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담 : 두 번째 아이는 사라진다 문학동네 청소년 13
방미진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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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못 위에서 형제가 사진을 찍으면 둘째가 사라진다.

 

― 연못 위에서 일등과 이등이 사진을 찍으면 이등이 사라진다.

 

― 연못 위에서 첫번째 아이와 두번째 아이가 사진이 찍히면 두번째 아이가 사라진다.  (40쪽)

 

 

이 세상에 가장 잘 알려진 두번째 사람은 모차르트를 샘하여 미워한 살리에리다. 살리에리도 나름대로 잘했을 텐데 모차르트 때문에 자신이 첫번째가 되지 못해서 괴로워했다. 아니, 첫번째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던가. 그것보다는 살리에리도 모차르트와 같은 천재가 되고 싶었던 것일지도. 살리에리는 어느 누구보다 모차르트를 인정했고 자신이 모차르트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살리에리는 차라리 모차르트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바랐다. 그러면 더는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니까. 모차르트가 힘들었던 때 살리에리는 모차르트한테 곡을 만들게 했다. 이것은 영화에서 본 것인데 실제로는 어땠을지. 모차르트가 그 곡을 끝냈는지 어쨌는지 잘 모르겠다. 그 곡을 쓰고 죽었던 것 같다. 그것은 진혼곡(레퀴엠)이었다. 천재라 해도 자기관리를 제대로 못하면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이다. 살리에리가 품은 나쁜 마음도 조금 영향을 미쳤을 테지만. 몸이 아픈 모차르트가 말해주는 것을 살리에리가 받아적었던 것 같기도 한데. 모차르트가 죽고 나서 살리에리는 좋았을까. 어쩐지 그 반대였을 것 같다. 모차르트는 살리에리한테 경쟁 상대였다. 모차르트는 살리에리를 어떻게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경쟁할 상대가 없어지면 재미없지 않을까. 살리에리는 모차르트가 죽어서 모든 게 덧없게 느껴졌을 것 같다. 자신을 불태웠던 감정이 사라졌을 테니까. 그것을 바랐던 것일까.

 

많은 사람이 생각하고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일등한테만 빛을 비춘다. 그 보기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네 해마다 열리는 올림픽이다. 세계운동회. 선수들은 올림픽에 나가기 위해 무척 애쓴다. 아마 거의 하루종일 운동과 그것만 생각하지 않을까. 거기에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조금이고 이것은 어느 나라나 같을 것이다. 사실 올림픽에 나가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다. 올림픽에 나갔으니 선수가 메달을 따고 싶어하고 따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메달 소식은 우리나라에도 알려진다. 방송에서는 금메달을 딴 사람을 더 잘 보여준다. 어쩌다 처음으로 메달을 딴 종목이면 은메달이든 동메달이든 상관하지 않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도 우리나라 선수가 금메달을 따면 더 좋기는 하다. 그러나 은메달도 동메달도 모두 값지다. 올림픽 같은 큰 경기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메달을 따는 것은 대단한 일 아닐까. 메달 색깔과는 상관없이 말이다. 보기만 하는 우리가 그렇게 생각해야 하지만 선수 자신도 그래야 한다. 메달을 따건 따지 못하건 올림픽에 나간 것 자체를 자랑스럽게 여기면 좋겠다.

 

내가 아는 괴담은 별로 없다. 들은 적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지금 바로 생각나는 것은 없다. 이 책을 보다보니 아야츠지 유키토의 《어나더》가 떠올랐다. ‘어나더’는 한 마을에 일어나는 일이어서 더 섬뜩하기는 하다. 그 책을 보고 그런 일이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지옥소녀>도 생각났다. 누군가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은 ‘지옥소녀’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람은 0시가 다 되어갈 때 인터넷에서 지옥소녀 사이트를 찾는다. 0시가 되면 그곳에 접속한다(거기에는 0시에만 접속할 수 있다). 진심 반 호기심 반으로 찾아보고 그곳이 나오면 지옥에 보내고 싶은 사람 이름을 적는다. 잠시 망설이는 사람도 있지만 결국에는 지옥에 보내기로 한다. 거의 누군가한테 괴롭힘을 당하다 참을 수 없어서 그곳을 찾았다. 어쩐지 그 안에는 두번째 사람도 있었을 것 같다. 자신이 첫번째가 되기 위해서. 여기에는 그런 사람이 나온다.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을 샘하고 미워해서 사라지기를 바라는 사람 말이다. 청소년 소설인데 이렇게 어둡다니(생각해보니 어두운 게 이것만 있는 것은 아니구나). 제목부터 ‘괴담’이니 이것은 어쩔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은 사람 마음속 깊은 곳을 비추고 있다.

 

어떤 이야기에는 착한 사람만 잔뜩 나오기도 하는데, 여기에 나오는 사람은 반대다. 그렇다고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고 보니 착한 사람만 나온 이야기에서는 서로를 인정해주고 서로가 잘되기를 바랐다. 여기에서는 왜 자신이 더 사랑받지 못하고 가진 것이 없는가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게 학생만은 아니었다. 엄마는 자기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더 잘해야 했다. 그렇게 되게 하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선생님은 학생을 샘하고 미워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졌기 때문에. 그 아이를 괴롭히기 위해 다른 아이들을 끌어들였다. 책을 보고 실제로 이런 사람들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첫번째, 두번째는 되어본 적이 한번도 없다. 누군가를 샘하고 미워하는 것도 상대가 있어야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렇다고 그런 마음을 가져본 적이 한번도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저 그런 마음이 오래 가지 않을 뿐이다. 나 자신이 더 괴로우니까.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더 모자라잖아. 조금 슬픈가.

 

서로가 가진 것을 더 끌어올리기 위한 경쟁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사라지면 자신이 첫번째가 될 텐데 하는 생각은 잘못되었다. 사람은 다 다르고 가지고 있는 것도 다른데 왜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부러워하는 걸까. 이런 말을 하는 나도 그러기는 한다. 아주 부질없는 일인데, 그것을 더 빨리 알게 된다면 좋겠지만 어려운 일이다. 안다 해도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는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기도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인정해주고 자신이 가진 것을 찾아서 갈고 닦아야 한다.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첫번째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사회도 그렇게 바뀌지 않을까. 자기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사라지면 그걸로 끝일까. 그렇지 않다. 상대는 끊임없이 나타난다. 다른 사람을 샘하고 미워할 게 아니고 좋은 경쟁을 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두번째 아이가 사라진다.

 

거짓말.

 

애초부터 모든 게 추측에 불과했다. 프리즘처럼 던져진 한 문장의 괴담이 있었을 뿐.

 

늘 사라지는 건 두번째 아이. 남는 건 첫번째 아이. 지연은 언제나 남았다. 하지만 지연은 한번도 첫번째 아이가 될 수 없었다. 두번째 아이가 눈앞에서 사라져 가는 그 순간조차도 지연은 자신이 첫번째 아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언제나 두번째 아이였다.

 

― 두번째 아이가 사라진다.

 

어쩌면 이 괴담 자체가 위험할 정도로 끝이 없는 거짓말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두번째 아이니까. 사라지는 것도 남는 것도 모두 두번째 아이.

 

남은 우리 역시 언젠가는 사라질지도 모른다. 지금 남아있는 건 그저 먹잇감을 끌어오는 미끼 노릇이 남아있어서일 뿐.  (238쪽)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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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4-01-03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의 세 문장이 정말 섬찟하네요...

희선 2014-01-05 23:13   좋아요 0 | URL
어떤 것 무생물 이런 이야기도 그런 것에 가깝잖아요 시간이 흐르면 그 이야기 자체에 어떤 힘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절로 움직여서 그런 말이 필요한 사람한테 나타나는 거예요 그렇구나 하고 덥석 물어버리면 안 될 듯합니다^^

도박을 하는 사람의 마음을 먹고 사는 바쿠치간이 생각나기도 하는군요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