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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소설 읽는 시간 - 세계 문학 주인공들과의 특별한 만남
정여울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내가 아는 이 시대의 최고 ‘글빨’ 정여울의 신간이다. 두 개의 소설 속 주인공들을 따로 또 같이 엮어 진하게 우려냈다. 최고의 먹물답게 풀어내는 문장들은 매끄럽기 그지없어서 그 유들유들함에 조금은 살짝 소름이 돋기도 한다. 모르긴 해도 독자들은 같은 신문에 칼럼을 쓰고 경쟁적으로 비슷한 종류의 책을 내고 있는 정혜윤과 비교하는 재미도 있을 터다.
굳이 비교해보자면 정여울은 깊고 이성적인 공감을 끌어낸다는 생각이다. 새로운 개념의 쓰다듬음과 언어의 조합으로써 이성에 감성을 덧입히고 있다.
성장과 사랑, 행복, 인간의 욕망 그리고 위험한 사회에 관하여, 예술에 관하여 그녀가 뽑아든 소설책은 무엇인가. 그녀의 손끝에서 풀어지는 이야기와 사유는 마치 내가 주인공들을 잘 알고 많은 이야기를 나눈 친구처럼 느껴지게 한다.뒤로 갈수록 무거워지는 주제는 내가 속해있는 사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할 지를 생각하게 했다.
그녀는 <위험한 관계>의 세실과 당스니의 사랑에서 첫사랑의 의미를 이렇게 뽑아내고 있다. 첫사랑이란 사랑의 성공이나 결과가 아니라 사랑에 빠지는 과정 하나하나에 매혹된다는 것! 사랑에 미숙하기때문에 사랑의 고통조차 아름다움으로 인식한다는 것!
그녀의 친절한 설명을 보고나니 잔혹한 깃털같이 떠다니던 나의 첫사랑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 시기에는 누구나 아직 완성되지도 않은 문 앞에서 손잡이를 찾지 못해 문을 두드려보기도 하고 흔들어보기도 하며 누군가 문을 열고 나와 주기를 바라는 인생의 염탐자가 아니었나. 내게 필요했던 건 상대방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감정을 실험할 상대가 필요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 세상에 이렇게 불안하고도 충만한 감정이 있다니.
이 느낌 다음엔 또 어떤 느낌이 기다리고 있는 거지? 하고 기다려보는.
사랑에 관하여 짝지어진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쇼데를로 르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에서는 연애의 달인이라고 자처하는 발몽과 토마스를 통해 진짜 사랑앞에 벗겨진 자신들의 맨얼굴을 보게한다. 무덤에서 사는 듯 나약한사랑을 유지했던 테레사와 진정한 사랑앞에서도 사랑을 부정했던 발몽에게 정여울은 사랑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빠지는 것'이다 라고 충고하고 싶어한다.
(위험한 관계는 ‘통하였느냐’라는 선정적 카피로 세인들의 관심을 끌었던 우리나라 영화 ‘스캔들’의 원작이기도 하다.)
사랑의 무거움만을 바라보는 테레사와 사랑의 가벼움만을 움켜쥔 발몽에게 사랑이란 무엇이었을까. 기억에 의하면 테레사는 책을 읽는 내내 사람을 축 쳐지게 했었고 발몽은 뒤통수 한 대 화악 쳐주고 싶게 했었다. 정여울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당신이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 가장 정직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어떤 사랑을 해왔는가’에 달려있다고 했다. 대답을 준비하다 보면 누구나 내가 그렇게 큰소리치면서 살만한 사람은 아니구나 깨닫게 되지 않을까.
사춘기가 되면 아이들은 자신의 구석으로 계속 걸어 들어가게 된다. 돌이켜보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들과의 동거는 얼마나 불편하고 힘든 일이었던가. 한사람의 인간으로서 매혹적인 텍스트가 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찬 히스클리프와 싱클레어.
-<데미안, 호밀밭의 파수꾼>
마음을 들키더라도 판단하거나 단죄하지 않을, 그저 마음의 무늬와 빛깔을 가만히 바라봐주는 사람을 갈구했던 그들의 소망은 어른들에게는 받아들여지기 힘든 바램이다.
장남 학교에서 부모교육의 일환으로 감정코칭에 대해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사춘기 아이들의 뇌는 아직 전두엽이 완성되지 전이어서 이성적인 판단이 힘듦으로 그들의 감정을 수용해주고 겉으로 보이는 행동만으로 섣불리 판단하지 말라고 했다. 이 ‘어린 백셩’들도 이 질풍노도의 시기가 지나면 저자의 말처럼 자신들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것들은 이미 다 가지고 있었고, 히스클리프와 싱클레어처럼 다만 자신이 손을 내밀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까.
현대인들은 1인 미디어를 통해 하나의 정체성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여러 개의 나’를 향유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지킬박사와 하이드>
아바타라고 표현하고 있는 ‘블로그’에 대해 그녀가 약간은 불편하게 건드려준다.
우리의 블로그는 보기에 좋은가?
블로그와 미니홈피를 보기 좋게 관리하느라 흙탕물 가득한 실제 세계를 아름답게 포장할 수만은 없는 진짜 삶을 위장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화살을 겨눈다. 원본과 복제의 관계로 시작했지만 복제가 원본의 삶을 압도함으로써 무엇이 원본이고 무엇이 복제인지 더 이상 구분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 만다는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자신은 젊음의 상태로 남아있고 그림이 대신 늙어주기를 바랐던 도리언 그레이처럼 블로그라는 공간에 최상의 나를 만들어놓고 영속하기를 바라는 욕망을 투사한 건 아닌지 돌아보게된다. 포토샵에 대한 그녀의 질타는 매서웠다. 흠
유토피아적 삶의 원칙은 욕망의 포기. 작금의 화두는 외로움과 욕망.
네 개의 작품<1984, 멋진 신세계, 동물농장, 걸리버 여행기>을 관통하는 인간의 욕망에 관한 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더욱 무서운 건 소설 속의 세상이라고 여겼던 세상이 발 앞에 떼굴떼굴 굴러와 있다는 것!
‘소마’를 마시면 모든 걱정, 질투, 우울, 분노, 절망이 사라지고 문학도 예술도 철학도 필요없는 사회. 현재의 쾌락만 있으며 주어진 노동에 충실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또한 미친 듯이 각종 엔터테인먼트에 심취하는 신세계.
인간의 탄생을 포드주의식 생산물로 보고 인간의 개별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인간의 무의식마저 지배하려는 영혼통제 프로젝트가 난무하는 멋진 신세계.
소마를 거부한 ‘야만인 존’의 재래식 삶의 방식은 사람은 제조되고 조절 가능한 행복에서 벗어나 '인간답게'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했다. 행복도 창궐하면 불행이 되다니.
무조건 경쟁에서 이겨 최고의 계급에 이르기를 원하는 사회. 웃음의 코드는 개콘으로 보편화시켰고 슬픔의 코드는 갈기갈기 분열시키는 미디어가 정치를 대신하는 사회.
화장실에서조차 스마트폰을 쥐고 생각할 시간을 빼앗겨버린 사회.
촘촘한 문어발식 사업으로 사람들의 의식주를 평정한 대기업의 비열한 마케팅은 이미 우리가 멋진 신세계에 살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인성은 무시된 채 그저 끝없이 학습을 반복하는 청소년들이 이끌어갈 사회를 상상해보면 앞으로 '세상 좋아졌다'는 말은 못할 것 같다.
또한 각종 정보시스템의 감시와 안전의 이름으로 내어준 우리 인권의 문제로부터 우리가
숨을 곳은 있기나 한 것일까.
소설처럼 현실을 부정하는 도구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그것을 현실의 늪이라 명명하고 있다. <소설이란 온 세상 구석구석을 은밀하게 염탐하는, 움직이는 영혼의 거울이다>라고 정의하며 명명백백한 팩트만으로는 건널 수 없는 현실의 늪을 비춘다고 했다.
인간의 삶이 서로서로 빚지지 않고서는 단 하루도 지속될 수 없다고 말하는 그녀는 인간관계의 실험이야말로 끝나지 않는 소설의 테마이며, 멈출 수 없는 인류의 화두라고 강조한다.
주입식으로 닫는 마침표보다는 울림을 주는 물음형 어미로 끝내기를 유난히 좋아하는 정여울,
그녀의 이름을 자판에 두드리자니 자꾸 ‘정여우‘라고 오타가 난다.
뭐 그리 틀린 말 같지 않아서 고치고 싶지 않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