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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 랩소디
애덤 셸 지음, 문영혜 옮김 / 문예중앙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하늘색과 레몬색으로 그라데이션이 되어있는 배경을 바탕으로, 아래로는 마을이 그려져있고, 위로는 토마토가 허공에 덩그러니 떠있는 표지가 내 품에 와락 안기게 된 것은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행운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느낌이란 것은 아무리 제목에서도 무언가를 소재로 하였다고 한들, 이렇게 주워먹기식의 표지를,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어떤 계기가 아니었다면, 이 책은 손에 집고 읽기는커녕, 한번 훑어보지도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신 것을 끔찍이도 먹지 못하여 - 달달한 과일 중 간혹 신 것이 있는 것일 테지만 - 토마토조차 좋아하지 않는 나는 - 아니, 신 과일이나 채소 자체를 아예 선호하지 않지만 - 표지를 보고서 기어코 토마토의 시큼한 맛을 생각해내고는 금세 신 과일을 먹은 듯한 표정을 안면 가득 지어내보이며 조건반사에 의해 입술을 앙 다문 그 속으로 침이 고임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옆에 끼고 읽는 내내 탐스러운 토마토를 베어문 입 안 가득 달콤한 향을 머금은 기분이었다고, 책을 다 읽은 지금,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른 입술을 혀로 촉촉히 적시며 입맛을 다시게 만들 만큼 현혹시키는 맛있는 소설이었다고, 그리 말해도 과하지 않은 책이었음을.

 

 

 

 

‘16세기 어느 해 8월 하순, 이탈리아 토스카나 공국의 작은 시골 마을, 피렌체에서 이주한 유대인 가족이 막 토마토를 들여왔다.’ ㅡ 이 문구를 보고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란 단연코 종교 문제밖에 없으리란 것을, 역시나 - 적어도 - 처음에 작가의 의도 또한 그렇게 다가왔음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카톨릭교도들만 사는 피렌체, 그곳에 유대인 노인인 논노와 그의 손자 다비도가 육감적인 색깔과 모양, 정력에 좋다고 알려진 효능 때문에 사랑의 사과라고도 불리는 토마토를 가지고 그들과 어우러져 살기 위해 들어오지만, 마을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보고는 마치 나병환자라도 가까이 오는 것처럼 반응했고 힐끔힐끔 쳐다보기만 할뿐, 그들의 가게에 절대 다가가지 않고 그 흔한 안부인사조차 그들에겐 베풀지 않는다. 그렇게 작가는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토마토를 집으면 손에 독이 오르고 먹으면 죽을 수도 있을 거라는 등의 행동으로 종교 문제를 살짝 보여준다.

 

 

 

 

하지만 그에 따른 더 큰 사건이라 함은, 마리와 다비도는 상대방의 시선이 온몸을 관통하면서 뭔가 뜨겁고도 숭고한 느낌이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그들을 둘러싼 세상은 녹아 사라졌다. 마치 각자의 영혼이 전부터 알았고 다시 만나기를 열망해온 것을 이제 막 눈으로 확인한 것 같았다. 그것은 둘의 운명이 하나라는 느낌, 그 사실을 증명하고 싶은 불 같은 열망이었다. 이러한 열망은 다비도와 마리의 귀에만 들리는 으르렁거림과 함께 다가왔다. 바로 맨초냐가 ‘일 투오모 델 아모레’ 즉 사랑의 천둥소리라고 표현한 것이었다. (p143-144) 그들의 우연한 만남과 사랑,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때부터 이야기의 축은 유대인과 카톨릭교도에서 약간 벗어나 다비도와 마리를 중심으로 이어지더라, 그것이다. 어쩌면 그들의 만남은 이미 정해진 수순이 아니었던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리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갈 수 있느냔 말이다. 작가의 기교가 대단하다 느낀 것이 그것이다. 인물 또한 그 둘을 둘러싸고 있는 가족뿐만이 아니라, 그의 마을 사람들까지 - 그 누구 하나 버릴 사람 없이 모두가 주연이 되는 식의 이야기라는 것,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다비도와 마리, 그들은 이미 시끌벅적한 장터에서 둘만의 만남의 의식을 치루고 있고, 처음 만난 후 엿새만에 자신을 훔쳐보는 이가 베니토로 착각하여 돼지 오물 한 양동이를 씌운 상태로 다비도와 재회하지만 서로의 호흡을 찾아 상대방의 품에 뛰어들게 되며, 후에 토마토가 가득 찬 가마솥 안에서 사랑을 나누더라는 등 - 어느새 내가 생각지도 못하게 한발 더 앞으로 나가있는 셈이다. 이야기는 전혀 미적지근하지 않고 오히려 뜨끈뜨끈하다. 그들이 가마솥에서 처음 사랑을 나눌 때, 그때 그들의 뜨거웠을 몸처럼. 책을 읽는 내내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과 같다, 생각했다. 분명 난 손으로 짚어가며 활자들을 읽어내리고 있는데 그것들이 영상이 되어 어느새 머릿 속에서 살아움직이더라, 그것이다.

 

 


 
 

토마토를 들여와 그것을 파는 유대인 노인 논노와 그의 손자 다비도, 올리브를 맛깔나게 절이는 비법을 가진 마리와 의붓아버지라는 명목 아래 마리를 이용하는 탐욕스러움의 일인자 주세페와 그의 하인 베니토, 본명이 있음에도 어릴 때 거위에게 오줌을 갈겨 한쪽 고환이 없어 시뇨레 콜리오네라 불리는 아드라이노 델그레코와 마리의 이름을 따 노래를 부른 치즈 장수, 늙은 노파 무카, 돼지고기 장수 빈첸초, 바보라 불리는 보보와 그가 가지고 다니는 보볼리토라는 인형과 죽은 전임신부의 조카 아우구스토 포, 카톨릭교도들과 유대인의 사이에서 어느 쪽 하나 치우침이 없이 중립적인 태도로 그들의 화합을 주도했던 굿 파드레와 복사 베르톨리, 단 하루라도 포도밭에서 일하며 농부들의활기찬 말투와 각운을 빌릴 수 있다면, 대공의 지위를 잃고 평생 말을 못하게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던 코시모와 자신을 마르가리타 공주라 일컫는 잔 왕자, 그의 요리사 루이지 - 까지 그 누구 하나 버릴 만한 인물이 하나도 없다고 앞서 얘기했었다. 누가 주인공이고, 누가 주변 인물이고. 명확하게 구분지어진 것은 그 무엇도 없다. 작가는 인물 하나 하나에 애정을 쏟은 만큼 보는 독자에게도 그것이 전달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쩌면, 어쩌면! 하는 사이에 그들의 손과 손이 마주 쥐어쥘 듯 하면서도 그것을 끊어놓은 것은 - 술 취한 성인의 축제에서 다비도가 베니토를 이겼을 때, 토마토 소스를 마을 사람들이 먹기 시작했을 때 - 책 속의 어느 특정한 인물도 포함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함께 사는 삶을 몰랐던게다. 하지만 인생이란 울 일을, 죽음과 슬픔과 상실을 끊임없이 감수해야 하는 것이기에 울었다. (…) 인생이란 웃어 넘겨야 할 죽음과 슬픔과 상실을 끊임없이 감수해야 하는 것이기에 웃었다. 라는 것을 굿 파드레에게서 말이 아닌 행동으로 느끼게 되며 함께 울고 웃으며 결국 눈물과 웃음으로 얼룩진 들의 손과 손은 마주잡아진다.

 

 

 

 

책 자체는 다비도와 마리의 로맨스로 한껏 버무려있어서 뜬금없이 인생? 이라고 되물어질 수도 있다. - 러브 스토리가 아닌 로맨스라 이야기하는 것은 작가가 14세기 극작가 포초 멘초냐의 말을 인용하여 “러브 스토리와 로맨스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며 러브 스토리에서는 사랑을 이루기까지의 장애가 본질적으로 주인공의 내부에 존재하여 문제를 연인들이 자초한 것에 반해, 로맨스의 경우는 주인공들의 사랑에는 문제가 없으나 가족과 사회가 연인들에게 지운 가혹한 굴레에서 비롯된다 이야기하는 까닭이리라. - 비도와 마리의 로맨스에 우리의 인생을 투영하여 결국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권선징악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달콤한 희극에 짠 눈물이 떨어지는 것이 인생이라며 인생의 양면성을 절묘하게 표현한다. 오늘도 싱그러운 햇빛이 나를 향해 방긋방긋 웃고, 겨울이라는 계절에 걸맞게 찬 겨울바람이 스치듯 지나가며 안부를 전하고, 나는 몸을 더 움츠리며 그에 맞는 안부를 건넨다. 발걸음은 경쾌하고, 입가에선 미소가 흐르지만, 짜증으로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일터. 이 인생, 내가 품어주지 않으면 그 누가 내 인생까지 옳다구나, 거리며 품어주리. 아, 아름다워라. 난 마리가 재배한 올리브로 만든 올리브유에 튀긴 감자에 다비도가 재배한 토마토로 만든 토마토 소스에 찍어 한 입 앙, 베어물고 입가에 묻은 토마토 소스를 냅킨으로 닦아내고 포도로 만든 포도주를 홀짝홀짝 들이키며 초대받은 그들의 술취한 성인의 축제에서 한껏 즐기고 이제 나의 삶으로 돌아오는 중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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