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알레르기
고은규 지음 / 작가정신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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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일곱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 『오빠 알레르기』는 『트렁커』 이후에 오랜만에 만나게 된 고은규 작가의 작품이었다. 여기서 잠깐, 나는 단편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었음을 밝혀야겠다. 장편보다 끝이 애매모호하기 때문이었다. 장편은 개연성에 의해 예측해야하는 상황을 맞닥뜨리지 않아도 되는데, 단편은 좀 읽을 만하다 싶으면 툭 끊겨버리는 아쉬움 때문에라도 부러 찾아서 읽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책을 읽는 습관을 약간 바꾸어보니, 생각을 해야 하는 시점에서 나는 생각을 하지 않고 그대로 다른 단편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당연히 작가가 숨겨놓은 지뢰를 터트릴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지뢰들을 하나둘씩 터트리며 이야기를 읽어보니, 단편은 생각 외로 다채로운 매력을 지닌 것이었다. 물론, 작품 해설을 읽으며, 내가 든 아이스크림 막대는 ‘하나 더’가 아니라 ‘다음 기회에’ 혹은 ‘꽝’ 일 때가 더 많지만. 따라서 나는 요즘 단편을 좀 더 찾아 읽는 중이다. 그래서 이전보다 좀 더 넓은(?) 마음으로 작품을 읽을 준비가 되어있었다는 사실을 서론에 굳이 밝히는 것이다.

 

 

 

 

이야기는 전반적으로 ‘죽음’을 밑바탕에 둔다. 내가 죽거나 (「차고 어두운 상자」), 가족이 죽거나 (「엔진룸」,「명화」,「딸기」, 「급류타기」), 아는 사람이 죽거나 (「오빠 알레르기」, 「급류타기」), 전혀 다른 생물이 죽기도 (「엔진룸」) 한다. 아니, 죽었는지 살았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딸기」)이 있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야기는 죽음과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죽음들을 통해, 작가는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일까. 결국은 ‘관계’가 아니었을까.

 

 

 

 

나, 「오빠 알레르기」를 읽으며 피식 웃었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이 다르지만, 정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구나. 싶어서. 남이야 오빠라고 부르던, 언니라고 부르던, 삼촌이라고 부르던 무슨 상관일까. 하지만 과거의 일은 그녀를 자칭/타칭 ‘꼰대’로 불리게 할 만큼 오빠-에 대한 알레르기가 생기게 했었음을 알고, 역시 사람의 행동거지, 생각의 하나하나에는 이유가 있음을 다시 한 번 인지했다. 공대를 나온 나는 이 사람도 오빠, 저 사람도 오빠였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선배라고 지칭해야함을 고등학교 동아리활동을 하며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대학 사람들은 선배 같지 않아 오빠라고 부른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 소영언니에게 몇 번의 뺨을 맞았을까- 생각하니 아찔하다. 그리고 나는 그이에게 직접적으로 오빠라고 부르지 않는데, 그것은 대학 사람들이 개나 소나 오빠라면, 본인은 그 개나 소가 되기 싫다는 매우 정직한 의견이었다. 그런 나는 적어도 남편에게 오빠라고 하지 않으니 꼰대인 ‘나’의 힐난을 면피할 수도 있었겠네. 라고 생각하며 웃기도 했고.

 

 

 

 

스토커 여자의 오지랖의 결과를 내비친 「맥스웰의 은빛 망치」와 죽겠다고 농약을 마시고 해독제를 찾는 「급류타기」도 인상 깊었지만,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것은, 「차고 어두운 상자」, 「엔진룸」, 「딸기」, 「명화」였다. 그 중 「엔진룸」이 더욱 그러했는데, 이 셋을 묶어놓은 까닭은, 절연하고 싶어도 절연할 수 없는 끈덕진 관계, 그러니까 숨이 막혀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버릴 수 없는 사람 =‘가족’으로 묶여져있어 ‘나’를 괴롭힌다는 데에 있었다. 어쩌면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차고 어두운 상자」가 왜 그곳에 끼느냐고. 그렇다면 나는 답변하겠다. 이지숙의 빚을 고스란히 떠안는 것은 오롯이 이지숙의 엄마인 까닭,이라고.

 

 

 

 

누군가 주검을 대하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고 했다. 그동안 얼마나 잘못 살아오고 있었던가, 살아온 날들을 뉘우치게 된다고 했다. 영훈의 생각은 달랐다.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도처에 깔려 있는 위험들이 그의 눈앞을 어지럽혔다. 마치 세상살이가 위험과 장애가 널려 있는 급류타기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p.144)

 

 

나는 이야기를 다 읽을 때마다 야트막한 한숨을 내쉬는 것을 반복했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급류를 타는 것과도 같아서, 너무나도 힘든 것이라고. 나는 그러한 까닭에, 이지숙이 살아서 그 빚을 다 갚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캥거루가 집에 있는 짐들을 싹 버리고 정신 좀 차리고 새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며, 대성약국 골목 오른편으로 꺾어지는 대흥연립주택 203호에 24개의 이빨이 돌아와서 120개의 튼튼한 이빨들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희망했고, 구덩이에 묻음으로서 모든 상황이 종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향후의 그들의 희망적인 삶을 염원했다. 하지만 삶은 그렇지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그들이 모인 자리에 가서 슬며시 끼고 싶었다. 그리고 함께 이야기하며 실은 나도 그러하다고, 결핍된 삶을 사는 이들이 당신들뿐만이 아니라고, 위로하고 위로받으며 그로인해 안도하고 싶었다. 급류를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평온할 일 없는 사람마저도- 내가 책을 읽는 그날만큼은 평온하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그것을 바라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의 일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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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에 관하여 - 나를 살아가게 하는 가치들
임경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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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님과 썸머님, 람이님 블로그에서 보았던 임경선 작가의 태도에 관하여가 도서관에서 나를 대출해주세요. 라고 나를 향해 손짓했다. 그렇잖아도 요즘, 소설에 물리고 있는 참이어서 그랬는지, 그도 아니면 이야기들을 읽어 내려가기에 머릿속이 엉켜 갈피를 못 잡는다던지 하는 까닭으로 오랜만에 만난 에세이에 지루함보다는 반가움이 먼저였다.

 

 

 

 

 

 

 

 

사실 나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감명 깊게 읽은 편이다. 평택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플랫폼에서도, 기차 안에서도, 기차에서 내리는 그 순간까지도 나는 그 책에 흠뻑 빠졌었다. 이후 저자 자신은 금수저이기 때문에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일 텐데 남에게 충고나 조언으로 불편하게 한다는 혹자의 말도 있었지만,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 하는 뼈마디 하나하나가 아픈 자아성찰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기에 더욱 열광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지금은 쳐다보지 않는 책이 되었을지언정.> 그리고 임경선 작가의 태도에 관하여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첫 문장부터 빠져들어 읽기 시작했다. 사실 별 거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내가 근래에 힘들어하는 부분을 어루만져 준 까닭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어린 시절 부모와 어떤 관계를 맺었냐가 성격과 삶의 태도에 영향을 준다는 이야기는 직접 아이를 키우면서도 통감하는 부분이긴 하다. 그래서 그들이 충족되지 못했던 부모와의 관계를 개서내보고자 소통을 시도해보고 부모를 변화시키려 노력하는 점도 십분 이해는 갔다. 불행히도 그것들은 대개 성공하지 못한다. 모든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지혜롭고 관용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나이 들수록 점점 고집스러워지고 어린아이처럼 이기적이 된다.

부모님이 나이가 더 드셨다고 자식이 바라는 대로 변해줄 리 만무하니 그런 모습을 보노라면 더욱 부모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치솟아 오른다. 그런 좌절된 마음은 더더욱 부모로부터 심리적으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버린 부모가 꿈쩍하지 않으면 나도 더 이상 여기서 한 발자국도 꿈쩍하지 못할 것처럼 엄포를 놓는다. 말로는 저항이지만 여전히 부모 앞에서는 불안한 눈빛으로 눈치 보며 인정과 사랑을 갈구하는 움츠린 어린아이다. p63-64

 

 

 

 

 

 

 

항변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나이 서른 넘어서까지 그럴 수는 없다. 어느 시점이 되면 어떻게든 꾹 삼키고 알아서 처리해버려야 한다. 애초의 원인 제공자가 누구든, 누구나가 인생의 한 시기에는 저마다의 지옥을 품고 가는 것이고, 훌쩍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라는 과거에 휘둘리면서 고여 있기를 자처하면 슬슬 그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기량이나 자립도를 묻게 된다. p65

 

 

 

 

 

 

 

 

 

 

알고 있다.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고로, 나는 이 에세이를 읽어도 내가 경험하지 않는 한 어떤 것도 변하지 않을 인간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그저 이렇게 글로 한 번 보고, 보고, 또 보아도 실천이 되지 않을 것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물론 저자도 이 글이 자신의 태도에 쓰고 싶었던 것이지, 누군가를 훈계하거나 조언을 하려고 쓴 글이 아닐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혹여나 그렇다면, 아주 많이 싫을 것 같다. 저자도 말하지 않았는가. 변화는 변하지 않는 것에서 오며, 모든 것은 경험한 것들을 통해 체득된다,.

 

 

 

 

 

 

나는 가치관이 바르지 않아도, 가치관이 직립된 사람을 좋아했었다. 그것이 간혹 오만하고 방자하며 거만해보이기까지 할 때도 있지만, 그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이 들었던 까닭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다. 그런데, 나는 저자가 부럽기까지 했다. 한 가지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방면인 것이 아닌 그것에 대한 확실한 정의가 내려져있다는 단편적인 사실이 아니라, 그 나이 대에도 (찾아보니 불혹의 중반을 지내고 있었다.) 그것들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이. 적은 나이지만 나의 경험만으로 내린 기준을 정의로 삼고 살아가던 나는 그 누구도 감히 유추할 수 없는 하나의 큰 사건과 그 외 자질구레한 사건들을 겪고 나니, 그런 가치관도 바뀔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겸손하고 겸허하게 살아가야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더란 것이다. 따라서 읽을 때는 공감하며 읽던 것들도 책을 덮고 나니 괜한 후회가 밀려온다. 어쩌면 요즘 나에게 필요한 것은 말뿐인 위로가 아니라, 해결방안인가 보다. 물론, 작가의 탓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꼭 이야기를 해야겠다. 마지막에 쓰여진 담화는 많이 지루했다. 책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그런 이야기들까지 책에 실을 필요가 있었을까. 생각해보는 부분이었다.> 나에게는 저자의 에세이는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고, 그 언젠가는 소설을 읽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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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을 나온 암탉 (반양장) - 아동용 사계절 아동문고 40
황선미 지음, 김환영 그림 / 사계절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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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아까워해서는 안 되는 계절, 바야흐로 봄이다. 지난주부터 강의를 차근차근 듣고 있는데, 그 중 내 마음을 사로잡는 과목은 여섯 개 중 겨우 두 개뿐인데, 그 중 하나는 역시나 독서와 논술의 이해. 나는 내가 지닌 있는 지식을 타인에게 전달하거나 교육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지만, 어쩐지 독서지도사라는 직업은 참 매력적이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이 동한다. 모르는 아이가 아니라 언젠가 나에게도 자식이 생긴다면, 조카가 생긴다면, 하는 미래를 바탕으로 꽤 재미있게 듣고 있는 과목. 그 과목에서 추천 동화가 여럿 나왔고 주말이 지나고 도서관을 찾아 그 동화책들을 검색하였으나 나오지 않는 게 더 많았다. 그 중 발견한 것은, 마당을 나온 암탉이었다. 이 제목으로 불과 며칠 전 영화가 상영되었던 것을 텔레비전에서 접했는데, 더빙이라는 점이 무척이나 불편해서 채널을 돌렸던 기억이 난다.

 

 

 

 결론적으로, 이 책이 추천동화책에 당당하게 올라와 있지만난 이 책이 무척 불편하다.

 ​물론, 잎싹()이 양계장에서 탈출하여 마당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구체적인 소망을 품는 부분, 그리고 그것이 실현되는 부분, 나그네(청둥오리)와 잎싹이 사냥꾼(족제비)에게서 초록머리(오리)를 지켜내려는 부성애와 모성애. 잎싹과 사냥꾼이 새끼들의 어미로서 지닌 공통적인 마음, 그리고 더 나아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하는 질문과 더불어 자기 성찰을 할 수 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배울만한 가치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내 시선은 엉뚱하게 다른 곳을 향해 있다. 초록머리는 종내 청둥오리 중에서도 어엿한 파수꾼이 되어 살아가지만,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그 과정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

 

 

1.

암탉이 깠어도 오리는 오리야! 우리 족속은 헤엄치고 자맥질하는 습성을 결코 잊지 않아. 특별히 배우지 않아도 당연히 안단 말씀이야. (중략)” 마당에서 도망쳐 나와 족제비에게 노출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키울 수밖에 없는 잎싹에게 마당에 사는 우두머리인 집오리가 "아기 오리를 데려 가겠다."하니 본인이 키우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점.

2.

엄마, , 오랫동안 생각해 봤어요.”

우리, 마당으로 가는 게 어때요? 외톨이로 사는 게 싫어.”

마당으로 가자고?”

어차피 나는 오리인걸. 괙괙거릴 수밖에 없어.”

그게 뭐 어떠니. 서로 다르게 생겼어도 사랑할 수 있어.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아니. 엄마, 나는 모르겠어. 이러다가 집오리들이 끝내 받아주지 않을까 봐 겁나. 나도 무리에 끼고 싶어.”

아가, 우리는 여태 잘 지냈잖아. 너는 영특해서 헤엄치고 나는 것도 혼자 터득했는데…….”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건 알아. 그래도 우리는 서로 다르잖아.”

다르게 생겼지. 그래도 나는 네가 있어서 기뻐. 누가 뭐라고 해도 너는 내 아기니까.”

엄마는 마당으로 가요. 나는 무리에 낄 테야!”

초록머리가 '나는 야생오리도 아니고 집오리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야. 외톨이로 사는 게 싫어. 마당으로 가서 집오리들과 어울리고 싶어.'라고 말한다. 하지만 잎싹은 본인이 마당에서 초록머리를 데리고 나왔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았다는 점.

 

 

 

 내가 불편해하는 점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초록머리도 본인이 집오리로 살 것인지 혹은 청둥오리로 살 것인지에 대한 선택권이 있기 때문에 여러 선택권이 있음을 오리에게 인지를 시켜주고 그 선택은 오리의 몫이라고 생각하는데 반해, 잎싹은 내가 품어 부화한 내 아이-로 오리의 삶을 본인의 삶과 동일시하려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모습은 꼭 오늘날의 어머니들이 아이들의 삶을 움켜쥐고 '넌 이렇게 해야만 해. 엄마가 시키는 거니까 무조건 이렇게 해.'라고 말하는 것 같은 착각에서 나오는 불편함이었다.

 

 

 이런 부분에 대해 이 책을 읽은 초등생의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됐을지 궁금했다. 교수님과도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순수하게 동화를 읽으라고 했더니 트집을 잡고 있네.’라고 생각하신 건 아닐까? 그래도 교수님께서는 감사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독서논술수업은 동화에 대한 감상만이 아닌 비판과 다른 의견 제시까지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다. 생각해보니 일전에 구이도 콘티의 닐로의 행복한 비행을 읽고도 혼자 열렬히 비판을 했던 기억이 나는데, 내가 너무 세상을 비뚤게 틀어놓고 사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된다. 어쩌면 동화를 읽는 내 시선이 너무나도 협소하고 단편적인 것도 문제라면 문제인데, 그것을 내 자신에게 당해낼 재간이 없으니 어쩌랴. 보다 더 열린 사고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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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주는 레시피
공지영 지음, 이장미 그림 / 한겨레출판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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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에 밑줄 쫙 그었던 그때로부터 (몸은 컸지만, 마음은 그대로라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회사일이 힘들다고 꼬질꼬질하게 울지 않는 그런 다섯 살이나 더 먹은 내가 되었다. 작가는 아니 엄마는, 다시 딸 위녕에게, 말을 건넨다. 그러면서 딸에게 주는 레시피라니. 음식말이야? 웃기지만, 난 정말 레시피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책 속에 있는 무언가를 해먹어 보기에는 까슬한 모래알들이 입안을 맴돌아 좀처럼 삼켜지질 않았던 날들이 이어졌다. 더디지만 분명 조금씩 마음이 진정되다가 어느 순간 다시 쿵,하고 내려앉는 날들이 계속되고 있기에 조금 아껴둬야지 생각도 했(었)다.

 

 

가벼이 써나가는 글 속에서 어쩌면 너를 괴롭히고 우울하게 만들었던 그 일들, 그 단어, 그 눈빛이 떠오를지도 몰라. 아프겠지만 그것을 잡아라. 오늘이 아니어도 좋아. 너무 아프거든 하지 않아도 괜찮아. 하지만 명심해라. 우리가 회피하고, 무시하고, 도망치고 싶어 하는 바로 그것이 실은 우리가 진정 풀어야 할 숙제이고 넘어야 할 언덕이며, 결국은 우리를 진정으로 성장시켜주는 열쇠임을 말이야. 얼핏 가시투성이로 보이는 그 껍질 속에 실은 성장의 열매가 있다는 것을 말이야. p18-19

 

 

산다는 것도 그래. 걷는 것과 같아. 그냥 걸으면 돼. 그냥 지금 이 순간을 살면 돼. 그 순간을 가장 충실하게, 그 순간을 가장 의미 있게, 그 순간을 가장 어여쁘고 가장 선하고 재미있고 보람되게 만들면 돼. p27

 

 

아침에 일어나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아무도 없는 휴일에도, 너 자신에게 가장 아름답고 좋은 옷을 입혀주거라. () 무릎이 나오고 고무줄이 하염없이 늘어나는 낡은 트레이닝복은 이제 쓰레기통으로 보내거라. 그날의 네 일상에 알맞은 복장을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고르고 양말까지 색깔 맞춰 신고 청결하게 하고 머리를 드라이어로 잘 다듬어라. 언제 어디서든 사람은 자기 자신의 몸을 돌보아야 해. 이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또 하나의 시작이다. p35

 

 

모든 것이 처음부터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쳐져 있는 것만 같이 느껴져서, 다시 태어나기 전에는 이 모든 일이 하나도 수습되지 않을 듯한 날이 있다는 걸. p66

 

 

 

나는 분명, 작가의 글 속에서 위로를 받았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뜻한 음식과 와인 혹은 맥주 혹은 소주를 생각하며 나도 치어스-를 했다는 것 또한.

 

 

하지만, 하지만 말이지.

 

 

 

아니야, 엄마. 내가 아는 오빠는 그 언니 만나서 갑자기 마음 잡고 술과 담배도 끊고 새사람이 되었어뭐 이런 말은 하지 마라. 그건 악마가 여자들을 유혹하기 위해 부린 술수가 틀림없어. 여자들은 수만 년 동안 남자들을 길들이려고 했지만 언제나 헛되었어. 자신이 낳아 기른 아들도 호르몬이 변하는 사춘기가 되면 엄마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데 무슨 수로 여자가 남자를 변하게 한단 말이니? 만일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를 만나 변했다면 그건 그 남자가 변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란다. 그녀를 만나지 않았어도, 다른 여자를 만났어도, 강아지를 새로 키우거나 닭이나 고슴도치를 키웠어도 그가 그렇게 변했을 거라는 데 500원을 걸 수 있지.

 

 

생각해봤는데 나는 결혼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까 아내와 엄마가 의미하는 그것들에 적합하게 태어난 사람이 아니야. 나는 내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오로지 (존경할 수 없는) 남자의 말을 다 존중하고 순종하(는 척이라도 하)며 나를 뒷전에 둔 채로 (더구나 젊은 그날에) 아이들을 위해 집 안에 머무르는 것을 좋아하는, 날마다 같은 그릇에 반찬을 차리고 닦고 그릇장에 넣고, 다음 날 같은 그릇을 또 꺼내 반찬을 담고 또 닦고 그릇장에 넣고, 이런 무한 반복에서 생의 의미를 찾는 종류의 여자가 아니었단 말이지. 나는 이런 것들을 잘 해내지 못했을 때 내게서 일어나는 죄책감도 너무 싫었어. () 네가 만일 누군가에게 반찬을 해주고 옷을 다려주고, 말하자면 엄마 놀이를 좋아해서 결혼하고 싶어 하고 말한다 해도, 나는 그것 때문이라면 결혼을 말리고 싶다. 여자에게 결혼이란, 이 모든 것을 날마다 몸이 아프거나 병들었거나 슬프거나 노엽거나 죽을 것 같아도 해야 하며 그렇게 해주어도 칭찬이나 대가를 받기가 힘든 노동이란다. 아니 험담이나 듣지 않으면 사실 성공이라고 할 수 있지. 엄마는 결혼 생활 동안 마치 누가 뒤에서 총이라도 겨누는 것처럼이 모든 것들을 죽도록 하고 비난을 받아왔어. () 너는 어리석었고 덜렁대는 엄마보다 현명하고 차분하니까 언제든 현명한 결정을 할 거라고 믿는다만, 결혼은 그러니까, 지금 혼자 있는 게 너무 좋은데 이 사람하고라면 그 좋음도 양보할 수 있을 거 같다, 이럴 때 하는 거야. 이 사람이 너무 좋아서 이 사람하고 연관된 모든 사람이 엄청 이상할 뿐만 아니라 나를 싫어하고 가끔 (듣기에 따라) 모욕하고 명령하고 이래도 이 사람이 하도 좋아 그쯤은 참을 수 있겠다, 이럴 때.

 

 

 

극단적이지만, 책으로 느끼기에 언뜻 노예처럼 살아왔던 자신의 결혼생활이 마치, 결혼생활의 전부인양 써놓은 글에, 그녀를 힐난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해서 행복해요.'라는 사람들을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고, 어쩌면, '결혼해서 행복하다는 것''결혼 생활에 맞춤된 여자'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 그게 거북했다. 나도 어느새 결혼한 지 만 이 년이 되었다. 나는 결혼해서 행복하다. 라는 말을 하는데, 그것은 배우자와 나의 가치관이 맞고, 그 가치관대로 살아가고 있는 까닭이다. 결코 나는 그를 만족시키기 위해 혹은 복종하거나 굴종하기 위해 혹은 맹종하기 위해 결혼하지 않았고, 어떤 존재도 그렇게 하기 위해 태어난 생명은 없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결혼에 알맞은 여자는 없다,는 것. 적어도 나에게는 호혜적인 부부가 될 수 없다면, 그 관계는 다시 생각해봐야하는 것이다. 결혼도 그러하지만, 하물며 ''이라는 것은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낯선 타인들과 공생하도록 설계가 되어져있다. 가족,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 직장, 다시 가정. 자라온 환경마다 조금씩 다를지언정, 어떤 조직에 속해져있다는 것은 누구나가 같다. 다만 작가는, 타협이나 의논 혹은 배려가 없는, 그러니까 '공생'이라는 단어를 전혀 느껴보지 못하게 만드는 그런 남자들을 세 번이나 만난 것뿐이고, 그게 전부인양, 편협한 생각을 가지고 말을 한다. ‘생각하며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는 말을 마음에 담아두며 살고 있는 요즘, 나는 내 경험만으로 편협한 생각을 가지고 살면 안 되겠다. 라는 말을 더욱 절실하게 다시 새길 수 있었다.

 

이러이러했기 때문에 나는 결혼에 부적합한 여자야.”라는 말은, 즐거운 나의 집을 떠올리게 했고, 자신의 삶을 과대 포장하는 것처럼 느끼게 했고, 자기합리화를 위해 최선을 다했던 그 책. 그 기분을 고스란히 느꼈다. ,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자기합리화는 똑같구나. 때문에, 앞으로는 작가의 에세이 혹은 자전적 소설에는 더 이상 손을 뻗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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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다 - 2014년 제10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이동원 지음 / 나무옆의자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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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에 의한 글자만을 찾아 헤맸고,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그때에, 나는 더 이상 책을 읽지 못하겠다, 생각 들었다. 그래도 전보다 아주 조금 여유가 생겨서, 한 글자도 읽지 못했던 책들에 손을 조금씩 대고 있다. 유약한 글들을 읽으면 나조차도 금세 녹아서 무너져 버릴까봐, 너무 강인한 글들을 읽으면 거부감이 생겨 버릴까봐, 어떤 책들에 눈길을 주지 못했다. 집에 있던 책들 중 그 어떤 것도 나를 위로해 줄 수 없다는 그 사실에 절망하며 도서관을 찾았다. 도서관이라고 다를 게 뭐가 있을까 싶었다. 그때 눈에 들어온 책. 일전에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서점에서도 본 적 있고, 서평도 읽은 바 있었다. 하지만 순전히 제목에만 이끌려 품 안에 안고 온 책. 살고 싶다-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살아내려 발악하는 요즘.이니까.

 

 

 

‘군대’라는 작은 사회 속에 몸 담고 있던 ‘선한’이라는 스물넷의 어린 남자. 어디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시를 쓰고자 했었고, 삶을 소풍처럼 살고자 했었던 그는, 스물넷이라는 어린 나이에 자의로 생을 마감했다. (이 정도만 써놔도 나중에 서평을 읽으며 기억을 할 수 있겠지.)

나는 스물다섯의 봄을 맞았는데 너는 왜 스물넷의 가을에 멈춰 있냐.

 

이 책을 읽기 바로 전에는 공지영 작가의 딸에게 주는 레시피를 읽었었다. 마음에 꼬옥 담아둔 문장을 인용해볼까 한다.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쳐져 있는 것만 같이 느껴져서 다시 태어나기 전에는 이 모든 일이 하나도 수습되지 않을 듯한 날이 있다는 걸. (이 책은 언젠가 꼭 서평을 쓸 테지만, 별 두 개에 그칠 수밖에 없는 책.) 선한도 저 말처럼, 그리 생각했던 게 아니었을까. 나 역시, 그렇다. 아니, 주체가 오로지 가 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랬다. 스물여덟 해를 살며 이렇게 힘들 때가 있다는 걸 처음 경험해본다. 낯설다. 삶이란 이토록 아주 재수 없을 정도로 소름끼치게 흥미로울 수 있구나.라는 생각도 해보면서, (나는 믿는 종교가 없지만, 현재 심리 상태에 딱 맞는 본문에 나오는 성경구절인) 마음에 와 닿는 말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작성할까 한다.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그래. 살아 내자. 이 세상. 살아내려 열심히 애쓰자. 얼마나 좋은 일이 오려고, 올해는 이렇게 지난한걸까. 생각을 정리하고자 쓴 서평인데, 바보 같이 또 울컥했다.

 

 

 

 

네가 없으면 죽겠다는 사람과는 만나지 마라. 사람은 사람을 채워줄 수 없다. 날 채워줄 수 없는 사람에게 나를 채워주길 기대하고 요구하니까 결국은 바닥을 드러내고 메말라 갈라져버린다. 자신이 없으면 살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남겨진 사람의 삶을 파괴하는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포도 향만 첨가된 탄산 주스처럼 그것은 사랑이라 불렸을지 모르나 실체는 다른 것이다. 사랑은 상대를 세워주는 것이다.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다. 생명을 낳는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나도 사랑은 가슴에 남아 그 남은 생을 살아가게 한다. 나는 누구보다 너와 엄마를 사랑하지만 너와 엄마가 없어도 살 수 있다. 너도 그래야 한다.


여담으로, 내가 외출할 때, 그이의 식사 걱정이라던지 안부를 걱정하면, 난 너 없이 밥도 잘 먹고, 잘 지내.라고 말할 때마다 안도감이 들면서 약간의 서운함이 생기곤 했는데, 그것은 아마 내가 그이에게 나의 모든 것을 만족시켜주길 요구하는 저차원적인 사랑에 근거되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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