게도 들어가고 싶어했던 독일 최고의 미술 교육기관, 미술아카데미. 17살의 어린 나이에 추천을 받아 입학한 에곤 실레에게 미술 아카데미는 오로지 그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 반가운 곳이었다. 그림 외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틀진 규율에 적응하지 못했던 실레가 뛰쳐나올 수밖에 없던 학교와 달리 미술아카데미는 그림으로 말하는 자신을 알아주는 소중한 곳이었다.
그러나 기대를 품고 들어간 아카데미는 실레의 바램과 달랐다. 그리스 조각의 아름다움을 자연의 아름다움보다 가치 있게 여기고 지나치게 보수적이며 시대의 현실에 등을 돌린 미술 아카데미와 실레는 화합할 수 없었다. 아카데미는 시대의 현실에 등을 돌렸고, 시대의 현실을 세밀하게 보려한 에곤실레는 아카데미에 늘 엇서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교수로부터 "자네는 악마가 내 교실로 보낸 학생이다"라는 말을 듣기도 한다. 자기 삶의 방식을 스스로 선택하듯, 실레는 그림은 누구의 방식도 아닌 자신만의 방식을 따랐던 것이다. 

열아홉살이 되던 해 실레는 그리펜케를 교수의 학생들과 13항목의 아카데미 개혁요구안을 학교측에 제시한다. 허나 요구안은 거절당하고 그만두지 않으면 퇴학당할 처지가 된다. 결국 그들은 '새로운 예술가 그룹'을 결성한다. 열아홉 살의 나이에 미술 학도의 신분을 버리고 시대의 한가운데로 나가 한 사람의 화가로 우뚝선다.
아카데미에 내민 13조항 가운데 '예술 작품의 질은 꼭 미술 아카데미에 의해서만 판정되는 것인가?', '청년들이 사랑하는 조국 오스트리아를 위해 전 유럽의 예술 활동을 선도하는 위치에 서고자 하는 시도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는가'와 같은 요구는 실레 스스로 자신의 미술에 얼마나 많은 자부심을 품고 있는지를 읽을 수 있다.

"혜안을 가진 열 명을 포함한 천 명의 학자가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한 명의 천재, 한 명의 발명자, 한 명의 창조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식을 가진 사람은 몇천 명이나 됩니다. 이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훌륭한 사람과 앞으로 훌륭하게 될 사람들이 있겠지요. 그렇지만 나는 나의 훌륭함이 마음에 듭니다."라 말할 수 있는 그의 당당함이 자신만의 미술에 대한 당당함으로 발현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래는 '새로운 예술가'란 제목으로 실레가 쓴 글의 일부이다.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이 시대를 향해 나아갈 운명에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들 모두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시대의 자식들이다. 적어도 현대로 나아가는 길을 찾아낸 자들이기에.
우리들 대부분은 예술가다. 예술가라는 표현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칭호나 특성을 지닌 인간에 대해서가 아니라 운명적으로 사명을 짊어진 인간에 대해서다.
예술은 항상 동일한 한 가지로서, 즉 예술로서 존재한다. 그런 까닭에 그 어떠한 '새로운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새로운 예술가'는 존재한다. 새로운 예술가의 습작은 언제나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습작은 살아 있는 그 자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들 중에는 개성이 결여된 사람도 있고, 개성이 풍부한 사람도 있다. 운명적으로 사명을 짊어진 자들이란 바로 후자를 가리킨다. 그러나 새로운 예술가는 많지 않다. 지극히 소수다. 새로운 예술가는 무조건 그 자신이어야 한다. 그는 창조자가 아니면 안 된다. 그는 매개되는 것 없이, 즉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을 이용하지 않고 전적으로 혼자서 자신의 내부에 자기가 발판으로 하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그는 새로운 예술가인 것이다. 

우리들 각자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이름은 '새로운 예술가 그룹'이 될 수 있다. 그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자는 오로지 혼자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완전한 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는 적어도 자신의 미래를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에 의해 독자적인 창조를 이뤄낼 수 있는 새로운 예술가가 몇 명쯤은 존재한다. 정해진 처방전은 그들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다. 모든 새로운 예술가는 본래 자기 혼자서, 자신을 위해서만 창조하며, 자신이 바라보는 모든 것을 창조한다. 그들은 모든 형태를 창조해 내고, 모든 형태를 그려낸다. 예술가는 한 시대를, 그 삶의 일부를 나타낸다. 언제나 존재 속에서의 위대한 한 가지 체험에 의해.


2. 가라앉힐 것을 가라읹히지 않는 실레

실레에게 '성(姓)'은 한 없이 이끌리지만, 격없이 다가갈 수 없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해석대로 아버지의 병력이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겠다. 허나 굳이 아버지의 병력이 아니었을지라도 육체적인 성의식은 분명 무언가 불편한 요소를 안고 있다. 특히 청년기의 강렬한 욕구를 늘 안고 있으나, 이를 자연스럽게 해소할 수 없는 상황이 충돌을 일으키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실레 역시 그랬을 것이다. 다만, 다른 것은 실레는 충돌을 빚는 자아의 단면과, 충돌을 일으키게 하는 대상을 날것 그대로 그렸다는 것이다. 
수 많은 벗은 몸을 그렸으나, 아름답다거나 매혹적이다거나, 신비롭다거나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그의 그림들을 보면 실레가 느꼈을 감정을 어느정도 느낄 수 있다. 골몰해있는 듯 하나 불안해 보이기도 하며, 긴장하는 듯 하나 몰두해 있는 실레의 여러 자화상은 저자의 지적대로 어떤 '일기' 보다도 선명하게 청년의 실레를 기록한다.
많은 사람들은 가라앉히고 정화하는 것을 오히려 흔들고, 휘저어서 내면에 있는 모든 요소들을 그대로 화폭에 토해내는 실레. 만일 그 시선이 자신의 밖으로 확장될 겨를이 그에게 있었다면 20세기 초반의 격동하는 세상을 날것 그대로 담은 생생한 기록을 만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크다.


3. 실레 그 자체인 그림

"나는 다시 그림에 몰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림이 없었다면 참아내기 힘든 상황도 이젠 견딜 수가 있을 것이다. 나는 겸손한 태도로 나를 굽힌 채 이 그림도구들을 위해 걸식이라도 하듯 애원했다. 만일 다른 방법이 없다면 그들 앞에서 우는 시늉이라도 했을 것이다. 오오, 예술이여! 너를 위해서라면 이 몸이 감당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고작 3일이었다. 24일간의 구류생활 중에 3일 동안 그림을 그릴 수 없던 실레가 4일째 되던 날 그림도구를 받고 쓴 일기이다. 예술가에게 예술이 밥만큼이나 꼭 필요한 일상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허나 실레처럼 단 사흘만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라면 모든 고통을 감당하겠다고 할 예술가들이 얼마나 될까? 

그리는 것으로 자신을 탐구하고, 눈에 보이는 것들을 만나고, 세상을 만나고, 내밀한 감정까지도 새삼스레 만나가던 실레의 예술 열정을 <에곤 실레, 벌거벗은 영혼>을 통해 깊게 새긴다. 스물 일곱의 짧은 그의 삶이 너무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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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라, 남자 - 농부 김광화의 몸 살림, 마음 치유 이야기
김광화 지음 / 이루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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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살면서 가장 힘든 일이 가까운 사람에게 잘 하는 것과, 매일 부딪히는 일상을 잘 해나가는 것이라 여긴다. 매일 먹고, 자고, 싸고, 잠들고, 일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내 마음을 그들에게 꺼내 보이는 일. 일상 속에 놓여 있어 잘 할 생각을 하기 어려운 것을 성찰하는 <피어라, 남자>. 
<피어라 남자>를 나는 생태주의자의 귀농일기로 읽지 않았다. 매일 만나는 나와 나와 관계 맺는 것들을 눈여겨 보고, 의미를 되새기는 이야기로 읽었다. 거창하거나 목표를 수치로 세워놓는 것이 아니라서 더욱 잘 하기 어려운 일상. 그 안에서 새삼스럽게 발견하는 가치와 철학을 덩달아 음미해보았다. 


1. 내가 나를 지배하는 힘.

글쓴이는 사람들이 권력을 갖으려 애쓰는 이유를 자신의 삶에서 주도권을 갖지 못하는 상황에서 찾는다. 사회 전반을 통틀어 하는 이야기가 아니어서 '권력'이란 것에 반감을 갖는다는 얘긴지, 부정적인 측면을 말하려는 지는 모르겠다. 허나 자신을 지배하는 힘을 근거로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산다. 나름대로 자유롭고 당당하다. 내 안에 잠재된 가능성을 하나둘 살려내면서 자신을 확장해간다."는 그의 고백을 들으며, 아름다운 삶이라 생각했다. 
자신이 갖고 있는 기질과 자신이 원하는 것, 잘하는 것과 약점, 주눅들게 하는 것과, 남들 눈 신경쓰지 않고 즐길 수 있는 것들을 찾는 과정을 가끔 돌아보곤 하지만, 그처럼 여유를 갖고 긴 시간을 내어 사색할 여유를 갖지 못했다. 내게도 그런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자신을 지배하는 힘은 자신을 잘 아는 것에서부터 만들어질테니 말이다.


2. 몸 놀림과, 몸 부림

나는 일을 할 때 즐거이 몸을 놀리는가, 아니면 마지못해 몸 부림을 하고 있을까? 얼마전, 사회 초년생으로 식품회사에서 일하게 된 후배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 친구는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쉬는 시간에도 쉬지 않고 일을 하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심지어는 짧은 점심시간에 밥을 먹고 화장실 청소를 자발적으로 하는 아주머니까지 있다며 혀를 찼다. 책을 읽으며 그 얼굴 모르는 아주머니와 아저씨들을 떠올렸다. 
김광화 씨는 "마음이 몸을 존중하는 몸짓이 몸놀림이라면 그 반대는 몸부림이다. 악착같이 또는 억지로 하는 일들은 다 몸부림이 된다."고 말한다. 누구든지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이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똑같은 일이어도 견딜 만하지만, 마지못해 따라 하면 그만큼 몸이 축나고 마음도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다는 이야기다. 
깊이 공감한다. 어디선가 아무리 쉬어도 피곤하고 힘이 들 때는, 자기 마음 속 기둥이 무너지고 있다는 경고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거꾸로 마음이 시키는 대로 몸을 놀리면서 살아간다면, 새롭게 솟는 기운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3. 선택의 빅뱅

'선택의 빅뱅'이란 말이 나왔다. 한 번의 선택이 생각지도 못하게 엄청난 폭발을 가져와 삶을 근본부터 바꾸는 현상. 일상에서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를 놓치게 된다. 하지만 선택의 빅뱅은 다르다. 고정된 틀이 탁 깨지면서 갑자기 대폭발에 가까운 다양한 선택지가 펼쳐지는 것이다. 

글쓴이의 삶 전반이 평화롭고 싱싱하게 된 것은 '선택의 빅뱅'에서 출발한 것이라 여긴다. 기존의 방식이나 습관이 아니라, 전혀 다른 새로운 지평을 꿈꾸며, 한 번을 다 비우는 사람만이 겪을 수 있는 '선택의 빅뱅'. 동경하지만 마음 먹고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다. 글쓴이의 삶이 부러워 보이는 이유이다.

책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이들의 교육과 아이들과 같이 이야기 하기', '아이들에게서 배우기', '부부 연애', '살림', '사람들과 관계 맺기', '수다 떠는 법 익히기' 등 자질구레해 보일 정도로 많은 생활의 순간순간을 이야기 한다. 그것도 성심성의껏 이야기 한다. 그 모든 것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자신과 생활과 주변을 대하는 진솔하고 극진한 마음만은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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