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렁커 - 제2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고은규 지음 / 뿔(웅진)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나는 한번도 어딘가에 갇혀본 적이 없는데도, 갇혀있는 기분이 무척이나 싫다. 그것은 왠지 관 속에 드러누운 기분이랄까, 하지만 나를 처연하게 만드는 것은 혼자 있다는 것에 대한 공포다. 나는 어릴 적부터 누군가가 옆에 있지 않으면 잠을 자질 못했는데, 그것은 낯선 곳에서 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동반하게 하는 것은 물론, 명절에 할아버지 댁에 가서 옆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벌떡 일어나는 것 또한 예사였다. 나는 중학생 삼학년 때까지 나이 차가 다섯 살이나 나는 동생과 한 방에서 손 잡고 잤었다고. 그것을 깨뜨린 것은 머리가 좀 컸다는 동생이었는데, 나는 그 전까지 혼자 방을 쓴 적이 없으니 고등학생이 되었어도 혼자 자지 못하는 멍청하기 이를 데 없는 그런 아이었음은 물론이고, 실은 이제는 혼자 잘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작년 이맘 때 즈음까지도 나는 어둠이 무섭다는 이유 하나로 20년이 넘게 자온 내 방 불도 켜고 잤는데, 간혹 엄마, 아빠에게 “전기세가 썩어나냐”라는 꾸지람을 듣고도 고치지 못하였더랬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나에게 있어 더이상의 공포는커녕, 혼자 불도 잘 끄고 자는 착한 어린이(?) 아니, 어른(?) 아니, 그 중간의 내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불껐어? 불 끄고 와. 기다려줄게’ 라는 그의 목소리가 아니라면, 불을 끄고 자는 것은 내겐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을 터다. 이는 친구들에게도 고백하지 못한, 서평을 통한 최초의 고백일 게다. 그런데, 트렁크에서 잠을 잔다고? 트렁크에서? 아, 난 상상만 해도 싸늘한 두려움의 그림자같은 것이 사방에서 내 몸 위로 내리는 기분, 딱 그것이다. 이 여자, 안락하고 따뜻한 집을 두고 스스로 비좁고 퀘퀘한 트렁크로 기어들어가 잠을 자려고 한다니, 분명 정신이 나간 것이 틀림이 없다.

 

 

 

 

트렁크를 열고, 누울 공간을 바라보았다. 피로가 밀려왔다. 트렁크에 오늘 하루를 밀폐시키면 좋겠어. 어제가 돼버린 기억들이 빠져나오지 못하게. 그렇다면 내일은 오늘과 다르게 순조로울 것 같아. 나는 속말을 했다. 나는 트렁크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내 세계가 봉해졌다. (p44) 바로 ‘이온두’(溫豆) - 바로 그녀다. 뜨거운 콩. 쿡쿡. 그녀는 ‘I love stroller♥’이란 명찰을 유니폼 오른쪽 가슴에 붙이고 다니는 유모차를 파는 점원. 그런데 고객에게 하는 꼬락서니하고는. 나같으면 그 유모차, 절대 사지 않을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할 만큼
무뚝뚝한 점원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유모차 브랜드가 몇 없다는 이유로 그 유모차를 구매하기 위해 지방에서도 올라올 만큼 인기가 좋다. 그렇게 멀쩡하게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그녀는 트렁크에서 잠을 잔다고 한다. 그것을 ‘슬트모(슬리핑 트렁커들의 모임)’라고 하는데 그녀는 그곳의 정회원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이름이 ‘이름’인 남자(정말 이름이 ‘이름’이야? 뭐 반전이 있는 건 아니고? 응, 진짜 이름이 ‘이름’이니, 나처럼 이 남자의 또 다른 이름이 있을거라며 헛수고하질 않기를.) 그녀가 차를 대놓고 자는 공터가 자기의 땅이라며 비워달라며 그녀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치킨차차차’라는 괴상한 게임을 시작한다. 지는 사람은 자신의 기억을 손바닥에 살며시 놓아두고 상대에게 보여주는 식이다. 하지만 온두, 그녀는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것은 나는 오븐에서 바로 나온 우유식빵처럼 보들보들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p36) 이 문장만 보아도 느낄 수 있을터. 그녀는 자신의 기억을 자신에게조차 숨기려 하고, 이야기를 지어낸다. 유모차를 파는 그녀는 자신이 희거나 검은 케이크를 파는 빵집ㅡ을 한다고 말을 한다.

 

 

 

 

‘온두’는 부모를 여의고 시설소에서 벗어나 찾은 곳이 트렁크였기에 그곳에서 잠을 자기 시작했고, - 비록 름에게 그것을 이야기하진 않지만. 아, 그것은 오랜 동료(?)였던 ‘피’에게도 말하지 않았더랬다. - ‘름’은 아버지가 자신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트렁크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제 3자인 내가 ‘치킨차차차’라는 이름만 들어도 웃음터지는 게임에 투명인간으로 합류했을 때, 그들의 기억이 손에서 천천히 녹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데에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하지만 무엇때문일까. 무뚝뚝한 작가의 매력에 나는 쉽게 매료되지 못했음은 물론, 그 흔한 와, 괜찮다 - 라고 말할 수조차 없었다. 이 책이 그들의 과거 이야기에 치중되어 있었음이 무엇보다 안타까웠더랬다. 과거와 현재가 넘나드는 시점이 결코 모호하진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이야기의 흐름이 뚝뚝 끊기는 느낌을 받았다고 해야할까, 게다가 그녀의 이야기를 독자와 함께 그(름)도 공유하고 있는가, 혹은 독자에게만 알려주는 일종의 비밀노트인가,하는 것은 아직도 애매모호하다. 하지만 그 무엇이 중요하랴. 그들은 그들을 가두게 만드는 트렁크 -과거의 기억- 에서 나와 따스히 비추는 햇살을 온 몸으로 받을 수 있을 것인가, 나에게는 그것이 중요했다. 이 책을 읽으며 신경숙 작가의 「외딴방」에서 ‘나’가 외딴방에서 나오는 것이 오버랩되며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흘렀다. 외딴방과 트렁크의 의미는 같고도 다른 것이었다. 같은 것은 나를 그 속에 가두는 과거의 속박이요, 다른 것은 자신이 갇혀있는 공간이니, 필요한 것은 마음의 치유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트렁크’를 갖고 있을 것이다.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장소, 그리고 도피와 은폐의 장소.(작가의 말) 그러고보면, 외딴방을 읽고 얼마나 그 수많은 눈물을 흘렸던가. 동이 트는 새벽에야 다 읽고, 터져나오는 울음을 멈출 수가 없어서 이불 속에 들어가 꺼억꺼억 울던 내가 아직도 선연한데, 같은 소재의 ‘트렁크’를 읽었을 땐, 그런 감정이 들기는커녕, 로맨스 소설도 아닌데 온두와 름을 생각하며 허허실실. 풉, 웃기기도 하여라. 구지 까닭을 찾아보자면 유쾌,하다고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책에는 진중함만이 아닌 하하호호 웃을 수 있는 소재들이 발 아래 수북하게 깔려져 있다고, -그러면서 감히 내가 그리 말해도 되겠느냐고, 반문해보고는- 아마 그렇기에 그랬을거라고 지레짐작해본다. 요즘은 상처를 외면하지 말고 직시하라고 말을 한다. 책 속의 인물들은 모두 나와는 달라서 꼴랑 몇 페이지의 책 한 권에 상처가 치유되고, 세상 속을 나올 수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런 소재의 책을 접할 때마다 나는 그들이 부럽다. 온두가 부럽고, 름이 부럽다. 그리고 며칠 전 상처를 꺼내서 어루만져보라,던 공선옥 작가의 ‘영란’의 영란도. 하지만 세상은 결코 녹록치않다. 상처를 털어버린 우리를 까꿍 - 하며 반가이 맞이하지는 않을거란 말이다. 상처를 꿰맨 자리를 손으로 움켜잡고 진물을 뚝뚝 흘러나오게 만들 것이 이 빌어먹을 세상이다. 책을 보면 아무래도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 치유를 받는가보다. 그러나 고리타분한 나는 이것을 손으로 잡고서는 누구에게도 내보이지 않을테다. 그저 돌고 도는 계절이, 늘어나는 주름이, 하얘지는 머리가 될 때까지 되새김질 하며, 그리 살아갈테다. 나에게는 상처인 동시에 추억이 되는 까닭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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