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기억해? 내 빨간 원피스, 명절 전 장터를 돌아다니며 골라준 그 쨍한 옷 말이야 그날 손금 사이로 녹는 아이스크림이 굉장히 거슬렸어 그래서 나는 명절이 지나도 할머니 집에 왜 남아야 하는지 묻지 않았지 엄마 기분을 이해하거든 아이스크림 막대가 아니라 손바닥에 들러붙는 한줌 바람을 버리고 싶었던 가엾은 엄마

 

 난 잘 지내 비어버린 외양간에서 여물 냄새가 좀 난다는 것만 빼고, 이상한 건 옆집마다 집을 허물어 온 가족이 비닐하우스에서 잠을 자도 내일이면 벽돌을 이만큼씩 올리고 있다는 거야 완성되는 옆집을 볼 때마다 할머니는 물끄러미 나를 쓰다듬었어 왜 저들은 웃고 있을까

 

 그림자가 길어지면 오후가 찢긴 몸을 쉬러 집에 들렀어 그마저도 구석에 있던 들풀거미가 예민한 다리로 햇볕을 살라먹었지 나는 개의치 않았어 빨간 원피스 입고 마을 어귀로 나갔을 뿐이야 태양이 마지막으로 타오르는 중이었어 흔들리는 배경이 온통 붉었어 오도카니 선 내게 마을 사람 몇몇이 망설이는 눈으로 편지를 욱여넣었지

 

 편지봉투에 콩을 넣어 보내는 노인과 손자에게 천 원짜리 몇 장 동봉하는 투박한 발신인이 쌓였어 각자의 감정으로 나는 속이 채워졌지 어떤 날 콩이 그리움 수만큼 터져 내 안에서 튀어오르면 재채기를 참느라 코를 꾹 눌렀어 중요한 건 담뱃가게 주인은 수신 없는 감정을 자주 부치러 왔다는 거야 빨간 원피스를 잡고 엉엉 울기도 하고 그의 알 수 없는 갈망으로 입안을 채운 날이 많아 그러면 나는 편지를 게워내고 그날의 반쯤 녹은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졌어

 

 시골은 저녁이 일러 곧 어둠은 들풀거미처럼 나를 발라먹겠지 그전에 할머니가 이곳으로 와 손을 이끌 거야 깨닫지 못했던 감정을 이해하는 순간이 있잖아 그건 누군가가 나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를 썼다는 증거 그렇다면 엄마, 그날 나에게 몇 장의 편지를 쓴 거야? 할머니가 보여 멀리서 가뭇거리는 발짓이 위태로워 어둠은 나보다 먼저 삼킬 것이 많은 듯해 안녕 엄마

 

-<우체통>, 86쪽~87쪽

 

 

 

 

 

 

 김희준 시집에 담긴 <우체통>입니다. 시인이 어릴 때 이야기와 둘레에서 본 이야기 같습니다. 우체통을 빨간 원피스라 한 거겠지요. 편지를 부치러 오는 사람들. 이제는 조금 보기 어렵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래도 빨간 우체통은 여전히 있고, 누군가한테 편지를 쓰는 사람도 있겠지요.

 

 책은 언제나 읽지만, 가을엔 더 만나야 할 것 같고 편지도 가을에 더 써야 할 것 같습니다. 가을에 편지 별로 못 썼습니다. 구월에 자주 써야지 생각했는데, 생각만 했네요. 아니 처음에는 썼는데, 시간이 흐르고 별로 못 쓰게 됐어요. 이달에는 더 못 썼습니다. 시월 얼마 남지 않았네요. 시월이 가기 전에 편지 조금 써야겠습니다.

 

 제가 보낸 편지가 길을 잃지 않고 가기를. 거의 잘 가는데 잘 못 가는 것도 있어서.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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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10-24 11: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체통 📪 그립네요 ㅋ이젠 찾기 어렵네요 ㅜㅜ 편지가 잘 갔으면 좋겠네요~!!

희선 2021-10-25 00:08   좋아요 1 | URL
요새는 거의 잘 가고 오던데... 우체국 앞에는 우체통 있으니 우체국에 가면 볼 수 있어요 이제 길에는 별로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희선

그레이스 2021-10-24 20: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표값이 얼마인지 모르겠네요
제가 아는 분이 갖고 있던 우표 붙이려고 했더니 편지 봉투를 도배했다고...^^

희선 2021-10-25 00:09   좋아요 2 | URL
보통 우표는 430원이고 규격 아닌 건 520원이에요 기념우표 사는데, 보통 우표도 조금 샀어요 이번에 나온 건 예쁘더군요 전에 두번(330원 380원) 나온 건 태극기 조금 다른 거였는데, 이번에도 태극 문양은 들어가고 훈민정음이 들어가 있어요 520원은 무궁화예요 이것도 예전에 두번 나온 것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릅니다 이번 구월부터 오십원 올랐어요 우표 많이 붙이는 건 등기 보낼 땐데... 등기 많이 올라서 얇은 책밖에 못 보내요

https://blog.naver.com/stampmuseum/222487847222
지금 찾아보니 우표박물관 블로그가 있네요 여기에 우표 그림 있으니 한번 보세요 다른 우표도 있군요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