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말했다 : 우리를 닮은 그녀의 이야기
김성원 지음, 김효정 사진 / 인디고(글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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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랜만에 그를 만나러 가는 기차 안에서 읽을 만한 가벼운 책이 필요했다. 결코 소설이어서는 안되었다. 그것은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는 집중하기가 힘들다,라는 생각도 물론 있었지만, 난 집중을 못한 적이 없는 나로서는 소설은 내가 내릴 때의 역이 되어서도 끝까지 손에 놓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까닭이다. 그럴 땐 역시 에세이가 최고지,하며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마음의 동반자로 데려갔던 책. 「그녀가 말했다」- 모든 감성 에세이가 그러하듯, 쫙 펴면 책 한 권이 손바닥에 견줄 만하고 두께는 감질맛날 만큼 얇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날 잡아끄는 것은 갈색 빛이 감도는 표지였는데, 이것은 스탠드를 켜고 봐도 예쁠 터인데 - 기차의 창문이 잔뜩 머금은 햇살에 갈색 빛이 더 영롱하게 비쳐져 한참을 쳐다보았다. 이토록 예쁜 책이 어떤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지, 기차가 출발함과 동시에 이야기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제서야 책을 펼친다.

 

 

 

쓰러졌지만 타는 가슴이 있던 하루, 일주일, 한 달, 그리고 몇 년간의 우리 청춘의 노래들’ 이라는 문장이 추천의 글로서 나를 맞이했는데, 사실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이 글을 보면 갸우뚱거리게 된다. 내가 마지막까지 읽은 것은 ‘사랑’이라는 것으로 국한되어 있지 않았던가. 간혹 ‘꿈(미래)‘에 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은 ‘사랑’이라는 주제에서 완전히 어긋나지 못한다. ‘사랑’이란 추상적 대개념 속에서 꼼틀대는 소개념일 뿐, 철저히 분리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저 공감하고자 가볍게 읽은 감성 에세이에 이러쿵 저러쿵 논하고자 하는 내가 참 우습기 그지없다. 시각을 약간만 바꾸면, 위와 같은 문장은 청춘은 곧 사랑,이라는 것이고, 역으로 생각해보자면, 사랑없는 청춘이 가능한가 - 인데, 내 청춘의 모든 주소엔 사랑이 있었고, 그로 인해 나는 성장했고, 또 여전히 성장 중이기에, 그같은 물음엔 아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제서야 안 게다.

 

 

 

“몇 번이나 따라부르고 잊었어?” 그녀는 “이만큼.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을 만큼.”하고 두 팔을 벌리면서 말하더니, 곧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이상해. 지금은 그 사람이 보고 싶지 않아. 내가 견딜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아팠거든. 그래서 잊었어. 그런데 가끔…… 목에 뭐가 걸린 것 같고, 심장에 가시가 돋는 것처럼, 아파.” (…) “노래를 들어서 그렇지. 나도 가끔 그래. 아무 일 없는데도, 슬픈 노래를 들으면 어제 헤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아무 일이 없는데도 슬픈 노래를 들으면 시선이 멈추는 곳에서 별안간 덜컹거리던 기차가 멈췄다. 광명역이라는 곳에서 기차에 문제가 생긴 것. 기차에서는 안내 방송으로 승객을 안심시키려 애쓰는 기관사가 있었다. 그리고 채 눈을 떼지 못한 책 속에는 수명이 다 한 사랑을 여전히 꼭 붙들고 있는 그녀를 위로하는 나(저자, 혹은 실재의 나)가 있었다. 나도 그런 적이 있노라고, 세상엔 잊을 수 없는 것 없고, 잊을 수 있는 것 없다고. 그저 무뎌지는 것이라며 책 속의 모든 것에 추억이 묻어 있었고 그래서 모든 것이 아팠던 것이다 ㅡ 그녀를 향해 날아드는 일만 개의 뾰족한 화살 는 말을 인용한다. 그리고 이제는 가물가물해진 오래 전의 그 기억들을 회상하고, 현재의 내 행복한 순간들에 감사하는 내가 있다.

 

 

 

“연애할 때 가장 안타까운 게 뭔지 알아? 처음 만난 날의 기억이 희미해진다는 거야.” ㅡ 기억은 희미해진다 이 말에 깊이 공감하고, 동감한다. 많진 않지만 나 역시 몇 번의 연애를 하면서 느낀 것 중 하나가 ‘처음’이라는 단어의 상실이었던 게다. 추억이 생길 때면, 그보다 전의 추억은 희미해지기 마련이고, 그것의 반복이다. 나는 그것이 늘 아쉽고, 또 그립다. 오래 전의 그런 아쉬움들로 점철되어진 그것들로 현재의 나는 지금 내 옆에 있는 그와 과거의 이야기를 자주, 또 오래 하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불과 일년 전의 그것들을 재연할 때면 “우와, 오랜만이다. 그치?” 라거나, 우연히 한 행동이 전의 기억을 회상하게 할 때면 “우리 예전엔 이런 것도 자주 했었는데….” 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데, 그것은 반가움을 동반한 기쁨으로 안면에 웃음을 띠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추억을 켜켜이 쌓아두는 것이 아닌, 옆에 나란히 놓아두는 법을 배우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록한다. 행복을 다시 꺼내보기 위해, 행복했던 순간들을 다시 살기 위해. ㅡ 사라지지마, 내 곁에서

 

 

 

그를 만나고 즐거운 한때를 보낸 뒤 집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책을 다시 펼쳤다. 이야기는 이어지지 않고, 또 새로운 이야기 시작이다. 기차에서 읽으면 이래서 좋다. 이게 무슨 내용이더라? 라며, 앞의 page를 넘겨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러다 핸드폰을 잡고 있는 내 손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그냥 이런 생각이 들었어. 만일 꼭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다면, 항상 그 소원을 마음에 새기고 있어야 해.” 자신이 원하는 걸 정확히 알고 있을 것. 완전한 형태를 갖지 못한 소원은 이루어지기 힘들다. 기회는 별똥별처럼 나타나 안개처럼 사라지니까. ㅡ 별똥별이다 꿈을 닮아가기 위해 손을 뻗고 있는 그와 나, 그리고 나의 지인들 모두가 마음 속에 새겨두어야 할 문장이었다. 바셋 하운드, 엘비스를 읽으며 사냥개 엘비스처럼 나 역시도 안락한 생활 속에 녹아들어가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 생각했고, 별은 별빛을 찾는 사람을 위해 빛난다를 읽으며 항상 꾸었던 꿈을 어느 순간 잊고 있었다는 질책을 나의 내면으로부터 받아야만 했다.

 

 

 

이렇듯 책 속의 그녀는 여전히 끊임없이 조잘조잘거리며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 혹은 저자는 늘, ‘완전한, 완성된’이 아닌 ‘불완전한, 미완성된’ 것들만을 스스럼없이 내보여주고 있다. 불완전하고 미완성된 것을 완전하고 완성할 수 있는 방법으로 다가가는 해결책을 넌지시 제시해주지만, 그것 또한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닐 터. 그녀 혹은 저자 역시 나와 같은 상태로 아직 불완전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일 것이라는 서투른 판단을 내려본다. 그저 나는 나보다 조금 더 폭 넓은 안목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 속에서 공감을 하고, 그것을 되새김질하며 또 하나의 책을 기억한다. 그리고 바래 본다. 책 속의 그녀들이, 그리고 그녀들을 똑 닮은 내가, 행복으로 번지기를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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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들의 결탁>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바보들의 결탁 - 퓰리처상 수상작
존 케네디 툴 지음, 김선형 옮김 / 도마뱀출판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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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요근래 왠만큼 끌리지 않으면 책 날개를 읽지 않고 그저 흘깃 보고는 넘겨버리는 좋지 않은 버릇이 들었다. 작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아야 내가 읽고 있는 이 책이 어떤 성격을 띠고 있는지에 대해 가늠할 수 있을 터인데, 그 통과의례를 나는, 가벼이 무시하는 경향이 생겨버린 것이다. 늘 그렇듯 이번에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헌데, 워커 퍼시 -「바보들의 결탁」이 세상의 빛을 보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 가 쓴 서문이 날 멈춰버리게 했다. 책의 끄트머리도 아니고, 서문에서. 내가 책 날개를 다시 펼친 것은 그때였다. 오래된 습관을 버리기라도 한 듯, 무척이나 자연스레 또 뻔뻔하게. 「바보들의 결탁」의 저자 ‘존 케네디 툴’은 이 책에 대한 강한 확신으로 원고를 완성시켰으나, 유명 출판사에서 출간을 거절당하고, 계속되는 원고 수정과 출판사들의 퇴짜, 어머니와의 불화로 생긴 우울증과 편집증으로 1969년 서른두 살이라는 창창한 나이에 자살이라는 돌아올 수 없는 멀고 먼 길을 택하게 된다. 본격적인 책의 첫 글자도 읽기 전, 읽으려는 작품의 저자가 생을 마감했다는 문장은 당황스러운 적막을 선사했고, 급기야 숙연함까지 깃들게 했다. 그렇다고 하여, 여지껏 다른 저자의 유작을 읽은 적이 없었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가 읽으려던 이 작품은 그가 이 세상에 남긴 단 한 권의 유작이라는 점은 안타까움이라는 한 단어로 치부해버리기엔 약간 모자란 듯함을 느끼게 하고, 다 읽고 난 후엔 유문 -이그네이셔스가 자주 칭하던- 속에서 똬리를 트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초록색 사냥모자가 살덩어리 풍선 같은 머리통 윗부분을 쥐어짜듯 꾹 덮고 있었다. (…) 북슬북슬한 검은 콧수염 밑으로는 두툼한 입술이 일자로 앙다문 채 툭 불거져 있었고, 양쪽 입아귀는 불만스런 기색과 포테이토칩 부스러기가 덕지덕지 달린 잔주름이 되어 쑥 꺼져 있었다. (…) 코끼리 같은 몸짓으로 육중한 엉덩이를 한쪽씩 들썩이며 쿵 쿵 제자리걸음을 걷자 부픗부픗한 살들이 트위드 바지와 플란넬 셔츠 밑에서 잔물결을 일으켰고, (…) ㅡ 이토록 괴상망측한 그의 이름은 ‘이그네이셔스J. 라일리’ - 그는 관절염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간 어머니를 홈스 백화점 앞에서 기다리는 중인 게다. 벌써부터 그는 용의주도하게 단어를 고르고 골라 어머니께 퍼부을 비난의 문장을 다듬고 있었다. 후회하게 만들거나, 그게 안되면 혼이라도 쏙 빼놓을 작정이었다. 어머니가 분수를 깨닫도록 자주자주 쓴소리를 해줘야 했다. 이런 막돼먹은 아들을 두다니. 아, 불쌍한 ‘라일리 부인’. 하지만, 라일리 부인도 만만치는 않다. 부인의 과음으로 인한 음주운전은 서른 살에 만년 백수인 아들을 억지로 그가 빅치프 노트에 써놓은 벌이를 해야만 하는 변태적인 상황으로 내모는 계기가 되었고, 그때부터 독자는 새로이 이야기가 다시 시작됨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는 멀쩡하랴. 책은 그 사회의 일원이 된 이그네이셔스를 조명한다. 아니, 끝이 보이지 없는 그의 벨탄샤웅(세계관)이 더 이상 빅치프 노트가 아닌 현실에 반영되는 순간부터 그가 만들어 내는 걷잡을 수 없는 사건들을 조명한다고 말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읽는 동안,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리 웃으면서도 마음껏 대놓고 하하하 - 거리며 눈물나게 웃을 수 없고, 그럴 거리도 내게는 없었음을 밝힌다. 또한, 무엇인가가 묵직하게 눌러 앉아있는 느낌 또한 지울 수가 없다. 빅치프 노트에 중세를 흠모하고 타락한 현대문명을 비판하는 장문의 고발장을 기가 막히도록 써내어 내가 알고 있는 그가 맞나? 하다가도, 그의 저속한 행태를 보고 있노라면 역시나, 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만든다. 급기야 도대체 이 인간,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게 만드는데, 이 책을 다 읽은 지금 내 눈에 그는, 그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회부적응자‘와도 다를 것 없다는 것이다. - ‘존 케네디 툴’이 ‘이그네이셔스’를 통해 시대의 자본주의 체제를 통렬하게 풍자하려고 만들어 낸 인물이라면 사실 목적은 제대로 달성한 셈이다. ‘이그네이셔스’라는 인물 자체가 자본주의 체제가 낳은 희생양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자본주의 체제를 따르라는 사회(혹은 라일리 부인)와 그것을 거부하는 이그네이셔스 - 그것의 간극에 우리는 감히 범접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미 자본주의 체제에 따르고 있는 현대인인 까닭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이그네이셔스를 동정할 수는 있어도 이해할 수는 없는 게다. 그런 인간이라면 혼쭐을 내줘야 하는 것이 맞고, 사회에 악영향을 끼친다면 경찰에 신고하고, 정신병원에 처넣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는 우리인 까닭이다.

 

 

 

나아가 이그네이셔스라는 인물은 나를 비롯한 현 시대 젊은이들의 군상을 보여주는 것과도 같다. 대학을 졸업한 동시에 4년을 눌러 앉아 석사 학위까지 땄으며 앞서 말했듯 현대문명을 비판하는 고발장을 쓸 정도로 -내 보기엔 과대망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유능한(?) 인물임을 간간히 일러주고 있다. 하지만 그의 취직 거부 사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다른 이들이 자신의 벨탄샤웅(세계관)을 두려워하고, 증오한다는 까닭이다. 게다가 허세는 어찌나 대단하신지. “실망시켜드려 죄송하지만, 급료가 적정 수준이 아닌 듯한데요. 석유계의 어떤 거물이 현재 저를 개인비서로 쓰겠다고 수천 달러를 흔들어 보이고 있습니다. 현재로선 제가 그 사람의 유물론적 세계관을 받아 들일 수 있을지, 결정을 고민하는 중이죠. 최종적으론 그 사람한테 ‘종습니다’라고 말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바로 이것이다. 대학, 대학원, 학위. 그 모든 것들을 짊어지고는 이 곳은 나와 맞지 않아, 내가 원하는 곳은 이런 곳이 아니야, 라며 소위 말하는 대기업 - 물론, 이그네이셔스의 목적은 대기업이 아니었지만- 에 취직하려고 눈을 밝히는 영락없는 우리네들 모습인 게다. 그것은 위에 발췌해 놓은 ‘리바이 팬츠’에서 월급을 상향조정하는데 있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사실 난 영미 문학을 좋아하지 않는다. 단호하게 딱 잘리는 문장들이 힘은 있을지언정 그 흔한 정이 없어 보인다는 것과, 재미있다는 그 문장들의 행간이 내게는 지루하게만 느껴지고, 답답하게만 느껴지는 것이 그 까닭이다. 그러나 이 책, 영미 문학을 좋아하지 않는 나도 킥킥거리며 읽을 수 있었던 책이었다. 읽으면 읽을 수록 작가가 강한 확신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무리가 아니다,라고 생각된 까닭도 그곳에 있다. 그의 다음 작품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결점이겠지만, 그만큼 라일리 부인의 ‘대관절’ 타령과 클로드의 ‘빨갱이’ 타령과 무엇보다 이그네이셔스의 이미 단물이 쪽쪽 빨려 나를 웃게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짜증을 불러일으킬 만한 ‘유문’ 타령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서문에서 세 번째 읽었을 때가 처음 읽었을 때보다 더 경이로웠다는 워커 퍼시의 말처럼 나도 두번 째 읽을 때가 언젠가는 오길, 기대해본다.

  

 

오탈자 : p20 : 15째줄 : 따옴표 ”

            p258 : 12째줄 : 이그타니우스 → 이그네이셔스

            p464-468 : 따바, 내나, 안대 (라틴 여자의 말이라고 일부러 써놓은 것 같지만, 계속되는 반복에 신경쓰이는 것은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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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의 간주곡>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허기의 간주곡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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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가 진다. 손 끝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깊고 애절한 그리고 집어 삼킬 듯 탐욕스러운 허기가 내 안에 존재하고, 나는 때때로 그것과 마주한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 추악한 그것이 더이상 추악하다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아련하고 슬퍼져서 그만 그것을 어루어 만지게 되는 것이다. 이쯤되면 내가 말하는 허기가 비단 굶주림만이 아니라는 것 만큼은 추측할 수 있을 터. 육체의 구석구석에 고스란히 전달되는 허기의 선연함은 자신 이외에는 감히 아무도 느낄 수 없는 하나의 무언의 대화와도 같아서 그 허기를 채워줄 수 있는 것은 타인이 아닌 오롯한 자신의 몫이다. 헌데, 나는 늘 그것을 나 자신이 아닌 타인에 의해 채우곤 했던 것이다. 허기가 진다는 것 자체는 삶에 대한 깊은 굶주림이고 회한인데, 지금 이 순간, 어쩌면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허기가 지는 때에 그에 걸맞는 제목인 「허기의 간주곡」을 읽게 된 것이.

 

 

 

에텔 - 부르주아 가정의 소녀가 보는 세상, 그리고 그런 그녀의 성장기를 그려낸 한 권의 소설이 여기에 있다. 증조부 솔리망씨가 에텔에게 보여준 연보라색집은 이 책에서 희망이 되는 단 하나의 실체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던 중 혁명으로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을 맞고, 어머니와 언니들과 러시아에서 독일로 도망갔다 마침내 프랑스에 거주하며 연명해나가는 삶이 힘들다는 제니아와 친구가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깊어져 가는 골이, 돈을 둘러싼 다툼들이,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음이 느껴지는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가 에텔 주위를 둘러싸고 있지만,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없는 까닭일까, 친구 제니아의 질척거리는 힘겨운 삶이 에텔에게는 신비로움을 넘어 동경하는 삶으로 싹트는 것이다. 만약 제니아에게, 제니아의 어린 시절에, 그녀가 살아온 삶의 매 순간에 그런 신비로움이 없었더라면 에텔이 그녀를 그처럼 사랑할 수 있었을까? 에텔은 자신의 감정이 순수한 것이 아니라 그런 허접을 안고 있음을 깨닫고 괴로워했다.(p46) 그렇게 에텔에게서 우정과 사랑, 애정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솔리망 씨뿐인 듯했던 그 시절은 지나고, 그것의 화살은 제니아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다른 증조부 솔리망씨가 숨을 거두면서 남긴 유산은 친권자라는 명목 아래 아버지인 알렉상드르에게 넘어가게 되고, 그것은 그녀의 유복할 미래를 몰락으로 몰고가기에 충분한 시나리오를 작성케 한다. 그와 동시에 에텔은 성장하고 있었다. 채 성장이 마치지 못했을 때, ‘전쟁’이라는 소용돌이에 말려든다. 전쟁과 개인이라는 지층은 두텁고도 단단하여 쉬이 깨뜨릴 수 없다. 그렇게 전쟁의 한가운데에 그녀의 몸이, 조금 더 나아가서 한 가정 -브룅 가족-이 던져지며 그렇게 또다른 생이 주어진 것이다. 유년기에서 벗어나 어른이 되어야 했다. 삶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 모든 것에. 그런데 무엇을 위해? 그러니까, 더는 척하지 않기 위해. 삶의 주체가 되기 위해. 중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강해지기 위해, 잊기 위해. 마침내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두 눈의 물기는 말라 있었다. (p159) 그녀는 그렇게 급작스레 어른이 되어버렸다. 더이상 코탕탱 가의 살롱에서 어른들의 대화를 수첩에 받아 적던 어린 소녀가 아니었기에, 공증인 봉디를 만나 자신의 권리를 되찾는 수순을 밟지만….

 

 

 

아르튀르 랭보의 「허기의 축제」를 인용하며 출발하기에, 나는 허기를 잘 알고 있다,라는 문장이 첫 스타트가 되며 육체적인 허기를 이야기하기에 보이는 그대로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허기를 잘 알고 있다는 문장의 끝은 다음에 이어질 이야기는 그것과는 또다른 허기에 관한 것이다. (p14) 이었기에 그와 반대되는 정신적인 허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심지어 책을 다 읽고 난 뒤 서평을 쓰면서조차도 - 허기에 대한 본질적 의미는 그대로 밑바탕에 깔아두고, 현상적 의미를 끌어올리려 애썼다. 가까스로 끌어올렸는데, 나는 나를 의심하고 있었다. 이게 맞는가, 자문하고 있었던 게다. 그러다 문득, 아무렴 개개인의 독자가 받아들이는 것 말고 또 다른 정답이 있을까, 싶었더랬다. 어쨌든, 그것은 에텔의 우정과 사랑, 애정을 받을 수 있는 단연코 한 사람뿐인 솔리망씨의 상실에 대한 허기였다. 좀 더 나아가 에텔의 로망이자 꿈이었던 연보라색집의 상실로 인한 허기였고, 고향에 대한 애수(향수)에 대한 허기였으며, 앞으로 자신의 삶에 대한 허기인 것이다. 그런 허기들이 하나의 음을 되찾고, 결국 그것은 웅장한 교향곡 사이사이에 끼어들어가 간주곡이 된다. 그녀가 울리는 허기의 간주곡을 들어볼 생각이 없는가. 당신이 조금 허기진 상태에서 듣게 된다면 그것을 채워줄지도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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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너머로 여자를 말하다 - 네이버 최고의 아트 블로거 강은진의 그림 에세이
강은진 지음 / 케이펍(KPub)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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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몸서리가 쳐지도록 외로웠던 나날이었다. 제 2의 사춘기가 찾아오는 듯한 그런 상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읽고 있던 소설책을 옆에 가지런히 놓아두고 마음을 평온하게 해줄 그림들을 감상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늘 그래왔었으니까. 그 그림이 이번엔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라는 화가의 그림으로 점철된 마로니에북스 책이 아닌 친애하는 이웃님의 ‘아트 talk talk’ 님의 책, 「그림 너머로 여자를 말하다」라는 것이 조금 다를 테지만. 저자의 블로그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불과 몇 달 전. - 싱숭생숭한 어느 날에 마음을 차분히 해줄 그림을 감상하려고 몇 번의 검색 끝에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공간을 찾아내었다. 그곳이 저자의 블로그였던 것. 내가 늘 위안을 받는 공간을 가꾸던 사람이 쓴 책이라 - 왠지 안면에 옅은 미소가 배어나온다. 책을 집는 순간부터 흐트러졌던 마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모양새를 보이는 것을 느낀다. 그래, 이거지. 이런 정돈되는 느낌을 원했던 거다.

 

 

 

늘 그렇듯, 그림 에세이라는 것은 하루만에 다 볼 분량인 것은 자명한데, 난 늘 쉬이 넘기지 못하고 그림 하나하나와 오래도록 마주하게 된다. 그것이 내게 있어서 그림에 대한 애정이라면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이리라. 한 마리의  고양이가 따사로운 햇빛이 작열하는 곳에 자리를 잡고 낮잠을 청하고 있는 모양새를 바라보듯, 그렇게 모든 것을 감싸 안아줄 양 포근함이 가득 담긴 아늑한 눈길로 바라보는 것. 그 눈길엔 고아한 척, 고매한 척 하는 그 어떤 인위적인 것도 들어차 있어선 안되는 것. 난 분명 이 책을 그림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얻으려고 펼쳐 든 것이 아닌,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줄 것을 헤매다 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 까닭이 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모든 그림이 나를 만족케 시켜줄 그러한 그림들은 아니었다. 개중엔 나를 지레 겁을 먹게 만드는 것도 있게 마련이었다.

 

 

 

 





구스타브 카유보트 - 「비오는 파리 거리」

 

 

책에 있는 다른 그림들을 보고 이 그림을 본다면, 아 - 무척 사실적이구나, 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그림에 대해 아는 것 전혀 없는 바인 나조차도 느낄 수 있음에 괜스레 기뻐진다. 실은 나, 이런 그림을 좋아한다. 하지만 요즘은 그냥 따뜻한 그림을 더 많이 찾게 됨에 무뚝뚝하게만 보이는 이 그림이 달가울리 없다. 마음에 조금 더 여유로움이라는 햇빛이 찾아들었다면, 나 역시 이 그림을 보고 청량한 블루 레인! 이라고 칭한 저자의 글을 보며 고개를 주억거리며 저자와 함께 했을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각기 다른 빨간 우산, 파란 우산, 찢어진 우산 -은 아니고- 이 아닌 똑같이 생긴 우산들을 보며 생각이 가지를 쳐서 급기야 산업화라는 것을 떠올리게 하고, 대량생산되어 누구나 다 똑같은 물건을 쓰고 있는 사진 아니, 그림 속의 인물들은 모두 쌀쌀맞고 퉁명스럽게만 보인다.

 

 

 

 

 

 

 

 

  

구스타프 클림트 - 「사포」



앙투안 장 그로 - 「류카테 절벽의 사포」


 
 


 

그리스 여류 시인 ‘사포’ - 당대 남성 우위의 위계질서에서 군계일학으로 자리메김하여 여성들과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쳤다던 그녀. 만일 내가 찾아낸 구스타프 클림트의 「사포」가 위와 같이 붉은 빛을 띄었다면야, 나에게도 혼동은 오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흑백으로 이루어진 그림은 뜨악함을 안겨주었다. 옆에 서있는 소녀(?)는 마치 혼령이야? 도대체 뭐야? 라는 식의 의문을 자아내고 이 화가는 이 분위기를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라는 생각마저 들었으니…. -흑백인지 혹은 붉은 빛인지 무엇이 진정한 그의 그림인지는 모르지만.- 계속해서 그림에 대해 풀어놓은 책에서도 이 그림에게 만큼은 자애롭지 못했던 듯 하다. 이 그림의 옆 페이지엔 사포라는 여인을 설명하기에만 급급했던 듯 하다. 옆의 그림은 뱃사공 ‘파온’이라는 남성을 열렬히 사랑했으나, 사랑의 고통으로 이내 바다에 목숨을 던졌다는 그 가슴 아픈 이야기. 오롯하게 ‘앙투안 장 그로’라는 화가의 무한 상상에서 나온 이 그림은 가슴을 저릿하게 만든다. 우리가 살아가다보면 사랑의 고통뿐 아니라, 거친 파도에 노출된 배처럼 자의적이 아닌 타의적으로 움직일 때가 있을 터다. 인생이라는 것이 그런거지, 라고 치부해 버리기엔 조금 무리가 있는데,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제 2의 사춘기가 찾아온 것만 같은 지금의 내 상태로 이 그림을 마주하기에 울컥하는 마음이 금세 다른 그림으로 옮겨가게 한다. 조금 더 오랫동안 바라보았더라면 나도 모를 눈물이 흘렀을지도 모르겠다. 무엇때문인지도 모르면서.

 

 

 

「실내」
 



「실내」



「실내」



「등을 돌린 젊은 여인」



모두 ‘빌헬름 함메르쇼이’의 작품이다. 왜 그는 무슨 연유로 이렇게 등을 돌아 있는 여인들만을 그려냈을까. 분명 여인이 서있는 자리를 그린 것이 분명할진대, 쓸쓸하고, 적막하기까지 하다. 이 그림을 보고 있자면 꼭, 외면받는 듯한 그런 기분이다. 그냥, 그런거, 나는 바라보고 얘기를 좀 하고 싶은데, 저 사람은 등을 돌리고 나를 바라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 그래서 풀 죽어 있는 것 같은. 이 그림은 자꾸 그런 느낌을 받게 만든다. 한도 끝도 없이 쓸쓸해지게.


 

 

 

자콥 타만 - 「선생님이 돌아서 있을 때」



「큰 모자를 쓴 잔느」

 

「노란 스웨터를 입은 잔느」 

 

하지만 쓸쓸하게 만드는 그림보다는 돌처럼 단단하게 굳은 마음을 몰랑몰랑하게 만들어주는 그림이 더 많았다는 것.  ‘자콥 타만’ - 「선생님이 돌아서 있을 때」라는 그림을 보며 입술 언저리를 실룩실룩거리며 웃기도 했고, ‘모딜리아니’의 시선이 닿는 곳엔 연인 ‘잔느’가 있었다. 「큰 모자를 쓴 잔느」, 「노란 스웨터의 잔느」를 보면서 그녀에 대한 ‘모딜리아니’의 사랑에 오히려 내가 더 두근댐을 느끼게 되면서, 분명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보았을 거야, 라고 호언장담하게 된다. 비록 가슴 아픈 결말이지만, 그들은 아마 지금 누구보다 더 행복한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혹, 그와 그녀의 아이까지 - 세 가족이 그곳에 있을지도 모르지.

 
 

 


   

 

칼 빌헬름 홀소에 - 「창가의 기다림」

 

 

눈을 뗄 수 없어 계속 멍한 상태로 내내 바라보았던 ‘칼 빌헬름 홀소에’ - 「창가의 기다림」과 ‘루이 마리 드 쉬리베르’ -「과일과 꽃을 파는 가게」가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루이 마리드 쉬리베르’의 작품은 나와있지 않은 것 같다. -아니, 내가 찾지 못하는 것이겠지.- 어쨌든 「창가의 기다림」에서 여인은 빌헬름 함메르쇼이’의 작품과 똑같이 뒤돌아 있다. 그럼에도 이 그림은 색감에서 따스함이 감돌고, 커튼 사이로 내미는 햇빛이 외면받는다는 느낌보다는 조금 더 희망적임을 느끼게 된다.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으로- 옆이라도 훔쳐보고 싶은데, 감히 부를 용기가 안난다. 눈물이 송글송글 맺혀있기라도 하면 부른 나도 그녀도 얼마나 민망하겠는가, 모르는 바 아니기 때문. 그녀의 기다림이 애틋하기만 하다. 저자의 아, 내게도 그런 기다림이 있었지. 라고 쓴 한 줄에 나의 기다림도 함께 포개어진다. 그렇게 그림 속의 이름 모를 그녀와 저자와 내가 교감을 느낀다. 그녀의 기다림은 지금쯤은 끝이 났을까 - 혹시 아직도 내내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쉬이 다음 페이지로 넘길 수가 없다. 그러다가 또 한번, ‘루이 마리 드 쉬리베르’의 그림에서 철푸덕 넘어지고 만다. 마치 「과일과 꽃을 파는 가게」에 서있는 여인의 등 뒤에서 몰래 훔쳐보다 넘어진 남자 곁에 나란히. 아이쿠. 부끄러워라. 그런데 여인에게서 눈을 뗄 수 없다. 여인의  핑크빛 드레스가, 여인의 아름다운 손짓·몸짓이, 여인의 사랑스러운 표정이 가던 길을 멈추고 여인을 바라보게 한다. 아, 예쁘다 -

 

 

 

 

 

이 말고도 이 책엔 수십 장의 아름다운 명화들이 있는데, 개중 어떤 것이 더 아름다운가를 판가름할 수도 없는 명화들이 가득하다. 자신의 마음가짐에 따라 조금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고, 혹은 조금 더 애정 듬뿍 바라볼 수도 있는 게다. 이 책의 1부에서는 각 19개의 주제를 제시하고 그에 맞는 명화들을 일러주고 있는 형식이라면, 2부에서는 화가의 생에 대해 일러주며, 화가의 특색을 잘 일러준다. 또한, ‘그림에 재미를 느끼는 여덞 가지 통로’를 제시하고 있어 여러 시각에서 좀 더 폭 넓게 그림을 바라볼 수 있게 도와준다. 올해(2011)에 첫 번째 그림 에세이를 읽으며 괜찮은 화가들을 여럿 만났고, 난 여전히 ‘그림’의 ‘그’자도 모르지만, 이번에도 즐거운 나들이를 감행했다. 그림 에세이는 늘, 눈과 마음이 즐겁다. 무한 상상에 도전해 보는 것도 그림을 보는 즐거움이 아니던가 - 당신의 상상을 저자의 상상에 포개어 둘만의 교향곡을 들어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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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관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1 케이 스카페타 시리즈 1
퍼트리샤 콘웰 지음, 유소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수많은 매니아층을 거느리고 있는 퍼트리샤 콘웰이라는 작가는 나에게 범접하기 힘든, 예를 들면 마이클 코넬리, 로버트 해리스, 제프리 디버, 버나드 콘웰과 같은 작가라 할 수 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어려워 보여서’라고 말하면 타인의 비웃음을 살런가. 나는 책을 읽으며 어려워보이는 책은 읽기가 싫다. 취미로 읽는 책을 구태여 과제처럼 생각하고 그 책들을 읽어야 하는지 모르는 까닭이다. 그렇기에 난 이들 작가의 책엔 감히 손도 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작년 즈음 로버트 해리스의 「고스트 라이터」와 마주 앉아 몇 일을 함께 했다. 쉬이 읽혀지는 책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뇌리에는 괜찮았던 책,이라고 박혀있는 까닭이다. 그런데 어렵게 느끼는 또 다른 작가의 책에 또 다시 슬쩍 손을 내밀 수 있었던 것은 「법의관」이라는 제목을 가진 까닭이었다.

 

 

 

책의 원제는 부검, 검시의 뜻을 지닌 《postmortem》 - 그것은 법의관이라는 직업을 설명하는 가장 최적의 단어가 아니던가. 하지만 나에게 법의관이라는 특정한 직업이라는 것이 생소하게만 느껴졌다. 물론 지금이야, 책을 읽었으니 그나마 조금 아는 척을 해보이는 것 뿐일 테지만, 실은 나, 법의관이라는 정확한 뜻을 몰라 법과 의학을 종횡무진하는 -의학이 소송까지 치닫게 되는(혹은 메디컬 드라마의)- 그런 직업으로만 생각했더랬다. 이 얼마나 무지몽매한 두뇌를 가지고 있는가 말이다. 요즘 박신양, 김아중 주연의 〈싸인〉이라는 드라마를 시청 중이라면 법의관이라는 직업이 낯설지 않게 다가왔을까. 이러쿵 저러쿵 할 것 없이, 사전을 뒤적여보는 수밖에. 사전에서 법의관은 ‘경찰의 범죄수사에 도움을 주거나 사인과 사망경위를 밝혀 인권을 도모하는 일을 주업무로 하는 학자’라고 명명하고 있다. 이런 매력적이고 매혹적인 직업을 가진 이가 이 책에 나온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피해자의 인간적인 존엄성을 지켜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일단 피해자가 사건 번호로 불리기 시작하고, 증거물이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면 나도 어쩔 도리가 없다. 꺼져버린 생명처럼, 개인의 프라이버시 역시 무참하게 짓밟히는 것이다. p17

 

 

 

이 책을 읽기 바로 전에 스티그 라르손의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1」을 읽었고, 채 읽지 못한 2권의 씁쓸함이 입 안으로 닥쳐와 쩝쩝 거리며 입맛을 다시고 있던 중이었다. 그 불충분한 것을 잠시 잊게 해줄 간식거리가 필요했고, 그것으로 나는 「법의관」을 손에 집었다. 집었을 때 두툼한 두께에 나도 모를 안도감을 느꼈는데, 요즘은 추리 소설을 대할 때 만큼은 두께가 이정도는 되니 결코 시시껄렁하지만는 않을거야, 라는 식의 두께로 책의 질을 가늠하는 괴상한 습관이 생겨버렸다. 어쨌든, 이 책은 「법의관」이라는 낯설지만 흥미로운 제목부터, 시작 하기도 전에 기대치는 넘칠 듯 끓어오르는 상태였다. 그 기대를 충족시켜줄 수 있을 것인가.


 

 

 

토요일로 넘어가는 깊은 새벽에 울린 전화에서 살인 사건을 전해 듣는다. 이미 전에 몇 차례의 살인이 있었고, 살인 사건의 정황을 살펴보았을 때, 이는 분명 연쇄 살인 사건,이다. 살인 사건을 전해 듣고 자다 깨서 곧장 현장으로 간다. 스카페타 박사가. 바로 그녀의 직업이 앞서 말한 매력적인 법의관이다. 사건은 그녀의 눈을 통해 전달되고 독자는 그것을 읽는다. 범인은 여성들을 강간하고, 전화선으로 결박하고 손가락, 갈비뼈 등을 부러뜨리며 끝내는 교살한다. 그런 그가 남긴 흔적이라고는 그의 손을 스친 시체의 몸에는 반짝이는 물질과 다리에 흘려놓은 비분비형의 정액뿐이다. 두가지 단서로 범인을 잡기에는 무리수가 뒤따른다. 게다가 범인을 잡기도 전에 스카페타는 함정에 빠진다. 컴퓨터 해킹으로 인한 정보 유출과 실험실에 있어야 할 -그러나 박사의 서명조차 없는- PERK의 라벨이 붙어 있는 것(샘플)이 냉장고 안에 있었던 것. 누군가 그녀를 함정에 빠뜨리려 하는 것인가?

 

 

 

여느 추리 소설이 그렇듯 이 책도 추리 소설이라는 정해진 프레임에서 벗어나진 못했음이 실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대부분의 추리 소설의 1인칭은 대부분 남성이다. 그들은 힘이 있다. 남성적인 힘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이끌어갈 힘이 있다는 것이다. 와카타케 나나미 「의뢰인은 죽었다」의 여탐정 하무라 아키라도, 기시 유스케 「도깨비 불의 집」의 변호사 아오토 준코도 곁에는 도와주는 남성이 있었다. 그들 또한 힘이 없었고, 또 연약했다. 그런 내 생각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 스카페타 박사도 역시나,다. 게다가 소극적이기까지 하다. 옆에 형사 마리노가 있지만, (후..) 뭐라고 해야하나. 마리노 형사는 입방정 좀 떨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이는 스카페타에게 말하지 않아야 했다는 것이 아니다. 형사라면 증거 불충분이란 명목 아래 그 누구도 쉽게 용의자로 몰아가선 안되고, 단정 지을 수 없는데, 그는 너무 쉽게 단정지어버리는 것에 있다는 점이다.- 그의 입은 너무 쉽다. 또한 앞서 스카페타는 소극적이라고 말했다. 그 소극적은 우유부단함과도 결부되는데, 범인이라고 생각하는 노선이 시도때도 없이 바뀌어버리고, 그러면서 독자의 노선도 함께 바꾸려 시도한다. 그러니까 범인의 포위망을 점점 좁혀가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 저 사람 꾹꾹 찔러본다고 말해야할까. 그와 함께 동참하는 독자가 있는가 하면, 아닌 독자도 있는 게지. 처음엔 나도 스카페타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이러다간 죽도 밥도 안되겠다는 생각에 내 입지를 점점 좁혀나갔다. 책 속에서 범인을 찾을 사람이 백이면 백, 1인칭일진대 그 사람을 믿지 않고 내 위주로 범인을 찾아 내겠다니, 그런 나도 어처구니가 없지, 생각한다.

 

 

 

범인의 정체는 놀라웠다. 잘 짜여맞춘 트릭이 아닌 예상 외의 인물이었기 때문일까. 왜 이 사람이 범인인가 싶을 정도로 얼토당토하기까지 했으니 말 다했지,싶다. 사건은 벌려놨지, 주위에 끌어들일 사람은 다 끌어들였지, 결국 그자를 프레임 밖에서 데리고 왔다. 이미 스포일러가 된 것도 같지만, 더 이상은 말하지 않겠다. 어쨌든 400페이지 모두 범인을 잡는데 할당되고 있다. 하지만 정말로 범인을 위해 쓴 페이지는 얼마나 되는가,라는 말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내 생각으로는 전체 페이지 중 11분의 1, 딱 그 정도. 그것으로 범인을 찾았으니 그대로 고개를 돌려 책을 덮기엔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이 너무 달짝지근하지 않은가. 라섹을 하고 난 뒤,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아가며, 시려서 잘 떠지지도 않는 눈에 강약으로 힘을 주어가며, 10페이지를 읽을 때마다 세개의 안약을 번갈아 넣어가며, 그렇게 읽었는데,... 그래도 그렇게 해서 읽은 연유는 책의 재미 때문이었겠지. 하지만, 퍼트리샤 콘웰이라는 이름으로 이제껏 읽지 않았다,고 이야기 하기엔 그녀의 첫 작품은 내게 너무 실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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