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슬픔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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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은 언제부턴가, 참 그랬다. 뽑지 못하고 놔둔 사랑니,같은 것. 지니고 있으면 통증이 일었고, 내쳐버리자니 공허함이 감돌았다. 내가 그의 작품을 처음 접했던 작품, 「엄마를 부탁해」도 아니요, 「엄마를 부탁해」의 후유증으로 읽기까지의 시간이 오래 걸렸던 「기차는 7시에 떠나네」도 아니었다. 참고로, 많은 독자들의 호평을 받고 있는 「엄마를 부탁해」를 ‘후유증’이라는 명사를 붙였는데, 그건 긍정이 아닌 부정이다. 난 그 책을 읽고 그를 자칫, 다시는 만나지 않을 뻔 했으니까. 감히, 그를 내 작가로 만들어야겠다, 고 생각하게 만든 「기차는 7시에 떠나네」가 아니었다면, 난 그의 책을 한 번 들추어나 보았을까, 싶을 정도로 「엄마를 부탁해」 ‘후유증’은 너무나도 심각했다. 그리고 후에 「외딴 방」은, 나의 방 문으로 들어온 그를, 주저앉히기에 충분했다. 그것이다. 사랑니와도 같다, 고 이야기하는 까닭이. 신경숙,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읽으며 느꼈던 약간의 아쉬움은 그의 단편 혹은 중편으로 짜여진 「딸기밭」으로 달랠 수 있었다. 언제고 읽어봐야겠다, 했던 「깊은 슬픔」을 그의 신간 「모르는 여인들」의 소식을 듣자마자 그것을 읽기 전에 느긋하게 읽어야겠다, 며 들었던 것. 그를 만나다.

 

 

 

 

 그들이 각자 지닌 사랑의 형태는 삐뚤빼뚤하여 균형감이 전혀 없어 온전하지가 못했다. “네가 그러고 있는 한은 나는 어디다 마음을 둬야 할지를 모르겠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할 텐데…… 네 생각을 하면 오싹해졌다 더워졌다…… 하늘이나 땅이나 어디라도 솟아버리거나 꺼져버렸으면…… 다 그런 거지. 다른 사람이라고 무슨 방법이 있으려고, 다들 이러겠지, 싶다가도……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마음끼리 보태져서 할 일이 있을 텐데…… 서로 돋아나게 하고…… 살고 싶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한 건 그러기 위해서였는데…… 왜 그렇게 멀어지기만 하는 거지? 왜 내가 곁에 가지도 못하게 하는 거지? 내가 무얼 잘못했어?” 사람들은 흔히,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진다,고 말한다. 작품도 그 말을 따라간다. 세는 은서에게, 은서는 완에게. 그리고, 완은 은서에게, 은서는 세에게. 그들은, 무얼 잘못한걸까. 사랑이 말한다. 너희들이 못한 건, 아무 것도, 없어. 라고.

그 여자 이야기를 쓰려 한다. 이름을 은서라 짓는다. 사랑이 불가능하다면 살아서 무엇 하나, 가끔 우는 여자. 언제부턴가 내 속에 내가 먹이를 주어 기른 여자.

 

나는, 은서였다. 나는, 완이었다. 또 어느샌가, 나는, 세였다. 철저하게 나는, 그들이었다. 사랑이 전부였던, 그녀, 혹은 그. 그들은, 서로에게 고향이었다. 버팀목이었고, 안식처였으나, 한편으로는 도망치고 싶은 곳,이기도 한. 그렇게 사랑이 시작된다. 아니, 시작된다고 말해야하나, 이미 시작이 됐다고 해야하나, 아니면 시작은 애초에 없었다,고 말해야 하나. 어쨌거나 언제부터인지 모를 사랑이 각자의 마음에 자리메김이 된다. 은서의 사랑이 슬펐고, 완의 사랑이 슬펐으며, 세의 사랑이 슬펐다.

 

 

 

 

투명해.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물 속처럼 다 보이지. 그리운 얼굴이 불의 일렁거림 속에 비치고, 외롭게 한 것들, 자꾸만 밀어내기만 하는 것들이 다 비치지. 불 앞에 오래 있으면 마음이 솔직해져. 밑바닥이 다 보여.

 

여담이지만, 작품을 읽으며 전에 근무하던 직장 상사 하나가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원래 사랑을 받는 사람이 사랑을 잘 할 줄 안대요. 리라씨는 사랑 받는 게 눈에 보여요. 그래서 연인에게도 참 잘 할 것 같아요.’ - 그래서였을까. 은서, 완, 세. 그들은 분명, 서로에게 사랑을 주었고 또 사랑을 받았지만, 그러면서도, 아니 그래서 외로웠다. 자기가 원하는 시기에, 자기가 원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받지 못할 뿐더러, 자신이 상대방에게 주는 사랑은 허공에서 유영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이 했던 사랑이라는 자리에는 눈물 방울이 몽글몽글하게 맺혀있는 건지도.

 

 

 

 

하지만 저 순간은 곧 지나가리. 이 청명한 봄날 아침의 저 순결한 목련잎은 곧 누렇게 되어 가벼이 떨어지리. 그렇다 할지라도 지금 목련은 무슨 일을 터뜨릴 것처럼 그렇게 아름답다.

 

그리고 화연. 작품 속에서 화연은 두 명, 아니 두 마리, 아니 두 번 등장한다. 세의 작업실에서 가져 온 석류를 밟은, 은서 앞에 그녀가 초인종을 누른다.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다가 간다며 문을 열어달라는 그녀. “미안해요. 정말 아무런 뜻도 없었어요. 그냥 날이 밝을 때까지만 아무런 얘길 하질 않아도 좋으니 누군가의 옆에 있고 싶었던 것뿐이었어요.” 은서와 화연, 그녀들은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상처로 인해, 누구보다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된다. 그리고 그녀가 데리고 있던 ‘수’,는 그녀의 사촌이자 남자에게 넘어가고, 그는 그것을 화연,이라 부른다. 은서 그녀 역시. 그렇게 부르면, 정말, 화연인 것 같아서. 화연아, 화연아, 화연아.

 

 

 

 

너는 너 이외의 다른 것에 닿으려고 하지 말아라. 오로지 너에게로 가는 일에 길을 내렴. 큰 길로 못 가면 작은 길로, 그것도 안 되면 그 밑으로라도 가서 너를 믿고 살거라. 누군가를 사랑한다 해도 그가 떠나기를 원하면 손을 놓아주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 그것을 받아들여. 돌아오지 않으면 그건 처음부터 너의 것이 아니었다고 잊어버리며 살거라.

 

울,컥. 결국 내 눈 끝에도 눈물이 맺혔다. 나 좀 데리러 와, 대신 한번 와, 라는 말로 대신했던 은서의 동생, 이수. 은서에게 누나, 누나, 누나 - 부르던 이수가 떠올라서 급작스레 우울해졌다. 내가 작품에서 가장 많은 정을 준 인물. 은서도, 완도, 세도, 화연도, 혜란도 아닌, 이수. 서평에 쓰진 않았지만 실은, 은서가 개인적으로 쓰고 있는 이야기 두 편이 소개된다. 은서가 이수에게 읽어주는 것, 하나. 이수가 은서에게 읽어주는 것, 두울. 첫번 째 이야기는 정을 줄 수 없는 어머니와 관련된 이야기라고 한다면, 두번 째는 떨어져 있지만, 끔찍이도 생각하는 동생 이수에 관한 이야기, 같다. 그것을 이수가 은서에게 읽으며 도중에 이건 내 얘기야. 누나 나 맨날 업고 다녔잖아!” / “거긴 여자 동생인걸. 그래도 너를 업으면 내 등이 따뜻했지.” - 은서가 정신적으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었던 존재, 이수,는 어떻게, 지내니? - 난, 신경숙이라는 브랜드가 더 좋아졌다. 난 정말, 당신이, 좋아요. 아니, 당신의 손 끝에서 뭉그러지는 글들이, 너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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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3-08-03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든 시기에...
깊은 슬픔"은
필사의 힘으로
저를 견디게 해준.
그런 책.

그녀,신경숙.
그 사람이..책을 쓰지 않았다면..
아마도 저는 이미 정말 없었을 사람.이라고.
 
그냥 눈물이 나 - 아직 삶의 지향점을 찾아 헤매는 그녀들을 위한 감성 에세이
이애경 지음 / 시공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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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다투고,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나를 위로해주지 않는다며 그에게 말하지 못한, 또 말하지 못할 서운함을 안은 채로 통화를 하던 어느 날, 마침 그는 쉬는 마지막 날이었고, 그는 나에게 오겠다고 했다. 아니야, 집에서 쉬어. 라는 나의 말에도 아랑곳 않고, 아니, 갈게. 라며 굳이 오겠다,고 했다. 응, 그래. 라며 전화를 끊고 그와 만나서 맥주 한 잔을 기울이고, 달달한 것을 먹고 싶다는 내 말에 커피를 한 잔 마시러 갔었다. 핸드폰을 따닥거리고, 카메라를 찰칵거리며 괜찮아졌다, 생각했는데, 급작스레 나도 모르는 눈물이 흘렀다. 그런 내 모습에 놀란 그는 나를 데리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나가자,라며 나를 끌었다. 그랬다. 그의 쿵쿵쿵 뛰는 마음에 움찔거리며 실룩대기만 하는 내 마음을 마주대어 달래보고자 하였는데, 그러면 좀 나아질 거라 생각했었는데, 그렇지를 못했다. 그를 기차에 태워 집에 가는 길에, 나는 올칵 눈물을 쏟아내었다. 나는 그런 내 마음이, 누군가를 향한 서운함이길 바랬고, 그리움이길 바랬고, 외로움이길 바랬다. 그것도 아니라면 차라리, 분노이길 바랬다. 그렇게 하여, 누군가에 의해 풀리기를, 절실하게 바랬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것도 아니었고, 그 누구도 위로의 대상이 될 수 없었음을.

 

 

 

작품에 쓰여 있는 타이틀은 딱, 맞아떨어졌다. 당시 내가 지니고 있던 감정,과. 모든 것이 불안했고, 휘청였으며, 또 그것은 느릿느릿했다. 혼란스러웠다. 여름을 보내고, 겨울이 오기 전 - 손님처럼 잠시 들렀던 가을이 까닭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날이 추워지면 그것이 얼어야했는데, 그러지를 못했으니. 절망스러운 사실은, 그런 내 마음이 까닭 모를 공허함에서 온 것이라는 것을 모를리 없었던 내가 있었다. 그 공허함의 근원지는 엉켜있던 마음, 그곳을 채 메우지 못한 간극,이었다고 말한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과연 딩동댕,하며 실로폰을 두들기며 정답입니다! 하고 외쳐줄까. 누가? ...... 내가? ...... - 그런 상황에서 책과 마주했다. 「그냥 눈물이 나」 라고 쓰여있는 책의 제목은 내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만 같아서. 그래서, 멈칫했다. 그렇기에 책을 읽어야했고, 그렇게 책이 손에 들어왔다. 이건, 저자의 일기장인데, 내가 왜 그렇게 읽고자 갖은 애를 썼는가. 초점없는 눈으로 책을 한참 동안이나 쳐다보고, 읽으려다 말았다. 공허함에 뭔가를 채워넣는다는 것이 무서웠다. 뭘 채워넣어야 할지, 아니 채워질 수나 있을지, 공허함에 외로움을 덧대는 건 아닌지, 두려웠다. 그러기를 몇 날 며칠. 그래서 비로소 책을 든 날이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해 내질 못한다. 그저, 무미건조한 눈동자가 책을 훑고 지나갔음을 기억해내는 것 말고는.

 

 

 

작품은, 내 마음에 여유가 없어, 저자의 여유롭게 살랑거리는 목소리를 내쳐버리고 밀쳐버린 채로, 그렇게 읽혀졌다. 그러다가 멈춘다. 멈춤과 동시에 미동도 않는다. 음악에서 보면 말야, 음이 진행할 때 자연스럽게 이끌어주는 버금딸림음이란 게 있어. 쉽게 말하면 ‘도’와 ‘솔’ 사이에 있는 ‘파’ 같은 음이야. 도는 도라는 음만으로도 무게가 잡히고 솔은 솔이라는 음만으로도 편안하게 들려. 하지만 파라는 음은 뭔가 좀 불안해. 미로 내려가던지, 아니면 솔로 올라가던지 둘 중 하나의 방향으로 가야만 비로소 음이 안정되거든. 서른넷은 그런 나이야. 서른다섯의 버금딸림음 같은 나이인 거지. 서른아홉도 마찬가지고. (p170)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 뻔 했다. 그것,이었을까. 저자가 말한 버금딸림음이, 어찌 서른넷에만, 혹은 서른아홉에만 국한되는 말이겠는가, 말이다. 자꾸만 눈이 그곳으로 옮겨가는 걸 보니, 그것이 까닭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짐짓 강하게 든다. 응, 지금은 내가, 당신이 말한 버금딸림음 시기인가 봐요. 이천십일 년, 십일 월, 현주소에서 내가 위태로운 상태로 두 다리로 지금을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이, 절망스럽게 느껴지면서도 다행이라 느껴지는 것이, 그것이요. 조금 있으면, 지나갈까요. 당신도 그 시기를 겪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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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니까 청춘이다 - 인생 앞에 홀로 선 젊은 그대에게
김난도 지음 / 쌤앤파커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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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을 하고 두어 달 만에 일에 적응하고 나서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내가 하는 일도 남과 별반 다르지 않구나, 하는 생각으로 하루에 몇 번도 더 찾아오는 회의감을 동반한 방황은 간신히 서 있는 나를 발로 차대며 위태로이 만들었고, 그것은 결국 눈물로 번지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나는 그것을 그 속에 다 쏟아부었더랬다. 그러다보면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뭐가 그리 서러운지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리는 상황이 될 때가 많았는데, 그 사실은 나에겐 힘겨움으로 다가왔고, 결국 현재의 상황을 체념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회피하는 것보다 훨씬, 최악이다.) 체념이라는 말, 마음 언저리가 콕콕 쑤실 정도로 참, 아프고 시리다. 현재의 상황을 체념한다 하여 가벼워지는 것은, 결코 없다. 나 그것이 결코 완전한 체념으로 굳혀질 수 없는 것은, 내겐 이루고 싶은, 이뤄야할, 이룰 - 꿈이 있는 까닭이다. 실은 나, 막연하다. 때문에 눈을 감는다. 하지만 눈을 감으면 어두운 터널 속에서 길을 잃은 내가 보인다. 그 모든 것들이 목을 죄어오는 까닭에 숨을 헐떡이게 되고, 자유자재로 호흡하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여 놓아버리고 싶어질 때도 있다는 사실이 ‘사는 게, 참 힘들다.’ 라고 생각하게 만들어 버린다. 정말 그것을 놓으면 편할까, 생각하지만 선뜻 그러지 못하는 것은 아직 할 일이 많은 까닭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하고 싶은 일이 많은 까닭이다. 그런데 그것을 위해 현재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자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책이 내 앞에 놓였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팔자 좋은 소리. 자, 당신은 그때를 이미 지나왔고, 현재는 성공한 케이스니까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거야.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른다. 책의 자자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책과 첫만남은 결코, 긍정적이지 못했다.

 

 

 

요즘처럼 치열한 경쟁을 뚫기 위해서는 그저 그런 스펙이 아니라 확실한 자기 브랜드가 있어야 한다. 브랜드의 핵심은 ‘하나의 초점’이다. 그대가 가장 잘하는 것, 그 한 가지에 집중해 그대만의 이야기를 들려주어라.

 

배우고 싶은 것이 많아졌다. 나는 내가 목적이 있는 배움이 아니라 ‘배움’, 그 자체를 즐기길 바랐다. 하지만 나, 지금 그러고 있는가. 실은 스펙쌓기에 연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퍼뜩 드는 것은 그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까닭이리라. 현재 하고 있는 자격증 공부를 하는 것은 애초에 내 능력에서 부족하다 싶은 것들을 채우기 위해 시작한 것인데, 난 지금 그저 그 시험을 잘 보기 위해, 그리고 그 자격증을 따기 위해 꼼수만 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배우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라면,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닐진대, 어째서 이렇게 허구헌날 아까운 시간들을 낭비해가며 잡고 있는가 말이다. 그 까닭은 한 가지로 응어리진다. 이직. - ‘내가 여기서는 배울 게 없어.’ , ‘일 하는 것이 체계적이지가 않아.’ 와 같은 이유였다. 하지만 나, 겁이 나고, 불안하다. 이곳을 벗어나 다른 세계로 발을 들여놓는다는 것을 겁 내는 것은 둘째치고, 내 능력을 의심하는 것에서 오는 불안인데, 그것을 걷잡을 수 없다. ‘확실한 자기 브랜드’가 없는 까닭이다. 지금 하고 있는 공부는 그것을 위한 발판일 뿐, 그것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기에 내가 이토록 불안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시험 준비란 겉으로는 매우 열심히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생의 전체적인 프레임에서 보면 문제를 유예하는 게으른 과정일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 하필 뜨끔한 구절과 다시 조우했다.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아. 난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거야.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과연 그럴까. 그것이, 사실일까.

 

 

 

그대, 좌절했는가? 친구들은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그대만 잉여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가? 잊지 말라. 그대라는 꽃이 피는 계절은 따로 있다. 아직 그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대, 언젠가는 꽃을 피울 것이다. 다소 늦더라도, 그대의 계절이 오면 여느 꽃 못지않은 화려한 기개를 뽐내게 될 것이다. 그러믈 고개를 들라. 그대의 계절을 준비하라.

 

책을 읽고도 답답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 어리석게도 책 한 귀퉁이에 내 답답한 마음 모두를 내려놓고자 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려면 한낱 318페이지도 되지 않는 이 책에, 생판 모르는 김난도 교수에게 내 인생을 맡겼어야 했으리라. 다행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서. 이 곳에 있는 동안, 나를 버리고 왔다고 믿었고, 또 그렇게 믿고 싶었는데,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오롯한 내 인생이었구나, 하는 생각에 실로 감격스럽다. 그동안의 방황으로 내 인생이 마구잡이로 흔들리고 있다 생각했는데, 그래서 날 힘들게 하는 그 모든 것들을 다 놓아버리고 싶을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는데, 아직 내 꿈에 대한 내 마음이 간절해짐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지, 싶다. 오월의 첫날에, 미칠 듯한 괴리감을 느꼈었다. 나만 외계인이었다. 탈을 벗고 싶을 정도로 답답했으나, 까닭을 모른다. 아니,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말썽이었다. 일도, 공부도, 사랑도, 우정도, 심지어 가족까지. 되는 일 하나 없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몇 시간을 내내 걸었고, 내 마음을 대변하는 글을 쓴 듯한 한 권의 책으로 위안을 받았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수첩에 이런 말을 적어놓았었다. ‘되는 것이 없다고 말하기엔 노력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 불안하니까, 막막하니까 흔들리니까, 외로우니까, 두근거리니까, 그러니까, 그래서, 그렇기에 청춘이다.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난 아직 일구어놓은 것이 아무 것도 없지 않은 까닭에. 그간 읽었던 자기계발서, 에세이 - 어떤 것도 내 마음을 다잡게 할 순 없었다. 이 역시도 물론 그렇지만, 적어도 멈춘 것만 같고, 멈출 것만 같던 내 시계가 아직 겨우 오전 7시 12분이라는 것을 확인했고, 내 꿈이 죽지 않고 살아서 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지 않았는가. 그거면 된거지, 뭘 바라겠는가. 정말 내 말대로 이 책에서 해결책을 찾으려 했는가? 당신의 미래를 결정지을 만큼 대단한 책은 존재하지 않음을 기억해라. 나는, 촉진제를 맞았다. 비로소 식욕이 돌며 침이 흐른다.

 

 

ps. “지붕부터 지을 수 있는 집이 세상 어디에 있습니까. 하물며 부서지기 쉬운 모래로 만드는 두꺼비집도 차근차근 짓지 않습니까.” - ws , LSJ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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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 한국 사회의 위선을 향해 씹고, 뱉고, 쏘다!
한홍구.서해성.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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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타인에게서 ‘넌 너무 직설적이야.’라는 말을 꽤 많이, 또 자주, 듣곤 한다. 사전적 의미로는 ‘바른대로 또는 있는 그대로 말을 함. 또는 그 말’이라고 명시 되어있는데, 타인이 보는 내 모습은 우회적이지 못하고 있는 대로 그대로 말을 한다,는 의미일 게다. 나는 돌려 말하는 것에 재주가 없거니와 (실은, 직설적이라는 것이 이미지에 큰 타격을 줄 때가 많기에 몇 번 우회적으로 돌려 말한 적이 있으나 그때마다 항상 삼천포로 빠지며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는 까닭이다.) 또 타인이 나에게 말을 할 때에 우회적으로 말하는 것도 나로 하여금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게 하는 까닭에 타인에게 말을 할 때에 직설적이 되어버리고, 타인도 나에게 말을 할 때에 직설적으로 말하기를 요구한다. 그래서 나는, 영화라던가, 책이라던가 하는 것도 전하고자 하는 것이 분명한 책을 좋아하는 것도 내가 가지고 있는 성향과 직결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통쾌하게 씹고, 뱉고, 쏘는 책(이라고 불리는 책)을 만났다. 그것도 현 정부,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의 사회를 말이다.

 

 

 

정치에 눈을 뜨면서부터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이 갑갑하게만 느껴졌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고등학교 이학년인가, 삼학년인가_ 내가 본 정치 쪽지시험은 읽고, 쓰고, 말하는 것이었다. 헌법전문을 시작으로 헌법 제10조까지 외기. 당시 그것을 외고 있을 땐, 왜 당연한 걸 외우라고 시키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외우라니까 외는 것, 그게 전부였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 그리고 학교를 졸업했다. 바로 그 해, 그것을 처음 실현할 수 있는(혹은 있다고 믿었던) 기회가 내게도 주어졌다. 다름대통령 선거. 국민의 투표에 국가원수가 정해졌고, 그렇게 정해진 국가원수에게는 5년이 주어졌다. 그런데 바로 다음 해, 촛불시위가 일어났고, 그것에 대한 과잉진압. 여느 때보다 뜨거웠던 국민들의 분노. 국가원수에 대한 국민들의 신임 하락. 후에 국민들의 허리띠를 졸라매는 4대강 정비 사업, 그리고 현재 한·미 FTA 체결 직전의 단계까지, - 국민들의 목소리는 국가원수를 감싸고 있는 권력으로부터 반사되어 그것이 국민들의 살림살이를 내쳤다. 내가 외웠던 헌법은, 태운 종이와도 같다는 것이, 그렇게까지 실감난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권력을 잡는다는 건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한번 누려보겠다’와 ‘한번 바꿔보겠다’. 후자가 늘 전자에 밀려요.(p440) - 어떻게 생각을 하는 것이 옳을까. 자리가 사람을 바꾼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사천팔백만명이 부둥켜안고 살고 있는 나라에 반영되는 것이어서는 결코 안 될 말이다. - 내내 답답했다. 특히나 정치인들은, 그간 자신들을 공격했던 화살들에 대해 자신들을 변호하느라, 또 변명하느라 바빴던 것 같음은, 현재의 내가 너무 부정적이었음을 암시하는 걸까. 그들은 톡톡 내 쏘고, 그것의 파급효과만 말할 줄만 알지, 풀어놓은 것을 묶어주지는 않고, 그 자리에서 멈추는 격이다. 끈이 풀린 채로는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다. 우린 무얼 해야 하나. 그렇죠. 펜대 꼬나잡고 주둥이 제대로 놀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죠. 그래, 그러니까 직설이지,하는 생각이 든다. 어떤 결과를 기대하려 읽었다면 나와 같은 추접스러운 서운함이 생길 거라는 거. 다만, 한 가지 명시해야 할 것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제 1조 2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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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조명애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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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맥 이쪽에서만 진실이고, 그 너머 세상에서는 거짓말인 것이 어떻게 진실이란 말인가?” 

미셸 드 몽테뉴, 「레이몽 스봉의 변호」, 『수상록』

 

 

난,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는 한 권의 책을, 읽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읽지 않은 것도 아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읽지 않은 것에 더 가깝겠다. 결코 두껍지 않은 책, 그리고 생각보다 빽빽하지 않은 활자들로 나열되어 있는 책은, 적어도 나라는 사람에게는 그곳에 아무런 애정도 가 닿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활자만 읽어 내려가야만 하는 책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매력이 없다. 나는, 책을 읽고 난 후,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또 어떤 줄거리인지조차도 가늠하지 못하고 책을 덮기에 이르렀음이, 나는 정말 편독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구나,를 새삼 깨닫게 된다. ㅡ 그래서, 두 번에 걸쳐 읽었다.  줄거리를 모르는 상태에서 활자만 읽어내려간 것이 첫 번째라면, 줄거리를 알고 난 후에 읽는 것이 두 번째였다. 그래, 그제서야 눈에 들어온다. 나는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책을 읽어왔던가. 그것은 비단 여유없음,을 핑계로 들기엔 부끄러움이 인다.

 

 

 

30여 년 전, 마드리드에 거주하는 알레한드로 베빌라쿠아. 그가 쓴, 아니 그가 썼다고 말하여지는 「거짓말 예찬」은 떠난 그가 남긴 걸작,이라고 불리워진다. 작품의 출판기념회 이틀 후, 그가 자신의 아파트 발코니에서 투신 자살을 하기에 이르른다. 그는 분명 신예 작가로 촉망받을 수 있었는데! 도대체 왜? 어째서? - 그의 죽음을 기자인 테라디요스가 재조명한다!

 

 

 

테라디요스는, 알레한드로 베빌라쿠아와 가까이서 생활한, 네 명을 목격자로 꼽는다. 첫 번째로, 알베르토 망구엘(작가 자신)이 화자로 나오는데, 그는 베빌라쿠아의 어둡고 우울함에 가득찰 수밖에 없었던 삶 전체를 아우른다. 철도 참사로 인해 돌아가신 그의 부모를 대신해 엄하기만 했던 외할머니에게 밑에서 자랐던 그에게는 분명 결핍이 존재했고, (개인적으로) 그가 그것을 사랑으로 대체하려고 했음도 눈에 띈다. 하지만 그의 사랑은 언제나 힘겨웠고, 그것 결핍을 더욱 증가시키는 꼴이 된다. 후에, 그라시엘라와의 만남에서 결핍이 채워지는가 싶었는데, 독재에 저항하던 그녀는 그의 삶을 안아 다독거리지는 못하고 그대로 헤어지게 된다. 뒤이어 감옥에서의 고문이라던가, 저자 자신 몰래 출간된 작품 「거짓말 예찬」은 그에게 최고조의 우울을 선물하고, 결국 그는 자살할 수밖에 없었다,고 화자는 그를 그렇게 ‘변호’하고 있었다. 두 번째 화자, 저자 몰래 작품을 출간했던 베빌라쿠아의 에스파냐 애인, 안드레아. 그녀는 베빌라쿠아의 「거짓말 예찬」이 자신으로 하여금 불러일으켰던 감흥을 이야기하며, 그의 책을 출간하게 된 과정을 설명한다. 세 번째, 감방 동료였 마르셀리노 올리바레스 (돼지라 불리워진다)의 이야기는 독자의 머릿 속을 혼란시키고, 미궁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가령, ‘어? 뭐야? 오마이 갓. 같은 거. 그는 「거짓말 예찬」의 저자는 따로 있으며, 그 저자가 다름 아닌 자신,이라고 말한다. 마지막, 네 번째 화자, 티토 고로스티사. 이 사람은 누구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는데, ‘아무것도 안 보여. 아무것도 안 들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라고 시작되는 그의 첫 문장은 죽은 사람,을 연상케했고, 역시나_ 어쨌든 그는, 다른 이들과는 확연히 다른 점을 보였는데, 세 명의 화자는, 「거짓말 예찬」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반면에, 네번 째 화자, 그만은 그것을 볼품없는 작품이라며, 꾸밈이 많고 젠체하는, 특색 없고, 생기 없는 책,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무래도, 난 티도 고로스티사의 ‘두려움에 대한 참작’은 두어 번 더 읽어봐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ㅡ 그리고 기자 테라디요스의 독백. 그는 어떠한 결론도 내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것을 내려놓는 즉시, 만나게 된다. 자신의 베빌라쿠아를.

 

 

 

한 사람의 삶을 타인의 눈을 통해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타당성이 있는지,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한 사람이 생애를 산다는, 아니 살아낸다는 것은, 돌연적인 요소가 무수히 많아서 타인의 생애를 두고, ‘그의 생애는 -였을 것이고, -였을 것이며, -였다.’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우리도 유명인의 죽음을 두고, -였을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그것을 꼬집는 한 마디가 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_ 진실은, 그 생애를 살았던 오직 단 한 사람만이 알 수 있다는 것. 하지만 말이다,  그것을 다른 시각에서는 볼 수 있지 않은가. 그것은, 그 사람의 어떤 생애를 보고, 듣고, 느꼈느냐의 차이인 게다. 나 또한,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을 대하는 것에 차이가 있듯이, 그도 그렇지 않았을까_라는 것, 그것의 간극은 이해해줄 수도 있지 않은가 싶은 것. 하지만 「거짓말 예찬」을 두고 벌이는 저자 논쟁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베빌라쿠아가 살아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이상, 네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가 된다.

 

 

 

오탈자 : 그것들을 조금만 다른 방식으로 배치하면, 어럽쇼! → 어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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