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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와 한국인과 일본인

월드 베이스볼 대회에서 일본이 운 좋게 우승했다.
이번 야구경기는 여러가지를 보여 주었다.
그 중의 하나가 한국인과 일본인의 성격 차이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어떻게 다른가.
고려대 총장을 지낸 민속학 교수 홍일식 박사가 두 민족의
성격 차이를 ‘도둑 누명’을 예로 들어 설명한 적이 있다.

황희 정승이 젊은 시절 어느 시골을 지나다 주막에 들러 쉬게 되었다.
그때 마당에서 거위가 구슬을 집어삼키는 것을 목격했다.
얼마 후 그 집주인이 귀한 구슬을 잃어버렸다며 난리를 치더니
남루한 옷을 입은 황희를 도둑으로 몰아 관아에 고발했다.
하룻밤 고초를 당한 후 다음날 문초가 시작되자 황희는
“거위가 지금쯤 똥을 누었을 테니 주막에 가서 살펴 보라”고 말했다.

관리가 달려가 보니 과연 거위의 똥 속에 구슬이 있었다.
관리가 “왜 이제야 말하느냐”고 묻자 황희는 “내가 그 때 사실대로 말했으면 주인이 거위의 배를 갈랐을 것이다.
내가 조금만 참으면 거위를 살릴 수 있지 않은가”라고 대답했다.

이에 비해 일본 사람들이 누명을 썼을 때 즐겨 쓰는 일화는 가슴이 서늘해질 정도다.
옛날 일본 시골에 떡장수와 가난한 낭인무사가 이웃해 살고 있었다.
그런데 낭인무사 아들이 떡집에 와서 놀고 간 뒤 떡이 한 접시 없어졌다.
떡 장사가 무사에게 달려와 “당신 아들이 떡을 훔쳐먹었으니 물어내라”고 했다.
무사는 “아무리 가난하지만 사무라이의 아들은 남의 것을 훔치지 않는다”며 호통쳤다.
그러나 떡 장사가 물러가지 않고 계속 돈을 내라고 하자
무사는 “내 아들이 결백하다는 것을 보여주마”라고 말한 뒤 아들을 칼로 찔러 배를 갈랐다.
거기에는 떡이 없었다. 그리고는 이어 떡 장사의 목을 베고 자신도 자살했다.

위의 두 에피소드는 문제 해결을 둘러싼 한국인과 일본인의 마음가짐이 얼마나 다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인에게는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아들의 배를 갈라 보인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치욕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죽음도 서슴지 않는다.
한국인의 피에는 선비정신이 깃들여 있고 일본인은 사무라이 정신이 스며 있다.
한국인들은 느슨하면서도 인정이 있고 일본인은 깔끔하지만 독기가 있다.

만약 한국과의 3차 대결에서 일본이 졌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건 야구팀만의 치욕이 아니라 일본과 일본 국민의 치욕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일본 야구선수들이 한국에 세 번이나 지고 귀국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야구팬들 중 누가 할복 소동을 피우지 않았을까.
상대방을 코너에 몰아넣는 완승은 후유증을 몰고 온다.
한국이 일본한테 진 것을 억울하게만 생각할 일이 아니다.

터키를 여행하노라면 터키인들의 한국인에 대한 호감에 놀라게 된다.
축구광인 이들이 코리안을 반가워하면서 하는 이야기가 걸작이다.
“월드컵 축구 때 한국이 터키한테 져준 것 감사해요.
그 덕분에 우리가 결승에 진출할 수 있었어요.”

이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패함으로써 얻는 교훈과 이득이 있다.
한국 야구팀이 일본팀에 지면서 보여준 여유와 한국 팬들의 격려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성격 차이를 실감나게 보여 주었다.
방망이를 들고 나와 타석에 선 선수들의 눈빛에서도 그랬다.
한쪽은 선량해 보이고 다른 한쪽은 오만해 보였다고 생각되지 않았는가.
한일 2차전에서 보여준 이치로 선수의 기분 나쁜 눈빛이 바로 그런 종류다.
경기뿐만이 아니다. 국민성을 보여준 것이 이번 WBC 대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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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 사이에 길을 놓다


시인, 소설가, 극작가, 자연철학자였던 괴테(1749∼1832)의 긴 창작 생애에는 좀 특별한 데가 있다. 주요 작품만으로 따진다면, 그가 첫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낸 것이 스물다섯 때이고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쓴 것은 마흔일곱이 되어서의 일이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일흔둘에 그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여행> 완결판을 내고 또 거기서 11년 뒤인 여든셋에 극시 <파우스트> 제2부를 완성한다. 그리고 그해에 그는 죽는다. 그가 <파우스트>를 완성하고 죽었다는 것이 꼭 특별한 이야기일 필요는 없다. 특별한 것은 그가 근 60년 동안 마르지 않는 샘처럼 ‘창조성’을 유지했다는 사실이다. 보통의 사람에게 여든셋이란 이미 적당히 노망기 들거나 혼미해져 코끼리 다리가 넷인지 다섯인지 기억하기 어렵고 기억하는 일조차 귀찮아질 만한 나이다. 그런데 그 나이에 이르도록 창조력이 왕성하게 살아 있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이 비범한 힘의 비밀은?

괴테의 어떤 시편에는 이 비밀의 단서 하나를 제공하는 듯이 보이는 대목이 한 군데 나온다. 그가 자기 부모를 회고해서 쓴 듯한 구절이 그것인데, 풀어쓰면 이런 내용이다. “아버지에게서 나는 생김새를 물려받고 삶에 대한 진지한 추구의 자세를 배웠다. 그리고 어머니에게서 나는 삶을 즐기는 법과 이야기 지어내기의 즐거움을 물려받았다.” 이야기 지어내기의 즐거움(Lust zu fabulieren)이라? 이 즐거움은 무슨 생물학적 디엔에이(DNA)가 아니라 괴테가 어머니에게 배워서 알게 된 즐거움- 경험과 체득의 디엔에이임에 틀림없다. 아닌 게 아니라 괴테의 어머니는 ‘이야기’로 아들을 키운 여자이다. 셰헤라자데처럼 그녀는 어린 괴테에게 매일 밤 이야기를 들려주어 아들의 상상력을 자극한 어머니, 말하자면 ‘아들의 셰헤라자데’이다. 그녀는 회고한다. “바람과 불과 물과 땅- 나는 이들을 아름다운 공주들로 바꾸어 내 어린 아들에게 이야기로 들려주었다. 그러자 자연의 모든 것들이 훨씬 깊은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 밤이면 우리는 별들 사이에 길을 놓았고 위대한 정신들을 만나곤 했다.”

어머니의 회고는 좀더 계속된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아이의 눈은 잠시도 내게서 떠나지 않았다. 그가 좋아하는 어떤 인물의 운명이 그가 원하는 대로 나아가고 있는지 어떤지 나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원치 않는 쪽으로 사건이 진행되면 아들의 얼굴에는 분노가 서리고, 그가 눈물을 내비치지 않으려 애쓰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중간에 이야기를 끊고 들어올 때도 있었다. ‘엄마, 공주는 그 못된 양복쟁이하고 결혼하면 안 돼. 양복쟁이가 악당을 쳐부순다 해도 말야.’ 그럴 때면 나는 거기서 이야기를 멈추고, 결말은 다음날 밤으로 미루었다. 그런 식으로 내 상상력은 가끔 아들의 상상력과 자리를 바꾸었다. 어떤 때는 바로 다음날 아침 그가 바라던 대로 주인공의 운명을 고쳐 이야기해주면서 나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래, 넌 벌써 짐작하고 있었지? 결과는 네가 생각한 대로 된 거야.’ 그러면 그의 얼굴은 흥분으로 빛났고, 나는 그의 어린 가슴이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괴테의 놀라운 창조력이 오직 어머니 덕분이었다는 식으로 한 군데로만 몰아 창조성의 원천을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창조성의 다른 이름은 상상력이며, 괴테의 경우 이 상상력을 자극하고 키워준 첫 번째 공로자는 밤마다 별과 별 사이에 길을 놓아주었던 그의 이야기꾼 어머니이다. 더구나 그 길 놓기는 어머니와 아들 두 사람의 공동 작업이다. “가끔 내 상상력은 아들의 상상력과 자리를 바꾸었다.” 괴테의 어머니는 어떤 정해진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들려준 것이 아니다. 그녀는 아들의 예민한 반응에 적절히 반응하고 아들과 함께 이야기를 만든다. 반응은 이미 상상력의 참여이고 발휘이다. 이야기 들려주기가 결코 일방통행이 아니라 ‘아들과 자기 사이의 특별한 사건’이라는 것을 괴테의 어머니는 잘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아들이 반응하고 그 반응에 어머니가 반응함으로써 화자와 청자는 서로 상상력을 자극하고 자극받는다. 이 자극은 이야기 지어내기를 즐거운 일이게 한다. 밤하늘의 별과 별 사이를 즐겁게 나는 상상력은 또 별과 인간을 잇고, 지상의 별들인 사람과 사람의 가슴 사이에, 사람과 개구리 사이에 길을 놓는다. 이야기는 단순 오락이 아니다. 그것은 상호 반응이며 길 놓기이고 연결하기이다. 이 연결의 능력이 상상력이다.

교육열 높다는 한국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동화책 사다 던져주고 “네가 읽어”라 말하거나 무슨무슨 학원으로 내쫓음으로써 할 일을 다 했다고 흔히 생각한다. 비디오만 열심히 틀어주는 부모도 많다. “내가 시간이 어딨어?”라고 우리는 말한다. 이 ‘우리’에게 괴테의 어머니는 말한다. “별들 사이에 길을 놓아라, 함께.”

도정일/ 경희대 영문과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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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웍의 조건


한국 야구가 미국 메이저리그 올스타팀을 꺾는 기적(?)을 보면서 느낀 것은
“팀 스포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용병이로구나” 하는 사실이다.
용병을 하려면 인화가 필수적인 조건이고, 인화는 리더가 덕장이냐 아니냐에 의해 좌우된다.
덕으로 다스리지 않으면 인화가 어렵고, 인화가 깨지면 각자가 지닌 능력이 발휘되지 못한다.
오히려 유능한 사람도 무능해지는 경우가 있다.
더구나 이번 WBC(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출전팀은
모두 국가대표팀으로 선수 하나 하나가 내로라 하는 수퍼스타들이다.
이들이 각자 지닌 역량을 어떻게 발휘하게 하느냐가 팀장의 숙제다.
그렇게 되려면 무엇보다 서로 믿어야 한다.
인간적인 신뢰 없이는 양보가 불가능해지고 서로 고집 부리면
팀장이 타이밍에 맞는 용병을 할 수 없어 팀웍이 마비된다.
조직이 유연성을 보이지 못하고 경직되면 스포츠에서는 끝이다.
팀웍이란 어떤 것인가. 헤밍웨이의 작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잘 그려져 있다.
폭파전문가인 미국 대학교수 조던은 스페인에 파견되어 집시 게릴라들의 안내를 받지만
결국 자신이 리더가 되지 않으면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는 힘으로 팀을 장악하지 않고 인간적인 면으로 어프로치 하여 집시들이 자신을 믿도록 하는데 최선을 다한다.
조던은 의심 많은 집시 두목 파브로에게서 충성심을 얻어내는데
성공해 마침내 오합지졸을 데리고 능력 이상의 임무를 수행해 낸다.
명령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리더 자신이 잘 나가고 있는 조직을 오히려 망치는 경우도 있다.
소설 ‘삼국지’를 보면 용장인 장비가 의형제인 관운장의 원수를 갚으려다 어처구니없는 최후를 마친다.
부하들이 장비를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지시사항을 지키지 못하게 되자 그를 죽여버렸다.
이 때문에 전세 전체가 뒤바뀌게 된다.
일본의 대표적인 지장으로 꼽히는 노부나가도 마찬가지다.
참모를 믿지 못하고 모욕적인 망신을 준 것이 부하 손에 죽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리더의 고집과 명령에 의해 움직이는 조직의 비극이다.
스포츠에서도 기술보다 인간적인 신뢰가 우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감독들이 경기에 임하면 깜빡한다.
중간 보스의 충고를 듣지 않고 자신이 모든 상황을 판단하다가 일을 그르친다.
어떤 사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월드컵 축구 때 히딩크 감독의 용병술에서 목격했었다.
히딩크는 타이밍을 중요시했다.
사람을 아무리 잘 써도 타이밍이 맞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다.
이번 WBC 야구대회에서 한국팀의 김인식 감독이 보여준 용병술은 히딩크의 것에 못지 않은 탁월한 경지의 감각이었다.
스포츠뿐만 아니라 국가나 회사에서도 누가 누구를 만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구성원들이 리더를 믿는 인간신뢰의 풍토만 성립되면 성공은 저절로 따라온다. 한국 야구팀이 보여준 것은 승리가 아니다. 어떻게 승리를 만들어내었나 하는 과정이다.
한국팀이 어떻게 그런 힘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는 지금 미국 야구계의 화제다.
무엇보다 제일 놀란 것은 한국인들 자신이다.
“저 사람들 한국팀 맞아?”라는 소리가 나올 만하다.
인화가 형성되면 내가 나에게 놀라는 기적이 일어나는 법이다.


이 사
clee@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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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책이란 나와는 무관한 것이라 생각했다.
특히 철학서적은 어렵게만 느껴져 더더욱 가까이 하지 않았는데, 나 자신의 삶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책을 가까이 하게 되었다.
방황의 시절, 난 내가 누구인지, 나만 왜 이렇게 슬프고 고민이 많은지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주변 사람들은 내 고민에 대한 명쾌한 답을 주지 못했고 난 그 해답을 결국 책에서 찾게 되었다.
그렇다고 책에서 모든 물음에 대한 정답을 얘기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책이 모든 해답을 갖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가야 할 올바른 길에 대한 여러 가지 길을 제시해 주었던 것 같다.
어떤 것을 받아들여야 할지는 오직 나 자신의 몫이었지만, 책을 읽음으로써, 인생의 올바른 방향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독서는 내 인생에 있어서 충분한 도움이 되었다.

 

만화를 그리는 지금, 내가 만약 탈레스의 일화에 대한 책을 읽지 못했다면 난 아마 이런 만화를 그리지 못했을 것이다.
방황하는 인생의 길잡이였던 책에서 읽은 것들을 이제 나는 만화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싶다.
인생에서 책을 읽는다는 건 공기를 마시는 것과 같이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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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집은 쉽게 빵과 집으로 나뉠 수 있다
큰 길가 유리창에 두 뼘 도화지 붙고 
거기 초록 크레파스로
아저씨 아줌마 형 누나님
우리집 빵 사가세요
아빠 엄마 웃게요, 라고 쓰여진 걸
붉은 신호등에 멈춰선 버스 속에서 읽었다
그래서 그 빵집에 달콤하고 부드러운 빵과
집 걱정하는 아이가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자세를 반듯이 고쳐 앉았다

 

 

세 한 장의 그림이 그려지지 않나요? 이면우 시인의 ‘빵집’이라는 시의 일부입니다. 버스를 타고 퇴근하는 길에 빵집 유리창에 붙여진 어린아이의 글씨를 봅니다. 아마 빵이 잘 팔리지 않는 모양이지요. 어린아이는 빵이 많이 팔려야 집안에 웃음꽃이 핀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손님을 끌어올 수는 없고. 결국 ‘광고’를 하기로 한 것이지요. 어쩌면 부모님이 빵이 잘 팔리면 아이가 원하는 선물을 사준다고 약속했는지도 모르지요. 아이의 때묻지 않은 마음이 빵냄새처럼 풍겨옵니다.

 

그런데 저는 갓구워낸 빵처럼 따뜻한 아이의 마음 못지않게 시 속의 화자의 변화에 주목합니다. 보세요. 화자는 빵집에 나붙은 삐뚤빼둘한 글씨를 보고 ‘자세를 반듯이 고쳐 앉았’습니다. 자세를 바로 한다는 것은 정신이 퍼뜩 들었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 시에서 책과 책읽기의 진정한 모델을 발견합니다. 아이가 빵집 유리창에 써놓은 글이 책이라면, 그것을 보고 자세를 바로 하는 퇴근길의 화자는 진짜 책을 좋아하는 독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책을 많이 읽는 것도 좋지만, 바른 자세로 읽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누워서 읽을 수 있는 책은 많습니다. 시간을 죽이기 위해 집어드는 책도 부지기수입니다. 목차만 훑어보아도 필요한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책도 많습니다. 다 좋습니다. 하지만 퇴근길 버스 속에서 아이의 글씨를 보고 자세를 반듯이 하는 저 시의 화자처럼 척추를 곧추세우고 읽어야 하는 책이 있습니다.

 

제가 오늘 드릴 말씀은 책 속에 길이 있으니, 그 책 속으로 얼른 들어가라는  ‘교장 선생님’의 훈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책을 읽되, 때와 장소를 가려 읽으라는 것입니다. 때와 장소를 가려 책을 읽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일정한 경지에 올라 있는 사람입니다. 책에 따라 그 책을 읽는 때와 장소가 달라집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책을 읽는 자세가 확연하게 차이가 납니다.

 

제가 존경하는 분들 중에 남다르게 책을 읽는 분이 몇 있습니다. 먼저, 호텔방에서 책을 읽는 분이 있습니다. 남들이 여름휴가를 떠날 때, 그 분은 평소 읽고 싶었던 책을 한 보따리 싸들고 시내에 있는 호텔로 들어갑니다. 일주일쯤 두문불출하며 책읽기에 빠져듭니다. 여름 휴가철에 도심의 호텔만큼 한적한 장소도 드뭅니다. 돈이 조금 들어가지만, 방해받지 않고 집중을 유지하는 데는 이만한 방법도 흔치 않습니다.

 

또 한 분은 매주 일요일 아침이면, 맑은 정신으로 책상에 앉아 한 시간 동안 책을 봅니다. 일요일 아침 한 시간을 ‘호텔 방’처럼 확보해 놓은 것입니다. 일요일 아침에 읽는 책은 평소 필요에 의해 펼치는 책과는 성격이 다른 책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세계 최고의 부호인데, 일년에 한 달씩 휴가를 내고 틀어박혀 책만 읽는다고 합니다. 휴가를 마치고 다시 집무실에 돌아가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온다고 합니다.

호텔에 들어가 책을 읽었던 분은 30년 가까이 신문기자 생활을 하다가 쉰이 넘어 소설가로 변신한 김훈 씨입니다. <칼의 노래>나 <자전거 여행>과 같은 문장이 하루 아침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 분은 문학평론가이자 동국대 국문과 교수인 황종연씨입니다. 황교수는 풍요로운 이론과 날카로운 안목으로 정평이 나 있는데, 제가 보기엔 저 일요일 아침의 참선 수행 같은 독서가 그 비결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누구나 다 아는 사람입니다. 바로 빌 게이츠입니다. 그는 “어릴 때 마을 도서관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책과 더불어 성장한 그는 마이크로 소프트사를 설립하고, 그것을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끌어올린 뒤에도 책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소설가 김훈씨나 평론가 황종연 교수 그리고 빌 게이츠가 책을 읽을 때 어떤 자세이겠습니까. 빌 게이츠한테는 직접 들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적어도 앞의 두 분은 정좌하고 책을 읽습니다. 정좌란 척추를 곧추 세우는 자세를 말합니다. 스님들이 깨달음을 구하고자 용맹정진할 때, 척추를 수직으로 세웁니다. 척추가 흐트러지는 순간, 집중력은 깨져버립니다. 죽비가 날아가지요.

 

호텔에서 책을 읽기란 쉽지 않습니다. 일요일 아침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기도 만만치 않습니다. 빌 게이츠처럼 비행기를 타고 홀로 조용한 휴양지를 찾기란 더욱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지하철에서든, 교실이나 강의실에서든, 화장실에서든 척추를 바로 세우고 읽은 책이 한두 권 있다면 오케이입니다.

 

척추를 곧추 세우고, 다시 말해 온몸과 마음을 집중해 읽은 책이 한두 권 있다면, 당신은 책 속에서 이미 길을 찾았을 것이고, 또 그 길 위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 나갔을 것입니다.  책을 몇 권 읽었느냐는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척추를 곧추 세우고 읽은 책이, 또는 그런 자세로 읽고 싶은 책이 과연 몇 권이 있는가가 책읽기의 핵심입니다. 척추로 읽는 책이 진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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