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 문학동네 시인선 125
이은규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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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집 사고 한해 넘게 지난 것 같아. 첫번째 시집도 사고 시간 많이 지난 다음에 본 것 같은데, 두번째도 그러다니. 그래도 보기라도 해서 다행 아닐까. 예전에 산 시집은 거의 한번은 보기는 했어. 아니 사두기만 하고 한번도 안 본 거 몇권 있을지도. 그건 시집을 어쩌다 한번 샀을 때였을 거야. 지금도 시집 자주 사지 않고 자주 못 만나. 한달에 한권 봐야지 한 적도 있는데. 어느 달에는 여러 권 만나기도 했는데. 이 말 예전에도 한 것 같군. 시를 보면 좋기는 한데, 시집을 보고 나서 무슨 말을 써야 할지 걱정스러워서 시집 보기 미뤄. 이 시집도 그랬어. 마음먹고 빨리 만나려 했다면 더 좋았을걸. 시집을 한권 보면 다음에 볼 게 없어서 또 살지도 모르잖아.

 

 첫번째 시집 제목은 《다정한 호칭》이었는데, 이번에는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야. 이 시집 어디에서 샀을까. 책방에서 샀어.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 책방에 갔더니 이 시집이 없더라고. 책 나오고 거의 한달 되려 했을 때였는데. 거기에는 새로 나온 시집이 있을 것 같아서 갔는데. 주문하고 며칠 뒤에 사 왔어. 이 시집은 2019년 7월 여름에 나왔어. 시집 색 봄 같지 않아. 시를 보니 봄을 말하는 게 많더군. 좋은 봄은 아니야. 그렇다고 안 좋은 봄도 아니야. 잊지 않아야 할 봄이야. 알지 2014년 4월 16일. 이은규는 그날을 잊지 않으려고 시를 여러 편 썼을까. 봄이 올 때마다 썼을지도. 2014년이 가고 봄은 여러 번 다시 왔지. 그때와는 다른 봄이겠지만. 언제든 같은 날은 아니지.

 

 

 

누가

봄을 열었을까, 열어줬을까

 

허공에서 새어나온 분홍 한 점이 떨고 있다

바다 밑 안부가 들려오지 않는데, 않고 있는데

 

덮어놓은 책처럼

우리는 최선을 다해

세상에서 가장 이기의 말을 반복했다

미안(未安)

잘못을 저지른 내 마음이 안녕하지 못하다는 말

이제 그 말을 거두기로 하자, 거두자

 

슬플 때 분홍색으로 몸이 변한다는 돌고래를 본 적이 있다

모든 포유류는 분홍분홍 울지도 모른다

 

오는 것으로 가는 봄이어서

언제나 봄은 기억투쟁 특별구간이다

그렇게 봄은 열리고 열릴 것

 

인간의 한에서 악을 골랐다고 말한다면

오래 바다에 귀 기울이자

슬픔은 날마다 새로 태어나는 그 무엇이어서

봄은 먼 분홍을 가까이에 두고 사라질 것

 

성급한 용서는

이미 일어난 일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만든다

오래 이어질 기억투쟁 특별구간

 

멀리서 가까이서 분홍분홍 들려오는 말

덮어놓은 책은 기도와 같다는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오고 있을 문장은 기도가 아니라 선언이어야 할 것

 

봄을 닫기 전에, 닫아버리려 하기 전에

누군가

 

-<봄의 미안>, 66쪽~67쪽

 

 

 

 미안하다는 말은 ‘잘못을 저지른 내 마음이 안녕하지 못하다는 말’이었군. 미안하다는 말 자주 안 하는 게 좋겠군. 아주 큰일에는 더하겠어. 많은 아이가 세상을 떠났잖아. 아이뿐 아니라 누군가의 식구도. 시간은 자꾸 흐르는데 뭐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해. 말하지 않는 사람이 있어서겠지. 이런 바람도 있어. 아이들이 어딘가 다른 세상에서 잘 지냈으면 하는. 내가 산 사람이어서 이런 생각을 하는군. 다시 좋은 세상에 나기를 바라는 게 나을까. 잘 모르겠군. 다시 만나지 못한다면 뭐든 좋을 건 없을 듯해.

 

 

 

책장 한편

눈 내리는 마을 스노볼이 놓여 있다

고요한 세계, 시인이

아름다운 나타사를 사랑해서

눈이 푹푹 내린다

 

문득 스노볼을 흔들면

눈송이들 반짝이며 흩어졌다 약속처럼 가라앉는다

그 시간을 한 생이라 하자

시인은 아직 나타샤를 사랑하고

눈은 푹푹 내리고

맑은 술을 마시며, 혼자 쓸쓸히 많이 생각한다

 

사계절 겨울인 세계에서는

눈 내리는 동안만 사랑이 있을까 사랑이 되돌아올까

고요에 눈이 멀고 귀가 멀고

 

눈이 푹푹 쌓이는 밤 나타샤와 시인은

흰 당나귀 타고 마을로 가자

작은 새가 우는 눈 내리는 마을로 가 살자, 노래하고

 

스노볼을 흔들면 문득

약속들 반짝이며 흩어졌다 눈송이처럼 가라앉는다

그 시간을 한 생이라 하지 말자

 

눈은 푹푹 내리고 시인은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오지 않을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고조곤히

눈 내리는 마을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 버리지 못하는

 

고요한 세계, 시인이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 응앙응앙 울 것

눈 내리는 마을 스노볼이 놓여 있다

책장 한편

 

-<스노볼*>, 64쪽~65쪽

 

 

*백석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기대어 쓰다.

 

 

 

 앞에 옮겨 쓴 시 <스노볼>은 <봄의 미안> 바로 앞에 실린 시야. 이걸 먼저 쓰려고 했는데 봄 이야기를 먼저 해서 차례가 바뀌었어. 이 시는 좀 익숙해 보이지. 다 똑같지는 않겠지만 백석 시가 생각나게 해. 백석 시에 기대어 썼다는 말이 있군. 이런 시는 한편 더 있어. 여기 담긴 시에는 처음과 끝이 비슷한 시 많아.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라. 그런 걸 수미상관이라 하지.

 

 여기 실린 시 다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보니 괜찮았어. 우연히 이은규 첫번째 시집을 봐서 두번째 시집이 나왔을 때 관심을 가졌다가 이렇게 봤어. 이 시집 제목에서 말하는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는 잊지 않아야 할 이야기인 듯해. 그런 건 속삭이기보다 조금 크게 말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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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4-20 16: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눈 내리는 마을 스노볼]

시인 백석의 나타샤 ㅠㅠ

희선 2021-04-21 01:08   좋아요 1 | URL
눈 내리는 마을이 작아졌네요 그런 걸 보고 백석 시를 떠올리고 시를 쓰다니...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4-20 16: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날은 오래 속삭이고 싶지 않은 날 ㅠㅠ
세상에 모르는 시인도 넘 많네요. 담아가요. 고마워요~~~~

희선 2021-04-21 01:10   좋아요 0 | URL
어느새 일곱해가 되다니... 그날은 오래 속삭이지 못할 일이네요 저는 다 알지 못했지만 행복한책읽기 님은 잘 보실 듯합니다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