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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 랩소디
애덤 셸 지음, 문영혜 옮김 / 문예중앙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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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색과 레몬색으로 그라데이션이 되어있는 배경을 바탕으로, 아래로는 마을이 그려져있고, 위로는 토마토가 허공에 덩그러니 떠있는 표지가 내 품에 와락 안기게 된 것은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행운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느낌이란 것은 아무리 제목에서도 무언가를 소재로 하였다고 한들, 이렇게 주워먹기식의 표지를,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어떤 계기가 아니었다면, 이 책은 손에 집고 읽기는커녕, 한번 훑어보지도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신 것을 끔찍이도 먹지 못하여 - 달달한 과일 중 간혹 신 것이 있는 것일 테지만 - 토마토조차 좋아하지 않는 나는 - 아니, 신 과일이나 채소 자체를 아예 선호하지 않지만 - 표지를 보고서 기어코 토마토의 시큼한 맛을 생각해내고는 금세 신 과일을 먹은 듯한 표정을 안면 가득 지어내보이며 조건반사에 의해 입술을 앙 다문 그 속으로 침이 고임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옆에 끼고 읽는 내내 탐스러운 토마토를 베어문 입 안 가득 달콤한 향을 머금은 기분이었다고, 책을 다 읽은 지금,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른 입술을 혀로 촉촉히 적시며 입맛을 다시게 만들 만큼 현혹시키는 맛있는 소설이었다고, 그리 말해도 과하지 않은 책이었음을.

 

 

 

 

‘16세기 어느 해 8월 하순, 이탈리아 토스카나 공국의 작은 시골 마을, 피렌체에서 이주한 유대인 가족이 막 토마토를 들여왔다.’ ㅡ 이 문구를 보고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란 단연코 종교 문제밖에 없으리란 것을, 역시나 - 적어도 - 처음에 작가의 의도 또한 그렇게 다가왔음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카톨릭교도들만 사는 피렌체, 그곳에 유대인 노인인 논노와 그의 손자 다비도가 육감적인 색깔과 모양, 정력에 좋다고 알려진 효능 때문에 사랑의 사과라고도 불리는 토마토를 가지고 그들과 어우러져 살기 위해 들어오지만, 마을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보고는 마치 나병환자라도 가까이 오는 것처럼 반응했고 힐끔힐끔 쳐다보기만 할뿐, 그들의 가게에 절대 다가가지 않고 그 흔한 안부인사조차 그들에겐 베풀지 않는다. 그렇게 작가는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토마토를 집으면 손에 독이 오르고 먹으면 죽을 수도 있을 거라는 등의 행동으로 종교 문제를 살짝 보여준다.

 

 

 

 

하지만 그에 따른 더 큰 사건이라 함은, 마리와 다비도는 상대방의 시선이 온몸을 관통하면서 뭔가 뜨겁고도 숭고한 느낌이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그들을 둘러싼 세상은 녹아 사라졌다. 마치 각자의 영혼이 전부터 알았고 다시 만나기를 열망해온 것을 이제 막 눈으로 확인한 것 같았다. 그것은 둘의 운명이 하나라는 느낌, 그 사실을 증명하고 싶은 불 같은 열망이었다. 이러한 열망은 다비도와 마리의 귀에만 들리는 으르렁거림과 함께 다가왔다. 바로 맨초냐가 ‘일 투오모 델 아모레’ 즉 사랑의 천둥소리라고 표현한 것이었다. (p143-144) 그들의 우연한 만남과 사랑,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때부터 이야기의 축은 유대인과 카톨릭교도에서 약간 벗어나 다비도와 마리를 중심으로 이어지더라, 그것이다. 어쩌면 그들의 만남은 이미 정해진 수순이 아니었던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리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갈 수 있느냔 말이다. 작가의 기교가 대단하다 느낀 것이 그것이다. 인물 또한 그 둘을 둘러싸고 있는 가족뿐만이 아니라, 그의 마을 사람들까지 - 그 누구 하나 버릴 사람 없이 모두가 주연이 되는 식의 이야기라는 것,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다비도와 마리, 그들은 이미 시끌벅적한 장터에서 둘만의 만남의 의식을 치루고 있고, 처음 만난 후 엿새만에 자신을 훔쳐보는 이가 베니토로 착각하여 돼지 오물 한 양동이를 씌운 상태로 다비도와 재회하지만 서로의 호흡을 찾아 상대방의 품에 뛰어들게 되며, 후에 토마토가 가득 찬 가마솥 안에서 사랑을 나누더라는 등 - 어느새 내가 생각지도 못하게 한발 더 앞으로 나가있는 셈이다. 이야기는 전혀 미적지근하지 않고 오히려 뜨끈뜨끈하다. 그들이 가마솥에서 처음 사랑을 나눌 때, 그때 그들의 뜨거웠을 몸처럼. 책을 읽는 내내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과 같다, 생각했다. 분명 난 손으로 짚어가며 활자들을 읽어내리고 있는데 그것들이 영상이 되어 어느새 머릿 속에서 살아움직이더라, 그것이다.

 

 


 
 

토마토를 들여와 그것을 파는 유대인 노인 논노와 그의 손자 다비도, 올리브를 맛깔나게 절이는 비법을 가진 마리와 의붓아버지라는 명목 아래 마리를 이용하는 탐욕스러움의 일인자 주세페와 그의 하인 베니토, 본명이 있음에도 어릴 때 거위에게 오줌을 갈겨 한쪽 고환이 없어 시뇨레 콜리오네라 불리는 아드라이노 델그레코와 마리의 이름을 따 노래를 부른 치즈 장수, 늙은 노파 무카, 돼지고기 장수 빈첸초, 바보라 불리는 보보와 그가 가지고 다니는 보볼리토라는 인형과 죽은 전임신부의 조카 아우구스토 포, 카톨릭교도들과 유대인의 사이에서 어느 쪽 하나 치우침이 없이 중립적인 태도로 그들의 화합을 주도했던 굿 파드레와 복사 베르톨리, 단 하루라도 포도밭에서 일하며 농부들의활기찬 말투와 각운을 빌릴 수 있다면, 대공의 지위를 잃고 평생 말을 못하게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던 코시모와 자신을 마르가리타 공주라 일컫는 잔 왕자, 그의 요리사 루이지 - 까지 그 누구 하나 버릴 만한 인물이 하나도 없다고 앞서 얘기했었다. 누가 주인공이고, 누가 주변 인물이고. 명확하게 구분지어진 것은 그 무엇도 없다. 작가는 인물 하나 하나에 애정을 쏟은 만큼 보는 독자에게도 그것이 전달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쩌면, 어쩌면! 하는 사이에 그들의 손과 손이 마주 쥐어쥘 듯 하면서도 그것을 끊어놓은 것은 - 술 취한 성인의 축제에서 다비도가 베니토를 이겼을 때, 토마토 소스를 마을 사람들이 먹기 시작했을 때 - 책 속의 어느 특정한 인물도 포함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함께 사는 삶을 몰랐던게다. 하지만 인생이란 울 일을, 죽음과 슬픔과 상실을 끊임없이 감수해야 하는 것이기에 울었다. (…) 인생이란 웃어 넘겨야 할 죽음과 슬픔과 상실을 끊임없이 감수해야 하는 것이기에 웃었다. 라는 것을 굿 파드레에게서 말이 아닌 행동으로 느끼게 되며 함께 울고 웃으며 결국 눈물과 웃음으로 얼룩진 들의 손과 손은 마주잡아진다.

 

 

 

 

책 자체는 다비도와 마리의 로맨스로 한껏 버무려있어서 뜬금없이 인생? 이라고 되물어질 수도 있다. - 러브 스토리가 아닌 로맨스라 이야기하는 것은 작가가 14세기 극작가 포초 멘초냐의 말을 인용하여 “러브 스토리와 로맨스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며 러브 스토리에서는 사랑을 이루기까지의 장애가 본질적으로 주인공의 내부에 존재하여 문제를 연인들이 자초한 것에 반해, 로맨스의 경우는 주인공들의 사랑에는 문제가 없으나 가족과 사회가 연인들에게 지운 가혹한 굴레에서 비롯된다 이야기하는 까닭이리라. - 비도와 마리의 로맨스에 우리의 인생을 투영하여 결국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권선징악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달콤한 희극에 짠 눈물이 떨어지는 것이 인생이라며 인생의 양면성을 절묘하게 표현한다. 오늘도 싱그러운 햇빛이 나를 향해 방긋방긋 웃고, 겨울이라는 계절에 걸맞게 찬 겨울바람이 스치듯 지나가며 안부를 전하고, 나는 몸을 더 움츠리며 그에 맞는 안부를 건넨다. 발걸음은 경쾌하고, 입가에선 미소가 흐르지만, 짜증으로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일터. 이 인생, 내가 품어주지 않으면 그 누가 내 인생까지 옳다구나, 거리며 품어주리. 아, 아름다워라. 난 마리가 재배한 올리브로 만든 올리브유에 튀긴 감자에 다비도가 재배한 토마토로 만든 토마토 소스에 찍어 한 입 앙, 베어물고 입가에 묻은 토마토 소스를 냅킨으로 닦아내고 포도로 만든 포도주를 홀짝홀짝 들이키며 초대받은 그들의 술취한 성인의 축제에서 한껏 즐기고 이제 나의 삶으로 돌아오는 중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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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Taschen 베이직 아트 (마로니에북스) 16
페터 파이스트 지음, 권영진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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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름답고 아름답다. 내가 이토록 찬미할 수 있는 화가가 있다는 것에, 새삼 놀란다. 그의 그림은 내게 있어 갑작스러운 순간적 마주침이라 이야기할 수 있는데, 나와 그의 그림이 조우하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07년에 갑작스레 찾아온 학교에 대한 회의가 느껴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휴학이라는 말도 안되는 선택으로 08년, 학교가 개강한지 두어 달만에 후회를 느끼고 한 해를 그저 흘려보냈었다. 나름대로 이것저것을 했다고 했지만 내 손아귀에 잡히는 건 그 무엇도 없었던 때었다. 그래서 작년(09년) 학교에서 졸업이란 순간을 앞두고 도서관에서 학구열에 불타오르고 있을 즈음, 도서관을 꽤 자주 들락날락했었는데 도서관에서 파묻고 있던 고개가 아파와 신경질적으로 쳐들었을 때, 그때 내 눈 앞에 있던 것은 ‘피아노를 치는 소녀들’ - 그때부터였다. 그의 그림을 찾아다니기 시작한 순간이. 그때 만난 것은 마로니에북스에서 나온 「인상주의 화가들」- 그의 파트만 살짝살짝, 야금야금 보고 있는 - 이나, 아이잭 신의 「르누아르와의 약속」 두 권 다 괜찮은 책이었음에도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은 아이러니다.

 

 

 

이게 왠 떡인가! 그때 마침, 서울에서 ‘행복을 그리는 화가 : 르누아르’ 라며 르누아르전이 한창이었던 것! 작년 여름전까지만 해도 서울과는 담을 쌓고 지내던 20대를 정해진, 내가 살고 있는 대전이라는 지역에 갇혀 모나지 않고 둥글게, 둥글게 살고 있던 나였음에도 그곳을 찾아가려 무던히 애를 썼으나 시험, 졸업작품에 파묻혀 결국 그대로 흘려버리고 말았더랬다. 그러니까 입에 물어준 떡도 먹지 못하고 바닥에 흘려버린 셈이다. 그러고서 올해 1월에 ‘모네에서 피카소까지’라는 전시회를 간 것은 꼴랑 5점인 르누아르 그림이라도 보러 가겠다며 눈 오는 날에 대전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표를 끊었었다. - 그와 함께 동행했는데, 아마 그는 내가 그림에 관심이 많아서,라고만 생각하고 있을터. 큭큭 - 어찌됐든 작년 이것저것 모든 것이 스트레스로 다가와 모진 슬럼프를 겪고 있을 때 즈음 그런 나에게 지인이 이 책을 선물로 보내주었을 때, 어찌나 좋았던지 방방 뛰었던 기억이 새록새록한 것이 참 좋아했구나 - 라는 말을 입술 사이에서 새어나오게 한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난 그를 좋아했던 것이 아니라 그의 따뜻한 동화같은 세상의, 동화같은 사람들의 그림을 좋아했던 것뿐이었던게다. 업무에, 사람에, 공부에, 또 나 자신에게 시달려 마음 언저리에 찬 바람이 스며들 때 그의 그림을 펼쳐드는 동시에 곧 내 앞에 그가 그린 동화가 펼쳐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난, 그저 그림에 현혹되었던 게지.

 

 

 

늘 그림만 보아오다가 그를 읽어야겠다,라고 생각한 것은 바로 전 「페르난도 보테로」를 읽었기 때문. 번역기를 돌린 것이 완연하게 티가 나는 그 글을 읽고 있자니, 이건 뭐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고, 죄다 무표정인 뚱한 사람들의 세상을 보고 있노라니 - 아, 보테로의 그림 중 가장 환하게 웃고 있었던 것은 ‘돼지 머리가 있는 정물’ 에서 웃고 있는 돼지뿐이었으니, 나 또한 그들을 따라 어찌나 끝도 없이 무표정해지는지 볼썽 사나워졌더랬다 - “그림은 항상 즐겁고, 유쾌하고, 예뻐야 한다” 라는 말을 한 르누아르의 그림이 간절해지더라, 이 말이다. 그래서 나는 손에 착 감기는 이 책을 잡고 그림이 아닌 행복을 그리는 화가, 르누아르를, 그를 읽었다. 그는 부유층을 그리기보다는 자신이 속한 중하층 보헤미안들의 일상적인 즐거움을 그림으로 표현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림으로 생계를 해결해야 했던 그도 표피적인 묘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지만, 그가 내키지 않을 때에는 그렇게 그리지 않았다고 - 그것을 책에서는 르누아르의 타고난 순박함 덕분,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검정이라고 하면 생기 하나 없는 죽은 색,으로 표현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는 그 검정색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붉은 색과 파란색을 섞어 사용했는데 그 예로 ‘물뿌리개를 들고 있는 소녀’ , ‘물랭 드 라 갈레트’ , ‘그네’ , ‘두 자매’ , ‘검은 옷의 두 소녀’ 등등 그의 작품 대부분이 그러하다. 그래서 어둡게만 보이지 않는 까닭이 그것인가,라고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게다가 그의 그림이 특별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림 속에 등장하는 모델은 대부분 르누아르의 부인, 아들들, 동생부터 그의 지인들까지 다양하다. 그것은 ‘물랭 드 라 갈레트’에서 확연하게 알 수 있는데, 그곳에는 그가 알고 지내는 지인들 모두가 그 그림의 모델이 된다. 이 그림의 첫 인상은 무질서와 혼란인데, 그로 인해 그림이 살아있다 - 라는 느낌을 받기에 충분하다. 더욱 인상깊은 것은 책에서 그림에 대해 설명해주는 것이었는데, 마로니에북스라 하더라도 지은이, 번역가에 따라 느낌이 이리 달라질 수 있다니…. - 내가 좀 더 애정깊이 본 까닭도 있을테지만 - 그림에 대한 설명 한톨도 없던 보테로와는 달리 이 책에서 느껴지는 것은 도슨트를 듣는 것처럼 귀를 쫑긋 세우게 된다는 점.

 

 

 

그러다가 그가 많이 아팠다는 글과 조우하게 된다. 그것은 「르누아르와의 약속」에서도 접했는데 그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르누아르는 류머티즘성 관절염이 악화되어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뼈가 비틀리고 피부는 말라붙었다. 1904년에는 몸무게가47킬로그램밖에 나가지 않았으며 앉기조차 힘든 지경이었다. 1910년 이후에는 지팡이 없이 걷지 못했으며, 휠체어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르누아르의 손은 심하게 비틀려 새의 발톱처럼 휘었으며, 거즈 붕대를 감아 손톱이 살에 파고들지 않도록 해야 했다. 더 이상 붓을 쥘 수 없어 굳은 손가락 사이에 붓을 끼워 그림을 그리면서도, 증세가 악화되어 침대에 눕지 않는 한 매일 그림을 그렸다. 침대에는 철망 구조물을 설치하여 이불이 몸에 닿지 않도록 했다. 몸이 완전히 마비되는 때도 있었다. (…중략) 하지만 그 상태에서 그린 그림조차 행복과 기쁨을 표현하는 송가였고, 천국의 미소였다. 며 여보게, 그림을 그리는 데 손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네.” 나는 그림을 그릴 줄도 모르고 제대로 그려본 적 없으며 배워본 것은 초,중,고등학교에서 배운 것이 전부,라고 말할 정도로 무지한데도 이 글에서 손 끝과 발 끝에서 전율이 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어쩌면 행복하게만 보였던 그림,을 그린 그,의 노년을 보는 것이 내가 모르는 또다른 삶을 엿본 기분이랄까. 그의 화가 생활을 읽어내리며 엔드다, 엔드.를 읊조린다. 그가 그린 그림이 모두 행복할 거라는 착각은 이제 엔드,를 뜻하는 것인지, 그를 읽는 것이 엔드라며,전과 같은 마음으로 그림을 보는 것을 뜻하는 것인지 아무 것도 정의 내리지 못한 채로. 비가 오는 오늘에 그를 만난 것은 참 다행이다. 커피 한 모금에 그의 그림을 담고, 두 모금에 그의 삶을 담는다. 자연은 예술가를 고독하게 한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 남고 싶다.”던 그는 안녕하신지. 하늘에서 또 어떤 동화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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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테로 Taschen 베이직 아트 (마로니에북스)
마리아나 한슈타인 지음, 한성경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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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 전시회 타령을 하는 나는 만약 그림이 눈 앞에 있다 하더라도 눈동자만 굴릴 것이 뻔하다.
그림을 보는 것만 좋아할 뿐, 실은 볼 줄도 모르고 어떻게 봐야 하는지 조차 모르는데,그것은 아마 그 화가에 대해 세세하게 알지 못하기에 그것을 볼 때에 어떤 느낌으로, 어떤 시각으로 보아야하는 것인지 모르는 까닭이다. 화가에 대해 안다면야 그 시대, 배경, 그때 화가의 상황, 그 그림을 그릴 때의 기분 등을 고려하며 볼 수는 있겠지만, 그런 것까지 다 따져가며 봐야한다 그림이란 것은 나와는 너무나도 별개인, 먼 세계의 것이라는 느낌을 주기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들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그림을 보는 것을 좋아하고 그 그림을 보며 사색에 잠기는 것 또한 좋아한다. 하지만 그것은 늘 - 어색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어느 순간, 객관적인 그림을 사이에 두고 다른 이의 느낌과 내 느낌을 공유하며 그림을 폭 넓게 보고 싶다는 욕심 또한 그리 과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에, 그림에 대해 설명해 놓은 책, 혹은 에세이_를처음 펼쳐든 것은 작년(09년) 그림치유에세이였던 이주은으로 시작되었고, 그 이후로도 부족하지만 조금씩 읽고 있는 중이다. 페르난도 보테로, 그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었다. 작년(09년) 즈음에 르누아르 전시회와 함께 보테로 전시회도 덕수궁에서 열린 것으로 기억한다. 실은 나, 전시회를 찾다가 그의 그림은 처음 인터넷상으로 접했었는데 - 허걱. 하는 소리가 마음 속에서 입 밖으로 나오는 데에는 몇 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음을 기억한다. 그것은 그의 그림은 내가 여지껏 봐왔던 그림과는 너무나도 달라서 낯설었는데, 그것은 아침에 일어났을 때 퉁퉁 부은 내 얼굴을 보는 것과 같은 낯설음과는 다른 내가 몰랐던 또 다른 통로로 날 찾아오더란 말이다.

 

 

 

그의 그림을 회사, 집, 또 다른 장소에서 페르난도 보테르 - 그를 만나고 그를 알아갔다. 하지만 곧 책을 덮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아무래도 노출 수위가 조금 컸던 탓,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만큼 발가벗은 여인이 자주 등장한다. 그래서 주위의 시선도 조금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하지만 보고 있으면 그리 에로틱하게 느껴지지 않는데, 그것은 모든 여인들의 통통 - 혹은 뚱뚱 - 한 몸매 때문일 거라 지레 짐작하게 된다.

 

 

 

그런데 간혹 그의 그림에 의문점이 생긴 것은 ‘아담’과 ‘이브’와  같은 경우, 아담의 생식기는 나뭇가지로 덮어놓는 반면에 이브는 거웃을 까맣게 그려 표현한다. 게다가 ‘연인들’(p30) 에서 남성은 이불을 목까지 덮고 있는 반면 여성은 노출되어 있고, 책의 표지인 ‘다정한 커플’(p37) 역시 옷을 다 갖추어 입은 남성에 반해 여성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 아, 다리에 있는 것이 실오라기라고 부인한다면 할 수 없지만 - 남성의 허리와 골반 사이에 앉아있다. 또한, ‘보나르에 대한 경의’(p46,47) 에서 욕실에서 남성은 뒤를 돌아보고 있는 반면, 여성은 노출된 앞부분을 보여준다. 물론_ 여성들의 나체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라 이야기할 수도 있을 터. 하지만 그것이 올바른 것인지 - 나의 궁금증을 풀어줄 만한 어떤 요소도 책 속에서 해답을 찾지 못했다는 것. 어쩌면 그것은 보테로에게 들을 수 있지 않았을까. 어째서 그것에 대한 한치의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라는 것인가. 어쩌면 나에게 있어 그것에 대한 탐구는 그의 책을 들어서 펼칠 때마다 가질 의구심일게다.

 

 

 

왜 뚱뚱한 사람을 그리냐는 질문에 “아니오, 나는 뚱뚱한 사람들을 그리지 않습니다.”라는 조금은 억지스러운 대답을 내놓는다. 응? 뭐라고? 라고 되물으며 - 내가 잘못 읽은겐가, 다시 눈동자를 굴려 질문에 데려다놓고 읽어보아도 마찬가지의 대답이 눈에 보인다. 아, 이 어찌 황당무계한 대답이 다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책에서는 그에 대한 대답을 부가 설명한다.보테로는 살찐 남자나 뚱뚱한 여자같이 특정한 무엇을 그리는 데는 관심이 없다. 외려 그는 리얼리티를 미술로 변환하는 수단의 하나로 변형과 변신을 이용하는 데 큰 관심을 쏟는다. 그의창조적 갈망과 미학적 이상은 형태와 부피감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런 양식은 보테로가 그만의 시각을 제시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중략) 보테로의 변형은 늘 회화의 감각적 질감을 강조하고자 하는 바람에서 비롯된다. (p49~54)

 

 

 

 

그의 그림을 보다보면 사람뿐만이 아닌 과일도, 동물도, 나무도 모두 비대하여 비정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족 풍경」이라던가 「신도교 가족」 , 「마리두케의 집」에서 등장하는 애완동물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스럽고 귀여운애완동물들이 아니고, 특히 「지붕 위의 고양이」는 지붕보다 더 큰 고양이는 고양이가 아닌 소처럼 보일 정도니, 두 말하면 잔소리일 정도다.  멜론먹는 소년」 - 멜론이 아니라 수박으로 보이지만 - 이나 「과일이 있는 정물」 , 「바이올린이 있는 정물」 , 「돼지 머리가 있는 정물」 , 「오렌지같은 것의 경우엔 과일, 채소가 무척이나 비대해 언발란스해보이기도 한다. 또 「거리의 남자」같은 경우, 나무가 아무리 크다 한들, - 그래,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 푸하하하하하! 터져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너무 보테로라는 사람에 대해서만 치중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작품에 대한 어떠한 일언반구의 설명도 부가하지 않는 까닭에 작년(09년)에 덕수궁에서 전시했던 것이 홈페이지에 나와있어 그곳에서 나는 그림에 대한 설명을 http://botero.moca.go.kr에서 보충해야만 했다는 점에 아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홈페이지에 엄청나게 많은 그림들이 나와있는 것도 아닌데 그것에 더 신빙성이 간다면 어이할꼬. 또한, 원래 제목에 그리 연연해하는 편이 아님에도 책에서는 「여자 재봉사들」이라고 적혀있는 것이 홈페이지에는 「바느질 작업장」이라고 제목이 붙어 있어 어쩌면 다른 것들도 그럴 수도 있겠다,며 혹, 이 곳에 나오는 앞서 말했던 「멜론 먹는 소년」같은 경우, 혹 수박이 아닌가 하고 찾아보았지만 그에 대한 그림은 검색을 해도 나오지 않더란 것. 그것 말고도 내가 따로 보충하고 싶은 것들에 대한 것은 검색을 해도 나오지 않는구나. 라는 생각에 좀 더 알고 싶은 그림은 눈으로 보기만 하며 그대로 넘겨야만 했던 것이 조금은 씁쓸해지더라, 말이다. 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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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여행책 - 휴가없이 떠나는 어느 완벽한 세계일주에 관하여
박준 지음 / 엘도라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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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세상은 한 권의 책, 여행하지 않는 자는 그 책의 한 페이지만 읽을 뿐!”이라는 문구를 띠지에 떡하니 붙여놓아 책의 내용을 짐작하기도 전에 깊은 떨림을 느끼는 것과 읽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든 건 동시였다. 막연하게 여행에세이에 대해선 비판적인 내게도 이런 마음이 들 수 있게 만들어주는 책이 있구나 - 라는 생각에 기쁜 마음과 함께 이 책을 덥썩 품에 안게 된 책이었는데, 딱 그만큼의 실망이었다. 딱 기대했던 만큼의 실망. 어쩌지? 난 미안하게도 이 책에 세개 이상의 별을 줄 수가 없다. 별 세개도 내 입장에서 본다면야 무척이나 관대한 것만 같아서 하나를 빼야 하나, 말아야 하나 무척이나 고민을 하게 만드는 것이 어쩌면 그의 전작이었던 「on the road」나 「언제나 써바이 써바이」를 추천하는 지인들이 많아 한껏 기대를 했던 까닭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내가 직접 읽어보지 않은 책의 대한 평이 좋다고 하여 그 다음 작품까지 좋겠지,라고 기대한 나에게도 탓은 있다. 

 

 

 

누군가의 여행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론 부족했다. 책 속에 등장하는 낯선 세계를 직접 느끼고 싶었다. 여행을 떠난 작가와 함께 나란히 길을 걷고, 그가 만난 사람들을 보고 싶었(p8)기에 책여행과 여행책이 합해져 「책여행책」이 되었다는 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러고보니, 전에 비슷하지만 다른 책을 접했던 것도 같다. 번역하는 여자 , 윤미나의 「굴라쉬 브런치」 - 그것은 독서 여행기라고도 불리우는데, 그것은 작가가 쓴 소설의 배경에 찾아가 그 책들과 조우하는 것이 그 까닭이다. 뭔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난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정리가 하나도 되질 않는다.) 그러니까, 어쩌면 그때 받았던 감흥을 - 이 책에서 다시 느껴볼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가지고 시작했다.

 

 

 

 

책을 덮고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을 꼽자면, 「아웃사이더 예찬」을 읽고 ‘성적 소수자들의 낙원이라’불리는 프로빈스 타운으로 가서 게이들이 스스로를 ‘게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이후다. ‘게이(gay)’라는 말 자체가 ‘명량한, 즐거운, 낙관적인, 밝은’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 호칭에서 알 수 있듯, 그들은 스스로를 더 이상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게이스럽게 산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자부심을 갖고 명랑하게 낙관적으로 산다는 말이다. 프로빈스타운 사람들은 참 게이스럽다. (p22) 라는 것을 느끼고 독자에게 전해주더라는 것,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읽고 체가 짜놓은 일정대로 체가 60년 전에 다녀갔던 그곳들 - 아르헨티나‘산 마르틴 데로스 안데스’에서 체가 며칠간 지냈다는 국립공원 관리사무소, 칠레에선 체가 묵었다는 ‘로스 앙헬레스 소방서’- 을 발견하고 신기해했을 그의 모습이 스쳐지나가며 미소가 입가에 걸리게 되고, 「내일은 어느 초원에서 잘까」 의 배경인 몽골의 아르항가이 초원에서 게르의 집 앞에서 몽골식 인사법으로 외친다. “개를 붙잡아주세요!”, 「느긋하게 걸어라」를 읽고는  ‘좋은 길’ 또는 ‘여행’을 뜻하는 스페인어인 ‘카미노’라고도 불리는 산티아고길을 찾아가는데,  그곳을 정말 걷는다. 정말 대책없다. 푸하하하 - 순례자여. 당신이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곧 길이다. 당신의 발걸음, 그것이 카미노다. (p136) ㅡ 총 열여섯권의 책을 읽고 책여행을 한다.

 

 

 

 

그렇게 책여행을 끝내고 나서,  ‘크레모나, 헬싱키, 할렘, 교토, 아바나, 아를, 앙코르와트, 하코다테, 님만해민, 뒤셀도르프, 후지산, 카오산로드, 야쿠시마’ 열세 개 나라의 수도를 방문하여 여행책을 써내려간다. 책에 흥미를 느낀 것은 바로 그때였음을 덮었던 책을 뒤적이며 서평을 쓰는 지금 깨닫는다. 다녀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여행책을 써낸 어떤 연결고리도 없이 이어지는 도시들은 내 머릿 속에서 뒤죽박죽으로 반죽된 채로 덩그러니 남아있었고, 흥미는 점점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 차고 올라오지 못한 것은 아마도 무언의 반항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지루해 지루해 - 를 연발하던 나는 결국 처음 책을 읽을 때와는 달리 아무런 감흥없이 책을 덮어야만 했다. 그것이 비단 책에 아무런 사진이 없다는 것뿐만은 아니었을터. 나는 카미노에 대해 마음대로 기대하고 실망했다. 정작 카미노는 내가 찬사를 보내건 실망을 하건 제자리에 제 모습 그대로 있었다. 나 혼자만 요란을 떨었다. 그때 난 카미노에서 누리고 있는 것들을 망각하고 있었다. 카미노는 가르쳐주었다. 실망을 하더라도 집착하지 말며, 현재를 누리되 집착하지 말라고. (p139) 나 역시 그의 책에 마음대로 기대하고 실망하여 다 읽고 나서는 공허한 마음마저 들었더랬다. 나는 덮었던 책을 다시 펴서 승차감이 투박한 하이카라찡찡 전차를 타고 다시 한번 하코다테를 구경할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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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꾼들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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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도 접해본 적이 없는 작가의 작품을 읽는 것에 지레 겁부터 먹는 것이 아마도, 어쩌면, 아직도_ 나의 편협된 독서습관 때문이겠지 - 라는 생각이 들며 푸른빛 눈물이 마음에 아롱진다. 「구경꾼들」이라는 책을 들고 표지를 슬쩍 보고 뒤로 홱 돌려 문학평론가 차미령의 열줄이 조금 넘는 평을 읽다보니 ‘세 번 톺아볼 때 여백이 깊어지는 소설’이라는 문구가 나를 잡고 흔든다. 세 번,씩이나? 읽는 것이 결코 녹록지 않겠다_며 책을 펼쳤을 땐 이야기가 이야기를 물고 그 이야기가 이야기를 물어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하면서도 결국은 이어내는 작가의 글에서 위태로움을 느끼기 전,에 왠지 모르게 따뜻함이 배어나온 것을 느낀 것은 내 입가에 웃음이 걸려있을 때였음을.

 

 

 

 

리뷰를 끄적이면서도 웃음을 실실 흘리고 있는 연유가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마다 신발을 바꿔신어 어정쩡한 걸음으로 걷는 큰삼촌의 모습이 상상되어서? 밥 먹고 기운낼 일이 있다며 열무김치에 밥을 두 그릇이나 비벼 먹고 가그린하는 할아버지에게 바람피우냐는 할머니의 말이 할아버지에게 한 마지막 말이라는 것 때문에? 그것도 아니면 빵봉지에 적혀 있는 제조사의 이름이 자신의 이름과 같아서 무작정 제조사를 찾아 공장을 찾아간 화자때문에? 아버지가 일하는 편의점에서 ‘물건 훔치기 놀이’를 하는 화자의 가족때문에? 퀴즈 프로그램에서 소녀시대가 몇 명이냐는 질문에 답하지 못해 첫 질문에 똑 떨어진 할머니때문에? 기침을 하다가 갈비뼈가 나간 화자때문에?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풉, 하고 웃음이 터지는 것이 어쩌면 그것일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니, 결코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것 모두가 우리의 삶과 똑 닮아있어서. 작가는 늘 비관적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그로 인해 삐딱한 세상만을 보는 내게 이 한 권의 책으로 따뜻함을 안겨주더란 이 말이다.

 

 

 

 

‘나’의 이름을 일러주지 않아 나에게선 아가_ 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화자,의 태동기를 읽어 내리면서 나는 ‘필연을 가장한 우연’,‘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떠올리게 된다. 그것은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큰삼촌, 작은삼촌, 고모, 나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하나의 공동운명체라고 할 수 있는데 앞서 말했듯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어 그들의 이야기를 주축으로 그뿐만이 아닌 다른 이의 삶까지도 구경꾼처럼 기웃거려 독자가 책의 등장인물 누구 하나 그냥 흘려보내질 못하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에 가능할런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사연없는 사람 하나 없다고 해야할까. 여기까지 쓰고는 거봐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잖아 (p108) 라고 말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오버랩되며 이제 아버지가 내 서평의 구경꾼이라도 된건가,하는 생각에 급작스레 터져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어 한바탕 웃어제낀다.

 

 

 

 

“잊지 마세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 기억하는 거예요.”(p88) 무심한 듯,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그들은 나였고, 또 우리였다. 우리의 삶을 또 다른 시각으로 그려내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애잔한 마음이 들며 그들의 어깨를 툭툭 털어주며 위로를 건네고 싶어지고, 또 나도 그리 위로받고 싶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수도 있겠다란 생각이 든다. 무척이나 기분좋게 읽은 책이기에 다른 이의 서평에 기웃거리며 훑어보고 있노라니 단편을 장황하게 이어놓은 것 같다,며 역시 단편 프레임에서 벗어나질 못한다,는 평을 보고서 어쩌면 내가 준 별 다섯개가 과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나는 좋았다. 오랜만에 다 읽고도 하루종일 그 생각에 한동안 주위를 서성일 수 있는 책을 만난게다. 그거면 된거다. 책을 읽고 내가 느낀 것이 별 다섯개라는데, 그 누가 뭐라할텐가. 부모님은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을 바라볼 것이다. 구경을 하는 동안 부모님은 자신을 잊을 것이다. 그러니 부모님을 구경할 또 다른 사람이 필요했다. 나는 뷰파인더로 아버지를 들여다보았다. 얼굴을 반으로 자른 다음 셔터를 눌렀다. 찰칵, 하는 소리에 맞춰 숨을 멈추었다. (p237) 그 순간 나도 그 가족의 일원이 된마냥 함께 숨을 멈춘다.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상을 태운 자리에 돋은 사과나무(라서 증조할머니가 보낸 선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하숙생이 사과씨를 뱉어내 싹을 틔운) 뒤에 숨어있는 구경꾼인 주제에. 낄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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