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사회구성원들은 정보의 홍수 시대를 살고 있다. 사회구성원들은 모든 사안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하고 또 알고 있다고 믿는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알고 있다는 믿음을 갖기 때문이다.

 

  무지에는 두 가지가 있다. 자신의 무지에 대해 모르는 무지가 있고, 자신의 무지에 대해 알고 있는 무지가 있다. 후자의 경우는 자신의 무지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점에서 무지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있지만, 전자는 그 가능성조차 없다. 정보의 홍수가 가져올 수 있는 위험이 바로 여기에 있다. 가령 정보가 넘쳐나지 않던 20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은 스스로 “무식하다”고 인정했다. 나의 유년시절인 50년대나 60년대에 아저씨뻘이나 할아버지뻘 되는 분들이 “나는 무식해서 잘 몰라”라고 말하는 경우를 비교적 자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엔 아무도 스스로 무식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책을 읽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독서의 중요성은 정보의 홍수 시대에 더 중요성을 갖는다. 정보를 생산하고 유포하는 주체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통해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벗어나기 위해서도 독서는 필수 불가결한 과정이다. 

 

  독서는 ‘세계를 향한 창을 여는 것’이다. 창은 열려졌을 때 그 참된 의미를 지닌다. 닫혀있는 창은 단지 가능성으로만 남을 뿐이다.   

 

  열려진 창을 통해 우리는 세상과 만난다. 그곳에 나와 다른 것, 내가 알지 못한 것과 내가 미처 느끼고 있지 못한 것이 있다. 오직 책을 통해서만 타임머신을 탈 수 있어서 우리가 갈 수 없는 과거의 세계와 미래의 세계를 찾아갈 수 있고 오랜 동안 인류가 남긴 지혜의 보고와 만날 수 있다. 공간적으로도 일상 세계를 뛰어넘어 지상의 모든 세계를 찾아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현미경으로도 들여다 볼 수 없는 인간의 내밀한 내면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다.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것들에 대해 알게 되고 그것들이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인간은 동물적 본능만으로 살지 않는다. 이성과 감성의 복잡한 구조를 가진 인간은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사회적 동물로서 살아간다. 사회적 동물로서 올바른 자아실현을 하려면 당연히 올바른 판단과 선택을 필요로 한다. 독서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가령 다양한 것과의 만남은 개인이나 집단이 빠지기 쉬운 폐쇄적이고 독단적인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한다. 편견과 차별, 부조리와 불합리는 대개 무지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물론 무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독서만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지만, 폭 넓고 깊이 있는 깨달음을 위해 독서가 가장 효과적인 방법임엔 틀림이 없다. ‘책 속에 진리가 있다‘는 말이 공연히 생긴 게 아니다.

 

  다양한 간접 경험이나 지식의 습득이 곧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 모두 진리의 길을 가지 않는다는 사실이  진리의 의미를 부정하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 그것은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선택 또한 앎을 통한 깨우침에 의해서 결정된다. 독서는 그러한 앎과 깨우침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한때 나는 책 도둑이었다. 십대 중반에서 이십대 초반까지 닥치는 대로 도둑질을 해댔는데 그 무렵에는 다른 도둑은 몰라도 책 도둑에 대해서만은 좀 너그러운 분위기라서 손모가지를 자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쉽게 훔쳤는지도 모르겠다.


처음 책을 훔친 건 중학교 때였다. 중학교에 입학해서 내가 맨 처음 발견한 건 본관에서 떨어진 아담한 건물에 있는 도서관이었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에는 도서관이 따로 있지 않았다. 그런데 중학교 도서관은 문과 창문을 제외하고는 사면이 천장까지 서가로 꽉 차 있었고 서가에는 책이 가득 꽂혀 있었다. 입학식을 한 다음날 나는 수업이 끝난 뒤 그 도서관에 갔다. 그리고 발견했나니 첫 번째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책이요 두 번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책꽂이에서 아무렇게나 뽑아든 그 책은 ‘하므리카’라는 가상적인 세계를 탐험하는 박사와 그의 조수의 이야기로 하므리카인들의 양식은 꽃향기인데 꽃의 비료는 사람의 방귀라는 식의 황당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내 수준에는 딱 맞았다. 문제는 그 책이 좀 두꺼워서 단숨에 다 읽기에는 시간이 모자란다는 것이었다. 책을 빌려갈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 책을 내 소유로 하고 싶다는 충동에 어처구니없이 간단하게 지고 말았다. 집에 가지고 가서 읽고 또 읽을 작정이었다, 오직 나 혼자서만! 그때부터 건성으로 책장을 넘기면서 주변을 살폈는데 그제서야 입구 근처의 탁자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도서관 담당 선생님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눈에 띈 게 아니라 내 망막과 시신경과 뇌에 광속으로 진주해왔다. 중요한 건 그 선생님이 너무도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밥도 안 먹고 방귀하고도 아무 관계가 없을 것 같았다. 책을 훔치다 들킨다면 그 선생님이 얼마나 나를 미워하고 경멸할 것인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오, 재미냐, 아름다움이냐. 아, 소유냐, 삶이냐. 고민을 하고 있던 내게 선생님이 기회를 주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간 것이었다. 나는 번개처럼 책을 가방에 집어넣고 문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그런데 입구에서 누군가 팔을 턱 내밀어 나를 가로막았다. 2학년이었고 도서반원이었다. 그 와중에 질투가 날 정도로 잘 생겼던 게 기억난다.


그 연적, 아니 잘나 빠진 도서반원은 내 이름과 반을 적고 무릎을 꿇은 채 팔을 들게 했다. 곧 선생님이 돌아왔다. 화장실에 다녀왔는지 손에 물기가 있었다. 선생님은 분홍 꽃무늬 손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나를 일어서게 한 다음 “책 훔친 것을 큰 소리로 사과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가게 해주겠다”고 무관심하고 의례적인 어조로 말했다. 그 무관심이 나를 책도둑으로 만들었다고 하면 책임전가일까. 나는 관심을 얻으려고 책을 훔쳐왔노라! 20대 초반 군대를 가서야 책도둑질이 멈춰졌는데 그 무렵 그 선생님처럼 완미한 사람을 만나고 그의 관심을 얻었는지에 관해서는 말할 수 없다.


재능 있는 책도둑은 아무 책이나 훔치는 게 아니라 훔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훔친다. 다른 것이 아닌 책을 훔침으로써 문명과 역사에 대한 안목을 넓히며 지식과 감성의 이종교배로 유전자를 개량할 수 있다. 훔친 책은 가슴을 뛰게 하는 긴장이 부작용처럼 곁들여지고 잘 읽히고 쉽사리 잊히지 않았다. 나보다 수준 높은 책도둑의 서고에서 동굴 속의 알리바바처럼 넋이 나가 서 있던 적도 두어 번 있다. 그 정선된 보물을 다시 훔침으로써 우리 책도둑들은 시대정신을 공유했다.


책을 훔치면서 알게 된 진리가 하나 있다. 훔친 책은 언젠가는 도둑질을 당한다는 것이다. 군대에 갔다왔더니 어떤 녀석인지 그동안 내가 피땀 흘려가며 훔쳐 모은 책만 골라 가져가 버렸다. 샀거나 물려받은 책은 귀신처럼 알고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는 자연과학도다. 고등학교 때도 물리나 수학에 비중을 둔 공부를 했고, 대학에서도 그랬다. 그때 나는 문학은 감수성 예민한 여학생들의 전유물인 줄 알았고, 실제로 내 주위에는 그 흔한 소설 책이나 철학서를 뒤적이는 부류는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주위의 친구들 중에 간혹 문학이나 철학에 대한 얘기를 하는 친구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때 나는 그런 얘기들을 인문학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보지 못 할 정도로 무지했다. 그렇다고 과학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교과서에 적힌 내용을 외우고 응용하는 정도였으니 딱히 과학을 공부한다고 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그때까지 인문학이든 자연과학이든 책을 읽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학 입시가 끝나자 지금도 그렇겠지만 우리에게는 이상한 공백이 왔다. 학과 진도는 이미 다 나간 상태에서 입시까지 끝나자 수업시간에 더 할 공부가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상한 공백 기간 동안 학교에서는 우리에게 아무 책이나 읽으라는 권유를 했다. 처음 맛보는 방임 상태에서 나는 잠시 난감했다. 독서 지도같은 것은 말도 들어 본 적이 없었고, 한 번도 서점이나 도서관을 드나든 경험도 없었다. 나는 자연히 집에 있는 책들 가운데서 한 권을 골랐다. 출판사는 잘 알 수 없지만 <철학대계>라는 전집(당시에는 전집류들이 장식용으로 방문판매되는 게 유행이었다) 중에서 제 1권을 뽑아 들었다.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늘 그렇듯이 첫 째 권부터 뽑아든 것이었다. 그게 무슨 책인지 상관없었다. 학교에 가서야 비로서 읽으려고 표지를 보니 『플라톤』이었다. 한 권의 책에 「대화」,「향연」,「파이돈」,「국가」 이렇게 4편이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주욱 읽어 나갔다. 처음 읽는 책이라서 그런지 마른 스폰지에 물이 스미듯이 책의 내용은 아무 비판없이 수용되었다. 그런 내 꼬락서니를 보던 국어 선생님이 뒤에서 다가와 물었던 기억이 있다. “재밌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은 아무 말없이 나를 지나갔다. 친구들도 궁금했는지 “뭔데?”하고 물어왔다. “플라톤.” “윤리 시간에 배웠던 그거?” “어.” 친구들은 뭐 별 대수롭지도 않네하고 제 자리로들 돌아갔다. 아무튼 나에게는 『플라톤』이 아주 단순하고 재미있는 우화처럼 여겨졌다. 그렇게 『플라톤』을 다 읽고나서 또 집에 책장을 보니 또 교과서에서 본 이름이 있었다. 키에르케고르였다. “이 사람도 윤리책에서 본 사람이네.” 『죽음에 이르는 병』―그런데 이 번엔 좀 힘들었다. 처음엔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는 말들이 계속되었다. 나는 당황했다. 글자는 읽는데 의미는 해독되지 않는 경험을 그 때 처음했다. 내가 얼마나 당황했느냐면, 나는 누가 책망하는 것도 아닌데 무지 챙피했다. 급기야는 공부 시간에는 친구들이 읽은 책을 빌려서 읽고, 키에르케고르는 집에서 혼자 몰래 읽었다. 이해 될 때까지. 그러나 읽어도 읽어도 키에르케고르는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키에르케고르를 끝내 이해하지 못한 채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그 후로도 다시는 키에르케고르와 친해지지 않았다.


  그 후 대학에 와서 열 아홉의 나이에는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에 대한 회의에 빠졌고, 나는 자연스럽게 신학에 관한 서적들을 닥치는대로 읽었고, 사회운동에 경도되었다. 80년대는 인문학의 시대였다. 사상이 넘쳐났고, 정의 할수 없는 용어들이 내 주위를 유령처럼 떠돌며 나를 괴롭혔다. 나는 이 혼란을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수강 과목 중에서 물리와 공업수학만 빼고 나머지 과목은 수업에 들어 가지도 않았다. 수업을 거의 전폐하다시피하며 나는 대학 도서관의 참고열람실에 파묻혔다. 거기서 닥치는 대로 읽어댔다. 방학 때도 집에 가지 않았다. 그렇게 6개월이 흘렀다. 그리고 나서 우연히 잡은 책이(디자인이 좋아서였다)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었다. 나는 거기서 플라톤을 다시 만났다. 그 때의 기쁨, 그리고 헤겔과의 만남, 조흔 인연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만 국한 된 게 아니었다. 나는 항상 책과 나 사이에도, 사물과 사람 사이에도 인연이 있다고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손은 시장경제에서 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누가, 도대체 왜, 나를, 이렇게 어딘가로 이끄는 것인가? 알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우리 모두는 딱 한번 살다가 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모습이던지 간에 멋진 삶을 원한다. 물론 사람마다 멋진 삶에 대한 정의가 다를 것이다.


나에게 누군가 묻는다면, 물론 세속적인 의미의 성공도 멋진 삶에 속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머리 속에 무엇을 집어 넣고 있는가, 무엇을 생각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행동하는 가도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매 순간마다 자신이란 사람을 구성하는 컨덴츠를 바꾸어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글 읽기를 생활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은 멋진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유한한 인간의 삶이지만 우리들은 글 읽기를 통해서 시공간을 초월해서 다양한 인물들과 사건들을 만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틈만 나면 글을 읽는다.


며칠이라도 강연이나 그 밖의 활동 때문에 글 읽기가 소월해지면 머리가 자꾸 비어가는 느낌을 갖는다. 그런 기분이 들 때면 몇 시간 정도 집중적으로 안락한 의자에 누워서 세상만사를 제쳐주고 글 읽기에 몰입해 들어간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런 글 읽기가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본능인 정복욕도 충족시켜 준다는 점이다. 이 책 저 책을 가리지 않고 광대한 지식의 지평을 달리다 보면 어느 새 머리 속이 꽉 찬 기분을 느끼게 된다.


그런 충전이 수시로 이루어질 때마다 세상을 맞설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갖게 된다. 글 읽기는 이처럼 집중적인 시간을 만들어서 하지만 대개는 틈틈이 자투리 시간을 내서 행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을 기다릴 때, 잠시 머리를 식힐 때, 머리를 다듬기 위해 기다릴 때, 언제 어디서나 나는 나만의 세계로 용감하게 돌진할 수 있다. 짧은 순간이지만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된다.


글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자유와 여유를 갖는 것 만으로 행복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그런데 나는 남의 지식을 얻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어떻게든지 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싶어 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성과를 내는 일을 맡으면서 내가 확실히 깨우치게 된 사실은 맡겨지면 하겠지만 그런 일들에 아주 신나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내가 스스로 창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구경꾼에 머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직접 행동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오랫동안 알아왔던 지인과 나눈 대화 가운데 이런 대목이 들어 있었다. 무엇인가 만족할 수 없는 대목에 대해 그 분은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이 잘 돌아가지요. 외형도 그럭저럭 성장을 하고 조직원들도 열심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직접 생산하지 않고선 그렇게 충만한 행복감을 느낄 수가 없네요.”


그분은 창조하려는 욕망이 강한 사람이다. 이따금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남에게 시켜서 남이 잘 하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는 사람이 있지만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를 만들어 낼 때 기쁨을 더 강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다. 나는 내가 주어진 자리에서 해야 하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하는 스타일의 인물이긴 하지만 진정한 행복은 그렇게 경영자로서 느끼는 그런 행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더욱 그 분의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았다. 나는 내가 직접 만들어야 되는 그런 스타일의 인물이다.


나는 이런 단순한 사실을 몇 번의 전직으로 통해서 깊이 깨우치게 되었다.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읽고, 생각하고, 강연하고, 쓰는 일을 게속해 나갈 작정이다. 다들 내가 다작한다고 아우성인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존재 이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질풍노도와 같은 젊은 날을 통해 내가 얻어낸 가장 큰 수확은 진정으로 내가 글을 읽고, 창조하고 그 결과물을 작품으로 내놓는 것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나에게 그것은 노동이 아니라 환상적인 게임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오늘도 의무감에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향해서 개인을 향해서 외치고 싶은 말들을 작품 속에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읽는 작업도 열심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하필이면 그때 고모네 가족이 옆집에 사셨다. 하필이면 그때 고모부께서 실직상태이셨다. 하필이면 그때 나는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나이였다. 고모부가 어린 조카에게 한글을 가르치시려고 마음먹게 된 그 이유를 나는 모른다. 내가 얼마만에 한글을 뗐는지도 이젠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아는 건, 그 날부터 내가 책벌레의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1960년대 서울 달동네에서 벌어진 일이었음을 생각해주시라. 유치원에 다니는 건 아주 부잣집 아이들에게만 허용된 특권이었던 시절이다. 대부분의 달동네 사람들처럼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그날 하루의 양식 걱정을 하고 살아야 했다. 고모부가 아니었다면, 내가 한글을 깨우친 것은 학교에 들어간 다음의 일이었을 것이다. 왜 그렇게 책이 신기하고 좋았을까. 누가 그 질문에 답할 수 있으랴. 그건 그냥 운명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골목길 아이들이 공을 차고 자치기를 하며 뛰어 놀 때 나는 고종사촌 형과 누나의 책에 달려들었다.

 

책벌레가 된 소년은 몰랐다. 그것이 얼마나 저주받은 인생인지를. 책을 한 권 읽고 나면 뿌듯한 포만감이 밀려왔다. 그러나 그 포만감은 아주 잠시였다. 눈 깜짝할 새에 포만감은 사라지고 지독한 배고픔이 밀려왔다. 아무리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배고픔.

 

초등학교 내내 소년은 외로웠다. 남자아이들은 쉬는 시간이면 공을 들고 운동장으로 나갔지만, 소년은 학급문고에서 빌린 동화책의 결말을 어서 봐야 했으므로 책상을 떠나지 못했다. 남자아이들은 소년을 놀려댔고, 어느 날부턴가 아예 소년이 없는 것처럼 그들만의 공차기를 꾸려갔다. 여전히 가난했던 소년의 부모님은 소년에게 많은 책을 사 줄 수 없었다. 학급문고에서의 양식 조달이 끝나면 부잣집 친구의 집으로 놀러가야 했다. 친구의 어머니는 “쟤는 남의 책도 저렇게 열심히 보는데 너는 사다 줘도 안 읽냐”고 친구를 야단치셨고, 그날부터 친구는 소년을 집으로 데려가는 걸 피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안다. 그렇게 책벌레의 외로운 인생이 나 혼자만의 운명이 아니었다는 것을. 세상엔 그렇게 저주받은 책벌레의 인생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꽤나 많다는 것을. 분명히 다 읽지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무더기로 책을 사들이고, 낯선 도시에 가서 헌책방을 만나면 그 퀴퀴한 낡은 책의 냄새와 먼지를 코로 들이마시며 ‘책벌레라서 행복해요!’라고 혼자 중얼거리는 사람들이 꽤나 많다는 것을.

 

인생의 모든 것은 동전의 양면이다. 책벌레로 인생을 살게 된 건 저주다. 끝없는 배고픔보다 더 지독한 저주가 어디 있는가. 그러나 그 끝없는 저주는 동시에 축복이다. 죽는 날까지 새로운 양식으로, 비록 곧 사라질망정 포만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처럼 놀라운 축복이 또 어디 있는가. 끝없는 포만감과 끝없는 배고픔이 꽉 부둥켜안고 추는 왈츠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제는 안다. 그 끝없는 배고픔이 내 정신을 통통하게 살찌웠음을. 내가 파먹은 그 수많은 책들의 구절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탄수화물이며 단백질이며 무기질이었음을. 책을 사느라고 비싼 식당에 갈 수 없었지만, 그 덕분에 내가 비만에 걸리지 않게 되었음을. 책을 읽느라고 그 시간에 더 많은 돈을 벌 수는 없었지만, 돈 많은 자들 앞에서 적어도 스스로 초라해지지 않을 수 있었음을.

 

어쩌다 보니, 세상의 그 많은 책에 또 몇 권을 보태는 인생을 살게 되었다. 아주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몇 천은 족히 넘는 사람들의 서재에 내 책이 꽂혀 있을 것이다. 그건 정말 내 몸을 떨리게 만드는 기쁨이다. 내가 읽은 책들의 저자들이 지금 내 정신 속에서 살아 있듯, 내 책의 독자들의 정신 속에서도 내가 살아 숨쉬고 있음을 나는 안다. 책이 아니라면 그 무엇이 그토록 놀라운 ‘함께 살아감’을 가능케 하겠는가.

 

오, 아름다워라, 책벌레의 인생이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