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이매진 - 영화와 테크놀로지에 대한 인문학적 상상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영화비평이 아니라 새로운 담론의 놀이라고 했다. 놀이? 맞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진중권만의 놀이이다. 놀이에는 늘 규칙이 따라붙기 마련이다. 그 규칙을 이해하고 규칙을 따를 때 놀이의 주인이되어 놀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진중권의 놀이는 규칙을 모르는 사람들은 '따'를 시키는 요즘 식의 놀이로 보인다. 전통적인 놀이에 '깍두기'가 있다. 동생을 돌봐야 하는 아이들이 동생을 업고서도 놀이에 낄 수 있게 만들고, 좀 서툰 아이들이라도 같이 어울려 놀 수 있게 만드는 미덕이 담겨 있는 게 '깍두기'가 아닐까 싶다. 허나, 진중권의 놀이에는 깍두기를 위한 자리 같은 건 없다. 
낯선 용어 때문만이 아니다. 그의 어법 때문이다. 그의 눈을 따라서 질정없이 영화를 보는 시각이 옮겨다니기 때문이다. 미학에서 철학으로 윤리학에서 정치로 하나의 기표를 집어들고 그의 직관이 선택한 이론적 연산틀 안을 주르르 훑게 만든 후에 툭툭 흩뿌려 놓는 느낌이다. 그래도 책이 던져주는 몇 가지 고민을 정돈해 본다.

1. 때로는 언어가 예술을 이끌기도 한다는 점.
우리는 테크놀로지에 둘러싸여 테크놀로지가 만들어내는 문명의 재부를 누리면서 산다. 나 역시 지금 키보드를 두들겨서 책상 위에 있는 쇳덩이에게 일을 시키고 있다. 쇳덩이와 나를 연결하는 것은 인터페이스라는 통역관을 통해서다. 난, 이 쇳덩이와 주고 받을 수 있는 말이나 같이 작업할 수 있는 일들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열 두살 먹은 우리 아이는 이 쇳덩이를 늘 끼고있으려 한다. 컴퓨터로 동영상을 보면서  대화창을 띄워놓은 상태에서 닌텐도를 하기도 한다. 한꺼번에 몇 가지의 이야기를 몇 가지의 인터페이스를 동시에 사용하는 아이의 세대는 나와 무언가 다른 언어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저자의 이야기에 주목하는 이유이다.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언어를 쏟아냈고,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화법이 영화예술에 사용되고 있다. 새로운 언어와 화법으로 말하는 영화는 그에 걸맞는 미학적 준거를 가지고 바라봐야한다는 이야기다, 무조건 플롯이나 줄거리를 중심으로 주제에 접근하려는 기존의 방식을 고수하지 말자는 것이다. 아직, 정돈되지 않아 충분히 동의할 수 없는 이야기다. 
다만, 새로운 언어나 새로운 양식은 새로운 예술을 이끌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하나의 개성있는 장르로 남을지 시대를 드러내는 사조로 남을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저자의 호들갑일지 예리한 직관일지 좀 더 생각해봐야겠다. 


2. 새로운 시각은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만드는 힘.
<미학 오딧세이> 곳곳에 나오던 에셔의 그림들을 보면, 저자가 엮어가는 담론의 놀이라는 것과 닮아있다는 생각을 한다. 포스트모던하다. '그런데, 그게 뭐야?' 하는 생각에 결국 빠지고 만다. 그리고는 이런 대답을 듣는다. ' 아름답잖아?', '참신하잖아?', '변화무쌍하잖아.', '누가 진지하고 지루한 얘기에 몰두하겠어? 요즘 세상에.'  뭔가 못마땅하지만, 별로 반박이 안 된다. (작품으로 입증하지 못하니까.)
아무튼 새로운 시각은 새로운 것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첫 가닥이다. 사람의 미감은 늘 새로운 것을 요구한다. 깊이 보고 세밀하게 보는 것으로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허나, 저자의 방식처럼 고개를 끊임없이 돌리거나 시공을 상상력의 날개를 타고 자유자재로 넘나들 때, 새로운 것들을 발견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시각을 끊임없이 변화시킨다면 말이다. 이건 어떤 것이  '본질'에 접근하는 최상의 방법이냐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새로운 것이 늘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새로운 시각이 늘 본질에 접근하는 방법은 아니다. 다만 그동안 보지 못했던 면모를 발견하게 해준다.
저자의 글이 불편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는 파편들의 조합을 자신의 기준으로 주런히 나열해놓고 '이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 간혹 맞을 때도 있겠지만, 맞지 않을 때도 있다. 정치를 말하든, 미학을 말하든) 
아무튼지 그는 늘 새로운 것을 끄집어내려 한다. 우회를 하는 것이든 발을 빼고 밖에서 보는 것이든, 상상력의 날개를 타고 새로운 각도로 볼 수 있는 곳으로 이동해 나선다. 그 상상력의 날개를 달고 새로운 시공으로 떠올라 새로운 각도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무척이나 소중한 행위이다.

마지막 꼭지가 '베를린 천사의 시'인 것은 재미있다. 역사 밖의 관조자로 남을 것인지 역사 안으로 뛰어들어 죽음의 강으로 빠져들 운명을 감수할 것인지 갈등하는 천사의 모습에서 시대와 미학의 경계에서 갈등하는 예술을 보는 것 같다. 시대와 미학을 모두 끌어안을 수만 있다면 무에 더 바랄 것이 있을까만, 그 경계를 오가면서 아슬아슬 걷는 것이 예술하는 사람들의 일상이 아닐까 싶다.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일상 말이다.
<진중권의 이매진>은 역시 경계에 있다. 관객도 창작자의 편도 아닌 어느 점에 부양하고 있는 느낌이다. 관조하는 것일까?  어쨌든 그가 있는 곳은 가까운 곳은 아닌가 보다.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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