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요즘은 누구든 마주치면 잘 싸워 이기시라는 이상한 말을 하게된다.

아낌없이 빛비를 내려주는 저 태양의 열정과 잘 싸우라는 말이다.

혹독하다는 말을 나는 겨울이라는 계절에만 써오고 있었지만

흠, 그러나 이 여름...혹독하다는 말이 조금  빈약해보인다.

 

8월이 되었고 나는 신간페이퍼를 작성해야한다는 새로운 알림음을

듣게 되었고 마치 그것을 뒷사람에게 말없이 몸짓으로 표현해야하는

놀이처럼 어떻게 전달해야할지 눈을 두어번 깜빡거리며 생각한 후에

뒷사람의 등을 쳐서 나에게로 돌려세운 후 나의 몸짓을 전달한다.

 

 

 

 

엄마와 연애할 때
임경선 지음 / 마음산책 / 2012년 7월

 

그녀의 글을 모신문 연애상담코너에서 보았다.

마치 세상살이 너무 쉬운데 너희들은 왜 그런 문제로 고민하냐는 듯한 말투였다. 톡 쏘는 말투가 건방지다 싶으면서도 시원해지는 것이 매번 챙겨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녀가 연애에 성공해서 아이를 낳아 나 육아에도 성공했그든? 하는 듯한 메시지를 어디 한 번 봐볼끄나.

 

 

 

 

 

안철수의 생각
안철수 지음, 제정임 엮음 / 김영사

 

그의 생각이 궁금하다기보다는 대한민국이 궁금한 것이겠지 한다.

나오자마자 무서운 속도로 팔리고 있는 이 책에서 우리는 과연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찾고자 하는 자에게 찾아지리라는 성경말씀을 인용하며 그의 진지한 얼굴을 열어보고자 한다.

 

 

 

 

 우리 모두는 시간의 여행자이다
크리스티안 생제르 지음, 홍은주 옮김 / 다른세상

 

세계적인 영성작가 크리스티안 생제르의 인생에 관한 물음과 대답이다.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는 수 많은 책들에 한 권의 권수를 더 보태게 되었다. 그토록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들의 질문은 늘 절박하지만 사람들은 늘 시차를 두고 고민하기에 삶에 대한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시간여행자가 되어 그가 들려주는, 고민하게 하는 화두에 젖어보고 싶다.

 

 

 

 

 

 

사는 방법의 연습
시오노 나나미 지음, 한성례 옮김 / 혼

 

세계인으로 불린다는 시오노 나나미여사의 삶 지침서이다.

젊은이들이 혹은 그 다음세대가 어떻게 세상을 채워 나가야할 지 조목조목 알려주는 책이다. 나는 젊은이는 아니지만 그녀가 권하는 삶에서 얼마나 가까운지 아니면 얼마나 동떨어져있는지 확인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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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간의 비밀
이원구 지음 / 화남출판사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제목에서 보듯이 G.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 년의 고독>과의 중첩적 이미지를 피해갈 수 없다.

호세 아르까디오라는 이름에는 충동적이며 모험적인 특성을 부여하고, 아우렐리아노라는 이름에는 명민하고 은둔적인 성격을 부여했던 소설적 장치가 이 소설에서는 어떻게 구현되었을까.

이 작품은 사실적인 르포르타주 식의 소설로 역사성과 객관성에 기대고 있으며 봉수, 봉기, 봉훈, 봉찬, 봉철로 부친을 비롯한 숙부들의 이름에 인물들이 가지게 될 특성을 암시하고 있다.

소설을 관통하며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등장하는 배경은 산.

동학혁명군이 전투를 벌이고 처형당한 곳이며 인민군에서 빨치산이 되어 죽어간 곳도 다름 아닌 산이었다. 높은 이상을 가진 삶에 맞아떨어지는 운명적 이름이다. 열사로 일찍 생을 마감한 봉기숙부, 의용군 군관으로 월북한 봉훈숙부, 학도병으로 선산에 묻혀있는 봉찬숙부, 그리고 정의감이 투철한 봉철 대전숙부의 삶은 봉우리(峰)로 내게 다가왔다.

 

접힌 부분 펼치기 ▼

 

버님이 편찮으시다는 말을 듣고 본가로 내려간 신혁은 그간 아버님과 소원하게 지냈던 것이 내심 미안하다. 이십대의 나이에 사십대의 얼굴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고뇌가 많았던 탓인지 아니면 아버지가 지니신 아픈 삶의 내력 탓인지 그들의 관계는 늘 데면데면했다.

신혁의 부친은 가난한 집의 장남으로 태어나 해방과 6,25때 두 동생이 죽거나 행방불명이 되어 무겁고 고된 삶을 살았다. 열여섯 살에 부친을 여의고 졸지에 가장이 되어 논 몇 마지기를 받고 친척에게 양자로 팔려가 품을 댄 대가로 지금의 선산을 물려받는다.

 

고향 와리는 전북 삼례 읍내에서 십여 리 쯤 떨어진 농촌마을.

100여 호 정도로 제법 큰 부락으로 주로 회안대군파인 전주이씨와 전주유씨의 집성촌으로 한 집 건너 일가친척이었다. 그 곳은 대동단결하여 반민족적이고 비민주적인 것들에 대항했던 공동체, 즉 소비에트로 불리는 정의감이 투철한 마을이었다. 그 마을의 중심에 신혁의 부친과 증조부, 일가친척들이 있다. 그러나, 신혁은 집안에 우환이 늘 겹치고 편안하지 않은 것이 마음 쓰였다.

더구나 그즈음 선산문제, 고향의 사회주의, 그리고 동학농민혁명까지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히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증조부가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한 것이 아닐까 추리하게 된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그 후예들 70%가 셋방살이를 하고 있다는 속설은 가족들로 하여금 역사를 은폐시키게 한 것이 아닐까. 사회주의운동 출신의 독립 운동가들은 아직도 상당수가 명예회복을 못하고 연좌제에 묶여 그 가족들까지 힘들게 살고 있는 게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의 탐구정신은 동학농민전쟁의 근거지가 되었던 삼례, 전주, 영광지방의 역사와 인물에 가 닿으며 해방공간의 잔혹한 역사에 눈뜨게 한다.

 

유럽 열강들이 한창 약소국가들을 식민지로 만들어가던 때, 동학혁명군을 진압할 힘이 없던 정부는 청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텐진조약을 빌미로 일본은 야심을 가지고 조선에 입항했다. 일본은 청나라를 이기고 조선에의 노골적인 침탈의지를 드러내며 조선 정부의 묵인 아래 동학농민혁명군을 섬멸하고 차츰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어 간다. 일본장교들의 지휘를 받으면서 조선 군인들이 미국에서 수입한 신식무기로 동학군을 잡아 죽였던 것이다.

 

일제는 1908년부터 토지 소유권제도와 등기제도를 세워 조선 농토와 삼림을 40% 가까이 차지하고 토지조사사업으로 세금을 증가시킬 수 있었고, 중산층을 몰락시켜서 농촌사회를 대지주와 소작농으로 재편했다. 과실나무 심는 것을 식목이라고 하듯이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식민지로 삼아 암탉처럼 쌀을 만드는 도구로 본 것이라는 청년 영두의 말은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해방이후, 정의로운 세상이 될 줄 알았으나 숨을 죽이던 친일파는 특유의 동물감각으로 반공주의자로 돌변해 또다시 민초 위에 군림하기 시작한다.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 모냥 조선 조정은 또 왜놈들을 불러들여 동학농민혁명군을 다 잡아 죽였고 해방이 되면서 미국 놈들헌티 또 깡다구 있는 사람들 다 죽고, 그래저래 우리처럼 허수하비 같은 사람들만 살아남았어.“

 

전남 영광 출신의 문근송의 눈을 통하여 본 당시 조선은 유럽을 본뜬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물이고, 특혜를 받는 일본 독점자본주의가 얼마나 조선 민중들을 철저히 착취하는가를 보게 한다. 진고개의 왜인마을과 우뚝 솟은 백화점, 지역 자본을 다 빨아들이는 백화점에서 신식 문물과 자본주의를 누리는 신여성들은 식민백성의 또 다른 그늘을 보게 한다. 그리고 청계천이나 동대문 성벽 밑에 즐비한 움막집들은 1920년대 지주와 자본가 밑에서 소작농과 노동자, 도시 빈민들이 얼마나 힘겹게 살고 있었는지를 신랄하게 보여준다.

 

결국 아버지의 새로운 유언장으로 선산문제는 마무리되었고 동학농민혁명 유족으로 인정도 받고

신혁을 괴롭히던 문제들은 해결되었다. 6개월밖에 못 살 거라던 신혁의 부친은 담낭암 선고를 받은 지 5년 만에 삶을 마감한다. 오진이었을지도 모르고 삶에 대한 아버지의 의지였을지도 모른다. 신혁은 아버지 삶의 궤적이 궁금하였으나 아버지는 ‘내가 농판인게’ 라는 말씀 외에는 과거를 안고 침묵한 채 돌아가신다. 신혁의 가슴속에 아버지는 권위와 권력을 거부한 영원한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펼친 부분 접기 ▲

 

<백년간의 비밀>은 전북지방의 수난사이며, 동학농민 혁명군 후손의 가족사이며, 인류의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구도적 탐구소설이지만, 넓게는 처참하게 희생된 30여만 명의 동학농민혁명군, 연좌제와 궁핍으로 비루한 생을 걸머진 그 후손들의 100여 년에 걸친 고난과 항쟁,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계승하여 그 명예를 회복한 이야기이다.

                                                                             - 작가의 말

 

작가는 실제 외가와 친가가 겪은 역사적인 수난을 추적하면서 이 작업에 5년 가까이 매진하였다한다.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채 외세의 간섭으로 분단과 내전을 겪은 뒤에도 분열을 조장하는 추악한 권력자들, 민중을 노예 취급하는 일부 자본가들, 사대주의적인 어용학자들, 그들에게 기생하는 탐욕적이고 파괴적인 인물들도 구체적으로 복원하여 그들의 지배욕과 허위의식을 폭로하고 고발하여 참다운 인간이 무엇인지 탐구하고자 하였다한다.

 

농민군과 양반 사대부, 벼슬아치가 한 덩어리가 되어 일제와 싸웠다면 조선이 과연 일제의 손아귀에 넘어갔을까. 양반 사대부 지배층들은 왜놈들보다 동학농민군들을 더 미워하였다. 그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던 것은 몇 백 년이나 내려온 신분제도를 허물면서 평등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나라는 망할망정 자기 집안은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저자는 소리높여 비판하고 있다.

 

“먹물도 아닌 우리아버지가 무슨 투철한 사회주의자였겠냐, 그냥 시대의 흙탕물에 휩쓸려 간 거지. 우익들의 보복이 무서워 수십 년간을 숨어 산 거여. 그게 자식들을 위하는 길이라고 믿었것지. 나원,”

 

한웅숙부의 한탄은 민족을 와해시키려던 일본인들의 술수에 걸려 찢기고 서로 할퀴어야했던 슬픈 민족사의 고백이다. 서로를 밀고하고 미워하고 믿지 못하는 극도의 불안정한 정신상태로 온 국민이 비탄에 빠졌던 것이다. 한 가문의 백 년간의 비밀은 가슴 깊이 새겨진 문신처럼 우리가 안고 살아가야할 흉터가 되었다.

역사를 돌아보면 착취와 억압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폭동과 반란이 있었다. 역사는 그것의 지루한 재생이 아닌가. 이념을 위해 숱하게 스러져간 청춘들, 억압과 착취가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했고 그것을 이루게 하는 것이 공산주의라 믿고 자신의 몸을 산화시킨 그 청춘들은 우리들이 밟고 있는 땅의 일부가 되어 꽃을 피우고 곡식을 내고 있다.

 

책 읽기를 마치니 역사의 한 장면에 지나지 않았던 동학운동이 어느 새 내 삶의 현장에서 일어난 듯 옆에 와있다. 옛날은 가고 없지만 아스라이 떠오르는 유년의 불행한 추억들로 가득찬 이산가족의 아픔이 내 슬픔인 양 눈에 밟힌다.

그들이 가진 이념은 형제에게도 총부리를 겨눌만큼 강하고 숭고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 당시로써는 알 수 없었던 전두엽의 미완성이라는 뇌의 미숙함때문에 일어난 집단행동이었을까.

한 사람이 느낀 두려움과 정의감이 무리 전체에 전염되어 그들은 조국해방이라는 목표를 향해 비상하여 날아갔다. 돌아오지 못할 지라도.

 

희생의 피 위에서 우리가 딛고 누리고 있는 이 자유, 자유라는 말이 너무 넘쳐 누구나 자유라는 말을 들이대며 다른 사람의 권리마저 침해하여 그 의미가 훼손된 시대를 살아가며 우리는 어떤 가치를 위하여 살아가고 있는가 생각해보게 된다.

피로 얼룩이 졌다고 할 수밖에 없는 한 가문의 백년의 비밀을 읽으며 나는 역사의 어디에 서 있는가.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야하는가. 저자의 말처럼 인류의 삶이 주동의 세력과 반동의 세력간의 싸움이라면 세상을 바꿀 힘은 이들 사이에서 자식처럼 탄생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답은 너무 분명하다. 두 눈을 부릅뜨고 우리에게 주어진 권리를 신성하게 행사하는 것, 그것이 출발이겠다. 선거가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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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뱅이 언덕 - 권정생 산문집
권정생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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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신문에 모 소설가의 서재가 공개되었다. 육필로 원고 쓰는 것으로 유명한 그의 서재는 자전거가 사람처럼 누워 있어도 전혀 비좁지 않을 만큼 넓었다. ‘아암, 베스트셀러를 내는 분의 서재가 이 정도는 돼야지.’ 그 후 <빌뱅이 언덕>이 집에 도착했고 나는 책날개위에서 수수하게 웃고 계시는 권정생님의 얼굴을 만났다. 그리고 좁디좁은 서재를 보았다.

 

 

 넓은 프레임으로 잡지도 않았는데 사진 한 장에는 양쪽 벽이 다 들어와 있다. 헌책방처럼 허름한 방에서 앉은뱅이책상을 놓고 조금만 움직여도 등이 닿을 것 같은 그의 서재에 눈물이 핑 돌았다.

구석에는 빅사이즈의 에프킬라, 책 한 권을 빼면 우르르 무너질 것만 같은 책 더미, 필시 벽에 못질을 해서 걸었을 법한 겉옷. 벽지 아랫부분은 때가 올라타서 아마도 퀴퀴한 냄새도 날 법하다.

삶과 글이 일치하는 몇 되지 않는 글쟁이라는 찬사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지 않겠는가.

책장을 넘기기 전, 나는 이런 소박함과 겸손한 얼굴을 하신 그 분의 일생에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고 첫 장을 넘겼다.

 

옛날 초가집 추녀에는 제비가 집을 짓고 이엉 속에는 참새 둥지가 있었다 한다. 새가 알을 낳고, 새끼를 치고 먹이고 기르는 것을 보며 아이들이 부모의 역할을 자연스럽게 배웠다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이 함께 살아가며 인생을 체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동화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아낌없이 주는 소년’으로 바라보아야하며 계발대상으로서 자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지켜야 할 대상으로 보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보면 자연에 대한 저자의 사랑이 어떠한지 짐작이 되지 않는가.

 

문학가이면서 삶이 증명하는 환경운동가로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글마다 절절 배어있다. 또한 낡은 물건일수록 자랑스러워하라는 말씀이 가슴 아프게 와 닿는다. 좀 더 불편하게 살고 난 다음에야 핵무기와 전쟁을 반대하는 운동에 앞장서라며 일의 순서도 정해주신다.

그래서 혼자 생각해보기를 이제 환경부 장관의 결격 사유는 지겹게 들어온 ‘위장전입, 다운계약서’가 아닌 ‘하루 배출하는 음식물 쓰레기의 양, 가구나 옷의 구매빈도, 자동차의 배기량’등이 청문회에서 회자되는 날이 오기를 바래본다.

 

‘민들레 홀씨’가 아니라 ‘민들레 꽃씨’임을 그래서 외국어는 틀리지 않으려 기를 쓰면서 국어는 틀리고도 무심해하는 세태를 꼬집는다. 그리고 박진영의 ‘그녀는 예뻤다’가 ‘그년은 예뻤다’로 들린다시던 부분엔 나도 모르게 호탕한 웃음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어색한 영어식 호칭에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신 것이다. 그러고보니 책표지 위쪽에 날아다니던 민들레 꽃씨가 완강하게 외치는 듯하다. <이젠 아셨지요? 나는 민들레 '꽃씨'라고욧! 빨리 퍼뜨리러 가야지, 나의 온전한 이름을.>

 

강조하고 싶은 주제는 당연히 말이 많아진다.

아이들에게 어떤 책을 읽힐 것인가와 요즘의 농촌 통신, 그리고 김목사님께 보내는 편지는 두고두고 읽어보아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독서도 인간을 이탈하는 쪽으로 하게 한다면 오히려 하지 않는 것이 낫다.(...)

인간 위에 군림하기 위한 독서도 진정한 독서가 아니다. p 201

 

과학은 인간을 차갑게 하지만 문학은 인간을 따뜻하게 만든다는 선생님의 지론에 따라 독서는 따뜻한 인간과 사회를 만들어가게 하는 데 쓰여야하겠다. 돌아보니 아이가 어떤 책에 관심을 보이는 지 보다는 미래의 직업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집중적으로 읽히고 싶어 했고 필독도서를 읽고나면 상을 받게 하고 싶어 독서기록장에 느낌과 내용을 잘 담아서 쓰라 닦달하고, 학교에서 실시하는 독서퀴즈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고자 예상문제를 뽑는다는 엄마들의 억척에 ‘그 집 애들은 뭐가 돼도 되겠네,’ 은근 부러워하지 않았던가.

독서는 훌륭한 백성을 만드는 데 있고 훌륭한 백성은 그 어떤 독재가도 발붙이지 못하게 한다는 그 원대한 뜻을 우리는 아이들에게 얼마나 왜곡시켜 전달시켰는지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하겠다. 독서는 무엇보다 남을 잘 이해하는 따뜻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무지하여 아무나 이 세상에 군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문장을 아름답게 하려는 화려한 형용사는 책 어디에서고 찾아볼 수 없다. 그 흔한 외래어 하나 없다. 우리말의 고갱이를 보여준다. 알아먹기 힘든 말도 없고 사전을 찾아 볼 일도 없었지만 그 어느 철학서나 교양서적에서 얻을 수 없는 가르침이 있다.

나의 상처와 일치하는 부분에서는 나도 모르게 책을 놓고 엎드려 울었으며 내 아이를 경쟁에 일조하는 아이로 키우기보다는 타인의 딱딱해진 마음을 해동시킬 수 있는 사람으로 키워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반대하지만 아이는 기타리스트가 되고 싶어 한다.)

 

교회종지기로 교회의 구석진 방에 살면서 저자가 느꼈던 기독교의 배타성과 이기주의에 대한 일침또한 뾰족하다. 새로 안수 받은 목사님께 드리는 글에는 교회를 짓지 말고 인간을 죽이는 무기부터 걷어 주십사,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벽부터 헐어 주십사 단호하게 부탁한다. 성공하는 목사가 아닌, 예수를 닮아 광야에서 외치다 죽는 실패하는 목사가 되시라 부탁한다.

시간과 형편이 못되어 교회에 나가지는 못하지만 생활자체가 거룩하고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돌아보고 가난한 마음 자체가 향기로운 예배임을 배우라 하시니.

그 당당함은 가난하지 않고서, 가난한 자들의 아픔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었으리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실패한 삶이라고 여기는 작가는 그럴수록, 삶이 괴로울수록 우리 아이들에게나마 나의 실패한 인생을 가르쳐 주어야한다는 강한 의무감을 느끼신단다. 못 먹어서 나무작대기처럼 마르고 생활고 때문에 교회에 나갈 시간조차 없다는 시집 간 동네 처녀 복순이를 생각하며 속으로 말한다.

‘가난할수록 더 착하게 살아야한다. 아무리 가난해도 착하게 살 수 있는 권리는 아무도 못 빼앗아간단다. 우리 못 먹고 못 입어도 꽃 한 송이, 참새 한 마리도 끝까지 사랑하자꾸나.’

 

한동안 멍해졌다.

 

집사님이라고도 불러보고 싶고 선생님이라고 부르고도 싶고 감히 성자라고 부르고도 싶어진다. 평생 약한 몸으로 살아 늘 가난한 생활과 마음으로 하늘나라를 마음에 품었고 의에 목마름으로 교회를 비판하며 가정을 꾸리지 않아 많은 아이들을 자식처럼 거느릴 수 있었던 분. 성경책 위로 기어 다니던 벌레를 차마 밀쳐내지 못하고 생명의 고귀함을 생각하고 있던 선생님의 시야에서 벌레는 사라지고, 전 날 다녀왔던 우체국의 언덕길을 회상하며 책은 끝이 난다.

<나 또한 이 언덕을 벌레처럼 기어갔던 게로구나.>

 

빌배산 빌뱅이 언덕의 집을 짧게 스케치하며 글을 마친다.

집 둘레에 보랏빛 들국화가 흩어져 피어 있고, 냇 기슭으로는 빨간 여뀌꽃이 한창이다. 밤이면 오므라진 호박꽃 덩굴사이로 파란 반딧불이 날아다닌다. (...) 베짱이가 시끄럽도록 운다. 마당가 풀밭에는 방아깨비가 그 무딘 몸으로 기우뚱기우뚱 뛰어다닌다.

앞 마당을 조금 일구어 가지 세 포기, 오이 두 포기, 그리고 파와 들깨와 배추를 심었다. 세 포기의 가지는 너무 무성하게 자라나 열매가 감당할 수 없도록 주렁주렁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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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랄라 하우스 - 묘하고 유쾌한 생각의 집, 개정판
김영하 지음 / 마음산책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툭 까놓고 나는 김영하가 누구인지 모른다.

그래서 제목을 보고는 어라? 콧노래를 부르네? 먹고 살만해서 자기 집을 멋드러지게 지은 얘기인가보다 내 맘대로 추측해보았고 표지 제목 위로 쓰인 ‘묘하고 유쾌한 생각의 집’이라는 부연설명을 보고서야 ‘아하, 이것은 사는 집이 아니었구나’ 뒷북을 치면서 읽었다. 안경 때문인지 살진 가수 윤상 포스가 난다꾸나 속으로 킥킥거리다가는 본문 그림과 사진을 직접 담당한 것을 보며 평면적인 작가는 아니구나 싶어 구미가 당겼다.

 

랄랄라 하우스는 소설가적 발칙함으로 일상에서 잡아 끄집어낸 이야기모음이다. 2005년도에 발행된 책을 7년이 지난 지금 다시 찍어낸 이유는 무얼까 검색질을 하며 시간을 할애해 보았는데 4년간의 해외생활을 마치고 최근 돌아왔고 올 10월에 소설 <검은 꽃>이 미국에서 출간될 예정이란다. 대박예감을 한 출판사 관계사들이 시선끌기용으로 재판을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 은교가 영화로 나름 성공을 거둔 이후 소설책 은교는 물론 훨씬 전에 출간됐던 박범신의 책들도 다시 처음인 척 쏟아져 나와 신문에도 대문짝만한 광고가 나지 않았던가.

그런 배경을 예상하며 집어 들었던 탓인지 딱히 새로울 것 없는 7년 전의 단상들은 솔직히 단조로웠다.

 

터키시앙고라나 페르시아 고양이를 고대하던 작가와 그의 아내가 어쩌다가 민간인에 가까운 방울이와 동거하게 되었는지, 주차장에서 하필이면 아내의 신발 위로 쓰러져 치우지도 못하고 집으로 데리고 들어와야했던 깐돌이와의 운명적으로 만남을 담백하게 따라가볼 수 있다. 그들과의 연애, 헤어짐까지..

 

버릴만한 나쁜 습관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도덕군자형 극빈자. (...)

배의 침몰을 막기 위해 무거운 화물들을 배 밖으로 던져야 할 상황인데, 그녀는 화물을 하나도 싣지 않은 배와 같았다.라는 마크 트웨인의 말을 옹호하는 그를 만난다.

 

이건 내가 진통제를 다루는 방식과 좀 상극이 되겠다.

진통제를 많이 먹다보면 언젠가는 진통제가 듣지 않으리라는 불안을 아주 어렸을 적에 습득했다. 그래서 나는 병원에서 지어 준 감기약에 들어가 있는 진통제를 슬그머니 빼곤 했으며 자의에 의해서 삼켜본 것은 일생동안 고작 2번 정도이다.

저 인용문은 나쁜 버릇이 있어야 위험한 상황에서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해 응급으로라도 사용해본다는 뜻인 것 같은데 잡아야할 지푸라기가 아무리 둘러보아도 없는 불쌍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젊은 날 나쁜 습관을 많이 가지라는 그의 충고는 어찌 받아들여야할지?

아, 이건 랄랄라 하우스였지.

 

아마도 이 책 중에서 가장 감동의 수위가 높은 것이 가네시로 카즈키의 소설 'GO'에 나온다는 권투에 대한 내용일 것이다.

 

왼팔을 앞으로 똑바로 뻗은 채로 몸을 한 바퀴 돌려보면 그 원의 크기가 대충 나라는 인간의 크기가 된단다. 그 원 안에서 가만히 있으면 안전하게 살 수 있다.

권투란 자기의 원을 자기 주먹으로 뚫고 나가 원 밖에서 무언가를 빼앗아오고자 하는 행위다. 원 밖에는 강력한 놈들로 잔뜩 있어 빼앗아오기는커녕 상대방이 네 놈의 원 속으로 쳐들어와 소중한 것을 빼앗아갈 수도 있다. 그런데도 권투를 배우고 싶으냐?

 

청와대비서실에서 잘 사용하는 외래어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재미있다.

‘로드맵’ ‘태스크포스’ 같은 외래어를 남발하는 그들의 심리는 ‘반응지연의 효과’를 노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외래어를 들으면 그 말뜻이 무엇인가 생각하느라 반응할 기회를 놓친다는 것이다. 마치 <김대리는 퍼포먼스는 좋은데 퍼스낼리티에 문제가.....>

당신은 어느 부분에서 화를 낼 것인가 라고 묻고 있다. 정말 애매하다.

이게 무슨 영어듣기평가문제도 아니고.

 

태극기 단상에서는 자못 진지하고도 비판적인 김영하를 만난다.

한 페이지에 하나의 에피소드를 채워가던 책이 느닷없이 단상이라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무려 9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태극기는 공장에서 나염공장에서 찍어낼 뿐인데 완성된 순간부터는 신성이 부여되어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권위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태극기를 못생기게 그린 것만으로도 지도한 선생님까지 체포될 가능성이 있었던 어두운 시절을 회상한다. 태극기에 부여된 ‘턱없이 고상한 권위와 위엄’을 거부하고 있다. 맹세도 필요로 하는 탐욕스런 신으로까지 보았으니 태극기 사랑은 독재의 춘몽이었던가.태극기를 앞세워서 이념논쟁을 하고 깃발아래 하나로 묶이지 말라한다. 태극기는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고 목터지게 강조한다.

 

저자는 독서에도 일정한 훈련과 의식적이 노력이 분명히 필요하다고 말한다.

소설은 춤과 같아서 처음에도 즐겁지만 배우면 배울수록 더 큰 즐거움을 준다고.

감정이입을 통한 즉각적 수준의 감동보다는 텍스트 자체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형태로 바뀌게 된다고 하니 이런 노력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나는 책을 읽다가 저자가 재미있게 읽었다는 책 제목들이 나오면 노트에 메모하곤 하는데 아예 대놓고 정답 알려주듯 이러이러한 사람들의 책을 읽어보시오 하고 꼭 찍어주니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덕분에 가와바타 야스나리, 미즈무라 미나에, 시오노 나나미, 오르한 파묵, 아고타 크리스토프, 존 파울즈, 플로베르, 요시모토 바나나라는 작가들의 이름을 써본다.

독서도 하나의 숙련된 기능이라고 하니 여태껏 스트레칭을 했으니 어디 본격적으로 근육 좀 붙여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헛둘, 헛둘.

 

마지막으로 그가 내게 남겨준 가장 유익한 충고를 적어놓는다.

 

질문은 힘이 세다, 세상은 질문하는 자의 것이고 답변만 하다가는 질문하는 사람의 뜻대로 살게 된다는 말씀.

 

그가 랄랄라 하우스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결국

<삶에 적극적으로 질문을 던지며 답은 고도로 훈련된 책읽기에서 얻으시면 어떤가요?>

하는 은근한 권유가 아닐까.

리뷰쓰기를 마친 나는 그가 쓴 책들을 검색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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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소설 읽는 시간 - 세계 문학 주인공들과의 특별한 만남
정여울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내가 아는 이 시대의 최고 ‘글빨’ 정여울의 신간이다. 두 개의 소설 속 주인공들을 따로 또 같이 엮어 진하게 우려냈다. 최고의 먹물답게 풀어내는 문장들은 매끄럽기 그지없어서 그 유들유들함에 조금은 살짝 소름이 돋기도 한다. 모르긴 해도 독자들은 같은 신문에 칼럼을 쓰고 경쟁적으로 비슷한 종류의 책을 내고 있는 정혜윤과 비교하는 재미도 있을 터다.

굳이 비교해보자면 정여울은 깊고 이성적인 공감을 끌어낸다는 생각이다. 새로운 개념의 쓰다듬음과 언어의 조합으로써 이성에 감성을 덧입히고 있다.

 성장과 사랑, 행복, 인간의 욕망 그리고 위험한 사회에 관하여, 예술에 관하여 그녀가 뽑아든 소설책은 무엇인가. 그녀의 손끝에서 풀어지는 이야기와 사유는 마치 내가 주인공들을 잘 알고 많은 이야기를 나눈 친구처럼 느껴지게 한다.뒤로 갈수록 무거워지는 주제는 내가 속해있는 사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할 지를 생각하게 했다.

           

 그녀는 <위험한 관계>의 세실과 당스니의 사랑에서 첫사랑의 의미를 이렇게 뽑아내고 있다. 첫사랑이란 사랑의 성공이나 결과가 아니라 사랑에 빠지는 과정 하나하나에 매혹된다는 것! 사랑에 미숙하기때문에 사랑의 고통조차 아름다움으로 인식한다는 것!

그녀의 친절한 설명을 보고나니 잔혹한 깃털같이 떠다니던 나의 첫사랑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 시기에는 누구나 아직 완성되지도 않은 문 앞에서 손잡이를 찾지 못해 문을 두드려보기도 하고 흔들어보기도 하며 누군가 문을 열고 나와 주기를 바라는 인생의 염탐자가 아니었나. 내게 필요했던 건 상대방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감정을 실험할 상대가 필요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 세상에 이렇게 불안하고도 충만한 감정이 있다니.

이 느낌 다음엔 또 어떤 느낌이 기다리고 있는 거지? 하고 기다려보는.

 

 사랑에 관하여 짝지어진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쇼데를로 르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에서는 연애의 달인이라고 자처하는 발몽과 토마스를 통해 진짜 사랑앞에 벗겨진 자신들의 맨얼굴을 보게한다. 무덤에서 사는 듯 나약한사랑을 유지했던 테레사와 진정한 사랑앞에서도 사랑을 부정했던 발몽에게 정여울은 사랑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빠지는 것'이다 라고 충고하고 싶어한다.

(위험한 관계는 ‘통하였느냐’라는 선정적 카피로 세인들의 관심을 끌었던 우리나라 영화 ‘스캔들’의 원작이기도 하다.)

사랑의 무거움만을 바라보는 테레사와 사랑의 가벼움만을 움켜쥔 발몽에게 사랑이란 무엇이었을까. 기억에 의하면 테레사는 책을 읽는 내내 사람을 축 쳐지게 했었고 발몽은 뒤통수 한 대 화악 쳐주고 싶게 했었다. 정여울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당신이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 가장 정직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떤 사랑을 해왔는가’에 달려있다고 했다. 대답을 준비하다 보면 누구나 내가 그렇게 큰소리치면서 살만한 사람은 아니구나 깨닫게 되지 않을까.

           

 사춘기가 되면 아이들은 자신의 구석으로 계속 걸어 들어가게 된다. 돌이켜보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들과의 동거는 얼마나 불편하고 힘든 일이었던가. 한사람의 인간으로서 매혹적인 텍스트가 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찬 히스클리프와 싱클레어.

-<데미안, 호밀밭의 파수꾼>

마음을 들키더라도 판단하거나 단죄하지 않을, 그저 마음의 무늬와 빛깔을 가만히 바라봐주는 사람을 갈구했던 그들의 소망은 어른들에게는 받아들여지기 힘든 바램이다.

장남 학교에서 부모교육의 일환으로 감정코칭에 대해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사춘기 아이들의 뇌는 아직 전두엽이 완성되지 전이어서 이성적인 판단이 힘듦으로 그들의 감정을 수용해주고 겉으로 보이는 행동만으로 섣불리 판단하지 말라고 했다. 이 ‘어린 백셩’들도 이 질풍노도의 시기가 지나면 저자의 말처럼 자신들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것들은 이미 다 가지고 있었고, 히스클리프와 싱클레어처럼 다만 자신이 손을 내밀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까.

           

 현대인들은 1인 미디어를 통해 하나의 정체성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여러 개의 나’를 향유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지킬박사와 하이드>

아바타라고 표현하고 있는 ‘블로그’에 대해 그녀가 약간은 불편하게 건드려준다.

우리의 블로그는 보기에 좋은가?

블로그와 미니홈피를 보기 좋게 관리하느라 흙탕물 가득한 실제 세계를 아름답게 포장할 수만은 없는 진짜 삶을 위장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화살을 겨눈다. 원본과 복제의 관계로 시작했지만 복제가 원본의 삶을 압도함으로써 무엇이 원본이고 무엇이 복제인지 더 이상 구분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 만다는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자신은 젊음의 상태로 남아있고 그림이 대신 늙어주기를 바랐던 도리언 그레이처럼 블로그라는 공간에 최상의 나를 만들어놓고 영속하기를 바라는 욕망을 투사한 건 아닌지 돌아보게된다. 포토샵에 대한 그녀의 질타는 매서웠다. 흠

           

 유토피아적 삶의 원칙은 욕망의 포기. 작금의 화두는 외로움과 욕망.

네 개의 작품<1984, 멋진 신세계, 동물농장, 걸리버 여행기>을 관통하는 인간의 욕망에 관한 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더욱 무서운 건 소설 속의 세상이라고 여겼던 세상이 발 앞에 떼굴떼굴 굴러와 있다는 것!

‘소마’를 마시면 모든 걱정, 질투, 우울, 분노, 절망이 사라지고 문학도 예술도 철학도 필요없는 사회. 현재의 쾌락만 있으며 주어진 노동에 충실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또한 미친 듯이 각종 엔터테인먼트에 심취하는 신세계.

인간의 탄생을 포드주의식 생산물로 보고 인간의 개별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인간의 무의식마저 지배하려는 영혼통제 프로젝트가 난무하는 멋진 신세계.

소마를 거부한 ‘야만인 존’의 재래식 삶의 방식은 사람은 제조되고 조절 가능한 행복에서 벗어나 '인간답게'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했다. 행복도 창궐하면 불행이 되다니.

           

 무조건 경쟁에서 이겨 최고의 계급에 이르기를 원하는 사회. 웃음의 코드는 개콘으로 보편화시켰고 슬픔의 코드는 갈기갈기 분열시키는 미디어가 정치를 대신하는 사회.

화장실에서조차 스마트폰을 쥐고 생각할 시간을 빼앗겨버린 사회.

촘촘한 문어발식 사업으로 사람들의 의식주를 평정한 대기업의 비열한 마케팅은 이미 우리가 멋진 신세계에 살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인성은 무시된 채 그저 끝없이 학습을 반복하는 청소년들이 이끌어갈 사회를 상상해보면 앞으로 '세상 좋아졌다'는 말은 못할 것 같다.

또한 각종 정보시스템의 감시와 안전의 이름으로 내어준 우리 인권의 문제로부터 우리가

숨을 곳은 있기나 한 것일까.

           

 소설처럼 현실을 부정하는 도구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그것을 현실의 늪이라 명명하고 있다. <소설이란 온 세상 구석구석을 은밀하게 염탐하는, 움직이는 영혼의 거울이다>라고 정의하며 명명백백한 팩트만으로는 건널 수 없는 현실의 늪을 비춘다고 했다.

인간의 삶이 서로서로 빚지지 않고서는 단 하루도 지속될 수 없다고 말하는 그녀는 인간관계의 실험이야말로 끝나지 않는 소설의 테마이며, 멈출 수 없는 인류의 화두라고 강조한다.

           

 주입식으로 닫는 마침표보다는 울림을 주는 물음형 어미로 끝내기를 유난히 좋아하는 정여울,

그녀의 이름을 자판에 두드리자니 자꾸 ‘정여우‘라고 오타가 난다.

뭐 그리 틀린 말 같지 않아서 고치고 싶지 않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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