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첫 번째 걷기 여행 - 머리를 비우고 마음을 다독이는
김연미 지음 / 나무수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여행이라는 분야에 있어 나라는 사람에 대해 간추리자면, 여행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먼저 여행가자,라고 말할 만큼 여행을 좋아하는 편도 아닌데, 아이러니하게 요즘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을 보면 마음 속에 황량한 바람이 계속해서 스며들고 있는가보다. 이럴 땐 걷는 게 최고지,하면서 시작한 것이라고는 그저 런닝머신 위에서만 걷는 것 뿐이다. 풉. 지금으로부터 3년 전, 그 무엇도 위로가 되지 못한 시절이 있었다. 그 어떤 이보다 찬란해야 했던 나였는데, 그런 내가 물을 먹어 빛을 잃은 하나의 전구와도 다를 바 없는 존재와도 같았으니 -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힘들 때 사람이 의지할 수 있는 거라고는 사람과 술. 그밖에 무엇이 있겠는가 말이다. 이리 써놓고 보니 이 서평이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과 다를 바가 뭐가 있나 싶겠다. 어찌됐든, 걷는 것은 꽤 매력이 있다. 전에는 버스를 타고 혹은 택시를 타고 다니던 길들을 이제는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이 나와 걸어서 가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는데, 걷는 동안 만큼은 오로지 나만의 시간이라는 점. 그 누구도 감히 나와 나의 소통에 끼어들 수 있는 간극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슬픔이 마음 속을 찢어놓을 만큼 힘들 때, 고민이 머릿 속을 지배할 때 등등, 나는 한적한 골목 구석구석의 길을 혹은 소음이 섞인 도시의 길을 그렇게 걸었다. 하지만 십이월이 되니 찬 바람이 뼈 속에서 휭휭 불어대고, 그로 인해 걸어야겠다는 의지는 또 한 풀 꺾이고 내년을 기약하는 내가 보임에 허허 웃어버린다.

 

 

 

  

‘서울 남산 산책로, 경기 용인 한택식물원 꽃길, 경남 하동 · 전남 광양 섬진강 매화길, 인천 웅진 덕적도 비조봉, 충남 서산 개심사~서산마애삼존불상 포행길, 강원 횡성 숲체원 편안한 등산로, 경남 함양 개평마을 고샅, 경기 여주 해여림식물원 산수유길, 전북 정읍 내장산 자연관찰로, 제주 올레길’ ㅡ 꽃을 좋아하는 나는 꽃을 구경할 수 있는 곳이라면 별 다섯개짜리의 의미인 간색 포스트잇 플래그를 덕지덕지 붙여놓고는 혼자 뿌듯해했다. 올해 겨울에도 여전히 듬직하게 내 옆을 지켜주는 그에게 “나, 여기 가고 싶어. 같이 안가면 친구랑 가든가, 혼자라도 갈거야.”라고 으름장을 늘어놓은 상태. 하긴, 나보다 여행을 더 좋아하는 그는 내가 가자고만 하면 카메라를 이미 챙겨들고 언제 갈래? 하며 나를 재촉할 터, 결코 손사레치며 마다할리 없음을 약삭빠른 난 이미 꿰뚫고 있었던 게다. 쿡쿡.


 

지방에 살고 있는 나는 ‘서울 남산 산책로’는커녕 근처에도 못가봤는데, TV에서 걸핏하면 나오는 통에 가보지 않은 그 곳을 몇번이고 다녀온 기분마저 든다. 하지만 볼 때마다 다른 것을 보니, 내가 직접 가면 또 얼마나 다른 모습으로 나를 놀래켜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어, 그에게 얼른얼른! 하며 보채는 내 꼴은 참으로 우습다. 하지만 그곳에 도착해서는 빨리빨리 - 를 추구하기보다는 도리어 느릿느릿의 미덕을 배워 불안한 삶을 재정비할 여유를 가져서 올테지. ‘경기 용인 한택식물원 꽃길’을 읽을 때에는 욕심같아서는 꽃이 다르게 피는 달마다 가서 꽃을 적은 메모지 한 장, 한 장마다_ 내가 입은 옷, 내가 신은 신발, 내가 쓴 안경의 테두리, 심지어 내가 내뿜는 입김 하나, 하나까지도  꽃내음을 가득 묻혀오고 싶을 정도로 폭 빠져버려서 2011년의 해가 밝으면 꼭 가야할 곳,으로 벌써 꼽아놓은 상태다. 또한 3월, 매서운 꽃샘추위를 뚫고 ‘경남 하동 · 전남 광양 섬진강 매화길’에 당도해서 매화를 손으로 어루어만지고는 나에게 너의 향기를 나누어 달라며 떼를 있는 대로 쓰고 올지도 모를 일이며, 갈림길이 있어 몇 번의 선택을 해야만 한다는 ‘인천 웅진 덕적도 비조봉’에 가서 오직 나의 선택을 믿고 앞으로 전진할 수 있는 용기를 배워올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내 눈을 사로 잡은 붉디 붉은 왕벚꽃이 천지에 떨어져 있어 보는 눈까지도 붉게 만드는 그 사진을 찍은 ‘충남 서산 개심사~서산마애삼존불상 포행길’은 실은 왕벚꽃이 아니라면 나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없었을 터, 나는 분명 이 곳을 방문할 일이 있다면 왕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사월 중순경에 갈테다,라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중이다. ‘강원 횡성 숲체원 편안한 등산로’는 걷기는 좋아해도 등산이라면 손사레를 치는 나에게 적역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과 함께, 와 - 정말 이런 곳이 있단 말이야? 난 왜 이제서야 알았지? 라며 한탄을 해야했는데, 그것은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만 할뿐, 어딘가를 가야겠다,라고 단호히 마음 먹은 적이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제서야 알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하는가. 큭큭. 담장 너머로 능소화가 핀다는 ‘경남 함양 개평마을 고샅’ - 비록 그곳이 그들이 있던 곳은 아니지만 난 아마 조두진의 「능소화」를 떠올리며 응태와 여늬의 가슴 아픈 사랑을 상기시키겠지. 그곳은 꼭, 사랑하는 이와 함께 가서 응태와 여늬에게 안부를 전하며  팔목수라로부터 우리 둘을 지켜달라, 그리 말하고 와야겠다. ‘경기 여주 해여림식물원 산수유길’에선 긍정적을 이르는 대표적인 단어들로 총집합된 10km에 이르는 꿈, 희망, 미래, 행복, 보람의 동산 - 다섯 가지 테마로 구성되었다는 이 곳을 여유로이 걷고 또 걷고, 쉬어갈 곳은 쉬어가며 그렇게 여유롭게 - .

 

 

 

 

책을 덮음과 동시에, 내 몸에 싱그러운 자연만의 향기가 내려와 앉은 것을 확인하고는, 이것이 날아가 버리기 전에 나도 떠나야 겠다, 생각한다. 무채색의 도시에서만 계절을 맞기에는 세월이 너무 눈부시다. 라는 그녀의 말이 눈에서 아른거리는 것이 그 까닭이다. 아, 아름답다. 그녀가 지탱하고 있는 땅이, 그녀가 가려는 길이, 그녀의 힘찬 발걸음이, 그녀의 입김과 함께 피어오르는 열정이. - 비단 이 책에는 그녀의 발자욱만 새겨진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생이 그녀의 발자욱을 따라 함께 걷고 있던 게다. 나는 책을 읽으며 그녀의 손 끝에서 새록새록 싹을 틔운 뭉그러지지 않은 단어들을 조합하며 감히 그녀의 생을 추측했고, 그것이 더 아름답게 빛나길 소망했다. 실은 여행서라고 한다면 내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떠날 수 있는 곳이 아닌, 돈과 시간이 적절히 어우러진 그런 해외 여행만을 생각했고, 실제로도 나는 그런 여행서를 많이 접했었다. 물론 국내 여행에 관한 책들이 한창 출간되던 때가 있을 테고, 지금도 간간히 나온다는 점은 인터넷으로의 검색을 통해서라면 알 수 있는 부분임에도 그 무엇도 나의 눈길을 꽂을 만한 책은 없었다. 늘 똑같은 일상에 권태를 느낀 적도 있었으나 주말만 되면 쉬기 바빴던 나는 조금 있으면 새로이 맞는 2011년의 주말이 조금은 즐거워질 것도 같은 예감이 몽글몽글 솟아오르는 것이 벅찬 기대감을 안겨준다. 어쩌면 이렇게 그녀의 책을 만나게 된 것은 큰 행운,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만큼 나는 그녀에게서 격동적인 열정을 선물받은 기분이다. 발로 직접 걸어 얻은 값진 지도다. 길은 걸어야만 거리를 좁힐 수 있다. 사람과 사이에도 길이 있어, 그 길을 걸었으면 좋겠다. 
여행서인 만큼 별 다섯개를 주기란 내게 무척이나 어려운 과제다. 어쩌면 별 다섯개를 채워줄 별 반개는 내 발로 직접 다녀와서 내 발자취를 상상하며 이 책을 읽을 수 있을 때, 그때에 새로이 얹어주겠노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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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롱뇽과의 전쟁>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도롱뇽과의 전쟁
카렐 차페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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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처음 받아들었을 때, 내가 했던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수화기를 붙잡고 그에게 “아 모르겠어. 이 책 이상해! 무슨 신문처럼 나눠져 있단 말이야!” 그랬다. 이 책을 스윽 넘겨보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만만찮은 두께에 나를 제압하는 표지. 난 이 책에 엄두를 못내고 붙잡고 스윽, 넘길 뿐이었다. 그런데 중간 한 장을 두 문단으로 나누어 깨알같은 글씨가 눈에 펼쳐지는 것을 보았는데 - 아, 아득하다. 제 아무리 노란색, 빨간색, 초록색 컬러가 눈의 피로를 정화시켜준다 한들, 전자의 이유때문에 이 책을 ‘어려운 책’이라고 멋대로 간주해 버리고서는 손도 대지 않고 최대한 멀리 했더랬다. 그러길 몇일, 주욱 방치해 두다가 더이상 미뤄둘 수 없어,라는 판단 아래 책을 들었는데, 어라? 괜찮네. 반 토흐 선장이 G.H 본디에게 도롱뇽에 대한 정체를 털어놓았을 때, 그에게 했던 말을 정정했다. “아니야! 점점 재미있어 지려고 해! 도롱뇽이 진주를 캐다준대!” ㅡ 하지만 책을 다 덮고 나선 앉아있는 자리에서 땅 속 깊은 곳으로 추락하는 것을 경험해야 했다. 책을 다 읽었는데도 읽지 않은 것 같은, 그런 찝찝한 기분. 그럼에도 내가 작품해설은 물론이고 역자해설까지 읽지 않은 것은 원래 읽지 않는다는 까닭도 있겠지만, 역자해설까지 멀리할 필요는 없다 생각하면서 그조차도 거부한 까닭은 책을 막 끝낸 멍한 상태로 어영부영 읽을 것을 이미 알아차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것에 있다. 그렇다면 읽으나 마나한 아니, 읽지 않는 것보다도 못한 사태를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일런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고심고심해서 썼을 그 이야기들이 내게 훌훌 읽혀버리는 것 또한 그들도 바라는 바는 아닐 터. 나중에 서평을 다 쓰고 생각이 조금 정리가 된다면, 그 때 읽어도 괜찮겠다 - 생각을 해본다.

 

 

 

 

도롱뇽,이라고. 내 눈이 기억하는 것은 결코 책에서 말하는 그런 형태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책을 읽을 수록 도롱뇽이라는 것은 공룡의 형상으로 다가오기 충분했는데, 그것은, 키가 열 살 꼬마 정도 되고 몸은 거의 새카맸어요. 물속에서는 헤엄을 치고 해저에서는 똑바로 걸어 다녀요. 똑바로요. 선장님이랑 저처럼 말입니다. 근데 계속 몸이 흐느적거려요. 이렇게, 또 이렇게요. 계속 그렇게……네, 선장님, 손도 있어요. 사람하고 똑같아요. 아니, 손톱은 없고요, 애들 손 같아요. 아뇨, 뿔이나 털은 없어요. 네, 꼬리는 있는데, 물고기 같지만 꼬리지느러미는 없고요. 머리는 큽니다. 바타크 놈들처럼 둥근 머리예요. 아닙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저 입술만 쪽쪽 빠는 것 같았어요. 이 구절이 내 머릿 속에 새로운 도롱뇽 친구를 주선했다. 이 책의 결론을 말하자면 인간의 추악이 태동케 만든 탐욕의 산물이 바로 도롱뇽이라는 점이다. 나이프만 주면 진주조개를 캐주는 도롱뇽 -실은 그들이 食이 되는 조개 속에 간혹 들어있는 진주는 그들에겐 얼마나 귀찮을 존재였을꼬, 책에서도 그들은 돌이라고 생각한다고 이야기한다.- 산업으로 이용하는 도롱뇽 신디케이트를 결성하게 된다. 그러다가 쿠르트 폰 프리슈가 도롱뇽들을 진주조개 채집 이외의 좀 더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는 다른 사업에 도입하는 것은 불가능한건지 질문하며, 항구를 더 깊이 판다든가, 방파제를 건설한다든가, 제반 수중 기공 사업에 도롱뇽들을 활용할 가능성을 함께 주장한다. 그렇게 도롱뇽들은 인간에 의해 문명을 배우고, 인간에 의해 도롱뇽교가 생겨 신처럼 여겨지기도 하며, 심지어 전쟁이 발발하게 된 까닭인 우두머리 도롱뇽도, 실은…….

 

 

 

 

어디에도 도롱뇽의 입장은 찾아볼 수 없다. 아, p232-233 의 것이 도롱뇽의 입장이라면 할 말은 없지만, 과연 도롱뇽들은 책에 적혀 있는 대로, 그리 생각했을텐가. 고개를 갸우뚱거려보아도 글쎄,라는 단어밖에 흐르지 않음은 어쩌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공통된 생각이 아닐런지. 인간의 지독하리 만큼 끝도 없는 탐욕에 실소가 터져 나오는데 마냥 웃고 있기엔 발가벗겨 놓은 것과 같은 적나라함이 얼굴을 내리친다. 퍽 -, 직격이다. 얼굴을 내리친 혐오감은 그대로 땅으로 추락하여 피로 얼룩진 그곳에 일그러진 얼굴 모양을 한 화석이 된다. 그것을 먼 훗날, 도롱뇽이 집어들고 금세 숨이 넘어갈 듯 깔깔거리며 웃겠지. 어리석은 인간들,이라며. 그래. 허구만이 아닌 허구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실로 낯뜨거운 영상을 보는 것처럼 붉어지는 얼굴을 뜯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이 책을 읽었지만, 네개 이상의 별을 줄 수 없는 것은 순진한 -결코 순수한,은 될 수 없는- 한 인간의 거북함이다. 그만큼 거북했다. 인간의 피폐한 잔상을 들여다보는 것이 무척이나 애탄스럽기 그지없었음을, 어쩌면 이렇게 고백하는 것일런지도 모르겠다. 동물이라고 감정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이 책에서 도롱뇽이라는 생물체는 영혼이 없는 인간에 의해 착취된 도구의 모습으로써 자리메김을 하는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아, 뭔가를 더 써야하는데 머리의 전원이 꺼지기 직전이다. 그의 말을 인용해야겠다. ……그 다음은 나도 잘 모르겠네.

 

 

오탈자 p207 …… 고등 교육을 받은 도롱뇽들은 탱크선의 목사를 <파파 도롱뇽>이라 불렀다→ 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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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렁커 - 제2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고은규 지음 / 뿔(웅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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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번도 어딘가에 갇혀본 적이 없는데도, 갇혀있는 기분이 무척이나 싫다. 그것은 왠지 관 속에 드러누운 기분이랄까, 하지만 나를 처연하게 만드는 것은 혼자 있다는 것에 대한 공포다. 나는 어릴 적부터 누군가가 옆에 있지 않으면 잠을 자질 못했는데, 그것은 낯선 곳에서 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동반하게 하는 것은 물론, 명절에 할아버지 댁에 가서 옆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벌떡 일어나는 것 또한 예사였다. 나는 중학생 삼학년 때까지 나이 차가 다섯 살이나 나는 동생과 한 방에서 손 잡고 잤었다고. 그것을 깨뜨린 것은 머리가 좀 컸다는 동생이었는데, 나는 그 전까지 혼자 방을 쓴 적이 없으니 고등학생이 되었어도 혼자 자지 못하는 멍청하기 이를 데 없는 그런 아이었음은 물론이고, 실은 이제는 혼자 잘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작년 이맘 때 즈음까지도 나는 어둠이 무섭다는 이유 하나로 20년이 넘게 자온 내 방 불도 켜고 잤는데, 간혹 엄마, 아빠에게 “전기세가 썩어나냐”라는 꾸지람을 듣고도 고치지 못하였더랬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나에게 있어 더이상의 공포는커녕, 혼자 불도 잘 끄고 자는 착한 어린이(?) 아니, 어른(?) 아니, 그 중간의 내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불껐어? 불 끄고 와. 기다려줄게’ 라는 그의 목소리가 아니라면, 불을 끄고 자는 것은 내겐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을 터다. 이는 친구들에게도 고백하지 못한, 서평을 통한 최초의 고백일 게다. 그런데, 트렁크에서 잠을 잔다고? 트렁크에서? 아, 난 상상만 해도 싸늘한 두려움의 그림자같은 것이 사방에서 내 몸 위로 내리는 기분, 딱 그것이다. 이 여자, 안락하고 따뜻한 집을 두고 스스로 비좁고 퀘퀘한 트렁크로 기어들어가 잠을 자려고 한다니, 분명 정신이 나간 것이 틀림이 없다.

 

 

 

 

트렁크를 열고, 누울 공간을 바라보았다. 피로가 밀려왔다. 트렁크에 오늘 하루를 밀폐시키면 좋겠어. 어제가 돼버린 기억들이 빠져나오지 못하게. 그렇다면 내일은 오늘과 다르게 순조로울 것 같아. 나는 속말을 했다. 나는 트렁크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내 세계가 봉해졌다. (p44) 바로 ‘이온두’(溫豆) - 바로 그녀다. 뜨거운 콩. 쿡쿡. 그녀는 ‘I love stroller♥’이란 명찰을 유니폼 오른쪽 가슴에 붙이고 다니는 유모차를 파는 점원. 그런데 고객에게 하는 꼬락서니하고는. 나같으면 그 유모차, 절대 사지 않을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할 만큼
무뚝뚝한 점원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유모차 브랜드가 몇 없다는 이유로 그 유모차를 구매하기 위해 지방에서도 올라올 만큼 인기가 좋다. 그렇게 멀쩡하게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그녀는 트렁크에서 잠을 잔다고 한다. 그것을 ‘슬트모(슬리핑 트렁커들의 모임)’라고 하는데 그녀는 그곳의 정회원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이름이 ‘이름’인 남자(정말 이름이 ‘이름’이야? 뭐 반전이 있는 건 아니고? 응, 진짜 이름이 ‘이름’이니, 나처럼 이 남자의 또 다른 이름이 있을거라며 헛수고하질 않기를.) 그녀가 차를 대놓고 자는 공터가 자기의 땅이라며 비워달라며 그녀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치킨차차차’라는 괴상한 게임을 시작한다. 지는 사람은 자신의 기억을 손바닥에 살며시 놓아두고 상대에게 보여주는 식이다. 하지만 온두, 그녀는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것은 나는 오븐에서 바로 나온 우유식빵처럼 보들보들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p36) 이 문장만 보아도 느낄 수 있을터. 그녀는 자신의 기억을 자신에게조차 숨기려 하고, 이야기를 지어낸다. 유모차를 파는 그녀는 자신이 희거나 검은 케이크를 파는 빵집ㅡ을 한다고 말을 한다.

 

 

 

 

‘온두’는 부모를 여의고 시설소에서 벗어나 찾은 곳이 트렁크였기에 그곳에서 잠을 자기 시작했고, - 비록 름에게 그것을 이야기하진 않지만. 아, 그것은 오랜 동료(?)였던 ‘피’에게도 말하지 않았더랬다. - ‘름’은 아버지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트렁크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제 3자인 내가 ‘치킨차차차’라는 이름만 들어도 웃음터지는 게임에 투명인간으로 합류했을 때, 그들의 기억이 손에서 천천히 녹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데에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하지만 무엇때문일까. 무뚝뚝한 작가의 매력에 나는 쉽게 매료되지 못했음은 물론, 그 흔한 와, 괜찮다 - 라고 말할 수조차 없었다. 이 책이 그들의 과거 이야기에 치중되어 있었음이 무엇보다 안타까웠더랬다. 과거와 현재가 넘나드는 시점이 결코 모호하진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이야기의 흐름이 뚝뚝 끊기는 느낌을 받았다고 해야할까, 게다가 그녀의 이야기를 독자와 함께 그(름)도 공유하고 있는가, 혹은 독자에게만 알려주는 일종의 비밀노트인가,하는 것은 아직도 애매모호하다. 하지만 그 무엇이 중요하랴. 그들은 그들을 가두게 만드는 트렁크 -과거의 기억- 에서 나와 따스히 비추는 햇살을 온 몸으로 받을 수 있을 것인가, 나에게는 그것이 중요했다. 이 책을 읽으며 신경숙 작가의 「외딴방」에서 ‘나’가 외딴방에서 나오는 것이 오버랩되며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흘렀다. 외딴방과 트렁크의 의미는 같고도 다른 것이었다. 같은 것은 나를 그 속에 가두는 과거의 속박이요, 다른 것은 자신이 갇혀있는 공간이니, 필요한 것은 마음의 치유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트렁크’를 갖고 있을 것이다.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장소, 그리고 도피와 은폐의 장소.(작가의 말) 그러고보면, 외딴방을 읽고 얼마나 그 수많은 눈물을 흘렸던가. 동이 트는 새벽에야 다 읽고, 터져나오는 울음을 멈출 수가 없어서 이불 속에 들어가 꺼억꺼억 울던 내가 아직도 선연한데, 같은 소재의 ‘트렁크’를 읽었을 땐, 그런 감정이 들기는커녕, 로맨스 소설도 아닌데 온두와 름을 생각하며 허허실실. 풉, 웃기기도 하여라. 구지 까닭을 찾아보자면 유쾌,하다고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책에는 진중함만이 아닌 하하호호 웃을 수 있는 소재들이 발 아래 수북하게 깔려져 있다고, -그러면서 감히 내가 그리 말해도 되겠느냐고, 반문해보고는- 아마 그렇기에 그랬을거라고 지레짐작해본다. 요즘은 상처를 외면하지 말고 직시하라고 말을 한다. 책 속의 인물들은 모두 나와는 달라서 꼴랑 몇 페이지의 책 한 권에 상처가 치유되고, 세상 속을 나올 수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런 소재의 책을 접할 때마다 나는 그들이 부럽다. 온두가 부럽고, 름이 부럽다. 그리고 며칠 전 상처를 꺼내서 어루만져보라,던 공선옥 작가의 ‘영란’의 영란도. 하지만 세상은 결코 녹록치않다. 상처를 털어버린 우리를 까꿍 - 하며 반가이 맞이하지는 않을거란 말이다. 상처를 꿰맨 자리를 손으로 움켜잡고 진물을 뚝뚝 흘러나오게 만들 것이 이 빌어먹을 세상이다. 책을 보면 아무래도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 치유를 받는가보다. 그러나 고리타분한 나는 이것을 손으로 잡고서는 누구에게도 내보이지 않을테다. 그저 돌고 도는 계절이, 늘어나는 주름이, 하얘지는 머리가 될 때까지 되새김질 하며, 그리 살아갈테다. 나에게는 상처인 동시에 추억이 되는 까닭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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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랩소디>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토마토 랩소디
애덤 셸 지음, 문영혜 옮김 / 문예중앙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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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색과 레몬색으로 그라데이션이 되어있는 배경을 바탕으로, 아래로는 마을이 그려져있고, 위로는 토마토가 허공에 덩그러니 떠있는 표지가 내 품에 와락 안기게 된 것은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행운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느낌이란 것은 아무리 제목에서도 무언가를 소재로 하였다고 한들, 이렇게 주워먹기식의 표지를,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어떤 계기가 아니었다면, 이 책은 손에 집고 읽기는커녕, 한번 훑어보지도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신 것을 끔찍이도 먹지 못하여 - 달달한 과일 중 간혹 신 것이 있는 것일 테지만 - 토마토조차 좋아하지 않는 나는 - 아니, 신 과일이나 채소 자체를 아예 선호하지 않지만 - 표지를 보고서 기어코 토마토의 시큼한 맛을 생각해내고는 금세 신 과일을 먹은 듯한 표정을 안면 가득 지어내보이며 조건반사에 의해 입술을 앙 다문 그 속으로 침이 고임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옆에 끼고 읽는 내내 탐스러운 토마토를 베어문 입 안 가득 달콤한 향을 머금은 기분이었다고, 책을 다 읽은 지금,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른 입술을 혀로 촉촉히 적시며 입맛을 다시게 만들 만큼 현혹시키는 맛있는 소설이었다고, 그리 말해도 과하지 않은 책이었음을.

 

 

 

 

‘16세기 어느 해 8월 하순, 이탈리아 토스카나 공국의 작은 시골 마을, 피렌체에서 이주한 유대인 가족이 막 토마토를 들여왔다.’ ㅡ 이 문구를 보고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란 단연코 종교 문제밖에 없으리란 것을, 역시나 - 적어도 - 처음에 작가의 의도 또한 그렇게 다가왔음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카톨릭교도들만 사는 피렌체, 그곳에 유대인 노인인 논노와 그의 손자 다비도가 육감적인 색깔과 모양, 정력에 좋다고 알려진 효능 때문에 사랑의 사과라고도 불리는 토마토를 가지고 그들과 어우러져 살기 위해 들어오지만, 마을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보고는 마치 나병환자라도 가까이 오는 것처럼 반응했고 힐끔힐끔 쳐다보기만 할뿐, 그들의 가게에 절대 다가가지 않고 그 흔한 안부인사조차 그들에겐 베풀지 않는다. 그렇게 작가는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토마토를 집으면 손에 독이 오르고 먹으면 죽을 수도 있을 거라는 등의 행동으로 종교 문제를 살짝 보여준다.

 

 

 

 

하지만 그에 따른 더 큰 사건이라 함은, 마리와 다비도는 상대방의 시선이 온몸을 관통하면서 뭔가 뜨겁고도 숭고한 느낌이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그들을 둘러싼 세상은 녹아 사라졌다. 마치 각자의 영혼이 전부터 알았고 다시 만나기를 열망해온 것을 이제 막 눈으로 확인한 것 같았다. 그것은 둘의 운명이 하나라는 느낌, 그 사실을 증명하고 싶은 불 같은 열망이었다. 이러한 열망은 다비도와 마리의 귀에만 들리는 으르렁거림과 함께 다가왔다. 바로 맨초냐가 ‘일 투오모 델 아모레’ 즉 사랑의 천둥소리라고 표현한 것이었다. (p143-144) 그들의 우연한 만남과 사랑,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때부터 이야기의 축은 유대인과 카톨릭교도에서 약간 벗어나 다비도와 마리를 중심으로 이어지더라, 그것이다. 어쩌면 그들의 만남은 이미 정해진 수순이 아니었던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리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갈 수 있느냔 말이다. 작가의 기교가 대단하다 느낀 것이 그것이다. 인물 또한 그 둘을 둘러싸고 있는 가족뿐만이 아니라, 그의 마을 사람들까지 - 그 누구 하나 버릴 사람 없이 모두가 주연이 되는 식의 이야기라는 것,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다비도와 마리, 그들은 이미 시끌벅적한 장터에서 둘만의 만남의 의식을 치루고 있고, 처음 만난 후 엿새만에 자신을 훔쳐보는 이가 베니토로 착각하여 돼지 오물 한 양동이를 씌운 상태로 다비도와 재회하지만 서로의 호흡을 찾아 상대방의 품에 뛰어들게 되며, 후에 토마토가 가득 찬 가마솥 안에서 사랑을 나누더라는 등 - 어느새 내가 생각지도 못하게 한발 더 앞으로 나가있는 셈이다. 이야기는 전혀 미적지근하지 않고 오히려 뜨끈뜨끈하다. 그들이 가마솥에서 처음 사랑을 나눌 때, 그때 그들의 뜨거웠을 몸처럼. 책을 읽는 내내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과 같다, 생각했다. 분명 난 손으로 짚어가며 활자들을 읽어내리고 있는데 그것들이 영상이 되어 어느새 머릿 속에서 살아움직이더라, 그것이다.

 

 


 
 

토마토를 들여와 그것을 파는 유대인 노인 논노와 그의 손자 다비도, 올리브를 맛깔나게 절이는 비법을 가진 마리와 의붓아버지라는 명목 아래 마리를 이용하는 탐욕스러움의 일인자 주세페와 그의 하인 베니토, 본명이 있음에도 어릴 때 거위에게 오줌을 갈겨 한쪽 고환이 없어 시뇨레 콜리오네라 불리는 아드라이노 델그레코와 마리의 이름을 따 노래를 부른 치즈 장수, 늙은 노파 무카, 돼지고기 장수 빈첸초, 바보라 불리는 보보와 그가 가지고 다니는 보볼리토라는 인형과 죽은 전임신부의 조카 아우구스토 포, 카톨릭교도들과 유대인의 사이에서 어느 쪽 하나 치우침이 없이 중립적인 태도로 그들의 화합을 주도했던 굿 파드레와 복사 베르톨리, 단 하루라도 포도밭에서 일하며 농부들의활기찬 말투와 각운을 빌릴 수 있다면, 대공의 지위를 잃고 평생 말을 못하게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던 코시모와 자신을 마르가리타 공주라 일컫는 잔 왕자, 그의 요리사 루이지 - 까지 그 누구 하나 버릴 만한 인물이 하나도 없다고 앞서 얘기했었다. 누가 주인공이고, 누가 주변 인물이고. 명확하게 구분지어진 것은 그 무엇도 없다. 작가는 인물 하나 하나에 애정을 쏟은 만큼 보는 독자에게도 그것이 전달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쩌면, 어쩌면! 하는 사이에 그들의 손과 손이 마주 쥐어쥘 듯 하면서도 그것을 끊어놓은 것은 - 술 취한 성인의 축제에서 다비도가 베니토를 이겼을 때, 토마토 소스를 마을 사람들이 먹기 시작했을 때 - 책 속의 어느 특정한 인물도 포함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함께 사는 삶을 몰랐던게다. 하지만 인생이란 울 일을, 죽음과 슬픔과 상실을 끊임없이 감수해야 하는 것이기에 울었다. (…) 인생이란 웃어 넘겨야 할 죽음과 슬픔과 상실을 끊임없이 감수해야 하는 것이기에 웃었다. 라는 것을 굿 파드레에게서 말이 아닌 행동으로 느끼게 되며 함께 울고 웃으며 결국 눈물과 웃음으로 얼룩진 들의 손과 손은 마주잡아진다.

 

 

 

 

책 자체는 다비도와 마리의 로맨스로 한껏 버무려있어서 뜬금없이 인생? 이라고 되물어질 수도 있다. - 러브 스토리가 아닌 로맨스라 이야기하는 것은 작가가 14세기 극작가 포초 멘초냐의 말을 인용하여 “러브 스토리와 로맨스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며 러브 스토리에서는 사랑을 이루기까지의 장애가 본질적으로 주인공의 내부에 존재하여 문제를 연인들이 자초한 것에 반해, 로맨스의 경우는 주인공들의 사랑에는 문제가 없으나 가족과 사회가 연인들에게 지운 가혹한 굴레에서 비롯된다 이야기하는 까닭이리라. - 비도와 마리의 로맨스에 우리의 인생을 투영하여 결국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권선징악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달콤한 희극에 짠 눈물이 떨어지는 것이 인생이라며 인생의 양면성을 절묘하게 표현한다. 오늘도 싱그러운 햇빛이 나를 향해 방긋방긋 웃고, 겨울이라는 계절에 걸맞게 찬 겨울바람이 스치듯 지나가며 안부를 전하고, 나는 몸을 더 움츠리며 그에 맞는 안부를 건넨다. 발걸음은 경쾌하고, 입가에선 미소가 흐르지만, 짜증으로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일터. 이 인생, 내가 품어주지 않으면 그 누가 내 인생까지 옳다구나, 거리며 품어주리. 아, 아름다워라. 난 마리가 재배한 올리브로 만든 올리브유에 튀긴 감자에 다비도가 재배한 토마토로 만든 토마토 소스에 찍어 한 입 앙, 베어물고 입가에 묻은 토마토 소스를 냅킨으로 닦아내고 포도로 만든 포도주를 홀짝홀짝 들이키며 초대받은 그들의 술취한 성인의 축제에서 한껏 즐기고 이제 나의 삶으로 돌아오는 중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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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Taschen 베이직 아트 (마로니에북스) 16
페터 파이스트 지음, 권영진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아, 아름답고 아름답다. 내가 이토록 찬미할 수 있는 화가가 있다는 것에, 새삼 놀란다. 그의 그림은 내게 있어 갑작스러운 순간적 마주침이라 이야기할 수 있는데, 나와 그의 그림이 조우하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07년에 갑작스레 찾아온 학교에 대한 회의가 느껴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휴학이라는 말도 안되는 선택으로 08년, 학교가 개강한지 두어 달만에 후회를 느끼고 한 해를 그저 흘려보냈었다. 나름대로 이것저것을 했다고 했지만 내 손아귀에 잡히는 건 그 무엇도 없었던 때었다. 그래서 작년(09년) 학교에서 졸업이란 순간을 앞두고 도서관에서 학구열에 불타오르고 있을 즈음, 도서관을 꽤 자주 들락날락했었는데 도서관에서 파묻고 있던 고개가 아파와 신경질적으로 쳐들었을 때, 그때 내 눈 앞에 있던 것은 ‘피아노를 치는 소녀들’ - 그때부터였다. 그의 그림을 찾아다니기 시작한 순간이. 그때 만난 것은 마로니에북스에서 나온 「인상주의 화가들」- 그의 파트만 살짝살짝, 야금야금 보고 있는 - 이나, 아이잭 신의 「르누아르와의 약속」 두 권 다 괜찮은 책이었음에도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은 아이러니다.

 

 

 

이게 왠 떡인가! 그때 마침, 서울에서 ‘행복을 그리는 화가 : 르누아르’ 라며 르누아르전이 한창이었던 것! 작년 여름전까지만 해도 서울과는 담을 쌓고 지내던 20대를 정해진, 내가 살고 있는 대전이라는 지역에 갇혀 모나지 않고 둥글게, 둥글게 살고 있던 나였음에도 그곳을 찾아가려 무던히 애를 썼으나 시험, 졸업작품에 파묻혀 결국 그대로 흘려버리고 말았더랬다. 그러니까 입에 물어준 떡도 먹지 못하고 바닥에 흘려버린 셈이다. 그러고서 올해 1월에 ‘모네에서 피카소까지’라는 전시회를 간 것은 꼴랑 5점인 르누아르 그림이라도 보러 가겠다며 눈 오는 날에 대전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표를 끊었었다. - 그와 함께 동행했는데, 아마 그는 내가 그림에 관심이 많아서,라고만 생각하고 있을터. 큭큭 - 어찌됐든 작년 이것저것 모든 것이 스트레스로 다가와 모진 슬럼프를 겪고 있을 때 즈음 그런 나에게 지인이 이 책을 선물로 보내주었을 때, 어찌나 좋았던지 방방 뛰었던 기억이 새록새록한 것이 참 좋아했구나 - 라는 말을 입술 사이에서 새어나오게 한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난 그를 좋아했던 것이 아니라 그의 따뜻한 동화같은 세상의, 동화같은 사람들의 그림을 좋아했던 것뿐이었던게다. 업무에, 사람에, 공부에, 또 나 자신에게 시달려 마음 언저리에 찬 바람이 스며들 때 그의 그림을 펼쳐드는 동시에 곧 내 앞에 그가 그린 동화가 펼쳐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난, 그저 그림에 현혹되었던 게지.

 

 

 

늘 그림만 보아오다가 그를 읽어야겠다,라고 생각한 것은 바로 전 「페르난도 보테로」를 읽었기 때문. 번역기를 돌린 것이 완연하게 티가 나는 그 글을 읽고 있자니, 이건 뭐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고, 죄다 무표정인 뚱한 사람들의 세상을 보고 있노라니 - 아, 보테로의 그림 중 가장 환하게 웃고 있었던 것은 ‘돼지 머리가 있는 정물’ 에서 웃고 있는 돼지뿐이었으니, 나 또한 그들을 따라 어찌나 끝도 없이 무표정해지는지 볼썽 사나워졌더랬다 - “그림은 항상 즐겁고, 유쾌하고, 예뻐야 한다” 라는 말을 한 르누아르의 그림이 간절해지더라, 이 말이다. 그래서 나는 손에 착 감기는 이 책을 잡고 그림이 아닌 행복을 그리는 화가, 르누아르를, 그를 읽었다. 그는 부유층을 그리기보다는 자신이 속한 중하층 보헤미안들의 일상적인 즐거움을 그림으로 표현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림으로 생계를 해결해야 했던 그도 표피적인 묘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지만, 그가 내키지 않을 때에는 그렇게 그리지 않았다고 - 그것을 책에서는 르누아르의 타고난 순박함 덕분,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검정이라고 하면 생기 하나 없는 죽은 색,으로 표현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는 그 검정색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붉은 색과 파란색을 섞어 사용했는데 그 예로 ‘물뿌리개를 들고 있는 소녀’ , ‘물랭 드 라 갈레트’ , ‘그네’ , ‘두 자매’ , ‘검은 옷의 두 소녀’ 등등 그의 작품 대부분이 그러하다. 그래서 어둡게만 보이지 않는 까닭이 그것인가,라고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게다가 그의 그림이 특별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림 속에 등장하는 모델은 대부분 르누아르의 부인, 아들들, 동생부터 그의 지인들까지 다양하다. 그것은 ‘물랭 드 라 갈레트’에서 확연하게 알 수 있는데, 그곳에는 그가 알고 지내는 지인들 모두가 그 그림의 모델이 된다. 이 그림의 첫 인상은 무질서와 혼란인데, 그로 인해 그림이 살아있다 - 라는 느낌을 받기에 충분하다. 더욱 인상깊은 것은 책에서 그림에 대해 설명해주는 것이었는데, 마로니에북스라 하더라도 지은이, 번역가에 따라 느낌이 이리 달라질 수 있다니…. - 내가 좀 더 애정깊이 본 까닭도 있을테지만 - 그림에 대한 설명 한톨도 없던 보테로와는 달리 이 책에서 느껴지는 것은 도슨트를 듣는 것처럼 귀를 쫑긋 세우게 된다는 점.

 

 

 

그러다가 그가 많이 아팠다는 글과 조우하게 된다. 그것은 「르누아르와의 약속」에서도 접했는데 그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르누아르는 류머티즘성 관절염이 악화되어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뼈가 비틀리고 피부는 말라붙었다. 1904년에는 몸무게가47킬로그램밖에 나가지 않았으며 앉기조차 힘든 지경이었다. 1910년 이후에는 지팡이 없이 걷지 못했으며, 휠체어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르누아르의 손은 심하게 비틀려 새의 발톱처럼 휘었으며, 거즈 붕대를 감아 손톱이 살에 파고들지 않도록 해야 했다. 더 이상 붓을 쥘 수 없어 굳은 손가락 사이에 붓을 끼워 그림을 그리면서도, 증세가 악화되어 침대에 눕지 않는 한 매일 그림을 그렸다. 침대에는 철망 구조물을 설치하여 이불이 몸에 닿지 않도록 했다. 몸이 완전히 마비되는 때도 있었다. (…중략) 하지만 그 상태에서 그린 그림조차 행복과 기쁨을 표현하는 송가였고, 천국의 미소였다. 며 여보게, 그림을 그리는 데 손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네.” 나는 그림을 그릴 줄도 모르고 제대로 그려본 적 없으며 배워본 것은 초,중,고등학교에서 배운 것이 전부,라고 말할 정도로 무지한데도 이 글에서 손 끝과 발 끝에서 전율이 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어쩌면 행복하게만 보였던 그림,을 그린 그,의 노년을 보는 것이 내가 모르는 또다른 삶을 엿본 기분이랄까. 그의 화가 생활을 읽어내리며 엔드다, 엔드.를 읊조린다. 그가 그린 그림이 모두 행복할 거라는 착각은 이제 엔드,를 뜻하는 것인지, 그를 읽는 것이 엔드라며,전과 같은 마음으로 그림을 보는 것을 뜻하는 것인지 아무 것도 정의 내리지 못한 채로. 비가 오는 오늘에 그를 만난 것은 참 다행이다. 커피 한 모금에 그의 그림을 담고, 두 모금에 그의 삶을 담는다. 자연은 예술가를 고독하게 한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 남고 싶다.”던 그는 안녕하신지. 하늘에서 또 어떤 동화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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