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수레바퀴 아래서 - 짓눌린 영혼에게 길은 남아있는가
헤르만 헤세 지음, 랭브릿지 옮김 / 리프레시 / 2025년 4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는 백 년도 넘은 작품이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에 그대로 투영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놀랍도록 현실적이다.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는 마을의 자랑이다. 똑똑하고 성실하며, 오직 공부 하나로 존재를 증명해 온 소년이다. 그의 삶은 단순하다. “잘하면 칭찬받고, 못하면 벌받는다.” 성공은 곧 애씀의 보상이다.
고된 입시 경쟁 끝에 신학교에 입학한 한스는 거기서 새로운 세상, 하일너를 만난다. 하일너는 전형적인 비주류다. 자유롭고, 시를 쓰며, 체제를 비웃는다. 공부보다는 삶을 탐구하고, 순응보다는 저항을 택한다. 한스는 하일너에게 매혹되지만, 동시에 혼란에 빠진다. 하일너는 새로운 길을 제시하지만, 그 길을 끝까지 함께 가주진 않는다. 결국 하일너는 학교를 떠나고, 한스는 홀로 남는다. 남은 건 공허, 혼란, 그리고 탈락이다.
이 책을 읽으며 저자의 다른 소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떠올릴 수 있다. 이 소설 역시 두 인물이 서로 다른 길을 걷는다. 나르치스는 수도사로, 골드문트는 예술가로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이들은 각자의 길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차이와 충돌 속에서도 ‘존재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반면 『수레바퀴 아래서』의 한스와 하일너는 교차는 했지만 공존하지 못했다. 하일너가 남긴 ‘질문’만 남은 채, 한스는 그 답을 찾지 못하고 무너진다.
한스는 결국 자살한다. 신학교에서 퇴학당한 후 일찌감치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적응하지 못한다. 어릴 때처럼 칭찬받지도 못하고, 친구도 없으며, 미래도 보이지 않는다. 어느 날, 그는 술에 취해 강물에 빠진 채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다. 사고인지 자살인지는 명확치 않지만, 헤세는 죽음을 통해 한스의 파국을 암시한다.
'왜 한스는 죽었는가?' 그가 특별히 나약했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는 오히려 너무 열심히, 너무 착하게 살았다. 그를 죽인 건 개인의 약점이 아니라, 시스템이었다. ‘수레바퀴 아래서’ 라는 제목은 이 구조를 정확히 가리킨다. 삶의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고, 사람들은 수레바퀴처럼 굴러가는 시스템 위에 올라타 있다. 벗어나려는 순간, 그 바퀴는 그들을 짓누른다.
이 소설이 쓰인 1906년과 비교해보면, 지금 우리는 더 치열한 경쟁사회에 살고 있다. 입시, 취업, 승진, 창업… 모든 단계가 무대이다. 요즘의 한스들은 고3에서 끝나지 않는다. 30대에도, 심지어 40대에도 인생을 '경쟁'으로 정의해야 한다. 게다가 경기 침체 속에서 청년 실업, 가계부채, 고독사가 늘어나는 시대다. 누군가는 “죽고 싶다”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고, 누군가는 진짜로 생을 놓는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그런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닐까? “한스는 너고, 너는 한스다.”
한스의 죽음은 과거의 비극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이어지는 경고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한스를 만들고 있고, 여전히 그들을 깔아뭉개고 있다. 그리고 하일너처럼 자유롭게 떠나는 사람은 소수다. 우리는 대부분 한스다. 그리고 여전히 바퀴 아래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을 해보며 리뷰를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