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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알레르기
고은규 지음 / 작가정신 / 2016년 7월
평점 :
품절
개인적으로 일곱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 『오빠 알레르기』는 『트렁커』 이후에 오랜만에 만나게 된 고은규 작가의 작품이었다. 여기서 잠깐, 나는 단편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었음을 밝혀야겠다. 장편보다 끝이 애매모호하기 때문이었다. 장편은 개연성에 의해 예측해야하는 상황을 맞닥뜨리지 않아도 되는데, 단편은 좀 읽을 만하다 싶으면 툭 끊겨버리는 아쉬움 때문에라도 부러 찾아서 읽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책을 읽는 습관을 약간 바꾸어보니, 생각을 해야 하는 시점에서 나는 생각을 하지 않고 그대로 다른 단편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당연히 작가가 숨겨놓은 지뢰를 터트릴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지뢰들을 하나둘씩 터트리며 이야기를 읽어보니, 단편은 생각 외로 다채로운 매력을 지닌 것이었다. 물론, 작품 해설을 읽으며, 내가 든 아이스크림 막대는 ‘하나 더’가 아니라 ‘다음 기회에’ 혹은 ‘꽝’ 일 때가 더 많지만. 따라서 나는 요즘 단편을 좀 더 찾아 읽는 중이다. 그래서 이전보다 좀 더 넓은(?) 마음으로 작품을 읽을 준비가 되어있었다는 사실을 서론에 굳이 밝히는 것이다.
이야기는 전반적으로 ‘죽음’을 밑바탕에 둔다. 내가 죽거나 (「차고 어두운 상자」), 가족이 죽거나 (「엔진룸」,「명화」,「딸기」, 「급류타기」), 아는 사람이 죽거나 (「오빠 알레르기」, 「급류타기」), 전혀 다른 생물이 죽기도 (「엔진룸」) 한다. 아니, 죽었는지 살았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딸기」)이 있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야기는 죽음과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죽음들을 통해, 작가는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일까. 결국은 ‘관계’가 아니었을까.
나, 「오빠 알레르기」를 읽으며 피식 웃었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이 다르지만, 정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구나. 싶어서. 남이야 오빠라고 부르던, 언니라고 부르던, 삼촌이라고 부르던 무슨 상관일까. 하지만 과거의 일은 그녀를 자칭/타칭 ‘꼰대’로 불리게 할 만큼 오빠-에 대한 알레르기가 생기게 했었음을 알고, 역시 사람의 행동거지, 생각의 하나하나에는 이유가 있음을 다시 한 번 인지했다. 공대를 나온 나는 이 사람도 오빠, 저 사람도 오빠였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선배라고 지칭해야함을 고등학교 동아리활동을 하며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대학 사람들은 선배 같지 않아 오빠라고 부른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 소영언니에게 몇 번의 뺨을 맞았을까- 생각하니 아찔하다. 그리고 나는 그이에게 직접적으로 오빠라고 부르지 않는데, 그것은 대학 사람들이 개나 소나 오빠라면, 본인은 그 개나 소가 되기 싫다는 매우 정직한 의견이었다. 그런 나는 적어도 남편에게 오빠라고 하지 않으니 꼰대인 ‘나’의 힐난을 면피할 수도 있었겠네. 라고 생각하며 웃기도 했고.
스토커 여자의 오지랖의 결과를 내비친 「맥스웰의 은빛 망치」와 죽겠다고 농약을 마시고 해독제를 찾는 「급류타기」도 인상 깊었지만,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것은, 「차고 어두운 상자」, 「엔진룸」, 「딸기」, 「명화」였다. 그 중 「엔진룸」이 더욱 그러했는데, 이 셋을 묶어놓은 까닭은, 절연하고 싶어도 절연할 수 없는 끈덕진 관계, 그러니까 숨이 막혀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버릴 수 없는 사람 =‘가족’으로 묶여져있어 ‘나’를 괴롭힌다는 데에 있었다. 어쩌면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차고 어두운 상자」가 왜 그곳에 끼느냐고. 그렇다면 나는 답변하겠다. 이지숙의 빚을 고스란히 떠안는 것은 오롯이 이지숙의 엄마인 까닭,이라고.
누군가 주검을 대하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고 했다. 그동안 얼마나 잘못 살아오고 있었던가, 살아온 날들을 뉘우치게 된다고 했다. 영훈의 생각은 달랐다.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도처에 깔려 있는 위험들이 그의 눈앞을 어지럽혔다. 마치 세상살이가 위험과 장애가 널려 있는 급류타기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p.144)
나는 이야기를 다 읽을 때마다 야트막한 한숨을 내쉬는 것을 반복했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급류를 타는 것과도 같아서, 너무나도 힘든 것이라고. 나는 그러한 까닭에, 이지숙이 살아서 그 빚을 다 갚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캥거루가 집에 있는 짐들을 싹 버리고 정신 좀 차리고 새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며, 대성약국 골목 오른편으로 꺾어지는 대흥연립주택 203호에 24개의 이빨이 돌아와서 120개의 튼튼한 이빨들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희망했고, 구덩이에 묻음으로서 모든 상황이 종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향후의 그들의 희망적인 삶을 염원했다. 하지만 삶은 그렇지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그들이 모인 자리에 가서 슬며시 끼고 싶었다. 그리고 함께 이야기하며 실은 나도 그러하다고, 결핍된 삶을 사는 이들이 당신들뿐만이 아니라고, 위로하고 위로받으며 그로인해 안도하고 싶었다. 급류를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평온할 일 없는 사람마저도- 내가 책을 읽는 그날만큼은 평온하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그것을 바라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의 일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