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그리고 고발 - 대한민국의 사법현실을 모두 고발하다!
안천식 지음 / 옹두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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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믿었다. 아니 믿었었다. 언제부터, 어디에서, 어떻게 비롯된 믿음인지는 모르겠으나, 대한민국에 쓰레기도 못한 대통령, 정치인, 경찰, 군인, 의사들은 많을지언정, 법관만큼은 올곧을 것이라 생각해왔다. 타인의 자유를, 삶을 말 한 마디로 결정하는 사람인만큼, 그럴 것이라 은연중에 믿어왔던 것이리라. 하지만 그 믿음은 너무 가혹하게 깨졌다. 세상에 믿을 새끼 하나 없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인가 싶었다. 경험해본 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였다. 법의 원칙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세워지지 않았고, 법관이라는 것들은 그것에 대한 경중도 판단하지 못하며, 그것 또한 무엇을 근거로 그러한 판단을 내리는지에 대한 의심이 싹텄다. 오래전 드라마 「내 딸 서영이」에서도 이서영 역을 맡은 이보영 씨가 한 말이 생각난다. 타인의 삶을 결정짓는 것이 힘들어 판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를 하겠노라,고.

 

 

그리고 지랄도 염병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게도 내가 그러한 사건을 겪고 나서 줄줄이 진경준 검사장, 현직부장판사 성매매, 사채왕 뇌물수수 받은 前판사, 정운호 구명로비 판사 연루 의혹 등 뉴스에 재미난 사건들이 뜨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눈여겨보지 않을 사건들이었는데, 내가 커다란 구멍을 겪은 탓인지, 무척이나 재미나게 다가왔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한 일련의 거짓말 같은 사건들이.

그래서였다. 안천식이라는 변호사가 쓴 이 책이, 꼭 읽고 싶다고 생각했던 까닭이. 하지만 내가 간과했던 것은, 목차만 보고- 여러 사건을 다룬 것인 줄 알았고, 그에 근거하여 대한민국의 사법을 비판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한 가지 사건에 대해 18차례 싸운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문장 해석에 따라 故기노걸 씨나 기을호 씨에게 실례되는 말일 수도 있지만, 이 사건을 바라보는 대한민국 사법은 무척이나 흥미롭게 여겨진다. (= 절대로 사건이 흥미롭다는 뜻이 아님을 오해 마시기를.)

 

 

 

 

D건설은 주택건설 사업을 위하여, 향산리 주민 24가구의 지주들과 토지에 대해 매매계약을 체결했다. 그중 한 사람인 기노걸 씨는 1997년 19억 6,000만 원에 토지에 대한 부동산 매매계약을 체결하고 계약금과 중도금으로 9억 8,300만 원을 지급받았다. 하지만 D건설은 1998년 IMF 유동성 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H건설에게 승계하게 된다. 그 사이에 땅값은 천정부지로 올라 40억 원까지 오르기 시작했고, 기노걸 씨는 약속한 잔금지급기일 내에 잔금을 지급하지 않았던 점을 지적하며, 대금을 올려주지 않으면 H건설과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상황에서 2004년 기노걸 씨는 뇌출혈로 사망한다. 그리고 H건설은 곧바로 기노걸 씨의 장남 기을호 씨에게 D건설로부터 승계를 받았으며, 기노걸 씨와 1999년 재계약을 했다고 하며 땅을 내놓아라, 요구한다.

 

 

하지만,

계약서에 기재가 되어있는 필체는 아버지 기노걸 씨의 것이 아니고, 막도장이었으며, 기재되어있는 계좌번호는 1997년에 해지된 예금통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D건설의 계약서를 보고 H건설에서 승계계약서를 위조로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가?

 

 

 

 

 

 

/ 대검찰청 문서감정실의 감정결과는 충격이었다. 사설 문서감정원장들도 대검찰청 감정결과 내용을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결과라고 하였다. 무엇인가 거대한 힘이 이 사건 전체를 지배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p.98

/ ​“에…… 꼭 재정신청 사건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고, 항소하더라도 무죄 부분이 번복될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고, 형량도 매우 적절하다고 판단되어 항소를 하지 않는 것으로 하였으니 그렇게 알고 계시지요.”

국민의 기본권은 그렇게 유린되어 가고 있었다. 그래도 대한민국은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 구석구석에서 오열하고 있는 피해자들의 모습은 단지 커튼 뒤에서 사라져가는 그림자에 불과할 뿐이다. p.165

 

읽는 도중, 몇 번이고 나는 너무나 화가 나서 그이에게 “나 이 책 읽기 싫어.”라고 말했다. 증인들의 뻔뻔한 거짓말들을 속아주는 거로 모자라, 증인신문조서엔 삭제된 진술이 있으며, 검사로부터 무시와 박해를 당하며, 상고를 하기 전부터 기각당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무시한 후 상고를 해도 기각당하기 일쑤이며, 위증죄로 신고했더니 도리어 무고죄로 신고당하며, 뻔한 증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묵살당하기 일쑤인, 또 당사자가 변론에서 주장하지 않은 사항(구상금 청구를 했을 뿐인데 부당이익금과 이자를 지급하라고 한 것)을 별도로 심리하여 판단하는 변론주의에 반하는 판결. 그런 이야기들을 어떻게 내가 태연히 읽어나갈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읽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힘도 없고 돈도 없고 빽도 없고 능력도 없는 대한민국 국민인 까닭이었다. 어쩌면 나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다.

   

 


소위 말해서 힘없고 배경 없는 서민들은 두 눈 멀쩡히 뜬 채로 재산 잃고 억울한 죄까지 뒤집어쓰게 되는 것이 대한민국의 사법 현실인 것이다. p.101

 


10년의 법정 싸움 끝은, 기을호 씨는 땅을 빼앗기고 돈까지 빼앗겼으며, 건강까지도 빼앗겼다. 기을호 씨만 불쌍하게 되었다. 로 끝나고 만다.

그는 계약금과 중도금으로 받은 9억 8,300만 원에서 천정부지로 오른 땅값을 더 쳐서 받기는커녕, 애초에 계약했던 잔금도 다 받지 못 했다. 그 돈에서 기을호 씨는 철거보상비로 50%나 증액된 3억 원을 내야 한다고 법원은 판시한다. 그 철거보상비라는 것은 D건설과 계약 시에 이주 보상비에 대한 2억 원으로 약정했다. 하지만 H건설과의 계약서엔 그런 부분이 명시되어있지 않으며, 3억 원이라는 금액이 어째서 적정한지 어떠한 근거도 없다. 또한 얼마 전에는 H건설로부터 2차 재심과 상고심 소송비용의 지급을 요구받고 있다고 한다.

 

 

나는 고등학교 때 헌법을 달달 외우던 정치 시간이 참 좋았다. 그 헌법을 외우고 있노라면, 공산주의로부터 멀어진 기분이 들었고, 나는 마치 이 나라에 주인이라도 된 듯 의기양양해지기만 했다. 따라서 가장 좋았던 헌법은 제1조 2항이었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하지만 지금, 이 문장이 가당키나 한가? 법 또한 이 나라를 살기 위한 국민을 지키기 위해 나오는 것이거늘, 지금 법은 누구를 향해 칼을 겨누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

 

그리고 이 서평을 쓰며 마지막으로 나도 한 마디 해야겠다. 며칠 전 나는 대전고등법원에 민원을 제기한 바 있었다. 이유인즉슨, 불친절한 응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내가 모르는 일이 처리가 되어있었다. 왜 일처리가 그렇게 된 것인지 적어도 나는 알 권리가 있었다. 하지만 내가 물어보는 것에 그들은 앞뒤 설명 없이, “우리가 어련히 알아서 하지 않았겠나.”하고 말을 했다. 그 대응에 화가 난 나는 직접적인 사과를 원한다고 했었다. 하지만 앵무새처럼 반복되는 죄송하다는 서면에 나는 그보다 위에 있는 직급에 있는 사람과 통화를 요구했고, 통화에 의하면, “저는 그것이 잘못되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본인이 사과를 하고 싶다는데 어떻게 강제적으로 하라고 시킵니까?”라는 답변이었다. 기피 신청에도 소용없이 그쪽 감찰실로 들어갔고, 세 번의 똑같은 요구의 내 민원은 법 조항이랍시고 끼적거리며 강제적으로 민원을 종결시키겠다는 마지막 서면을 받았다. 그게 바로 ‘제 식구 감싸기’라는 것이지. 내가 이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는데, 서평으로나마 이렇게 싸지를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참으로 지체 높으신 분들이라 하잘 것 없는 민원인은 찌그러져 있어야 하지요. 참 잘났다, 니들.

/

그리고 책에 대해 한 마디 덧붙이자면, 읽기가 조금 힘들었다.

차라리 「소수의견」처럼 소설화되어 읽을 수 있었다면 좀 더 편했을까? 생각했지만,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읽기가 힘들었다는 것은, 반복되는 이야기에 조금 지치는 느낌이었다.

어쨌든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당한 것에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입 다물고 잠자코 내 권리를 찾아주겠지. 하고 있으면 아무도 내 권리를 되찾아주지 않으니까.

 

 

 

 

 

 

 

 

오탈자 p.155 11째줄

<증인A>가 거짓증언한 사실“이 있더라고, 이 사건 계약서가 위조되었다는 증거로 부족하다고 한다 ▶ 있더라도

오탈자 p.223 5째줄

그 외 2000년 2월경에 위조 작성된 정일석 등 4인 명의의 부동산매매계약서는 <증A>의 필적이 기재되어 있다는 점 ▶ <증인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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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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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떨떨했다. 그 얼떨떨함이 하루 동안 지속되었다. 왜 자꾸 그 생각이 하루에 수백 번, 수천 번씩 뇌 회전을 동안에도 계속 그 자리에 고여있는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오기와 장모, 그 행동과 말 하나하나들이 육중하게 머리를 눌러댔고, 급기야 두통이 일었다. 그 두통을 털어버리는 것이 다름 아닌 서평이라고 생각했는데, 한글 파일을 열어놓고도 얼떨떨했다.는 그 한 문장으로 서평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것 이상으로 부연 설명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따라서 나에게 편혜영 작가의 은 기--, 얼떨떨했다.로 끝날 예정이다.

 

 

 

하필 오기에게만 그런 일이 닥쳤다. 오기의 세상만 무너졌고, 오기의 삶만 갈가리 찢어졌다. p153

아내가 먼저 죽은 것이 오기에게는 다행인 걸까, 아내가 정말 정원 가꾸기를 즐겨 했던가, 무슨 생각으로 정원을 가꾸었을까, 장모가 오기에 대해 아는 것은 어디부터 어디일까, 장모가 판 그 구덩이는 정말 연못을 만들려고 판 것이 맞는 걸까, 장모의 생각은 무엇일까. 이 모든 것에 대한 대답은 그 어떤 것도 명확하지 않다. 그저 작가가 써둔 이야기를 읽어나가며 유추해야만 해야만 했고, 그것에 대한 대답이 맞는지 얼버무릴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설의 묘미는, 장모의 표정, 행동, -이 전부였다는 것에 있었다. 그 홀에 나는 완전하게 빠져버렸고, 미처 다 빠져나오지 못해 허우적거리고 있는 꼴이다.

 

 

 

소설은 구멍으로 시작되어 구멍으로 귀결되었다. 오기의 유년시절의 구멍을 읽으며, 당신도 그 구멍 속에 빨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 살아내야만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삶을 지녔구나. 하고 생각했다. 유년시절의 구멍이, 아내를 만나 메워지는 듯하다가 다시금 눈에 뜨일 정도로 커져버렸다. 아마 불만족한 부부생활에 기인하여 온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오기는 학교 후배 제이와의 외도가 있었고, 그 구멍은 점차 커져갔다. 강원도 여행에서 생긴 교통사고는 그 구멍이 얼마나 큰지 확인시키는 일종의 ‘피할 수 없는, 그리고 피해서도 안 되는 하나의 필연적인 사건이었다. 처음부터 오기의 구멍은 메워질 수 없었는데, 그것을 오기가 몰랐던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리고 오기는 그 구멍 속으로 자의/타의에 의해 빨려 들어가고 만다. 그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계획되어있는 삶을 순차적으로 살고 있는데, 삶이라는 놈이 우연을 가장하여 잠시 도와주는 척하다가 곤경에 빠트리곤 종내는 구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입가에 미소를 걸쳐놓고 보는 것. 어쩌면 나의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얼떨떨함에서 빠져나와 비로소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오기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내가 열중하는 일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응원하고 싶었다. 재능은 있지만 계속해서 헛된 시도를 하고, 어떤 성취감도 얻지 못한 채 비아냥과 조롱만 늘어가는 아내가 애틋했다. 오기가 지난 시간을 제 영역을 확장하는 데 보냈다면 아내는 시간을 보낼수록 홀로 남겨졌다. 확실히 젊은 시절의 아내를 생각하면 지금의 모습은 안타까울 정도였다. p.84

여기서 서평을 끝내려고 했는데, 이 이야기는 반드시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가 하나 있다. 그것은 알게 모르게 굉장히, 치명적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었다.

 

 

정원을 가꾸는 건 전문가한테 맡기고 당신은 다른 일을 해보는 건 어때?”

다른 일?”

이런 거 말고 당신이 성장할 만한 일 말이야.”

나는 이미 성장기가 지났어. 식물이야 계속 자라지만 사람은 아니야. 어느 나이가 지나면 더 자라지 않아.”

그런 성장을 말하는 게 아니잖아. 당신이 하고 싶은 걸 찾아서……

계속 성장하는 게 있기는 있어.”

그게 뭔데?”

. 암은 성장기가 다 지난 사람한테서 자라잖아.”

당신이 정말 하고 싶은 걸 해보라는 뜻이잖아.”

내가 지금 정말 하고 싶은 게 이거야.” (p.88-89)

 

 

대부분의 남자들은 어쩐 일인지, ‘자신의 삶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여자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어도, 그것은 원치 않는 일을 억지로 하는 일이라고 자신만의 선에서 치부해버리고 만다. 그리고 말한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할 필요는 없어. 하고 싶은 일을 해.” 그것이 진정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인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원하지 않는다면 왜 그토록 그것에 매달리고 있는지 모르면서 쉽게 이야기하곤 하는 것이다. 아마 오기의 아내도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구멍을 메울 수는 없었어도 구멍이 더 커지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 어쩌면 대화, 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어쩌면, 이미 아내는 =구멍에 빠트려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구멍에서 오기가 자신을 꺼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도. (음, 모르겠다. 내가 너무 오기 씨의 아내에게 심취해버린 걸까.)

 

 

 

마지막으로, 장모가 읊던 다스케테 쿠다사이는 누구에게나 다 통용되는 말이었다. 장모에게도, 오기에게도, 아내에게도. 그리고 무엇보다, 힘든 삶의 진통을 겪고 있는 당신에게도, 말이다. 오기 씨의 구멍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빠지는지 확인하였다면- 이제 나의 삶의 균열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확인해봐야 할 차례다. 나는 그 구멍에 안 빠질 거라는 헛소리는 오만이자 착각이다.

 

 

오기 씨.

교통사고 의사 왈, 의학이 아니라 의지

열 살, 엄마의 죽음이 가져다준 구멍

변덕스러운 아내는 곧잘 생각의 가지치기를 한다

이사- 크고 작은 열네 개의 전구

강원도 여행, 운전은 오기 씨

아내의 반지 장모

8개월 만에 집에 돌아오다

장인- 트집 잡기 좋아함

장모- 시종일관 알 수 없는 표정

호루라기 2- 간병인 호출

간병인의 아들이 드나들기 시작

도둑질로 인하여 간병인이 내쫓김

다스케테 쿠다사이

 

오기와 장모는 서로에게 유일한 가족이 되었다. p138


 

/

오탈자 p64 15째줄. 자연스럽게 그런 애기가 나온 것 같았다.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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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알레르기
고은규 지음 / 작가정신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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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일곱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 『오빠 알레르기』는 『트렁커』 이후에 오랜만에 만나게 된 고은규 작가의 작품이었다. 여기서 잠깐, 나는 단편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었음을 밝혀야겠다. 장편보다 끝이 애매모호하기 때문이었다. 장편은 개연성에 의해 예측해야하는 상황을 맞닥뜨리지 않아도 되는데, 단편은 좀 읽을 만하다 싶으면 툭 끊겨버리는 아쉬움 때문에라도 부러 찾아서 읽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책을 읽는 습관을 약간 바꾸어보니, 생각을 해야 하는 시점에서 나는 생각을 하지 않고 그대로 다른 단편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당연히 작가가 숨겨놓은 지뢰를 터트릴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지뢰들을 하나둘씩 터트리며 이야기를 읽어보니, 단편은 생각 외로 다채로운 매력을 지닌 것이었다. 물론, 작품 해설을 읽으며, 내가 든 아이스크림 막대는 ‘하나 더’가 아니라 ‘다음 기회에’ 혹은 ‘꽝’ 일 때가 더 많지만. 따라서 나는 요즘 단편을 좀 더 찾아 읽는 중이다. 그래서 이전보다 좀 더 넓은(?) 마음으로 작품을 읽을 준비가 되어있었다는 사실을 서론에 굳이 밝히는 것이다.

 

 

 

 

이야기는 전반적으로 ‘죽음’을 밑바탕에 둔다. 내가 죽거나 (「차고 어두운 상자」), 가족이 죽거나 (「엔진룸」,「명화」,「딸기」, 「급류타기」), 아는 사람이 죽거나 (「오빠 알레르기」, 「급류타기」), 전혀 다른 생물이 죽기도 (「엔진룸」) 한다. 아니, 죽었는지 살았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딸기」)이 있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야기는 죽음과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죽음들을 통해, 작가는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일까. 결국은 ‘관계’가 아니었을까.

 

 

 

 

나, 「오빠 알레르기」를 읽으며 피식 웃었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이 다르지만, 정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구나. 싶어서. 남이야 오빠라고 부르던, 언니라고 부르던, 삼촌이라고 부르던 무슨 상관일까. 하지만 과거의 일은 그녀를 자칭/타칭 ‘꼰대’로 불리게 할 만큼 오빠-에 대한 알레르기가 생기게 했었음을 알고, 역시 사람의 행동거지, 생각의 하나하나에는 이유가 있음을 다시 한 번 인지했다. 공대를 나온 나는 이 사람도 오빠, 저 사람도 오빠였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선배라고 지칭해야함을 고등학교 동아리활동을 하며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대학 사람들은 선배 같지 않아 오빠라고 부른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 소영언니에게 몇 번의 뺨을 맞았을까- 생각하니 아찔하다. 그리고 나는 그이에게 직접적으로 오빠라고 부르지 않는데, 그것은 대학 사람들이 개나 소나 오빠라면, 본인은 그 개나 소가 되기 싫다는 매우 정직한 의견이었다. 그런 나는 적어도 남편에게 오빠라고 하지 않으니 꼰대인 ‘나’의 힐난을 면피할 수도 있었겠네. 라고 생각하며 웃기도 했고.

 

 

 

 

스토커 여자의 오지랖의 결과를 내비친 「맥스웰의 은빛 망치」와 죽겠다고 농약을 마시고 해독제를 찾는 「급류타기」도 인상 깊었지만,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것은, 「차고 어두운 상자」, 「엔진룸」, 「딸기」, 「명화」였다. 그 중 「엔진룸」이 더욱 그러했는데, 이 셋을 묶어놓은 까닭은, 절연하고 싶어도 절연할 수 없는 끈덕진 관계, 그러니까 숨이 막혀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버릴 수 없는 사람 =‘가족’으로 묶여져있어 ‘나’를 괴롭힌다는 데에 있었다. 어쩌면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차고 어두운 상자」가 왜 그곳에 끼느냐고. 그렇다면 나는 답변하겠다. 이지숙의 빚을 고스란히 떠안는 것은 오롯이 이지숙의 엄마인 까닭,이라고.

 

 

 

 

누군가 주검을 대하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고 했다. 그동안 얼마나 잘못 살아오고 있었던가, 살아온 날들을 뉘우치게 된다고 했다. 영훈의 생각은 달랐다.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도처에 깔려 있는 위험들이 그의 눈앞을 어지럽혔다. 마치 세상살이가 위험과 장애가 널려 있는 급류타기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p.144)

 

 

나는 이야기를 다 읽을 때마다 야트막한 한숨을 내쉬는 것을 반복했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급류를 타는 것과도 같아서, 너무나도 힘든 것이라고. 나는 그러한 까닭에, 이지숙이 살아서 그 빚을 다 갚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캥거루가 집에 있는 짐들을 싹 버리고 정신 좀 차리고 새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며, 대성약국 골목 오른편으로 꺾어지는 대흥연립주택 203호에 24개의 이빨이 돌아와서 120개의 튼튼한 이빨들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희망했고, 구덩이에 묻음으로서 모든 상황이 종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향후의 그들의 희망적인 삶을 염원했다. 하지만 삶은 그렇지가 않음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그들이 모인 자리에 가서 슬며시 끼고 싶었다. 그리고 함께 이야기하며 실은 나도 그러하다고, 결핍된 삶을 사는 이들이 당신들뿐만이 아니라고, 위로하고 위로받으며 그로인해 안도하고 싶었다. 급류를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평온할 일 없는 사람마저도- 내가 책을 읽는 그날만큼은 평온하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그것을 바라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의 일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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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에 관하여 - 나를 살아가게 하는 가치들
임경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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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님과 썸머님, 람이님 블로그에서 보았던 임경선 작가의 태도에 관하여가 도서관에서 나를 대출해주세요. 라고 나를 향해 손짓했다. 그렇잖아도 요즘, 소설에 물리고 있는 참이어서 그랬는지, 그도 아니면 이야기들을 읽어 내려가기에 머릿속이 엉켜 갈피를 못 잡는다던지 하는 까닭으로 오랜만에 만난 에세이에 지루함보다는 반가움이 먼저였다.

 

 

 

 

 

 

 

 

사실 나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감명 깊게 읽은 편이다. 평택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플랫폼에서도, 기차 안에서도, 기차에서 내리는 그 순간까지도 나는 그 책에 흠뻑 빠졌었다. 이후 저자 자신은 금수저이기 때문에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일 텐데 남에게 충고나 조언으로 불편하게 한다는 혹자의 말도 있었지만,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 하는 뼈마디 하나하나가 아픈 자아성찰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기에 더욱 열광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지금은 쳐다보지 않는 책이 되었을지언정.> 그리고 임경선 작가의 태도에 관하여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첫 문장부터 빠져들어 읽기 시작했다. 사실 별 거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내가 근래에 힘들어하는 부분을 어루만져 준 까닭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어린 시절 부모와 어떤 관계를 맺었냐가 성격과 삶의 태도에 영향을 준다는 이야기는 직접 아이를 키우면서도 통감하는 부분이긴 하다. 그래서 그들이 충족되지 못했던 부모와의 관계를 개서내보고자 소통을 시도해보고 부모를 변화시키려 노력하는 점도 십분 이해는 갔다. 불행히도 그것들은 대개 성공하지 못한다. 모든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지혜롭고 관용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나이 들수록 점점 고집스러워지고 어린아이처럼 이기적이 된다.

부모님이 나이가 더 드셨다고 자식이 바라는 대로 변해줄 리 만무하니 그런 모습을 보노라면 더욱 부모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치솟아 오른다. 그런 좌절된 마음은 더더욱 부모로부터 심리적으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버린 부모가 꿈쩍하지 않으면 나도 더 이상 여기서 한 발자국도 꿈쩍하지 못할 것처럼 엄포를 놓는다. 말로는 저항이지만 여전히 부모 앞에서는 불안한 눈빛으로 눈치 보며 인정과 사랑을 갈구하는 움츠린 어린아이다. p63-64

 

 

 

 

 

 

 

항변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나이 서른 넘어서까지 그럴 수는 없다. 어느 시점이 되면 어떻게든 꾹 삼키고 알아서 처리해버려야 한다. 애초의 원인 제공자가 누구든, 누구나가 인생의 한 시기에는 저마다의 지옥을 품고 가는 것이고, 훌쩍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라는 과거에 휘둘리면서 고여 있기를 자처하면 슬슬 그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기량이나 자립도를 묻게 된다. p65

 

 

 

 

 

 

 

 

 

 

알고 있다.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고로, 나는 이 에세이를 읽어도 내가 경험하지 않는 한 어떤 것도 변하지 않을 인간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그저 이렇게 글로 한 번 보고, 보고, 또 보아도 실천이 되지 않을 것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물론 저자도 이 글이 자신의 태도에 쓰고 싶었던 것이지, 누군가를 훈계하거나 조언을 하려고 쓴 글이 아닐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혹여나 그렇다면, 아주 많이 싫을 것 같다. 저자도 말하지 않았는가. 변화는 변하지 않는 것에서 오며, 모든 것은 경험한 것들을 통해 체득된다,.

 

 

 

 

 

 

나는 가치관이 바르지 않아도, 가치관이 직립된 사람을 좋아했었다. 그것이 간혹 오만하고 방자하며 거만해보이기까지 할 때도 있지만, 그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이 들었던 까닭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다. 그런데, 나는 저자가 부럽기까지 했다. 한 가지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방면인 것이 아닌 그것에 대한 확실한 정의가 내려져있다는 단편적인 사실이 아니라, 그 나이 대에도 (찾아보니 불혹의 중반을 지내고 있었다.) 그것들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이. 적은 나이지만 나의 경험만으로 내린 기준을 정의로 삼고 살아가던 나는 그 누구도 감히 유추할 수 없는 하나의 큰 사건과 그 외 자질구레한 사건들을 겪고 나니, 그런 가치관도 바뀔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겸손하고 겸허하게 살아가야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더란 것이다. 따라서 읽을 때는 공감하며 읽던 것들도 책을 덮고 나니 괜한 후회가 밀려온다. 어쩌면 요즘 나에게 필요한 것은 말뿐인 위로가 아니라, 해결방안인가 보다. 물론, 작가의 탓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꼭 이야기를 해야겠다. 마지막에 쓰여진 담화는 많이 지루했다. 책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그런 이야기들까지 책에 실을 필요가 있었을까. 생각해보는 부분이었다.> 나에게는 저자의 에세이는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고, 그 언젠가는 소설을 읽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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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을 나온 암탉 (반양장) - 아동용 사계절 아동문고 40
황선미 지음, 김환영 그림 / 사계절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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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아까워해서는 안 되는 계절, 바야흐로 봄이다. 지난주부터 강의를 차근차근 듣고 있는데, 그 중 내 마음을 사로잡는 과목은 여섯 개 중 겨우 두 개뿐인데, 그 중 하나는 역시나 독서와 논술의 이해. 나는 내가 지닌 있는 지식을 타인에게 전달하거나 교육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지만, 어쩐지 독서지도사라는 직업은 참 매력적이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이 동한다. 모르는 아이가 아니라 언젠가 나에게도 자식이 생긴다면, 조카가 생긴다면, 하는 미래를 바탕으로 꽤 재미있게 듣고 있는 과목. 그 과목에서 추천 동화가 여럿 나왔고 주말이 지나고 도서관을 찾아 그 동화책들을 검색하였으나 나오지 않는 게 더 많았다. 그 중 발견한 것은, 마당을 나온 암탉이었다. 이 제목으로 불과 며칠 전 영화가 상영되었던 것을 텔레비전에서 접했는데, 더빙이라는 점이 무척이나 불편해서 채널을 돌렸던 기억이 난다.

 

 

 

 결론적으로, 이 책이 추천동화책에 당당하게 올라와 있지만난 이 책이 무척 불편하다.

 ​물론, 잎싹()이 양계장에서 탈출하여 마당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구체적인 소망을 품는 부분, 그리고 그것이 실현되는 부분, 나그네(청둥오리)와 잎싹이 사냥꾼(족제비)에게서 초록머리(오리)를 지켜내려는 부성애와 모성애. 잎싹과 사냥꾼이 새끼들의 어미로서 지닌 공통적인 마음, 그리고 더 나아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하는 질문과 더불어 자기 성찰을 할 수 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배울만한 가치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내 시선은 엉뚱하게 다른 곳을 향해 있다. 초록머리는 종내 청둥오리 중에서도 어엿한 파수꾼이 되어 살아가지만,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그 과정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

 

 

1.

암탉이 깠어도 오리는 오리야! 우리 족속은 헤엄치고 자맥질하는 습성을 결코 잊지 않아. 특별히 배우지 않아도 당연히 안단 말씀이야. (중략)” 마당에서 도망쳐 나와 족제비에게 노출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키울 수밖에 없는 잎싹에게 마당에 사는 우두머리인 집오리가 "아기 오리를 데려 가겠다."하니 본인이 키우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점.

2.

엄마, , 오랫동안 생각해 봤어요.”

우리, 마당으로 가는 게 어때요? 외톨이로 사는 게 싫어.”

마당으로 가자고?”

어차피 나는 오리인걸. 괙괙거릴 수밖에 없어.”

그게 뭐 어떠니. 서로 다르게 생겼어도 사랑할 수 있어.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아니. 엄마, 나는 모르겠어. 이러다가 집오리들이 끝내 받아주지 않을까 봐 겁나. 나도 무리에 끼고 싶어.”

아가, 우리는 여태 잘 지냈잖아. 너는 영특해서 헤엄치고 나는 것도 혼자 터득했는데…….”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건 알아. 그래도 우리는 서로 다르잖아.”

다르게 생겼지. 그래도 나는 네가 있어서 기뻐. 누가 뭐라고 해도 너는 내 아기니까.”

엄마는 마당으로 가요. 나는 무리에 낄 테야!”

초록머리가 '나는 야생오리도 아니고 집오리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야. 외톨이로 사는 게 싫어. 마당으로 가서 집오리들과 어울리고 싶어.'라고 말한다. 하지만 잎싹은 본인이 마당에서 초록머리를 데리고 나왔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았다는 점.

 

 

 

 내가 불편해하는 점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초록머리도 본인이 집오리로 살 것인지 혹은 청둥오리로 살 것인지에 대한 선택권이 있기 때문에 여러 선택권이 있음을 오리에게 인지를 시켜주고 그 선택은 오리의 몫이라고 생각하는데 반해, 잎싹은 내가 품어 부화한 내 아이-로 오리의 삶을 본인의 삶과 동일시하려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모습은 꼭 오늘날의 어머니들이 아이들의 삶을 움켜쥐고 '넌 이렇게 해야만 해. 엄마가 시키는 거니까 무조건 이렇게 해.'라고 말하는 것 같은 착각에서 나오는 불편함이었다.

 

 

 이런 부분에 대해 이 책을 읽은 초등생의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됐을지 궁금했다. 교수님과도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순수하게 동화를 읽으라고 했더니 트집을 잡고 있네.’라고 생각하신 건 아닐까? 그래도 교수님께서는 감사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독서논술수업은 동화에 대한 감상만이 아닌 비판과 다른 의견 제시까지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다. 생각해보니 일전에 구이도 콘티의 닐로의 행복한 비행을 읽고도 혼자 열렬히 비판을 했던 기억이 나는데, 내가 너무 세상을 비뚤게 틀어놓고 사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된다. 어쩌면 동화를 읽는 내 시선이 너무나도 협소하고 단편적인 것도 문제라면 문제인데, 그것을 내 자신에게 당해낼 재간이 없으니 어쩌랴. 보다 더 열린 사고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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