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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 릴케 시 필사집 ㅣ 쓰는 기쁨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배명자 옮김 / 나무생각 / 2026년 4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시를 전공으로 선택하기 전 좋아했던 국내외 시인이 둘 있었다. 국내 시인은 윤동주 시인이었고, 해외 시인으로는 윤동주 시인의 시에서도 언급되는 R.M. 릴케. 그래서 해외 시인들의 책 가운데 그나마 릴케의 시집이 내겐 더 있었던 것 같다. 20년도 더 이전의 성년의 날 선물로 받았던 책 중 한 권도 『말테의 수기』였으니...
사실 필사집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는다. 대학시절 시를 전공하며 시를 잘 쓰기 위해 가장 처음 했던 일이 필사였기에 어쩌면 내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따로 필사 노트를 준비해서 마음에 드는 시들을 필사했고, 필사는 군대에서도 계속됐다. 이 책은 필사에 앞서 내가 시를 전공하기 전에 시를 사랑하게 했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서정시들을 되새기게 하는 책이라 끌렸다. 책 제목도 그의 묘비명이고, 책의 컬러도 내가 좋아하는 보라색이라니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을 읽으며 장석주 시인의 추천사를 읽으며 과거 릴케의 시 <가을날>을 읽으며 느꼈던 가슴 벅찼던 시기를 되새긴다. 그때의 감동은 희미해졌으나 이제는 왜 여름이 위대한지를 알게 되는 나이가 됐다. 내가 가톨릭 신자가 되어 기도문을 쓰는 데 영향을 준 시이기도 했다. 나도 세례를 받고 주요 기도문을 외웠을 뿐, 특별히 기도문을 쓰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는데 문예 창작 전공이라며 많은 기도문을 내게 넘기던 누나들이 생각난다. 분명 그때도 얘기했지만 난 기도 창작과가 아니었고,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왔던 당신들이 더 잘 해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은 여전히 묻지 못한 질문으로 남아 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들의 번역이 내가 어린 시절 읽은 것과는 완전히 똑같진 않겠지만 그 뜻은 이어지기에 시인의 시를 읽으며 과거와 현재의 정서가 이어지는 듯했다. 내 시가 너무 길지 않은 것도 내가 사랑했던 두 시인들의 시 대부분은 그리 길지 않았기에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생각의 깊이가 이어지지 않은 것은 그만큼의 고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한창 시를 쓰던 학창 시절에 특별한 고민은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이제 40대가 되어 보니 여러 고민들이 몰려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가? 과거에 읽었던 시들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문장들이 바늘처럼 다가오는 것은 이젠 가볍게 넘기기에는 더 이상 가볍지 않은 순간들을 겪었고, 과거에 없던 신앙을 가졌고, 삶을 연기하듯 살아가야 할 때도 있음을 알기 때문인 것일까?
시인의 묘비명은 윤동주 시인의 <서시>처럼 외우지 않더라도 익숙하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의 삶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을 이제는 누가 말해주지 않더라도 알기 때문이지 않을지... '누구의 잠'이 아닌 '누구의 짐'도 되지 않고 싶은 소망이 커져가는 것은 나만의 고민이 되려나?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들을 눈이 아닌 손으로 익히는 시간. 영화 해리포터 속 돌로레스 엄브릿지의 체벌의 시간을 떠올리는 것은 좀 과한 것일까? 필사자 가슴에 그 정서를 심는 시간이 되어갈지 해리 포터의 체벌의 시간이 될지는 필사를 하는 이의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R. M. 릴케의 시들을 오랜만에 다시 접하기 좋은 시간이었고, 그의 짧은 시들에서 앞으로 내가 쓸 시들에 대한 생각의 방향을 찾았던 시간이었다 전하며 리뷰를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