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뱅이언덕]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빌뱅이 언덕 - 권정생 산문집
권정생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얼마 전 신문에 모 소설가의 서재가 공개되었다. 육필로 원고 쓰는 것으로 유명한 그의 서재는 자전거가 사람처럼 누워 있어도 전혀 비좁지 않을 만큼 넓었다. ‘아암, 베스트셀러를 내는 분의 서재가 이 정도는 돼야지.’ 그 후 <빌뱅이 언덕>이 집에 도착했고 나는 책날개위에서 수수하게 웃고 계시는 권정생님의 얼굴을 만났다. 그리고 좁디좁은 서재를 보았다.

 

 

 넓은 프레임으로 잡지도 않았는데 사진 한 장에는 양쪽 벽이 다 들어와 있다. 헌책방처럼 허름한 방에서 앉은뱅이책상을 놓고 조금만 움직여도 등이 닿을 것 같은 그의 서재에 눈물이 핑 돌았다.

구석에는 빅사이즈의 에프킬라, 책 한 권을 빼면 우르르 무너질 것만 같은 책 더미, 필시 벽에 못질을 해서 걸었을 법한 겉옷. 벽지 아랫부분은 때가 올라타서 아마도 퀴퀴한 냄새도 날 법하다.

삶과 글이 일치하는 몇 되지 않는 글쟁이라는 찬사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지 않겠는가.

책장을 넘기기 전, 나는 이런 소박함과 겸손한 얼굴을 하신 그 분의 일생에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고 첫 장을 넘겼다.

 

옛날 초가집 추녀에는 제비가 집을 짓고 이엉 속에는 참새 둥지가 있었다 한다. 새가 알을 낳고, 새끼를 치고 먹이고 기르는 것을 보며 아이들이 부모의 역할을 자연스럽게 배웠다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이 함께 살아가며 인생을 체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동화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아낌없이 주는 소년’으로 바라보아야하며 계발대상으로서 자연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지켜야 할 대상으로 보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보면 자연에 대한 저자의 사랑이 어떠한지 짐작이 되지 않는가.

 

문학가이면서 삶이 증명하는 환경운동가로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글마다 절절 배어있다. 또한 낡은 물건일수록 자랑스러워하라는 말씀이 가슴 아프게 와 닿는다. 좀 더 불편하게 살고 난 다음에야 핵무기와 전쟁을 반대하는 운동에 앞장서라며 일의 순서도 정해주신다.

그래서 혼자 생각해보기를 이제 환경부 장관의 결격 사유는 지겹게 들어온 ‘위장전입, 다운계약서’가 아닌 ‘하루 배출하는 음식물 쓰레기의 양, 가구나 옷의 구매빈도, 자동차의 배기량’등이 청문회에서 회자되는 날이 오기를 바래본다.

 

‘민들레 홀씨’가 아니라 ‘민들레 꽃씨’임을 그래서 외국어는 틀리지 않으려 기를 쓰면서 국어는 틀리고도 무심해하는 세태를 꼬집는다. 그리고 박진영의 ‘그녀는 예뻤다’가 ‘그년은 예뻤다’로 들린다시던 부분엔 나도 모르게 호탕한 웃음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어색한 영어식 호칭에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신 것이다. 그러고보니 책표지 위쪽에 날아다니던 민들레 꽃씨가 완강하게 외치는 듯하다. <이젠 아셨지요? 나는 민들레 '꽃씨'라고욧! 빨리 퍼뜨리러 가야지, 나의 온전한 이름을.>

 

강조하고 싶은 주제는 당연히 말이 많아진다.

아이들에게 어떤 책을 읽힐 것인가와 요즘의 농촌 통신, 그리고 김목사님께 보내는 편지는 두고두고 읽어보아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독서도 인간을 이탈하는 쪽으로 하게 한다면 오히려 하지 않는 것이 낫다.(...)

인간 위에 군림하기 위한 독서도 진정한 독서가 아니다. p 201

 

과학은 인간을 차갑게 하지만 문학은 인간을 따뜻하게 만든다는 선생님의 지론에 따라 독서는 따뜻한 인간과 사회를 만들어가게 하는 데 쓰여야하겠다. 돌아보니 아이가 어떤 책에 관심을 보이는 지 보다는 미래의 직업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집중적으로 읽히고 싶어 했고 필독도서를 읽고나면 상을 받게 하고 싶어 독서기록장에 느낌과 내용을 잘 담아서 쓰라 닦달하고, 학교에서 실시하는 독서퀴즈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고자 예상문제를 뽑는다는 엄마들의 억척에 ‘그 집 애들은 뭐가 돼도 되겠네,’ 은근 부러워하지 않았던가.

독서는 훌륭한 백성을 만드는 데 있고 훌륭한 백성은 그 어떤 독재가도 발붙이지 못하게 한다는 그 원대한 뜻을 우리는 아이들에게 얼마나 왜곡시켜 전달시켰는지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하겠다. 독서는 무엇보다 남을 잘 이해하는 따뜻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무지하여 아무나 이 세상에 군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문장을 아름답게 하려는 화려한 형용사는 책 어디에서고 찾아볼 수 없다. 그 흔한 외래어 하나 없다. 우리말의 고갱이를 보여준다. 알아먹기 힘든 말도 없고 사전을 찾아 볼 일도 없었지만 그 어느 철학서나 교양서적에서 얻을 수 없는 가르침이 있다.

나의 상처와 일치하는 부분에서는 나도 모르게 책을 놓고 엎드려 울었으며 내 아이를 경쟁에 일조하는 아이로 키우기보다는 타인의 딱딱해진 마음을 해동시킬 수 있는 사람으로 키워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반대하지만 아이는 기타리스트가 되고 싶어 한다.)

 

교회종지기로 교회의 구석진 방에 살면서 저자가 느꼈던 기독교의 배타성과 이기주의에 대한 일침또한 뾰족하다. 새로 안수 받은 목사님께 드리는 글에는 교회를 짓지 말고 인간을 죽이는 무기부터 걷어 주십사,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벽부터 헐어 주십사 단호하게 부탁한다. 성공하는 목사가 아닌, 예수를 닮아 광야에서 외치다 죽는 실패하는 목사가 되시라 부탁한다.

시간과 형편이 못되어 교회에 나가지는 못하지만 생활자체가 거룩하고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돌아보고 가난한 마음 자체가 향기로운 예배임을 배우라 하시니.

그 당당함은 가난하지 않고서, 가난한 자들의 아픔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었으리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실패한 삶이라고 여기는 작가는 그럴수록, 삶이 괴로울수록 우리 아이들에게나마 나의 실패한 인생을 가르쳐 주어야한다는 강한 의무감을 느끼신단다. 못 먹어서 나무작대기처럼 마르고 생활고 때문에 교회에 나갈 시간조차 없다는 시집 간 동네 처녀 복순이를 생각하며 속으로 말한다.

‘가난할수록 더 착하게 살아야한다. 아무리 가난해도 착하게 살 수 있는 권리는 아무도 못 빼앗아간단다. 우리 못 먹고 못 입어도 꽃 한 송이, 참새 한 마리도 끝까지 사랑하자꾸나.’

 

한동안 멍해졌다.

 

집사님이라고도 불러보고 싶고 선생님이라고 부르고도 싶고 감히 성자라고 부르고도 싶어진다. 평생 약한 몸으로 살아 늘 가난한 생활과 마음으로 하늘나라를 마음에 품었고 의에 목마름으로 교회를 비판하며 가정을 꾸리지 않아 많은 아이들을 자식처럼 거느릴 수 있었던 분. 성경책 위로 기어 다니던 벌레를 차마 밀쳐내지 못하고 생명의 고귀함을 생각하고 있던 선생님의 시야에서 벌레는 사라지고, 전 날 다녀왔던 우체국의 언덕길을 회상하며 책은 끝이 난다.

<나 또한 이 언덕을 벌레처럼 기어갔던 게로구나.>

 

빌배산 빌뱅이 언덕의 집을 짧게 스케치하며 글을 마친다.

집 둘레에 보랏빛 들국화가 흩어져 피어 있고, 냇 기슭으로는 빨간 여뀌꽃이 한창이다. 밤이면 오므라진 호박꽃 덩굴사이로 파란 반딧불이 날아다닌다. (...) 베짱이가 시끄럽도록 운다. 마당가 풀밭에는 방아깨비가 그 무딘 몸으로 기우뚱기우뚱 뛰어다닌다.

앞 마당을 조금 일구어 가지 세 포기, 오이 두 포기, 그리고 파와 들깨와 배추를 심었다. 세 포기의 가지는 너무 무성하게 자라나 열매가 감당할 수 없도록 주렁주렁 열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