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보스 문도스 - 양쪽의 세계
권리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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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이 서점과 도서관 직원들을 혼란스럽게 했으면 좋겠다. 여행기에 놓아야 할지, 철할에 놓아야 할지, 예술 일반에 놓아야 할지, 아니면 문학과 취미 사이 애매한 선반에 애매하게 놓아두어야 할지.’ 이것이 오롯한 여행기가 될 수 있을까, 라는 갈등을 한 것도 잠시 아니, 라는 대답과 함께 에세이로 밀어넣는다. 비단 여행한 흔적을 증명할 사진이 없다는 이유같지 않은 이유로 여행기에 분류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만으로 여행기네, 아니네를 따지자면, 일전에 읽었던 작가 박준의 「책여행책」도 사진 한 점 없다는 이유로 여행기가 아니라는 것과 같은데, 우리는 그것을 한치의 의심도, 어떠한 일언반구도 없이 당연하다는 듯 여행기라 일컫고 있다. 하지만 작가 권리의 「암보스 문도스」 - 이것을 여행기라 치부해 버린다면, 이 책은 결코 (지극히 주관적인 내 판단 아래) 좋은 책이 될 수 없을 게다. (적어도 나에겐) - 이렇듯 내가 이 책을 여행기에 넣지 않는 까닭은, ‘여행기’라는 한정된 장르에 얽매여 있기에는 작가만의 냉소적이지만, 결코 냉소적이지 않은 내면들이 박탈당하는 것만 같달까. 하지만 그런 모든 것들이 여행이라는 직접 발로 걷고, 눈으로 보고, 느끼는 곳에서 응어리진다. 그래서 일거다. 이 책의 장르를 명료하게 구분짓지 못하는 것이.

 

 

 

나는 문학이라는 여정이 마치 평생의 배우자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이런저런 남편들 사이를 기웃거리고 다녔다. (…) 카프카는 우울할 때만 연락해 함께 침대에서 뒹굴며 술을 마시고픈 남편이었다. (…) 도스토옙스키가 술과 도박과 여자라는 3대 악에 찌든 방탕한 남편이라면, 카뮈는 남편이 없는 사이 바람을 피우고 싶은 상대였다. 전자가 나랑 한바탕 싸우고 집을 나가버릴 것 같은 남편이라면, 후자는 내게 외투를 입고 정오에 산책을 나가자며 차를 대기시키고 있을 것 같은 남편이었다.

 

그녀에게 몽상가적 기질이 있다는 것은 책의 앞부분을 읽으며 약간의 의구심을 품는 것이 전부였지만, 러시아를 경유해 유럽으로 가면서, 그녀에게 ‘글을 쓰게 한 요인’을 이야기하기 위해 넌지시 ‘남편론’을 꺼내어 놓은 것을 들음으로써 명료해졌다. 그녀의 남편들을 소개받으며, 나와 그녀 간에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아쉬웠음은 물론, 나도 그 남편들을 가져본 후 그것을 느껴보다, 생각하지만, 아직까지 그들 모두는 나에게 가까이 하기엔 먼 당신들,일 뿐이다. 그렇게 또 언젠가,..라며 미뤄두는 내가 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아니, 정확히는 수전 손택의 글을) 약간 모방하여 말한다면 나도 그 못지않은 남편들이 있다. 비오는 수요일이면 장미꽃을 건네줄 것만 같은 기욤 뮈소가 있는가 하면, 평생 잊고 살 것처럼 돌아서놓고 삶이 권태롭다거나 지독한 슬럼프에 빠져있을 때에 찾으면 씨익 미소짓지만 등 뒤에 칼을 가지고 있을 것만 같은 히가시노 게이고가 있고, 지독한 열애가 끝난 뒤엔 달려가 품에 안기고픈 츠지 히토나리가 있으며, 자기 전에 머리맡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목울대에서 울리는 감미로운 음성으로 시를 읊어주는 윤동주가 있지 않은가. 그뿐인가, 밤새 육체의 고통으로 끙끙 앓는 나를 밤새 간호해줄 조두진도 있다, 그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펜대를 쥘 힘을 주지는 못했다. 그저 품 속에서 알량한 감정들을 속삭였을 뿐. 헌데, 그녀는 그들이었다고 이야길 한다. 그녀가 자발적으로 글을 쓰게 만든 것이. 하지만 비단 그뿐이었을까. 그들이 그녀의 글쓰기의 전부였을까 말이다. 시간이 지나자 글쓰기는 헤어진 연인처럼 여러 의미로 퇴색되어갔다. 처음에 그것은 종교였으나, 이내 오락이나 시간때우기로 생각되다가, 어느 순간에는 고통의 도구였다가, 허기진 마음을 채우는 두레박이 되기도 하였다. 이제 나는 미치지 않기 위해 글을 쓴다. 글은 영혼에서 멀어지려는 나를 붙들어 매어준다. 실은 나, 그녀의 글을 쉬이 이해할 수 없었을 적도 있었는데, 그것은 아마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오롯한 그녀의 글쓰기인 까닭은 아닐까. 그러니까, 자신의, 자신에 의한, 자신을 위한 글쓰기라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누구에게나 그런 글쓰기가 있듯이. 혹은, 낙서와 같은 사소한 한 줄의 문장이 마음에 새겨져 지우개로는 지워질 수 없는 것과 같이.

 

 

 

나는 책임질 수 없는 자식을 뿌리는 수컷처럼 수많은 사진을 찍어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는 그 흔한 사진 한장 없다. 왜? - 무차별적으로 찍는 동안 사진이 기억을 대신한다. 뇌는 기능을 멈추고 오로지 장전된 총만 바쁘게 돌아간다. 왜 우린 찍는가? 왜 찍지 않으면 죄의식이 드는가? ‘기억하지 못할까 봐’라는 말에는 너무나 많은 핑계가 숨어 있지 않은가? 우리는 사실 충분히 기억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억하기를 회피해버린다. 기억의 단초를 만들기 위해 사진으로 남겨둔다지만, 몇몇을 제외하면 대개는 기억을 위한 기억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찍는다. 내재된 폭력성과 소유욕이 빚어낸 불안한 습관. 기억을 위한 기억,이라고. 참 씁쓸하기 그지없는 말이 아닌가. 그러면서도 옳은 문장들의 행진에 절로 고개가 주억거려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우리도 흔히 어느 곳에 놀러간다,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챙기는 것이 카메라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뿐만 아니라, 찰나의 그 순간을 찍기 위해 우리는 카메라 렌즈를 피사체에 얼마나 오래도록 두고 있었던가.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본 그 풍경이, 그 세상이 내 눈으로 본 것보다 더 값지고 아름다울 수 있는가 말이다. 저자 역시도 이 도시에서는 절대 사진을 찍지 말자, 손가락과 눈과 마음에 자유를 줘보자,라고 결심했지만 그녀 역시 그 욕망을 쉬이 이겨낼 방도가 없더란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카메라를 건드린 것이 아니라 신기하게도 카메라가 저절로 손에 딱 붙어버려 저절로 전원을 켜고 앵글과 구도를 맞추더니 셔터를 누르고 도로 가방 속에 들어가 꼼짝 않았다고. 그렇게 저자는 기억을 위한 기억 몇 장을 또 만들어 냈을 게다.

 

 

 

 

즐거웠다. 여행에 대한 그녀만의 철학을 내세워 정의해놓은 이 책을 읽는 것이. 또, 그 안에 녹아든 여행의 행보를 함께 하는 것이. 그러고보면, 나는 대체적으로 솔직한 글을 좋아하는가 보다. 일전에 작가 윤미나의 「굴라쉬 브런치」를 읽었을 때도 솔직한 여행에세이에 깔깔거리며 읽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이 책에서도 저자의 표현때문에 웃을 일이 좀 있었는데, 기억나는 것만 적어두자면 카지노에서 알바를 하던 중, 이가 하나도 없는 터키 출신 노인이 기계에 떨어진 동전을 집는 것을 보며 동전을 가로채가더니 볼에 뽀뽀를 했다는 것에서 ‘볼이 썩는 것 같았다.’는 표현에 마시던 커피를 도로 뱉을 뻔 한 적이 있는가 하면, 리컨펌을 하지 않고 바로 SBY 티켓(스탠바이티켓)을 발급받았지만, 한시간 전에 탑승 완료가 되어 비행기를 놓치게 되어 막막하던 통에 “호텔 숙박권과 600유로를 드릴게요” 라는 직원을 보고 ‘언젠가 기회가 되면 나는 천사를 본 적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라고 써놓은 문장을 읽고 병원에서 진료 순서를 기다리며 큭큭거리며 웃기도 했었다. 그러나 몇 개월 만에 둑처럼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모기를 잡고 난 뒤 손바닥에 묻은 피를 보고서도 갑자기 엉엉 울고 싶어질 만큼 심신이 지쳐 있었다고. 그래서 마음이 아니라 몸을 괴롭혀보라는 친구의 조언에 내적으로는 종교 생활을, 외적으로는 운동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 운동이라는 것이 브라질에 끌려간 흐인 노예들이 지주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만든 무술인 ‘카포에이라’ - 그것으로 활력을 되찾은 저자는 자신만의 암보스 문도스 왕국에서 벼룩이 득실거리는 개보다 행복하다는 그녀가 진정 행복해보인다. 헌데, 프롤로그에서 보았을 때, 귀향이 본질적인 목표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녀는 그곳은 찾았을까. 그곳이 그녀만의 암보스 문도스에서 멈춰버린 것은 아닐까. 개인적으로는 그녀의 여행이 끝나지 않았음을 바란다. 어디서든지, 그녀의 귀향이 순조롭기를.

 

 

 

 

p118 , 2번째 줄 : 여기서 다분히 아옌데의 약녀 기질이 드러난다 → 약녀의 뜻이 ‘어린 딸’이라고 나와 있는데, 글쎄, 맞을까. 그냥 의문이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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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시절
공선옥 지음 / 창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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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 작가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작년 11월 말에 만났다가 올 4월에 만난 것이라고 한다면, 꽤 오랜만법도 하건만, 아직 「영란」에서 영란의 행보가 한 발자욱, 한 발자욱 또렷하게 각인되는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를 읽고 거진 일 년만에 「영란」을 접했었는데, 전작을 읽을 때는 몰랐던 어떤 괜찮음,을 발견했었다. 대체적으로 그것이 내 지독했던 슬럼프를 깨뜨려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말하기 어려운 어떤 매력을 느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에게 있어 공선옥이라는 작가의 이미지는 순수함,인데, 어떤 기준으로 그렇게 정해놓았는지도 불분명하다. 그녀가 만들어내는 인물은 모두 소박하고, 순수하다. 그런 영혼들이 공선옥, 그녀를 거쳐 나왔으니 짐짓 그럴거라 생각하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래서 그것에 한치의 의심도 품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 그리 받아들이고 있는 겐가. 인물의 순수성은 글을 통해 느낄 수 있는데, 문장들은 군더더기가 없고 간결하다. 때로는 그것이 오인되면 무뚝뚝하게 느껴질 때도 없잖아 있다. 그렇기에 그와 상반되는 방정맞다거나 호들갑스러움이 없는데도 나는 그녀의 책을 받아들 때면 어쩐일인지 엄청 재미있게 쓰여진 책을 눈 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스레 달뜨게 된다. 그래서 이번에 만나게 된 그녀의 책이 마냥 반가운 까닭이다. 꽃 같은 시절 - 처음엔 요목조목 쓰인 글자가 예뻐서, 또 단어가 예뻐서 한참을 쳐다보았더랬다. 처음에 표지를 언뜻 보고는 가족 구성원을 그려놨나, 하여 가족 소설인가 싶었는데, 다시 보아하니 죄 노인들뿐이기에 노인들의 꽃 같았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려나 보다, 했다. 헌데, 이야기가 왜 돌공장에서 나오는가.

 

 

 

오명순씨의 시위참여 동기는 조용히 살고 싶어서.조용히 살다 죽을라고까지 혀.죽을라고까지 어떻게 쓴답니까. 그냥 살고 싶어서.조용히 살다 죽을라고.

 

살던 동네가 재개발되어 유일한 생계수단인 가게가 철거되고, 개업할 때 물고 들어온 권리금과 시설투자금을 날리고 이사비용에 불과한 보상금을 받고 길바닥에 나앉게 된 철수, 영희 부부. 시골동네를 전전하다가 진평리의 한 곳에서 머무르게 되는데, 이곳도 조용하지 않다. 문제는 불법 쇄석 공장 ‘순양석재’가 들어서고 나서부터 날아오는 돌가루와 소음이었다. ‘새끼를 낳던 암소가 돌 깨는 굉음에 놀라 사산하고, 덤프트럭이 질주하는 농로에서 노인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논바닥으로 처박혔다. 먼지는 비닐하우스에 켜켜이 쌓여서 하우스 안은 구름이 낀 것처럼 햇빛이 들지 않았다. 깻잎에 돌가루가 박혀 입에서 싸그락싸그락 돌이 씹혔다. 논바닥에도 돌먼지가 쌓여 햇빛을 차단한 탓에 벼뿌리가 썩어갔다.’ 급기야 주민들은 데모를 하지만, 주민이라고 해봤자 3,40대는 서너 명밖에 되지 않고 노인들이 대다수인데, 형사(“나요? 나 알아서 뭣할라고? 연애할라고?” “이러면 영업방해로다가 현장체포감들이여어, 우리 언니들이 토옹 뭣을 몰라아.”)와 트럭 기사(“칵 갈아버릴까보다 그냥”)의 조롱 어린 말과 행동때문에 화가 난 영희는 메가폰에 대고 몇 마디 한 것으로 덜컥 대책위원장이 된다. 그런데, 그들의 데모라는 게 공장 앞에서 덤프트럭을 막고, 군청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법원에 소송하고, 감사원에 탄원서를 넣는 것 말고도 지나가는 이름 모를 이들에게도 밥을 챙겨주는 것이 눈물나도록 정겹기 그지없는 풍경이라는 게다. 하지만 이곳에서 수줍은 표정으로 꽃 같은 시절을 이야기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지 않나요. - 아니, 당신은 꽃 같은 시절이 어떤 건지나 알고 말하는거요?

 

 

 

‘또르또르또르르르’ 하는 소리의 근원지가 어디인지 알고 있는가. 지렁이 울음소리라고 하면 비웃을 텐가. 소리를 내지 않는다 하여 정말 소리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지렁이에게도 울음소리가 있다는 것을, 믿게 되는 것은 한순간이다. 어쩌면 지렁이 울음소리가 없을 거라 당당하게 말하는 당신도 노인들의 ‘꽃 같은 시절’을 함께 통과하며 그곳에서  지렁이 울음소리를 들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들었던 것처럼. 나는 이 책을 세 권째로 읽으며 그 세 권의 공통점을 발견했는데, 작가 공선옥은 죽으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어떻게든 살려는 사람들을 그렸다는 것. 썩은 동앗줄인 것을 알면서 붙잡았고, 그로 인해 내동댕이 쳐질 것을 알면서도 붙잡은 것은 남은 생을 제대로 살기 위한 발악인 게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의 해금이 그랬고, 「영란」의 영란이 그랬고, 「꽃 같은 시절」의 영희와 노인, 동물과 식물을 비롯한 그곳 주들 모두가 그랬다. 물질적 욕망에 얼룩진 것에 의해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것은 그들이기에, 그들은 모두 돌가루를 뒤집어 쓴 채로 흐드러지게 피는 것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는데, 그것을 통해 원하는 바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예전처럼 살게 해달라,는 단 하나 뿐이라 안쓰러움에 마음이 뭉그러진다. 이렇듯 이 책은 사회적 약자를 편에 서기는커녕, 굽어보지도 않았던 대한민국을 발가벗긴 채로 채찍을 가했던 공지영의 「도가니」, 손아람 「소수의견」을 떠올리게 하며, 진정성이 휘발된 나라에서 두 발을 땅에 딛고 걷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몸서리 쳐지게 소름끼치는 일인 것이다. 책의 이 사건은 실화이지만, 지명을 밝힐 수 없는 것은 -ing로 진행형인 까닭이겠지. 세상 곳곳에서는 여전히 지렁이들의 한맺힌 울음소리로 세상을 메우고 있는, 당신네들 귀는 얼마나 두꺼운 철벽으로 가로막혀 있어 들을 수 없는가. 혹은 들리지 않는 척 하는가. 아무리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는대도, 어떻게 들리는 것이 들리지 않는 것이 되더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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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2
스티그 라르손 지음, 임호경 옮김 / 뿔(웅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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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1권 서평 - http://blog.naver.com/baereerah88/120123209971

 

 

 

1부 1권을 읽고 난 뒤 근 두어 달 만에 접한 2권이었다. 한국 소설이라하더라도 주인공의 이름을 적어두는 내 습관(나중에 아! 하며 상기시킬 수 있는 것은 둘째치고, 당장 읽고 있는 책의 주인공들의 이름을 늘상 헷갈려하는 나이기에)이 특히 이번에 참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다행이다,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이 책을 위한 준비 작업을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창하기 이를 데 없는 그 준비 작업이라는 것이라는 게 사실은 1권을 끝내고 2권을 읽기도 전에 쓴 서평을 다시 읽어보는 것과, 1권의 끝부분을 다시 살펴보는 것. 풉. 1권의 서평에 어떠한 진척도 없었고, 계속 제자리를 맴돌며, 발돋움도 시작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며 이 책의 어떠한 평도 내릴 수 없다,고 말했었다. 그래, 그랬었지. 그래서 왜 밀레니엄, 밀레니엄 하는지 모르겠다며. 사건은 이미 시작이 되었는데, 과거사만 너무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별 세개만을 주려다가 2권은 어떨지 몰라 별 네개를 주었더랬다. 허나, 오랜 간극이 원인일까. 초반에 집중을 하지 못해 허우적 허우적 거리기 일쑤였고, 급기야는 책을 놓고 「압구정 소년들」을 시작했었다. 그리고도 선뜻 바로 들지 못하고, 몇 권의 책을 더 읽은 후에야 다시 들 수 있었는데, 아차, 싶었다. 어느 순간 빠져버린 게다. 그것도 꽤 깊숙히. 아마, 그것은 미카엘 블롬크비스트와 리스베트 살란데르가 함께 한, 그 때가 아닌가 짐작해본다.

 

 

 

1장 , ‘스웨덴 여성의 18퍼센트는 살면서 남성의 위협을 한 번 이상 받은 적이 있다.’ 2장 , ‘스웨덴 여성의 46퍼센트가 남성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3장 , ‘스웨덴 여성 중 13퍼센트는 심각한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다.’ 4장 , ‘성폭행을 당한 스웨덴 여성 중 92퍼센트가 고소를 하지 않았다.’

 

하리에트 방예르
의 사건은 초반에도 좀처럼 실마리를 드러내지 못하다가 둘의 합심으로 조금씩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드디어 범인과, 맞닥뜨린다. 그런데 그 범인이라는 작자가 - 그리고, 홀연히 사라진 하리에트가 - (…) 저자는 스웨덴의 기자라는 투철한 직업 정신으로 똘똘 뭉친 제 2의 스티크 라르손을 만들어내는데, 그 인물이 바로, 미카엘 블롬크비스트. 저자는 그를 통해 스웨덴의 사회상을 고발하는 동시에 기업의 불투명함을 고발하며 그 인물로 베네르스트룀을 지목하고 그를 끌어내고자 한다. 그는 내가 바라는 대로 질질질, 끌려 내려올 것인가. 혹은 그곳에 버티어서서 굳어버릴 것인가. 나는 책을 읽는 도중에 아니, 하리에트의 사건이 끝난 직후에 큰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그 여파로, 일명 ‘복지국가’라고 널리 알려진 스웨덴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는 것이다. 그렇듯 단순한 추리소설로 치부해버리기에는 시사하는 바가 현실적인 까닭에 서평을 쓰는 지금에도 이 모든 것이 씁쓸하게 다가온다. - 이 책을 끝내기 전, 한가지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1권에서 난, 블롬크비스트보다는 살란데르의 매력에 더 빠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2권에서는 그의 매력을 조금 더 볼 수 있겠지,라는 생각을 했었으나, 전혀, 라는 것이 내 대답이다. 사건의 실마리는 주로 살란데르에게서 나왔으며 베네르스트룀을 무너지게 만드는 계기도 그녀가 주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나는 그의 매력을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1권을 이어 2권에서도 역시 2부에서는 그의 활약이 조금 더 돋보였더라면 좋을텐데,라는 아쉬움을 안고 책을 덮어야만 했다. 어쩌면 좋을까. 다들 매력적이라는 당신의 그 매력을, 나는 찾아 주질 못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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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한 보통날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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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니 가오리를 지독하게 싫어했던 때가 있었다. 아니, 지금도 그렇다고 해야하나, 혹은 덜하다고 해야하나. 내용이 나와 맞지 않았을 수도 있고, 작가가 나와 맞지 않았을 수도 있고, 혹은 번역이 나와 맞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맞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은 작가가 자신의 삶을 투영시켜가며 써낸 너무나도 지극히 그 나라만의 특유한 문화가 곁들여진 내용이 담겨 있는 그 책. 나에게 있어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사치였고, 허영이었다. 때로는 아찔한 현기증을 동반하는 가벼운 두통,이기도 했다. 에쿠니 가오리의 첫 책은 고등학교 시절 「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라는 책이었는데, (두번이나 읽었음에도 또렷하게 기억이 나질 않지만) 한 부부가 나오는, 무던히도 평범한 책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그러다가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학교 도서관에서 「반짝반짝 빛나는」이라는 책을 만났었고, (실은 그 두 작품이 같은 작가였다는 사실은 뒤늦게야 알았지만) 파란 표지가 정말 제목처럼 반짝반짝하게 빛나고 있었음에 고민도 하지 않고 집어들었던 것. 하지만, 레즈비언이라던가, 게이라던가, 하는 것들을 웃으며 받아들이기에는 나는 그런 것들을 끔찍이도 경멸했고, 싫어하는 내용을 이해하면서까지 읽어야하는 것 또한 싫었기에, 읽지 않겠다 했다. 그러나 그 후, 아주 자연스레 「홀리 가든」을 만나게 됐었다. 읽다가 조금이라도 심기가 불편하다면 미련없이 덮어버리리, 생각했지만, 결국 난 또 끝까지 읽어내려놓고 신경질을 내며 책을 덮었다. 속의 주인공들은 바쁜 삶에 치여 사는 나와는 다르게 그들은 너무나도 한가했고, 여유로왔다. 그게 질투가 났던 게다. ㅡ 그렇듯,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만이 북적거리고 있는 에쿠니 가오리의 세상 속의 사람들을 이해하기에는 내게는 힘겨움으로 다가왔다. 그때부터였다. 에쿠니 가오리라는 작가의 책은 읽지 않겠, 아니 읽기 싫다고 생각한 것이. 그러나 그 이후에도 난 그녀의 책을 몇 번이고 다시 들어 읽고 나서, 또 생각한다. 다시는, 읽지 않겠다고.

 

 

 

그럼에도 - 분명, 그녀의 문장은 달달했다. 그것때문일지도 몰랐다. 후에 다짐이 그대로 녹아버리는 까닭이. 그것은 설탕이 흩뿌려진 것과는 명백하게 다른 달콤함이었다. 아무리 가까이 다가간다 하여도, 아무런 향도 나지 않을 것 같이 말라비틀어진 부부들의 사이에서 건조하게 내뱉어지는 말들이 그들에게 위안이 된다는 사실과 또 그것을 건조하게 써내려가는 저자와 그 건조한 문장들의 조합이 무엇보다 아이러니하게 다가오더라는 이다. 그것의 예로 나는 가장 최근 읽은 「빨간 장화」를 들 수 있다. 하지만 그 건조하다는 것이 때로 맨송맨송한 피부들의 마찰음처럼 느껴지는데, 나는 그 느낌이 싫지 않다. 아니, 도리어 때로는 그립기까지도 하다. 하지만 아직도 한 켠에는 그녀를 받아들이기 위한 자리가 없음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늘상 그녀의 책을 집어들 때마다 이렇게도 깊은 심호흡을 하고 비장한 표정으로 책을 읽을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 긴장이 이 책을 읽을 때 만큼은 느슨해지는 것을 깨닫는다. 몇 번이고, 책을 덮어 저자를 확인하곤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이 책, 뭔가가 이상해. 에쿠니 가오리 책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야. 어떤 면이? 아니, 그냥. 그러다가 깔깔깔 웃어버린다.

 

 

 

(에쿠니 가오리의 책을 몇 권이고 계속해서, 또 자주 읽은 것은 아니지만) 난생처음 부부 중심이 아닌 가족 중심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종전의 책들과는 분위기부터가 남달랐다. 책 속의 미야자카家의 가족들은 봄이었고, 벚꽃이었다. 소요의 이혼, 시마코의 충격 발언, 리쓰의 정학, 윌리엄의 죽음 - 그 어떤 것에도 비바람이 몰아 치며 돌풍이 부는 여름으로 넘어가던가 하는 어떠한 변화도 없다. 그저, 소요의 이혼에는 만에 하나 네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 갔다면, 그때는 거리낄 것 없이 그 사람 품으로 가거라.”라는 엄마가 있고, 결국 그녀가 다시 가족 품으로 돌아왔을 땐 가족이 다시 모였다는 것은 순수한 기쁨이며 행복한 온기 같은 것.이라며 가족의 진정성을 표출하고, 시마코의 충격 발언에는 그래봐야 우리는 언제나 시마코 언니 편이다. 라며 각자의 삶을 이해하게 되며, 리쓰의 정학에는 “괜찮아. 엄마는 정학도 멋진 일이라고 생각해. (…) 무슨 일이든 다 경험이잖아.” 라며, 꾸짖음이 아닌 포용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듯, 그것이 마치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인 듯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그것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끌어안고 각자의 손을 포개어 어루만져준다. 비록 물엿처럼 찐득찐득거리는 가족愛라는 것은 책 속에서는 확연히 눈에 띌 정도로 존재하지 않으나, 소란하지만 결코 시끄럽지 않은 소소한 일상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그것이 바로 가족愛임을,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어렴풋 이해하고 미소 지을 수 있었다. 가족이라는 것이 그것이지. 동떨어져 있는 듯 하다가도 세상에 홀로 남겨져 울고 있을 때, 내 손을 이끌어 줄 이들. 내 가족인 게다.

 

 

 

때로 인생에 대해 생각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시간에 대해, 그동안에 생기는 일과 생기지 않는 일에 대해, 갈 장소와 가지 않을 장소에 대해 그리고 지금 있는 장소에 대해. 대개는 낮에 인생을 생각한다. 그것도 아주 날씨가 좋은 낮. 싸늘한 부엌에서. 전철 안에서. 교실에서. 아빠를 따라간 탓에 혼자서만 심심한 책방에서. 그런 때, 내게 인생은 비스코에 그려진 오동통한 남자애의 발그레한 얼굴처럼 미지의 세계이며 친근한 것이었다. 내 인생. 아빠 것도 엄마 것도 언니들 것도 아닌, 나만의 인생. p188

 

“무슨 얘기를 하면 좋을까, 인생에 대해서.” 에쿠니 가오리는 ‘가족’이라는 전체적인 덩어리에서 각자의 ‘인생’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만, 맴맴 도는 생각들이 유영하는 것을 바라보기만 할 뿐, 결코 어떻다, 단정짓지는 않는다. 나는 호젓한 거리를 걸으며 상념에 잠기기를 꽤 좋아한다. 그것은 때로 누군가라는 인물이 될 수도 있고, 어떤 무엇이라는 사물이 될 수도 있으며, 그 무엇도 아닌 추상적인 개념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늘 ‘인생’ 혹은 ‘삶’ 이라는 단어로 직결되기 마련이다. 경험에 의하면, 그것은 결코 어떤 하나로 완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생각 끝에 인생을 만들어줄 재료를 추출해야 비로소 완성되고, 그 완성이라는 것에도 오류가 생겨 사는 동안에 수 십, 수 백, 혹은 더 많게 필요한 것과 아닌 것을 넣고 빼며 다시 꿰매야 한다. 물론, 개개인의 인생은 각자의 손에 달렸겠지만, 적어도 책 속의 여섯 인물의 집합체, 미야자카家의 인생은 12월 첫째주 토요일에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사는 것, 1월 2일에는 새해맞이 글쓰기를 하는 것, 고등학교 때까지 아침은 정해진 메뉴를 먹는 것, 스무 살이 넘으면 생일 선물은 돈으로 받는 것, 책을 읽는 것을 독서 놀이라고 칭하는 것, 버스를 타면 남남 놀이를 하는 것, 1년에 한번 엄마의 생신 때만 외식을 하는 것, 부엌일을 거들기와 옆에서 책읽기 중 선택하는 것, 가족 중 입학하는 사람이 있으면(유치원 졸업은 예외) 전날에 항상 사진관에서 가족사진을 찍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것이 그들을 한 울타리에서 살게 하는 것이다. 그들이 함께 공존하며 애정을 표하는 데 있어 무리가 없는 그것들-. 

 

p153 , 09째줄 : 게단 → 계단

p249 , 11째줄 : 콧등이 약간 빨갰지만, 이미 울고 있지는 않았다. → (문맥상) 콧등이 약간 빨갰지만, 울고 있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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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엄마 엄마 - 자살을 결심한 엄마와 그 시간을 함께한 세 딸이 전하는 이야기
조 피츠제럴드 카터 지음, 정경옥 옮김 / 뜰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엄마,라는 단어가 안겨주는 애잔함을 감히 어떤 것과 견줄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글쎄. 그 무엇도, 라는 것이 내 대답이다. 헌데, 그런 존재가 언제부터 내가 마음대로 대할 수 있는 존재로 전락했단 말인가. 며칠 전, 의견 차이로 엄마와 충돌이 있었는데, 그 일 이후로 냉전이 지속되고 있다. 문제의 짤막한 원인이라 함은, 모진 사람들이 꾸려낸 세상으로부터 튕겨나가기를 원하고 좋은 사람들이 꾸려낸 세상으로 가는 것이 엄마만의 도피,라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런 엄마의 도피를 이해하지 못했고, 엄마는 조금도 이해하려 노력조차 하지 않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가족,이라는 옹골진 단어 속에서 태동하는 우리가, 왜 그래야만 하는지 답답했다. 아니 실은, 엄마가 먼저 손을 내밀었던 적이 있지만, 그것을 차가운 말로 내치는 내가 있었고, 그런 내가 엄마에게는 지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터다. 그래서 아무 일 없었던 듯 천연덕스레 엄마를 부르고 싶게 만드는「엄마, 엄마, 엄마」 - 라는 이 책을, 쉬이 들 수 없었던 것도 그 까닭이다. 또, ‘엄마’를 소재로 한 책들 중, 깔깔 웃으며 읽었던 책은 단 한 권도 없다,는 것도 한 몫 했으리라. 그것은 응어리진 눈물 방울들을 대롱대롱 매달고 엄마에게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한 책들 뿐이었는데, 「엄마를 부탁해」가 그랬고 「바보 엄마」가 그랬다. 그런데 이 책, 뭔가 이상하다. ‘자살을 결심한 엄마와 그 시간을 함께한 세 딸이 전하는 이야기’ - 자살을 결심한 엄마라니. 아, 이건 악몽이다. 글귀를 보자마자 나는, 그동안의 일들을 새까맣게 잊은 채 그대로 엄마 품으로 돌진할 뻔 했음을.

 

 

 

울형성 심부전증, 천식, 만성 폐질환, 골다공증, 관절염, 저혈압, 그리고 이십 년도 넘도록 앓아온 파킨슨 병 - 보기만 해도 막막하게 나열된 병들, 그것을 앓고 있는 일흔다섯의 마거릿.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의 병은 해도해도 너무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결국 투병에 지친 그녀는 자살을 꾀한다. 하지만 딸들은 그런 결정이 경미한 우울증과 자제력을 과시하고 싶은 병적인 집착에서 오는 것이라고 가볍게 여겼지만, 자살할 날짜까지 정해놓고 딸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때 쯤이면 마무리를 하기에 적당하다’던가 하는 말들을 소풍가는 날짜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며 그것을 실행하겠다, 라는 암시를 주어 딸들의 마음을 더욱 바스라지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마무리’가 되는 날은 이미 두 번이나 바뀌었고, 헬륨가스, 세코날 수면제, 모르핀, 단식…과 같이 죽음에 이르는 방법 또한 결코 만만치 않다.

 

 

 

마거릿을 그저 ‘이기적’이라고 생각하기엔 충돌하는 것들이 있었다. 나 역시도 훗날에,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링겔이라던가, 산소호흡기라던가, 하는 그런 모든 것들은 거부할 요량에 있다. 생에 대한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완치될 수 없는 병에 억지로 링겔을 꽂은 팔에 주사액이 투여되고, 고르지 않은 희미한 숨통을 조금이라도 잡아보고자 산소호흡기를 꽂아 산다면 그때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생각하고, 지인들을 생각하고, 무엇보다 나를 생각해야 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고 여태까지 생각해왔던 것들 중 하나이니까. 그런 내가, 투병에 지쳐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그녀에게 가타부타 이야기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안다. 따지고 보면, 행복전도사 최윤희도 그러하지 않았는가. 힘든 것은 자신인데, 누가 그녀를 함부로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딸들에게 자신의 마지막 날을 통보하는 엄마,라는 점에서도 그녀가 내 엄마가 아님에도 야속한 생각에 몸서리를 쳤지만 후에, 딸들이 그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하나의 준비 과정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조심스레 가져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자체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닐지만. 그래서 실화임에도 불구하고 슬픔이 가득 서려있기 보다는 제 3자의 눈을 빌어 썼다고 표현해도 대수롭지 않을 만큼 꽤나 담담하고 조금은 여유로운 문체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눈에 들어온 것은 아닐까. 처음엔 그 탓에 ‘체념’이라 착각할 뻔 하였던 것도 사실이나, 책 속에는 결코 그것과 연관시킬 하나의 자투리도 없었음을 밝힌다.

 

 

 

책을 다 덮었을 즈음, 엄마를 생각했다. 내 엄마는 아직 건강하고, 또 그렇게 믿고 싶다. 발꿈치를 들어 올려서 팔을 주욱 뻗어도 손이 하늘에 닿지 않는 것처럼, 나는 그것들이 그만큼의 거리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허나, 언젠가 그런 일들이 나에게 닥친다고 가정했을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말이다. 엄마를 어떻게든 막아야 올바른 것인가, 엄마를 도와주어야 올바른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손을 놓고 체념한 채로 바라봐야 하는 것인가. 둘 중 어떤 것도 올바르다,라고 장담할 수 없는 게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옥죄어옴과 동시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것을 느낀다. 아직도 나는 엄마가 홀연히 떠나버리는 꿈을 꿀 때면, 엉엉 울며 엄마에게 달려가 엄마의 고른 숨소리를 듣고 그곳에 내 숨소리가 얹어지고 나서야 겨우 잠들 수 있다는 사실을, 난 너무 오래도록 잊고 있었다. 책을 덮음과 동시에, 그동안의 엄마와의 냉전을 끝내려 하는 내가 있고, 엄마를 완전하게 이해할 순 없지만, 내가 사랑하는 엄마니까 이해하려 노력하겠다고, 문자를 보낸 후에야 비로소 불안정했던 맥박들이 가지런하게 뛰는 것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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