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의 여름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구수영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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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사람이 사는 세상은 경쟁이 심하다. 사람은 언제부터 경쟁하는 걸까. 언젠가 사람이 처음 경쟁하는 사람은 형제다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사람은 태어나기 전부터 경쟁하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이 세상에 나온 건 경쟁에서 이겨서겠지. 정말 그럴까. 그런 것 같기도 하면서 그건 자신이 바란 건 아니다는 생각도 든다. 사람한테 자아라는 게 생기는 건 세상에 나오고 시간이 흐른 다음일 테니 말이다. 이 책 《호박의 여름》을 보고 별 생각을 다했다. 어떤 말로 시작하면 좋을지 몰라서 한 말이기도 하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 경쟁이 없기를 바라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걸 싫어한다고 해도 그걸 아주 안 하는 건 아닐 거다. 사람은 순수하게 자기 생각으로만 살지 않겠지. 그런 게 있기나 할까.


 어릴 때는 부모한테 여러 가지 배우겠지. 부모가 마음먹고 아이한테 뭔가를 가르치지 않아도 사람은 부모를 보고 여러 가지를 배운다. 사람은 사회 동물이라고 하지 않는가. 아니 사람만 부모를 보고 배우지는 않는다. 동물도 잠시동안 부모와 살면서 여러 가지를 익힌다. 나자마자 엄마를 먹는 거미도 있지만. 동물은 사람보다 부모 곁을 빨리 떠난다. 사람도 자식이 자기 곁을 빨리 떠나기를 바랄까. 그런 사람도 있고 언제까지나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겠다. 서로 떠나지 못하는 거겠지. 그것 또한 그리 좋은 건 아닐 것 같다. 부모도 사람이고 자식도 사람인데, 왜 부모 자식은 쉽게 떨어지지 못하는 걸까. 세상도 그렇다. 부모는 자식을 잘 길러야 하고, 자식은 부모를 잘 모셔야 한다고 한다. 그걸 ‘효’ 라는 말로 잘도 포장했구나. 아픈 부모를 모시는 사람은 그걸 효라 생각하지 않는데, 다른 사람은 그렇게 말한다. 좀 우습구나.


 여기엔 미래 학교라는 배움터가 나온다. 세상 사람은 그곳을 종교단체로 알기도 하지만, 종교단체는 아니고 아이를 세상에서 하는 것과 다르게 기르는 곳이다. 부모와 아이는 함께 살지 않았다. 아이들끼리 자라게 하면 자주성이 생긴다고 믿었다. 그런 말 아주 틀린 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어릴 때부터 부모와 떨어져 살게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문제 있는 부모가 있기도 하겠지만, 아이는 자기 부모와 살고 싶어할 거다. 학교처럼 다른 식으로 공부만 하는 곳이었다면 더 나았을 텐데. 부모 없이 아이들끼리 지내면 자주성이 생기겠지만 외로울 거다. 그건 다른 사람이 채워주지 못한다, 못할 거다. 처음부터 부모 없이 자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부모가 없는 사람과 부모가 있지만 따로 살아야 하는 사람은 다를 거다. 세상에 가장 좋은 교육이 있을지.


 미래 학교는 세상과 다른 교육을 한다는 믿음으로 만든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 것에 감화되어 자기 아이를 거기에 넣은 사람도 있고, 미래 학교에서 일하는 부모도 있었다. 이 소설 처음 봤을 때는 대체 여기는 뭐 하는 곳인가 했다. 가끔 사라지는 아이도 있다고 해서 아이들을 교육하는 곳이라기보다 아이를 어딘가에서 데려다 놓고 장기를 파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내가 더 무서운 생각을 했구나. 언젠가 그런 거 본 적 있다. 부모가 없는 아이만 있는 곳에서 아이 장기를 부자한테 주게 하는 거. 미래 학교는 그런 곳이 아니어서 다행이지만, 좋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어릴 때부터 이곳에서 산 미카는 부모와 살고 싶었는데. 그건 미카만 바란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말하지 않았지만 많은 아이가 그랬을 거다. 거기에서 자라고 어른이 되고는 바깥 세상으로 나가지 못하기도 했다. 새장 속 새가 된 느낌이다. 자유롭게 생각하게 한다고 했는데, 좁은 세상에서 그런 생각을 한들 무슨 소용 있을까. 다른 사람이 그곳을 종교 단체로 생각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샘물을 신성하게 여기기도 했구나.


 소설은 미래 학교 배움터에서 여자 아이 백골 시체가 나온 걸로 시작한다. 그 시체가 자기 손녀일지도 모른다고 여기고 그 일을 변호사 곤도 노리코한테 알아봐달라고 했다. 노리코는 어렸을 때 초등학교 4학년에서 6학년까지 여름 방학 한주를 시즈오카 현에 있는 미래 학교 배움터에서 보냈다. 노리코는 그동안 그곳을 잊었다가 백골 시체가 나왔다는 뉴스를 보고 떠올린다. 노리코는 백골 시체가 오래전 여름에 거기에서 만난 미카가 아니기를 바랐다. 초등학생 때고 여름에 겨우 한주만 보냈다면 잊기도 하겠지. 그때 만난 친구와 늘 친구다 말한다 해도. 그런 거 보면 아쉽다. 아무리 좋았다 해도 그걸 잊는 사람도 있지만, 그 말에 기대 사는 사람도 있을 테니 말이다. 난 어느 쪽일까. 반반인 것 같다. 어떤 건 잊고 어떤 건 기대는. 누구나 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나 좋을 때 한 말을 잊은 사람을 탓하면 안 되겠다.


 노리코는 여름에 잠시 동안 지내는 배움터가 좋았다. 거기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좋아도 거기에 사는 사람도 좋을까. 모두 안 좋은 건 아닐지도 모를 일이다. 부모와 살지 못해서 쓸쓸한 아이도 있었다. 아이는 부모 물건이 아니다 하면서 따로 살게 하는 게 맞는 일일까. 부모와 아이도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하지만, 미래 학교는 그 거리가 멀었다. 그걸 깨달았을 때는 많이 늦었겠지. 어딘가에서 잘 살겠지 여긴 자기 아이가 백골 시체로 나타난 부모가 그랬을 거다.


 처음 부모가 된 사람은 아이를 어떻게 기르면 좋을지 모르겠다. 뭔가 좋은 게 없을까 하다가 미래 학교라는 곳을 알고 거기에 아이를 보낸 사람도 있겠지. 그건 자기 책임을 남한테 떠넘긴 것 같기도 하다. 아이를 어떻게 기르면 좋을지 모른다 해도 그저 곁에서 사랑해주면 괜찮을 텐데. 아이가 부모한테 바라는 건 좋은 교육보다 조건 없는 사랑일 것 같은데. 나도 잘 모르면서 이런 말을 했다. 아이가 자라고 부모 곁을 떠난다고 하면 보내주고, 어릴 때는 함께 지내는 게 더 낫겠다.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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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5 22: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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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1 00: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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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6 17: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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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1 00: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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