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미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잘 알던 미로가

갑자기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어


미로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두려움에 빠져 주저앉았어


미로는 어디로 가야 할까

누가 미로를 이끌어 줄까


미로를 이끌어 줄 사람은 없어

미로 스스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로든 가야 해


미로가 가는 길이 틀릴지도 몰라

아니 그건 아무도 모르겠어

미로가 가고 싶은 길을 가길 바라


미로는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디든 가도 괜찮아

그러다 긿을 잃으면

조금 쉬었다 다시 나아갈 거야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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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고 선량하게 잦아드네 ㅣ 문학동네 시인선 224
유수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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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라디오 방송을 듣고 유수연 시인 첫번째 시집 《기분은 노크하지 않는다》를 만났다. 그때 무척 어렵게 느껴서 두번째 시집 《사랑하고 선량하게 잦아드네》를 만날지는 몰랐다. 우연히 여기 담긴 글을 다른 데서 보고 이 시집에 관심이 갔다. 내가 본 건 ‘시인의 말’이다. 그것도 시와 같구나. 시인의 말은 멋지게 쓰는 듯하다. 문학동네에서는 그것만 모아서 낸 것도 있는데. 기념책이던가. 여러 시인의 말을 한곳에서 만나는 것도 괜찮겠다.


 유수연 시인 첫번째 시집은 많이 어려웠다. 이번에 만난 《사랑하고 선량하게 잦아드네》는 그때보다 덜 어려운 느낌이 든다.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지난번보다 알아들은 게 많은 듯하다. 이번에 괜찮게 봐서 다음 시집은 망설이지 않고 만날지도. 그건 다시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알아들은 게 많고 마음에 드는 구절도 많았지만, 다 옮겨쓰지는 못하겠다. 시 전체보다 한두행, 한연 두연이 괜찮았다. 시인은 누군가와 헤어질 때마다 시를 쓸지, 한번 헤어진 걸 여러 번에 걸쳐서 시로 쓸지. 누군가와 헤어진 일을 여러 번 쓸 것 같다. 시를 보고 다 시인이 겪은 일이다 여겨도 될지. 자신이 겪지 않은 일도 쓸 거 아닌가.




 오렌지 한 알도

 한 시간 들고 있지 못한다


 그런 법인데


 너는 꽤 오래

 내 마음을 들고 있었다  (<걱정>에서, 26쪽)




 헤어지는 게 어려워 친구에게 상담을 받으러 갔다 오래 사귀었는데 마음이 떠난 것 같은데 어떻게 헤어져야 잘 헤어지는 건지 모르겠어 막상 그 말을 꺼내기 전에 다시 사이가 따뜻해진 것도 같아 아니 따뜻해진 게 아니라 미지근해진 것 같기도 해 여름보다 봄이 더 사랑받는다지만 어떻게 잘 헤어질 수 있을지 모르겠어 친구는 이야기를 다 듣기도 전에 당연하다는 듯 괜찮은 헤어짐은 없다고 했다 어떤 시간도, 머물지 않은 관계도 끊어내는 건 힘든 일이라고 혹시 너는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 무서운 건 아니냐고 그런 건 아니야 그저 남이 되는 게 아쉬운 걸까 아니면 살아 있는 사람을 장례 치르듯 다시 보지 못하게 되는 게 무서운 걸까 그런 생각을 하기 전에 헤어지는 게 어떠니 친구는 한심하다는 듯 나를 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표정이었다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울적해하는 너에게 지었던 내 표정이 그랬다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과 이별을 이야기 하는 동안 사람의 배움은 짧아진다 배울수록 미숙한 것은 괜찮은데 미천해지는 건 어떻게 참아야 할까 친구는 가고 나는 남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마음은 왜 떠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좋았던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 건 무엇 때문일까 그런데 내가 계속 너처럼 느끼고 너는 계속 남처럼 구는 이유를 모르겠다 종이가 빡빡할수록 접으면 선이 선명하게 남고 깔끔하게 찢어낼 수 있는데 우리 둘은 재생지처럼 자를 대고 찢어도 깨속 뭔가 더 뜯겨나갈 것만 같다


-<우리는 시간을 사랑으로 바꾸며 살았고 누가 먼저였을까 사랑과 바꾸긴 아깝다 생각한 사람은>, 31쪽




 앞에 옮긴 건 <걱정>에서 한부분이고 다음은 시 한편이다. 시도 길지만 제목도 참 길다. 여기엔 제목 긴 시가 여러 편 담겼다. 누군가와 헤어질 때 친구나 아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사람 있을까. 이 시에 나오는 사람은 그렇게 했구나.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 헤어지는 것도 중요하다. 친구가 괜찮은 헤어짐은 없다 했지만, 잘 헤어지기를 바란다. ‘마음은 왜 떠나는 걸까’는 여자 남자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금가버리라지


깨진 것도 붙이는데

사람 사이야 뭐 어렵겠어


근데 언니, 안 붙는 건 진짜 안 붙더라


액상 접착제가 제일 잘하는 건

제 입구를 먼저 막아버리는 것


노력은 지난 노력을 뜯어낸 후에 가능했어


근데 언니, 엎지른 것도

사실 거의 담아낼 수 있잖아


괜찮다 말해줄래?

나는 깨지진 않는 거잖아


길바닥에 던져져도 다시 일어나긴 하잖아


그게 문제였을까, 언니

멍은 없는데 왜 종일 박살난 마음이니


그 모양 그대로인데

왜 몇 조각 잃은 퍼즐 같니


완벽은 없다지만

언니, 나 괜찮다 말해줄래?


손금도 자주 씻어주면

운명도 붙는 날 있는 거겠지


-<희망>, 46쪽~47쪽




 시 제목이 ‘희망’이어서. 시에서 말하는 건 희망과 반대인가. 꼭 그렇지는 않을 거다. 지금은 부서진 마음 같아도 시간이 가면 좀 낫겠지. 그러길 바란다.




그것도 하기로 해요


잃어버리면

같이 헤매기로 해요


어두워지면

어두워지고


어려우면 멀어지기로


부르면 잠시

잠시 머물다


돌아가기로 해요


깨어나면

깨어지고


그때 붙이기로 해요

그땐 붙어 있기로 해요


하기로 해요


그것도 이제 해야 해요


-<여력>, 70쪽~71쪽




 이걸 볼 때는 그냥 마음에 들기도 했다. 이렇게 옮겨쓰니 뭔가 싶기도 하다. 맨 처음과 끝에서 말하는 ‘그것’은 뭘까. 잃어버리면 함께 찾으러가고, 잊어버리면 함께 헤매는구나. 거리를 두기도 하고 가까이 있기도 하는 듯하다. 힘을 한번에 쓰지 말고 남겨두자고. 이상한 말을 했구나.




했던 말을 나는 주워 담을 수 있는데

하느님은 그러지 못해 세상이 생겨버린 것


하신 말을 거둘 수 없어

아까운 사람만 일찍 거두어 가신다


미안해, 미안해 기도하면 그렇게 들리는 이유


-<완벽함은 하느님이 하시는 거니 나는 완벽함 근처도 가지 않기로 했다>, 105쪽




 앞에 시에서는 2연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시도 제목이 길다. 제목에서는 완벽함은 하느님이 한다고 했는데, 시를 보면 하느님도 완벽하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정말 했던 말 주워담을 수 있을까. 이 시도 다시 보니 잘 모르겠구나. 시에서 조금만 알아들어도 괜찮겠지. 괜찮다고 해줘.


 내 마음에 드는 시구가 있다 해도 시 전체를 알기는 어렵구나. 갑자기 사람 마음이 가장 어렵다고 한 게 생각난다. 그것과 비슷한 말이 담긴 시도 있다. 유수연 시에서는 슬픔보다 쓸쓸함이 느껴진다. 시로 쓰는 건 그런 것일 때가 많겠다. 슬픔을 담담하게 나타낸 건지도. 다른 사람 슬픔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겠지. 그저 슬프겠다, 아프겠다 할 뿐이다. 자신의 슬픔이나 아픔도 다른 사람은 모른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조금이라도 공감하면 낫겠다.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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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6-07-17 2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첫 시집보다 두 번째 접한 시집이 더 가깝게 느껴진다는 건 그만큼 마음을 많이 여셨다는 뜻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시가 좋네요.^^

희선 2026-07-18 11:13   좋아요 1 | URL
마음을 열어서 좋게 느끼기도 했다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군요 제가 좋게 봤다고 이걸 친구한테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이젠 책 별로 안 볼지도 모를 텐데...


희선
 


잘 자요





잠 잘 자세요

꿀처럼 단잠


잠을 잘 자야 합니다

잠을 조금만 자도 괜찮다

정신으로 이길 수 있다는 말에

속지 마세요

아주 잠깐은 정신으로 버텨도

길어지면 안 됩니다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도 있잖아요


날마다 깊이 꿈도 꾸지 않고

자면 좋겠지만

지금 세상은 그걸 힘들게 합니다


잘 때만은 편안하길 바라요

잠이 잘 들지 않아도 누워 있어요

이런저런 생각해도 괜찮아요

그러다 보면 스르르 잠이 들 거예요


새로운 인사가 생각났습니다

늘 잘 자요

앞으로는 이걸 써야겠어요


“잘 자요”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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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립백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G1 게뎁 첼첼레 - 12g, 5개입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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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립백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G1 게뎁 첼첼레, 포도 산미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꿀의 단맛은 조금, 마카다미아의 고소한 맛이 있다. 늘 쓰여 있는 걸로만 맛을 말하는구나,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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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 두 개 ㅣ 소설의 첫 만남 33
이희영 지음, 양양 그림 / 창비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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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속에서 만난 사람을 실제로 만나기도 할까. 지금까지 난 그런 일은 없었다. 어쩌면 내가 잊어버린 거고 꿈속에서 만난 사람을 실제로 만난 일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꿈속에는 모르는 사람이 나오기도 한다. 알지만 한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도 나온다. 이름이 잘 알려진 사람이 뜬금없이 나오는 일도 있구나. 그런 일은 왜 일어날까. 그런 건 꽤 좋은 꿈일까. 연예인이 나온 꿈을 꾸고 복권 당첨된 사람도 있다고 하니. 난 그런 꿈 꿔도 복권 살 생각은 안 했다. 앞으로도 그러겠지.


 이 소설 《쿠키 두 개》에서 ‘나’는 여름방학 동안 엄마가 하는 수제 쿠키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한다. 엄마가 다른 디저트도 하고 싶다면서, 그걸 배우러 다니는 시간 동안 가게를 봐야 했다. 쿠키 가게 이름은 ‘쿠키 한 개’다. 이 책 제목은 ‘쿠키 두 개’구나. 난 쿠키 하나도 두 개도 혼자 먹겠다. 이 이야기에서 그런 거지만 쿠키 비싸구나. 하나에 천오백원이라니. 쿠키가 좀 클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별 생각을 다했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는 날 꿈을 꾸었다. 방울소리가 나는 손이 나오고 그 손이 ‘나’와 같은 또래 남자아이를 가리켰다. 가게에 꿈속에서 본 남자아이가 나타났다. 남자아이는 쿠키를 그렇게 좋아하는 것 같지 않은 듯 아무 쿠키나 두 개를 사 갔다. 그렇게 남자아이는 날마다 쿠키 가게에 오고 쿠키 두 개를 사 갔다. 어느 날 ‘나’는 남자아이한테 꿈속에서 만난 적 있지 않느냐고 말한다. 그날 뒤로 남자아이는 가게에 오지 않았다. 방학이 끝나갈 때쯤 남자아이가 쿠키 가게에 오고 녹차 쿠키를 찾았다. ‘나’는 말차 쿠키가 녹차 쿠키다 했다.


 다음엔 남자아이 시점으로 이야기가 나온다. 낯선 도시 낯선 동네에 오기 전에 남자아이는 아이들이 얼마 없는 학교에 다녔다. 아홉해 동안 L과 남자아이는 같은 반이고 친하게 지냈다. 남자아이는 고등학교도 L과 같은 곳에 다닐 거다 했는데, L이 먼저 세상을 떠난다. 남자아이는 2학기부터 새로운 고등학교에 다니게 됐다. 학교에 다니기 전 여름방학 동안 남자아이는 저도 모르게 ‘쿠키 한 개’에 가고 쿠키 두 개를 샀다. 마지막 쿠키 두 개는 남자아이와 ‘나’가 하나씩 먹는다.


 남자아이는 ‘나’가 꿈속에서 만났다고 했을 때 자신은 꿈을 꾸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남자아이는 꿈속에서 L을 만나고 둘이 쿠키를 하나씩 나눠 먹었다. 잠이 깨면 그 꿈을 잊었다. L은 마지막 꿈에서 남자아이한테 쿠키를 사고 남자아이와 ‘나’한테 하나씩 먹으라고 한다. 남자아이는 꿈을 기억하지 못했는데 L이 말한대로 했다. L은 혼자가 될 남자아이를 생각하고 ‘나’의 꿈에 나타나고 남자아이를 가리킨 건 아닐지. 그렇다고 믿고 싶다.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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